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 355화 : 아무튼 벌목입니다 (2)
* * *
정강이만 한 검은 줄기가 나를 땅에 꽂아버릴 기세로 뻗어온다.
반사적으로 자리를 차며 옆으로 뛰었다.
쿠웅!
공중에 뜬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들려온 울림.
시선이 자연히 움직이면서, 방금까지 서 있던 곳에 검은 나무줄기가 단단히 꽂혀 있는 게 보인다.
블루벨이 시달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분명 이 다음부터 가지들이 쉴 새 없이 몰아칠 터.
아니나다를까, 땅에 발이 닿자마자 옆과 위에서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빠르게 눈을 돌린다.
왼쪽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오는 게 하나.
위에서 꼬챙이처럼 찔러오는 게 또 하나.
곡예를 부리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검자루를 꽉 쥔다.
지금의 나는,
할 수 있어!
“흡……!”
숨을 들이마신 채 왼쪽으로 몸을 돌려 뛰다가, 발을 멈추고 땅 위를 쓸듯이 나아간다.
순식간에 시야를 꽉 채우는 검은 줄기.
그를 똑바로 보며, 아래에서 위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화르륵!
무언가 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불길에 타오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며 뒤로 멀어진다.
그 소리를 무시한 채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바닥을 구른다.
또 하나의 줄기가 땅에 꽂히는 잔향이 울린다.
그 검은……!
놈에게 대꾸할 틈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굴러온 방향으로 다시 뛰어 돌아간다.
바닥에 꽂혀 있는, 어째 힘줄이 솟아 있는 것 같은 검은 나무줄기를 썩둑 벤다.
그러자 하얀 불꽃이 붙은 줄기 윗부분이, 허공에서 몸부림치면서 검은 연기를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딱 봐도 닿으면 난감할 거 같아, 서둘러 거리를 벌렸다.
“후……”
……일단 끝인가?
숨을 돌리면서 빠르게 주변을 살피자, 메린이약간 떨어진 곳에서 굵은 가지들을 상대하는 게 보였다.
정면을 벽처럼 막은 세 줄기를 단숨에 베어버린 후, 등을 노리고 날아오는 가지를 몸만 살짝 비틀어 피하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두른다.
그대로 반의 반 바퀴를 돌면서 상체를 후려치려는 가지를 벤다.
다리를 훑으려는 걸 발로 차올린 다음, 머리를 내려찍으려는 가지와 함께 썰어버린다.
이따금 빠른 회피를 위해 짧게 뛰기만 할 뿐, 땅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띄우진 않는다.
발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푸른빛 궤적이 허공을 그리며 가지를 잘라간다.
촉수가 아니라 힘줄 솟은 나뭇가지라서 그런지, 무참히 잘려 나간 조각들은 아무 움직임없이 바닥에 쌓여가고 있었다.
메린도 저게 재생이나 분열을 안 한다는 걸 진작 알아차렸을 거야.
그러니 저리 신나게 마구 썰어대고 있지.
그나저나 잠깐도 안 멈추고 계속 검을 휘두르는 거 같은데, 대체 언제 숨을 쉬는 거야?
봐도 모르겠어.
고개를 작게 흔들고 재차 크게 숨을 내쉬는데, 돌연 머리 위가 캄캄하게 흐려졌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자마자 등줄기가 섬찟했다.
“……!”
저 놈이 또 뛰었어!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땅을 박차고 달렸다.
그 와중에 옆쪽에서 후려치려는 가지를 뛰어넘고, 갑자기 앞에 솟은 줄기들을 베고 그 너머로 뛰어들듯이 몸을 날렸다.
이내 어깨가 땅에 닿으면서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자,
콰아아앙—!!
뒤쪽에서 크게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쥐새끼 같은 놈……!
놈이 나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린 뒤, 돌연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놈의 몸 주위와 가지들에게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닿으면 안 돼!
그렇게 크게 떠드는 본능을 따라 한층 더 멀리 떨어졌다.
메린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뒤로 크게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블루벨은………
………어디 갔지?
설마 또 튄 건가?!
주위를 돌아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색채가 그다지 없는 공간이니, 그 가을숲처럼 노랑과 빨강으로 알록달록한 머리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그녀와 함께 있었을 메린에게 물었다.
“메린! 블루벨은?!”
“저기.”
녀석의 손이 덤덤히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끔찍하게 기괴하게 생긴 큰 나무줄기 옆에,
“……………”
블루벨이 팔뚝만 한 나무줄기에 칭칭 묶여서 바둥거리고 있었다!
“뭐야, 저 할망구 언제 잡혔어?!”
“처음에 가지 피했을 때.”
같이 싸우라고 메린이 풀어주자마자, 바닥에서 갑자기 굵은 줄기가 튀어나오더니 블루벨을 붙잡고 본체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며 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죽이진 않겠지. 저 놈이 높이 뛰기 전에 가까이 갔었는데…… 뭐, 괜찮아 보이더라.”
