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0화 〉 347화 : 적당히, 적절히, 알맞게 (4)
* * *
완성된 수프를 각 사람에게 돌린 뒤, 내 몫의 그릇을 들고 앉아서 한 스푼 떴다.
“오.”
맛있어!
원래 내가 하던 것도 맛없진 않지만, 평소보다 맛이 더 풍부해졌다고 해야 하나?
육수를 쓰지 않아서 여전히 담백하긴 해도, 뭐가 부족하다 싶을 만큼 허전하지가 않다.
이걸 진짜 내가 만들었다고? 이렇게 풍미가 깊은 걸?
요리 경험이 있는 나도 눈을 크게 뜨면서 놀라고 있는 만큼, 그런 게 전혀 없었던 블루벨의 반응은 한층 더 컸다.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닌지, 블루벨은 야채 건더기를 가득 떠서 삼킨 뒤로 수프에서 아예 눈을 못 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맛보다도 다른 것에 더 마음이 동한 것 같았다.
첫 술을 뜨기 전에, 메린과 로나가 약간 풀어진 얼굴로 수프를 먹는 걸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블루벨은 자신의 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엷게 웃고 있었다.
두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70년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일 테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나도 어설프게나마 요리 교습을 한 보람이 있을 텐데.
직접 물어봤자 또 틱틱댈 게 뻔하니, 그냥 내 멋대로 짐작하고 말기로 했다.
……근데 진짜 되게 좋아하네.
누가 보면 수프 혼자 끓인 줄 알겠어.
오늘 감자수프는 내 지도를 받으면서, 그리고 메린의 조언을 받고서 만든 거다.
그런데도 저렇게 감동하다니, 나중에 혼자 요리하는 데에 성공하면 엉엉 우는 거 아냐?
그럼 여정 끝날 때까지 쭉 놀려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
……왠지 어렸을 때가 생각나네.
다섯 살 때, 낚시하러 가는 어른들을 따라 호수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땐 메린을 만나기 한참 전이라서 말라 빠진 나뭇가지나 다름없는 꼴이었지만, 내 약값 때문에 일하시느라 끼니도 대충 때우는 부모님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 어쩌면 내가 쓸모 있다는 걸 보이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어른들을 따라가게 해달라고 조르고 졸라서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 자그마한 낚시대를 들고 열심히 쫓아갔었다.
어른들은 혼자 낚시를 나온 내가 가여웠는지 대견했는지, 굉장히 친절하게 낚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날 네다섯 마리 낚았던가?
혼자서는 힘이 부족해서 옆의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던 탓에, 우리 가족 몫을 뺀 나머지는 그 사람에게 답례로 줬었다.
그 덕분인지, 그 사람은 그 뒤에도 나를 도와주거나 과자를 주는 등 되게 잘 대해주었다.
……그 달 말에 늑대인간에게 죽지만 않았다면, 좋은 낚시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무튼 그 아저씨 덕에 얻은 물고기 세 마리를, 집 근처 공터에 모닥불을 지펴서 노릇하게 구웠었다.
뭐, 불의 요정인 블레이즈에게 내 몫의 생선 1/3을 대가로 줘서 불을 피운 거지만.
어차피 나 혼자 먹기엔 생선이 너무 커서 별 손해는 아니었다.
비록 생선을 굽는 내내 녀석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 결과물이 생각보다 굉장히 좋았던 데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무척 기뻐하셔서 엄청나게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내 첫 요리이자, 내 낚시 인생의 시작이었지.
……내가 생선 구워 올 때마다 엄마가 되게 맛있게 드셨었는데.
그때를 떠올리는 중에 나도 모르게 웃은 건지, 갑자기 메린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뭐 웃긴 얘기라도 생각났냐?”
“엉? 아……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옛날……. 그러고보니 나도 아까 옛날 생각나더라. 네가 블루벨 가르치던 거, 꼭 아주머니 같았어. 조곤조곤 말하는 게 특히.”
