〈 358화 〉 345화 : 적당히, 적절히, 알맞게 (2)
* * *
다시금 개울가로 돌아온 우리는, 쓰러져 있는 나무줄기에 딱 붙어서 천막을 세우기로 했다.
나무들을 부러뜨린 놈이 아직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 로나가 말했던 것처럼 울타리나 방벽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뭐, 그 방향 외엔 전부 뻥 뚫려 있으니 실질적인 효과는 없겠지.
그래도 기분상,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정해진 자리에 메린과 로나가 천막을 세우는 동안, 나는 블루벨과 함께 저녁 준비를 하기로 했다.
손꼽아 기다리지 않은 요리 수업의 시작.
그 첫 단계로, 나는 당근과 양파, 리크 등의 야채가 든 바구니를 들고서 그녀와 함께 물가로 향했다.
그런 뒤, 블루벨과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야채들을 하나씩 씻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잘 들어, 블루벨. 요리할 때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건 재료를 물에 깨끗이 씻는 거야.돼지나 소 같은 고기 빼고는, 뭔 재료이든 맑은 물에 씻어야 돼. 그냥 흙 터는 것만으론 안 되니까 기억해둬.”
“응…….”
“물고기도 마찬가지야. 원래 물 속에 있긴 했지만, 흙 같은 게 껴 있을 수 있으니 씻어야 돼. 뭐, 비늘 큰 놈은 벗기면서 자연히 씻게 되지만. 이건 생선 다듬을 때 다시 얘기해줄게.”
“응…….”
……진짜로 알아듣고 있는 건가?
깨끗이 씻긴 양파를 다른 바구니에 담으면서 블루벨을 슬쩍 보니,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을 뿐 아니라 흙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래도 손은 멀쩡하게 움직이면서 야채를 꼼꼼히 씻고 있었다.
“……블루벨, 내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말해봐.”
“돼지나 쇠고기 같은 거 빼곤, 뭔 재료를 쓰든 물에 깨끗이 씻어야 된다……. 생선도 포함이다…….”
듣기는 또 제대로 들었네.
그냥 기분만 팍 죽어버린 상태인가?
그렇다기엔 좀 많이 석연치 않아.
‘나, 나도 그 정도는 알아!’라고 따지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고?
딴 사람도 아니고 블루벨이?
……아무래도 메린에게 너무 세게 당해서 고장난 모양이다.
음…… 여긴 천막이랑 조금 떨어져 있으니, 작게 이야기하면 저쪽엔 안 들리겠지.
나는 계속 야채를 씻으면서 블루벨에게 나직이 물었다.
“블루벨, 나랑 로나가 없을 때 있었던 일 말인데, 왜 말 안 하는 거야? 메린이야 그렇다 치고, 댁까지 그렇게 철저하게 입 다물 필요가 없잖아.”
“……아무 일 없었으니까.”
“말하면 귀 잘라버리겠다, 뭐 이런 협박이라도 했어? 그래서 안 하는 거야?”
“………”
리크를 씻던 블루벨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얼굴을 안 봐서 확실하진 않은데, 사실대로 말할지 아주 잠깐 고민한 것 같다.
결국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지만.
……메린 녀석, 아주 단단히 협박을 했나보군.
뭐, 나도 녀석이 눈을 부라리면서 무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자신이 있다.
녀석의 분노를 받느니 차라리 그대로 목이 베여서 죽는 게 낫지!
어으, 눈초리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 돋네.
하지만 아무리 블루벨이 거슬린다고 해도, 메린은 이 엘프가 이렇게까지 쭈그러져 있는 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이래서는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테니까.
애초에 녀석은 누군가가 자신 때문에 풀이 죽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건 말건 관심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는 거면 몰라도, 일부러 기세를 홱 꺾어버리고 기뻐하는 녀석은 절대 아니야.
그렇게 사악했다면,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일은 없었겠지.