“뭔 소리야, 잡혔는데 괜찮겠냐?!”
“콧소리 내고 얼굴 빨갛고……. 왠지 네가 생각나더라. 장서관에서 잤을 때의 너.”
장서관에서의 나……?
어, 그거 설마…….
“………”
생각하지 말자!! 한창 싸우는 중인데 멍해지면 안 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그 생각을 떨치려 했지만, 내 눈은 다시 꽁꽁 묶여 있는 블루벨에게 향했다.
“…………”
바둥거리는 이유로 다른 게 떠오르는군.
그러고보니 입에 뭐가 물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따금 움찔거리는 것 같은데, 그녀를 붙잡은 가지가 꿈틀대는 걸 착각한 거겠지.
아무튼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걸?
여러모로 너무 위험해……!
그나저나 이거 난감하네.
놈이 내뿜은 연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는데, 인질이 잡혀버렸으니 멀리서 공격하지도 못한다.
허공에 성검을 휘둘러, 그 궤적을 칼날처럼 날리는 공격.
지금 써먹을 수 있을 그 원거리 공격은 처음 한 번만 통할 텐데, 그것으로는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없겠지.
덩치가 너무 크니까.
그래도 가지를 잘라버리는 등의 보조는 가능할 거 같은데, 놈에게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캬아아아!!
응? 웬 비명?
귀를 찌르는 듯한 비명이 울리더니, 마구 뿜어지고 있던 검은 연기가 차츰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덕에 맑아진 시야 속에,
쿠우웅!
로나가 철퇴로 놈의 발가락을 뭉개는 모습이 비쳤다!
저주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더니, 놈이 뿜은 검은 연기 속에 있어도 별 이상이 없는 듯했다.
근데 우와, 철퇴가 내려칠 때마다 땅이 울리고 있어!
발가락이 바닥과 한 몸이 되도록 짓뭉개고 있는 거야, 분명해!
쿠웅! 쿵! 쿠우웅!
……순식간에 놈의 발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나는 놈의 정강이까지 뚝 부러뜨려버리곤, 곧바로 다른 발을 뭉개기 시작했다.
놈이 마구 비명을 지르면서 나뭇가지들을 날려대자, 로나는 바깥쪽으로 피하긴커녕 오히려 놈의 배 아래로 들어갔다.
그리고 철퇴의 끝을 머리 위로 향하더니, 자신을 노리는 가지를 딛고 수직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꾸어어어……!
왠지 퍼억 소리가 들린 것 같아.
거리가 멀어서 들릴 리가 없는데.
로나는 놈이 달달 떨며 경직된 틈에, 다시 발을 뭉개버리기 시작했다.
쿠웅! 쿵!
“……”
존나 아프겠다…….
“어우, 왠지 내 손이 아픈 거 같네.”
“발인데?”
“생긴 건 손이잖아. 으으…… 아무튼 이제 가까이 갈 수 있겠지?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메린과 함께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기척을 느꼈는지, 나뭇가지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본체는 계속해서 발가락이 납작해지는 중이라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럼 아까처럼 정교하게 움직이진 못할 터……!
“카엘!”
“봤어!”
다리를 멈추면서 검자루를 꽉 쥔다.
발이 땅을 쓰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나뭇가지들을 노려본다.
……곡예부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여기서 힘 빠지면 지난번처럼 또 살아있는 검자루가 될 거야!
“또 당하기 싫어어어!!”
전심으로 외치며 성검을 크게 휘두르고, 몸이 돌아간 그대로 다시 반대쪽으로 틀면서 또 한 번 허공을 베었다.
곧바로 다시 뛰기 시작한 내 눈에, 길쭉한 빛덩어리가 소리 없이 날아가며 가지들을 두 동강 내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나무조각들을 피하면서 놈에게 다가가자,
“꺄하하핫! 바로 이거에요, 이 감촉이에요!! 아하하하! 뿌득뿌득 소리 아주 좋네요!!”
“으으읍! 후으으으읏! 으으으읍!!”
곧바로 멀리 도망가고 싶어지는 소리들이 마구 들리기 시작했다!
“………”
진짜 왔던 길로 다시 가고 싶은데…….
로나야 뭐, 원래 싸우는 거 좋아하는데다 잃어버렸던 철퇴 다시 찾았으니 더 신나서 저러겠지.
몬스터의 비명소리를 뚫을 정도로 크게 웃는 건 좀 그렇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망할, 고개를 못 돌리겠네.
괜히 고개 움직였다가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이 일이 끝난 뒤에 날 죽이려 들 거야!
아니면 수치스러워서 못 산다고 난리 피우거나!
본의 아니게 사각이 생겨버렸는데, 다행히 놈의 가지들은 본체와 바짝 붙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나를 잡으려고 배 아래로 가지를 보내거나, 땅 속에서 뿌리 또는 줄기가 튀어나오게 하는 것도 본체가 조종해야 하는 모양이군.
아, 진짜 다행이다.