“하하, 나도 모르게 옮았나보네. ……음, 그나저나 오늘 수프 진짜 맛있다. 네 말대로야채 볶을 때 버터 넣고, 소금으로 간 맞추는 대신 치즈 넣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르다니.”
살짝 갈라지려 하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을 돌려버렸다.
편히 웃으면서 엄마 이야기를 하려면, 역시나 몇 년 더 지나야 하는 것 같다.
메린은 내 요리 이야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히 대꾸했다.
“둘 다 원래 향이 진한 편이라서 그래. 그 대신, 너무 많이 넣으면 향이랑 맛을 다 잡아먹으니까 적당히 넣어야 돼.”
“으으, 그 놈의 적당히……….”
눈을 반짝이던 블루벨이 표정을 살짝 구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뒤,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메린에게 물었다.
“근데 메린, 너는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잘하게 된 거야? 누구한테 배웠어?”
“나? 기초만 배웠는데. 아주머니…… 그러니까, 얘 어머니한테.”
“그 다음은 독학한 거고?”
“독학……?”
메린은 그 말을 되뇌면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뜻을 알려주자, 녀석은 다시 인상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 혼자 해먹기만 하고 또 배우진 않았어. 근데 왜 묻냐?”
“……너 요리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잘하니까 신기해서.”
“엥? 그래? 야, 네가 보기에도 그러냐?”
나를 툭툭 치면서 묻길래, 녀석의 눈을 보며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어. 너 솔직히 짐승 사냥하고 그 자리에서 생살 뜯어먹거나, 아니면 그냥 통째로 구워서 들고 뜯어먹을 애처럼 보여. 식기 쓰는 게 신기할 정도야.”
“……내가 언제 그 비슷한 짓이라도 한 적 있냐?”
“없긴 한데, 네 분위기가 그렇다니까? 안 그래, 블루벨?”
“아니, 난 그 정도까진 생각 안 했는데.”
상당히 덤덤한 부정이 돌아왔다!
이 망할 할망구가, 여기서 혼자 발을 뺀다고?!
배신감에 힘주어 노려봐도 블루벨은 뚱한 눈으로 꼬치구이를 우물거릴 뿐이었다.
그때,
“억.”
메린이 목을 조를 기세로 어깨에 팔을 턱 두르고, 다른 손에 꼬치를 든 채 고기를 뜯으면서 말했다.
“반응 보니까 네 눈깔에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어떤 거 같냐?”
“어떻긴? 내 눈은 지극히 정상이야.”
꼿꼿이 모닥불을 쳐다보면서 대꾸했다.
하,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뜻을 꺾을 것 같아?
천만에! 쳐맞고 죽더라도 할 말은 하는 게 내 신조라고!
“까불지 마, 임마. 넌 아직 야생인이야. 머리랑 옷 말끔하면 뭐하냐? 혓바닥이랑 하는 행동은 산적 두목이나 다름없는데. 컥, 이거 봐, 말 좀 했다고 바로 목 조르려고 하잖아! 말에는 말로 받아쳐야 문명인이지!”
“아, 그래? 거참 미안하게 됐다. 나처럼 못 배워먹은 여자가 막 들러붙어서!”
토라진 건지, 메린은 뾰로통한 얼굴로 쏘아붙이면서 나에게서 홱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울컥 올라와서, 나는 녀석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미안해하지 마, 멍청아! 야생인인 건 나쁜 게 아냐! 난 너처럼 순수한 사람 못 봤어! 겉치레나 어떤 목적없이 항상 진심으로 날 대해준 건 너 하나뿐이었다고! 그런 네가 좋아서 미치겠구만, 뭐가 어째?!”
“어……”
녀석의 두 주홍빛 눈동자가 놀란 것처럼 크게 떠지는 게 보인다.
그 속에 비치는 듯한 내 얼굴을 향해, 나 자신에게 선언하듯이 힘주어 외쳤다.
“똑바로 들어, 메린! 넌 사람 찢어 죽일 것처럼 존나 무서우면서, 한순간도 눈 떼기 싫을 정도로 아름답고, 맨날 꼭 껴안고 다니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야생인이야!