“블루벨, 메린은 나쁜 녀석이 아니야. 말이랑 행동이 험하고, 사고방식도 심각하게 고약한 건 나도 알아. 그래도 말이 안 통하고 그러지 않아. 오히려 말 잘 들어주는 편이지.
그리 보여도 심성은 착한 녀석이니까,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둘이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장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
“메린 너무 무서워하지 마. 기운도 좀 내고. 평소엔 더럽게 틱틱대던 사람이 시든 시금치가 되어 있으니까 어색해 죽겠다.”
툭하면 빽빽 소리지르던 사람이 갑자기 쥐 죽은 것처럼 조용해지니까 진짜 불편하다.
얼굴도 당장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시커멓게 그늘 져 있고 말야.
이 할망구가 변태끼를 주체 못하고 헛소리를 나불댈 때마다 돌아버릴 거 같지만,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는 걸 보는 것보단 나은 거 같아.
“아, 맞다. 내가 오늘 안 쉬고 계속 달렸던 거, 댁 괴롭히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댁이 자꾸 허세부리니까 본때를 보여주려고 한 거지.
블루벨, 우린 지금 같이 여행하는 중이잖아.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줘야 돼.”
몸이 안 좋은 걸 숨기고 가다가 쓰러지는 것보다, 다 회복될 때까지 쉬었다가 늦게 출발하는 게 훨씬 낫다.
주변에 쉴 만한 데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없으면 찾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그러다가 몬스터와 싸우게 되면, 못 움직이는 동료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우리 쪽이 심각하게 불리해진다.
‘나 때문에 일정이 늦춰졌다’는 죄의식을 피하려는 행동이, 일행에게 더 큰 고난을 안겨줄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말에, 블루벨은 눈썹을 내리면서 웅얼거리듯이 대꾸했다.
“……내가 처음에 힘들다고 했으면, 혀 차면서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욕했을 거면서.”
“아닐걸?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메린 말에 태웠겠지. 내가 그 녀석 때문에 퍼진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그거 이해 못할까.”
게다가 나는 딱 한 번이긴 했지만, 몸살 때문에 드러누웠던 적도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몸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을 타박할 수 있을까?
“그러니 앞으론 허세부리지 마. 적어도 건강에 대해선 솔직하게 말해줘. 다른 건 댁이 핑계를 치든 시치미를 떼든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애초에 한 적도 없다.
고맙다는 말을 솔직하게 받지 않는 것도, 쓸데없이 뱅뱅 꼬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도 크게 불평은 없다.
변태끼를 드러낼 땐 닥쳐줬으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짓눌렸잖아.
메린 녀석, 적당히 좀 하지…….
음식 간은 잘 맞추면서 이런 건 정도를 모른다니까.
“아무튼 기운 내. 이 여정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가능한 좋은 분위기로 가자고.”
뭐, 오늘은 지독하게 당했으니 기운 내고 싶어도 안 되겠지.
메린에게도 따로 한두 마디 해두고 싶지만……
‘지금 그 년 편드냐?’면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존나 쪼아댈 거 같아!!
으으, 조금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식사할 때 살살 이야기하는 게 그나마 낫겠군.
작게 한숨을 쉬며, 나는 씻은 야채들이 담긴 바구니를 살짝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카엘.”
“엉?”
그리고 일어나려는데, 돌연 블루벨이 말을 걸었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블루벨은 졸졸 흐르고 있는 개울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메린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니?”
“뭐?”
“무서운 애잖아. 게다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댁이 할 말이 아닌데?”
머릿속이 자기도취와 외설물로 가득 차 있는 근친 및 피학성애자가 말야.
지금 누굴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말은 나처럼 평범한 일반인만 할 수 있는 건데, 나 참, 어이가 없구만.
“내가 뭐 말하는지 알잖아.”
블루벨은 내 말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거 있잖아. 드래곤.”
“드래곤? ………아, 그거.”
뭘 말하는 건가 했더니, 메린이 대재앙 아트라토스의 정수를 품고 태어난 걸 가리키는 거였다.