그리고 고마워요, 몬스터 님! 블루벨의 입을 막아줘서!
하지만 여전히 빨리 끝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놈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리거나, 내 정신이 못 버티고 나가버리기 전에 끝장내야 돼!
“메린, 반대쪽!”
“알았어!”
메린은 곧바로 로나가 뭉개고 있는 다리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아직 멀쩡하게 땅을 짚고 있던 놈의 발목들이 썩둑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아!!
놈이 한층 더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거대한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는 순간,
“로나! 비켜!”
메린이 놈의 옆구리를 뻥 걷어찼다!
그러자 기우뚱거리던 놈의 몸이 옆으로 크게 휘어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하하핫! 넘어간다아아~!”
“우으으으읍?!”
……블루벨도 같이 넘어가고 있는데?
뭐, 로나가 그쪽 근처에 있으니 잘 구해주겠지.아마도.
블루벨에게 ‘우리를 믿으라’고 한 것처럼, 나 역시 녀석들을 믿고 내 역할을 다해야 해!
쓰러진 몬스터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 놈의 배를 딛고서 더 위로 뛰어올랐다.
나를 치우려고 날아들고 있을 가지들을 메린이 쳐주리라 믿으며,
“뒈져라, 변태 나무—!!”
나무줄기이자 놈의 몸뚱이에 성검을 내리찍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귓속을 마구 찌르며 머리를 마구 뒤흔드는 듯했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려는 걸 아랫입술을 깨물어 강제로 깨운 뒤, 찍어 누를 기세로 검자루에 무게를 더 실었다.
“으으으윽!!”
그러자 검이 꽂힌 자리를 기준으로 흰 선들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빛? 아니, 불꽃이다.
어둠을 태워버리는 성스러운 불꽃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나무의 속에서 힘차게 타올랐다!
캬아아아! 뜨거워어어! 뜨거워뜨거워, 아아, 뜨거워어어어! 아아, 아아아아! 이게 바로, 사라,
“닥치고 죽어어어!!”
내 빡침에 응한 걸까?
성검에서 한층 더 강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나무를 아예 터뜨려버렸다!
그 탓에 나도 튕겨져 나갔지만, 메린이 받아준 덕분에 목이 부러지는 일은 없었다.
녀석은 나를 똑바로 세워준 뒤, 여기저기 툭툭 털어주면서 물었다.
“괜찮아?”
“응……. 어으, 끝까지 지랄을 떨다니……. 엘프는 죄다 왜 저러나 몰라.”
“사랑이랬나? 그거 처음 느꼈다잖아. 그래서 그런 거겠지. ……아, 잠깐.”
덤덤하게 대꾸하던 메린이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나도 저렇게 되는 거 아냐?”
“엉? 네가 왜?”
“나도 그 감정 모르잖아.”
그러니 사랑이란 감정을 알게 되면, 방금 그 미친 나무처럼 괴상해지는 것 아닌가?
메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나 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는 녀석의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네가 왜 그 꼴이 나냐?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마.”
“왜?”
“왜냐고?”
의아해하는 메린의 뺨을 어루만지며 빙긋 웃었다.
“넌 이미 그 감정을 내보이고 있으니까.”
“내가……? 뭐, 네 눈엔 그렇게 보이니까 날 안은 거겠지. 근데 난 잘 모르겠는데.”
“네가 가장 우선하는 사람이 누구야?”
“너.”
……주저없이 돌아온 대답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듯했다.
다 예상하고 물은 건데, 그래도 속이 울컥하면서 약간 떨리기까지 했다.
기뻐…….
진짜로, 울고 싶을 만큼 기쁘다.
하지만 지금 울면 되게 한심하겠지.
터질 것 같은 속을 꽉 누르며, 그 반동처럼 메린을 꽉 껴안았다.
그런 뒤, 크게 숨을 내쉰 다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 마음이야. 네가 그걸 품고 있는 걸 알았으니까 널 안았어.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엄청 친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것도 사랑이지. 종류는 다르지만. 너, 나한테 그 반지 받은 거 엄청 좋지? 그 마음이야.”
어젯밤, 메린은 내 청혼에 대답하지 않았다.
끝을 맞이할 거란 걸 알고 있기에,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 대신 나를 꼭 안고 우는 걸로,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인 모습으로 답을 알려주었다.
……그걸로 충분해.
“그거면 돼.”
“음……”
“괜찮아. 생각해봐. 뭐, 네가 무슨 결론을 내든 변하는 건 없겠지만.”
내가 안 놓아줄 테니까.
그렇게 속삭인 후, 하얗게 활활 타고 있는 잔해를 지나치며 로나와 블루벨에게 향했다.
도중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메린이 멀거니 서서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뺨이 약간 붉어진 채, 왼손의 반지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거봐.
넌 날 사랑한다니까?
“메린! 거기 서 있지 말고 와!”
흠칫 놀라며 가볍게 뛰어오는 그녀를, 흐뭇이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