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화 〉 350화 : 방치된 미아 (3)
* * *
상자에 들어있는 건 각각 팔찌와 반지이다.
게다가 보석이 중앙에 박혀 있어서 위아래가 어디인지 뻔히 보이는데, 뭐? 할 줄 몰라?
팔찌도 대놓고 사슬에 걸라고 갈고리 달려 있구만!
뭔 칼 뽑을 줄 모른다는 소리하고 있네!!
상자를 든 채 경악하고 있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메린이 엄청 뻔뻔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 너도 할 줄 모르냐?”
“너, 너너, 너 또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딱 봐도 차는 방법 뻔히 보이잖아, 임마!”
“해본 적 없어서 잘 모른단 말야. 보는 거랑 다를 수도 있고. 내가 괜히 건드렸다가 망가뜨리면 어떡해? 네가 껴줘.”
“난 뭐 해봤겠냐?!”
“그럼 뭐, 못하는 거고.”
“으으으윽……!!”
젠장, 이제 와서 때려치우자고 할 수도 없고……!
더 기가 막히는 건, 녀석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진심으로 자신이 만졌다가 망가질까봐 못하겠다고 하고 있어!
아으, 진짜 돌아버리겠네!
………일단 침착하자.
머리 터져버릴 거 같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자고.
아마 팔찌만 나보고 해달라고 하는 거겠지.
그럼 메린이 완전히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손목에 끼우는 게 아니라, 손목 두께에 따라 사슬에 끼워서 길이 조절하는 방식이니까.
메린은 이런 거 해본 적 없어.
그러니 이걸 느슨하게 해야 되는지 딱 맞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 거야.
그럼 그냥 맘대로 하면 될 걸 뭔 지랄을……!!
아아아, 아냐아냐, 아니야!
메린은, 이 녀석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거에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그러니 또 이상하게 보일까봐 걱정하는 거지.
응, 그런 거야. 분명 그럴 거야!!
……어쨌든 나만 잠깐 참으면 되는 거 아냐.
로나가 여기 주변에 저주가 가득 차 있다고 했잖아.
당장에 메린이 오늘 또 악몽에 눌릴지도 모른다고.
민망한 게 싫다고 이 녀석을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
그건 나 자신한테도 좋지 않은 일이다.
걱정돼서 제대로 못 잘 테니까.
“………후.”
좋아, 결심 섰다.
나는 반지가 든 상자를 내려놓고, 다른 상자에서 팔찌를 꺼내어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었다.
……진짜 펜던트랑 비슷한 방식이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이 팔찌의 절반은 사슬 여러 줄을 달아서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쪽은 어차피 안 보이니까 재료를 아낀 것이리라.
또 하나, 이 팔찌엔 양쪽 끝 모두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길이를 맞추고 남은 사슬줄이 밑으로 늘어뜨려지지 않게 하라는 듯했다.
됐어, 분석 끝.
나는 팔찌를 든 채 녀석에게 고갯짓했다.
“대.”
“어느 쪽?”
“어…… 왼쪽?”
메린은 양손 다 자유로이 쓸 수 있지만, 그래도 오른손을 더 많이 쓰고 있었을 터.
그러니 왼손에 해야 더 쉽게 차거나 풀 수 있겠지.
덤덤히 내밀어진 왼쪽 손목, 그 손등 아래에 보석이 위치하도록 팔찌를 가져다 댔다.
으, 쓸데없이 긴장이 되네.
그래도 얼굴이 가깝지 않아서 그런지, 펜던트를 걸었을 때처럼 손이 바들바들 떨리진 않았다.
이윽고 손목 두께에 딱 맞도록 사슬을 고정시킨 다음,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면서 손을 떼었다.
“바, 봤지? 이렇게 하면 될 거야.”
“흐음……”
메린은 팔찌가 채워진 왼쪽 손목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살짝살짝 매만지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끝났군. 생각해보면 그리 당황할 것도 아니었다.
하하, 이게 뭐라고 허둥지둥한 건지 모르겠네.
“얼른 이것도 끼고 자.”
녀석에게 다시 반지가 든 상자를 내미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팔찌 때문에 쓸데없이 긴장한 반동으로 조금 피곤해진 모양이다.