블루벨은 내 반응에 고개를 약간 더 숙이면서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걸 알면서도 사귈 수 있어? 결국은 걔와 싸우고 죽여야 하잖아. 아, 뭐, 넌 그런 거 다 각오한 거겠지.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 알아.
애초에 어떻게 걔를 좋아하게 될 수 있는 거야?”
“……뭔 소리야?”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모르겠다.
메린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좀 화가 날 거 같은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블루벨의 눈엔 내 표정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개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사고방식이 괴상한 엘프는 졸졸 흐르는 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너, 메린 좋아한 지 꽤 됐지? 용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좋아한 거 아냐?”
“글쎄?”
“시치미 떼는 거니?”
“아니, 진짜 몰라. 고향에선 그런 생각 품은 적이 없거든.”
어렸을 땐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나이 먹고서도 메린이 여자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식의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치료소 도우미 누나로는 한두 번 해보긴 했는데, 너무 허무맹랑하게 느껴져서 괜히 허탈해지기만 했고.
아무튼 메린은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녀석과 있으면 안심되고, 눈에 안 보이면 또 무슨 일 저지르는 거 아닌가 걱정되고, 사람들에게서 겉도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처럼 귀엽다느니 사랑스럽다느니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단 말이지…….
뭐, 그래도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올해 초에 앓아 눕지 않았다면, 그래서 약속대로 메린과 같이 신년축제에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함께 새해 기원을 적은 종이를 태우고, 그 불빛을 받으며 같이 춤을 췄다면……
그 뒤에도 그냥 소꿉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을까?
그런 의문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모르겠다’는 결론만 나왔다.
어떤 가설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같이 있는 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정도로, 나는 메린과 너무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것이리라.
“메린을 좋아한다는 걸 안 건 얼마 안 됐어. 아마 두 달 전이었을걸? 댁이 우리한테 잡혔던 그 도시 기억나? 거기 있을 때 알았어.”
“아, 그때? 그럼 고백은?”
“댁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또 호구 짓 하느라 자신을 따라서 뛰어내린 거냐는 녀석의 폭언에, 나도 모르게 욱해서 튀어나왔었지.
뭐, 그래도 좋아한다는 말은 제대로 했었다.
붕대 감긴 꼴로 누워서 하는 바람에 좀 볼품없어서 그렇지.
……왠지 좀 쑥스럽네.
괜히 바구니를 흔들어서 물기를 터는데,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쳐다보자, 블루벨이 개울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고 있었다.
상당히 어처구니없어 하는 눈초리로.
“………좋아한다는 걸 안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질렀다고? 너 보기보다 저돌적이구나. 근데 두 달 전부터 좋아한 것 치곤 엄청 깊은 거 같던걸. 아마 너 스스로 몰라서 그렇지, 훨씬 전부터 좋아했던 걸 거야.
그래서 걔 어디가 좋은 건데? 뭣 때문에 그렇게 좋아할 수 있냐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질문.
그를 입에 올린 블루벨의 눈엔 살짝 그늘이 져 있다.
왜 그걸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 같아서 솔직하게 대답해주기로 했다.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 얼굴 예쁘지, 몸매 끝내주지, 어떤 적이든 슉슉 해치우는 모습도 엄청 멋있잖아. 글을 잘 몰라서 그렇지, 꽤 똑똑하기도 하고.”
“……그런 거 때문에 좋아한다고?”
“당연히 더 있지.”
나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한 번 켠 다음 바구니를 들었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블루벨에게 말을 이었다.
“은근히 나 챙겨주면서 신경 써줄 정도로 상냥하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받아줄 만큼 너그럽지, 엉겨붙고 헤헤 웃는 거 귀엽지, 요리도 엄청 잘하지…….
무엇보다도 나 계속 좋아해주고 옆에 있어주잖아. 내가 그간 얼마나 추한 꼴을 보였는데. 지금도 간간이 보이고 있고.”