내 눈이 잘못됐다고? 웃기지 마, 임마, 내가 내 여자도 제대로 못 볼 만큼 눈이 안 좋은 줄 알아?! 내 눈 존나 멀쩡하다, 짜샤!!”
짜샤아…… 짜샤…… 샤……
목청껏 외친 말이 메아리를 달고 숲 속에 힘껏 울려펴졌다.
그 잔향이 가라앉기까지, 우리 네 사람이 둘러 앉은 모닥불 주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속에서 올라온 말들을 죄다 퍼부은 나는,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녀석의 얼굴을 놓고 다시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근데 왠지 너무 조용해진 것 같은데.
힐끗 옆을 쳐다보니, 메린이 멍하니 나를 보며 눈만 끔벅이고 있다.
곧바로 으르렁댈 줄 알았는데, 내가 소리쳐서 놀라기라도 한 걸까?
근데 메린은 그런 심약한 녀석이 아닌데…….
그렇게 잠시, 내가 스푼으로 그릇을 긁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슬슬 마음이 불편해져서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순간,
“꺄아! 이젠 남 눈도 신경 안 쓰고 막 고백하시는 거 봐! 꺄아아아!!”
로나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마구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잇, 저 자식, 또 사춘기 도졌네!
고백이라니 내가 언제 그런 걸 했다고…………
언제……
그런 걸………
…………
“………”
방금 했네!!
그것도 존나 크게!!
아아아아, 카엘, 이 등신 새끼야, 다들 있는 데서 큰 소리로 뭘 떠든 거야!!
좋아서 미치겠다니, 아름답다니!!
메린이 예쁘고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대놓고 큰 소리로 떠들 게 아니잖아, 내가 팔불출로 보일 거 아냐아아아!!
로나가 발을 구르며 꺄아꺄아 소란을 피우는 와중, 나는 들고 있던 수프 그릇을 조용히 내려놓고,
“……하으.”
얼굴을 손으로 덮고서 무릎에 처박았다.
하씨, 쪽팔려 뒤지겠네…….
그리고 메린은 그런 내 얼굴을 손가락을 콕콕 찌르면서 킥킥 웃어대기 시작했다.
“야야, 너 또 빨개졌지? 얼굴 들어봐~ 들어보라니까?”
“싫어…….”
“푸하하, 귀 엄청 빨개졌어! 야, 카엘, 내가 그렇게 예뻐? 막 껴안고 다니고 싶은 거 참고 있었냐? 앞으론 그러고 다닐래? 말도 같이 타고? 그렇게 할까? 응?”
“아으으으………!”
아, 얼굴 화끈거려 죽겠다.
저 멀리서 보면 뭔가 빨간 공 같은 게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틀림없어!
바로 옆에서 날아오는 재미있어 하는 시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내오는 들뜬 시선, 그리고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넋을 잃은 시선.
그 모든 시선들을 피하려 후드를 뒤집어쓰려 했는데, 허공에서 손이 턱 붙잡혀버렸다.
자연히 드러난 귓가에, 메린이 키득거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천막 안에서 꼭 껴안을래? 어제처럼?”
“……?!”
어제라면, 하루종일 침대에서……!
으아악, 떠올리지 마, 주변에 땅거미가 졌다 해도 모닥불 때문에 밝단 말야, 반응하지 마아아!
그보다 이 녀석은 다들 있는 데서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도 죄다 귀 좋은 녀석들인데!!
“너, 너너, 너 진짜, 너……!”
“왜? 그냥 꼭 껴안고 같이 코~ 자자는 건데? 뭐 다른 거 상상했냐?”
“으으으……!!”
“푸핫, 얼굴 봐, 완전 터질 거 같아! 아하하핫! 카엘, 귀여워~!”
메린은 하나도 기쁘지 않은 소리를 해대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기 시작했다.
젠장, 귀엽다는 소리를 듣다니 남자로서 굴욕이다!