“음……”
뭘 고민하는 건지, 메린은 반지를 물끄러미 보면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반지까지는 좀 과하다 싶은 건가?
아니, 이 녀석 성격에선 ‘번거롭다’는 게 더 맞겠네.
“이거까지 하는 건 귀찮아? 뭐,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도 껴줘. 그래야 내가 안심할 거 같아.”
“그건 아니고……”
“그럼?”
메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껴줘.”
“…………왜?”
겨우겨우 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 자식, 설마 반지도 낄 줄 모른다는 개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아무리 관대해도 그 핑계는 도저히 감쌀 수 없을 거 같은데!
한 소리 장전하면서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는데,
“반지잖아.”
……막상 나온 그녀의 대답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메린은 잠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나에게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대마법사가 그랬어. 신사가 숙녀에게 반지를 바치는 거니, 네가 직접 끼워야 된다고.”
“……”
“……이것도, 똑같은 거 아냐?”
“………”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 가지고.
그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
혹시 그거 노리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
……물론 아니지. 알아.
넌 그런 얕은 수를 쓰는 애가 아니야.
남자가 어떨 때에 반지를 끼워주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넌 알고 있어.
반지를 든 남자에게 왼손을 내미는 게 뭘 뜻하는지를.
그러니 잠깐 고민하고서, 나에게 오른손을 내민 거야.
네가 직접 말했듯이, 넌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이 없으니까.
하지만 반지는 받고 싶은 거지.
그래서 그때 일을 떠올린 거야.
내 말 맞지?
“……나한텐 못해?”
내가 말이 없으니까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앞으로 내민 손을 주춤거릴 만큼 불안해하면서.
반지를 보자마자 나에게 받고 싶었으면서.
그런데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
나나 되니까 그 말이 진심인 줄 아는 거야, 알긴 하냐?
……근데 있잖아, 메린.
우리 진짜 웃기지 않냐?
난 내 감정을 알지만 민망해서 잘 못 드러내고, 넌 자신의 감정을 모른다면서 다 티 나게 표현하잖아.
누가 우릴 보면 ‘놀고 있다’고 돌 던져댈걸?
뭐,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냐?
안 그래?
그래도 지금은 우리 둘만 있으니까 내가 좀더 용기를 낼 수 있어.
너도 모르게 내비친 마음에 확실히 답해줄 수 있어.
알잖아?
나 할 때는 하는 거.
“바보야. 손이 바뀌었잖아.”
숨기듯이 담요 속에 들어간 그녀의 왼손을 찾아서 살며시 끌어왔다.
살짝 움찔하면서도, 그녀는 손을 빼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눈썹을 약간 내린 채 나를 바라볼 뿐.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래, 메린.
망설이는 너를 대신해 선언할게.
네가 끝까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내가 네 손을 절대 놓지 않을 테니까.
장갑을 벗은 덕에 드러난 가느다란 손가락들.
언제나 나를 보듬어주고 지켜주는 사랑스러운 손을 감싸 쥐고, 그 위에 입을 맞춘다.
“오늘 원래 이러려던 건 아니고,”
한 손으로 조심스레 손가락 하나를 받친다.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좀더 일찍 했을지도 모르는 맹세의 자리.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녹색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가까이 댄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꼭 잡고서 천천히 반지를 끼워간다.
“이것도 그냥 부적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네 말대로 반지니까…… 말할게.”
첫 번째 마디를 지나고, 이윽고 아무 어려움 없이 세 번째 마디에 다다랐다.
너무 느슨하지도, 그렇다고 꽉 죄이지도 않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석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무척 자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네 손에 끼웠구나.
이 순간을 위해 마련한 반지도 아니고, 직전까지도 이럴 생각은 없었지만 말야.
근데 ‘마침내’라니, 내가 널 언제부터 좋아했길래 그런 생각이 드나 모르겠다.
너랑 이어진지 이제 열흘 되는데.
분위기에 안 맞는 자조를 감출 겸, 이때를 맞이하기까지 옆에 있어준 감사를 담아 반지에 입을 맞추고,그 손가락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살짝 커진 눈, 물기 어린 주홍빛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사랑해, 메린.”