“……”
표정이 슬슬 구겨지던 블루벨은, 내 마지막 말에서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제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만약 네 옆에 계속 있던 게 메린이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면, 넌 그 여자를 좋아했겠네?”
“그런 일은 없어.”
의아해하는 녹색 눈동자를 향해, 나는 빙긋 웃으며 계속 말했다.
“메린 말고는 못해. 그 녀석은 엄청 덤덤하잖아. 그런 성미이니까 싫은 기색 없이 계속 나랑 있어줄 수 있던 거야.”
“만약이라고 했잖아.”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어.”
딱 잘라버린 후, 나는 잔잔히 흐르는 개울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블루벨, 난 마을의 유일한 필경사이자, 촌장님이 자꾸 불러서 마을 대소사에 관여도 하는 사람의 아들이야. 그런데도 좀 건강해지기 전까지 메린 말곤 친구가 없었어. 어떤 개자식이 끌고 다니는 패거리한테 시달리기만 했지.”
“……”
“며칠씩 앓을 때마다 매일 돌보고, 그 전이나 후에나 변함없이 찾아와서 같이 놀아주고, 날 괴롭히는 놈들을 쫓아내주는 여자가 또 있을까? 난 없다고 봐. 있으면 진작에 날 봐줬겠지.
댁이 아까 그랬지? 메린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맞아, 보통 사람 아니야. 그리고 메린이 특별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야.”
아트라토스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메린은 다른 사람처럼 감정 다 가지고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을 터.
지금처럼 무지막지하게 강하지도 않을 거고, 무엇보다 고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하게 다른 애들과 놀고, 다른 여자애들처럼 예쁜 옷이나 머리핀에 관심을 가졌겠지.
안 꾸민 얼굴도 예쁘장한데 제대로 꾸미고 다닐 테니 꽤 인기 얻었을 거고.
그런 여자애가, 병약해서 제대로 밖에 못 나가는 남자애에게 관심이나 가질까?
낮에도 위험한 숲을 한밤중에 거침없이 돌아다닐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을 거다.
그러니 한밤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 나는, 그때 바랐던 대로 숲에 꿀꺽 삼켜졌겠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인생의 막을 그대로 내려버렸을 것이다.
“……메린밖에 없어. 그 마을에서, 내가 그나마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메린뿐인 거야.”
“……”
“아무튼 그래. 난 녀석의 모든 게 좋아. 눈 부라리면 더럽게 무섭긴 하지만, 그 눈도 평소엔 노을 같아서 엄청 예쁘다고.
뭐, 댁한테는 좀 품은 게 있어서 더 날카롭게 대하는지도 몰라. 그 부분은 나도 어떻게 해볼 테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 녀석, 은근히 그거 신경 쓰거든.”
메린이 순간순간 격하게 화내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나부터 겁먹으니까.
그래도 녀석이 블루벨을 가혹하게 대하는 건 막을 수 있겠지.
녀석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아니까,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지든지 나만 안 쫄면 얼마든지 중재할 수 있을 거다.
그래, 나만 안 쫄면 되는 거야.
……근데 그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잖아, 젠장!
한숨을 푹 쉰 후, 나는 멀거니 서 있는 블루벨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만 돌아가자. 너무 느긋~하게 있으면 메린이 또 뭐라고 할걸?”
“걔가 또…… 히이익……!”
“……”
대체 뭘 당한 거야?
도로 덜덜 떨기 시작한 블루벨을 보는 내 머릿속에, 영영 풀리지 않을 물음표가 마구마구 떠올라왔다.
벌벌 떨면서 주춤주춤 걷는 블루벨과 함께 천막으로 돌아오자,
“아, 카엘 님! 마침 잘 오셨어요!”
로나가 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왔다.
얼굴 이곳저곳이 붉게 물든 채.
그런 그녀의 앞에는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의 땅만 빨간 걸 보면, 아마 남자의 몸통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그 남자의 앞에는 메린이 멀뚱히 서 있었다.
녀석은 남자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검을 든 채.
“……”
그 칼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