그러니 화를 내면서 뿌리쳐야 할 텐데, 녀석의 손길이 기분 좋아서 속이 울컥 솟다가 도로 들어가고 있어, 이런 제기랄!
“아하하! 분한 듯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메린 님의 손을 잡거나 뿌리치지 않고 계시네요~ 메린 님이 쓰다듬는 게 그렇게 좋으신가봐요~ 이야, 두 분 보고 있으니까 밥이 술술 넘어가는데요?”
“그래……? 난 배가 불러서 안 넘어가는데……. 하…… 적당히 좀 하지…….”
히죽히죽 웃는 게 훤히 보이는 듯한 사춘기 소녀의 중얼거림에 이어,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보면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문명화가 덜 된 야생인에게 농락당하면서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잠시 후, 실컷 나를 놀리고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로나랑 낄낄거리는 메린을 뒤로 하고, 나는 로나가 쓰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입구가 느슨히 묶인 채 천막 중앙에 놓여 있는 포대자루를 풀고 아래로 약간 내렸다.
사라락, 자루의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이어서 눈이 감겨 있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기분이 좀 안 좋아요. 그러니 혹시 깨어나셨거든 순순히 눈 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쭤볼 게 좀 있어요.”
“……”
“아직 안 깨어나신 거죠? 일부러 자는 척하고 계신 건 절대 아니죠? 혹시 몰라서 시험 좀 할 테니, 아직 안 깨어나신 거라면 미리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길게 말을 전했는데도, 남자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진짜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인가보군.
하지만 자는 척하는 걸 수도 있잖아?
설령 낮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일단 존재하는 이상 얼마든지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법.
그러니 가장 먼저, 이 남자가 지금 자는 척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손에 든 김이 펄펄 나는 찻주전자를 공중에 들고서 살짝 기울였다.
쪼르륵.
팔팔 끓은 물이 남자의 바로 코앞에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움찔.
남자의 눈가가 크게 찌푸려졌다가 펴지는 게 보였다.
하하하, 이런, 자는 척하고 계셨구나.
……그랬단 말이지?
“아, 이런, 빗나갔네. 다음은 진짜 코에 부을 거에요.”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남자가 곧바로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하하, 안 들려, 안 들려.
“으응, 죄송해요, 어째 환청이 들리는 거 같아요. 왠지 당신이 두 눈 부릅뜨고 고개를 휙휙 젓고 있는 거 같은데, 방금까지 시달린 탓에 환각을 보나봐요. 당신은 아직 안 깨어났는데 말이죠.
제가 기막힌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사람들이 있죠, 제가 일부러 좋게 말해주면 꼭 들어처먹지를 않아요. 그래놓고 꼭 뒤늦게 질질 짜고 생난리를 친다니까요. 그러게 진작에 말을 들을 것이지.”
쪼르륵. 쪼륵.
뜨거운 물이 좀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남자의 얼굴 여기저기로 마구 튀었다.
그러자 남자가 새하얗게 색이 빠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아아, 그만, 그만해주세요, 저 깨어났어요, 눈 똑바로 떴잖아요, 지금 보고 계시지 않나요?! 앗, 뜨거! 뜨거워어억!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정신 잃은 척해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으아아악!!”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아무 소용도 없는데 말이지.
만약을 위해, 로나에게 팔다리를 밧줄로 묶어달라고 했으니까 말야.
설령 그 밧줄을 어떻게 풀어낸다고 해도, 자루째로 꽁꽁 묶여 있으니 옴짝달싹 못할 터.
이 남자가 보통 인간이라면, 내가 풀어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보통 인간이라면 말야.
나는 찻주전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창백해진 남자의 얼굴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말했다.
“아, 정신이 드셨었군요. 다행이네요. 그럼 대화 좀 할까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여쭤볼 게 좀 있거든요.”
빙그레 웃으면서 단검을 꺼내 바닥에 콱 꽂았다.
남자의 시선이 칼날을 향하는 게 보였다.
“솔직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정중히 부탁하자, 남자가 고개를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였다.
휴우……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야.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