몇 번이나 입에 담았는데도 아직 부끄러운 말을, 한껏 더 마음을 담아서 입에 올렸다.
“나와 결혼해줘.”
그리고 조용히 품고 있던 꿈의 편린을,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 결혼하자.”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먼 희망을 그녀에게 전했다.
그동안 메린은 나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목초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읏.”
이내 고개를 떨구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이 떨리는 그 어깨를 깊이 안고서, 그녀가 차마 말로 하지 못한 대답을 품에 한가득 받았다.
방울진 행복이 흘러 넘치는, 가슴 시린 밤이었다.
이튿날 아침 여덟 시, 우리 네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불 꺼진 모닥불에 나와 둘러 앉았다.
빵과 훈제고기, 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던 중, 로나가 돌연 팔짱을 끼며 말을 꺼냈다.
“또 시원하게 내지르신 돌격자 카엘 님, 일단 이렇게 무사히 아침을 맞긴 했는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뜬금없이 돌격자가 되었다.
장난치는 건 상관없는데, 이상한 수식어는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는걸?
“어떻게 하냐니? 그보다 내가 뭘 내질렀다는 거야?”
“에엥~? 굳이 제 말로 또 이야기를 해야 하나요오~? 일부러 못 본 척해드리고 있었는데요오~?”
내가 묻길 기다렸다는 듯이, 로나는 즉시 더럽게 얄미운 얼굴로 히죽거리면서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메린이 왼손을 이리저리 보면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녹색 보석반지를 낀 채로.
“저거 페리도트라고 들은 거 같은데요~ 그러고보니 그거 뜻이 부부읍.”
“식사나 하십쇼, 사제님.”
아침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읊으려 드는 사제님의 입을 빵으로 틀어막아버렸다.
으, 메린 녀석, 낮엔 불편할 테니 밤에만 끼라고 했는데도 말 안 듣고 말야.
팔찌는 잠 깨자마자 바로 뺐으면서!
“……”
………싱글싱글 웃기까지 하고.
괜히 나까지 얼굴 풀어지잖아.
돌겠네, 진짜.
“얘, 카엘. 초 쳐서 미안한데, 꼬맹이가 하려다 만 얘기를 마저 해야 될 거 같거든?”
“헛.”
블루벨의 뚱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되지, 안 돼.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 헤벌쭉하면 안 된다고!
내가 팔불출인 줄 알 거 아냐!!
마음을 다잡으려 크게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로나를 보며 말했다.
“이 다음에 어쩔 거냐고 물었지? 왜, 뭐 생각해둔 게 있어?”
빵을 우물거리면서 히죽거리던 로나는, 평소처럼 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이대로 숲을 빠져나가는 거에요.”
“엥? 저주랑 몬스터는 어쩌고?”
“제 알 바 아니에요. 악마랑은 전혀 무관한 일이니까요. 이건 있죠,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치유사제의 일이에요.”
전투사제는 악마와 그 추종자를 쳐부수는 게 일이지, 원한과 독기를 고치는 게 아니다.
만약 그녀가 이 일에 관여한다면, 저주를 흩뿌린 존재만 무참히 죽을 뿐.
이 숲은 여전히 저주에 잠겨 있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하는 로나를 향해,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래도 그냥 갈 순 없어. 그 몬스터가 어제 블루벨을 콕 집었다니까? 숲 바깥까지 계속 쫓아올지도 몰라. 아니면 노을이 지자마자 덮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저주를 부린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분명 잿빛머리 남자의 눈을 통해 블루벨의 얼굴을 보았을 터.
어쩌면 놈은 지금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블루벨을 떠올리면서 저주를 퍼붓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여기 머무실 거에요? 그 편이 오히려 더 위험할 거 같은데요……. 정 뭐하면 블루벨 씨만 두고,”
“얌마.”
“그치만 전 저주 못 푸는걸요!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요.”
로나는 샐쭉한 얼굴로 물잔을 기울이고서 말을 이었다.
“저는 창조주의 가호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잖아요. 특히 카엘 님은 내성 같은 거 아예 없고요! 까마귀 악마 때의 일, 잊으신 거 아니죠?”
“으.”
“용사의 여정을 돕는 역할을 맡은 자로서, 가급적 카엘 님의 뜻을 따르고 도와드리고 싶긴 한데요. 이건 안 돼요. 오늘 해지기 전에 처치해버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단호히 말하는 로나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돌려줄 수 없었다.
단 한 방울의 저주로 골골 앓아 누웠던 내가, 무슨 낯짝으로 저주를 다루는 몬스터를 잡자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 나는 제안할 수 없다.
개인으로서 나서기엔 설득력이 약하고, 용사로서 주장하기엔 명분이 없으니까.
팔려간 어린애들을 찾으러 상인의 도시에 갔을 땐 방향이 비슷하기라도 했지.
그러나 이번엔 사명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며, 말 그대로 옆길로 새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러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 일에 가장 깊이 연루된 사람이 나서는 게 가장 좋겠지.
“……부탁할게.”
그리고 그 장본인인 블루벨은, 내 바람대로 입을 열어주었다.
웃음기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붉은 사제를 마주하며, 엘프는 짙은 녹색빛 눈동자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나 살려달라는 거 아니야. 놈이 나를 보고 동족이라고 한 게 신경 쓰여. 그 전말을 알아낼 수 있게 도와줘. 부탁이야…… 로나.”
“……어머.”
로나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마 블루벨이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면서까지 부탁할 줄은 전혀 예상 못한 것이리라.
만약 이 소녀가 일반 사람이었다면, 블루벨의 그 모습에 마음이 동했겠지.
그러나 로나는 사제였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영혼이 조금 비어 있던, 신을 섬기기에 가장 최적화된 사제.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정성까지 들이시는 건 놀랍지만요. 제 대답은 똑같아요.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처치할 수 있는 보장이 없으니 여길 떠나야 해요.”
사명을 위해서만 사는 사제는, 역시나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하지만 로나,”
“용사님,”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로나는 내 말허리를 썩둑 잘라버렸다.
이름이 아니라 용사로 부른 건, 아마 내 역할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이리라.
“맹약을 나눈 자의 역할은, 대재앙 아트라토스에 맞서는 것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거에요. 저희는 아트라토스에 맞서는 당신을 돕기 위해 모인 거지, 당신의 도움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
“착각하시면 안 돼요, 용사님. 당신이 우선해야 하는 건 대재앙이에요. 설령 동료를 저버리게 되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살아서 북쪽 산에 가야 해요.
그 길을 막는 자는 누구이든 모조리 쳐부숴버릴 거에요.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블루벨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자연히 침묵이 내려앉으면서, 화창한 날씨에 걸맞지 않은 무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럼 점심 전에 해치우면 되겠네?”
눈치라는 건 평생 키우지 않은 메린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 녀석의 이런 실없는 소리를 평화롭게 받아치는 게 내 역할 중 하나였다.
“말이 쉽지, 임마. 숲 다 뒤져야 할 판이구만.”
하다못해 잿빛머리 남자가 산다는 마을 위치라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어제 물었을 때, 남자는 숲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서 지도 어디에 마을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자그마한 실마리를 서둘러 쫓아갈 수도, 시간을 들여서 샅샅이 뒤질 수도 없는 상황이건만.
메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어디 있는지 안대.”
“뭐? 누가?”
“이 놈이.”
짤막하게 대답하면서, 녀석은 살짝 몸을 틀어 등 뒤에서 무언가 꺼냈다.
아니, 등 뒤에 있던 걸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메린의 두 손엔 땅딸막한 나무인형이 들려 있었다.
동그란 머리에 통통한 몸통, 그리고 짤막한 팔다리가 달린 인형.
머리카락 대신에 풍성한 나뭇잎을 지닌 나무인형은, 두 손에 빵 조각을 들고 있었다.
아마 메린이 쥐여준 것이리라.
이 녀석이 다 큰 뒤에야 인형놀이에 눈을 떴나 싶은 순간,
“냠.”
나무인형이 빵을 한 입 뜯어먹었다!!
“꺄아악, 귀신 들린 인형이다아아!!”
“트릴드잖아, 등신아.”
뚱한 시선을 던지며 메린이 가차없이 쏘아붙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