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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69화 (369/475)

〈 369화 〉 356화 : 숲의 막내딸, 결심하다 (1)

* * *

로나는 여전히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블루벨을 내려다보다가, 나와 메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우리를 돌아보며 헤실 웃었다.

“두 분 오셨어요? 이야~ 카엘 님도 이제 꽤 능숙해지신 것 같던데요! 메린 님이 던지지 않아도 몬스터를 밟고 뛰어오르시고 말이죠!”

“그래봤자 너네들보단 한참 밑이잖아……. 그건 그렇고, 너 아까 그 시커먼 연기 마셨지? 진짜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이따 자기 전에 우슬로 차 끓여마시면 돼요!”

우슬 차……

그러고보니 그때도 요정이 끓여준 우슬뿌리 차 덕에 마녀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었지?

종교적으로만 정화의 힘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이번에도 모두 무사한 채로 싸움을 마쳤으니 정말 다행이다.

한 명은 뭐…… 어쨌든 사지는 멀쩡하지?

원래는 괜찮냐고 묻고 그래야 하겠지만, 블루벨이 내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나을 듯했다.

“근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어? 안 풀려?”

“네, 놈이 죽으면 저절로 풀릴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뜯어낼까 했는데, 보기보다 단단하더라고요. 그래서 입에 물린 것만 뺐어요.”

로나가 블루벨을 꺼내려면 나무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녀석이 철퇴를 섬세히 다뤄서 나무만 때려부순다고 해도, 블루벨이 그 진동에 영향을 받을 게 뻔하니 그냥 둔 것이리라.

메린이 나서는 것도 조금 위험했을 터.

다행히 성검이 아직 밖에 나와 있던 덕에, 블루벨은 무사히 결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뒤, 아주 잠깐 나를 쳐다보곤 도로 시선을 내렸다.

“………고마워.”

“고, 고맙긴 뭘.”

……큰일났다, 엄청 어색해!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있지 않는 것 같지만, 나무가 뭔 짓을 했을지 짐작되는 게 있어서 얼굴 못 보겠어!

그래도 얼굴 봐야 돼.

할 말을 제대로 해야 해!

나는 이 일행의 대장이니까!

잠깐 뒤돌아서 뺨을 착착 두드리고, 헛기침을 크게 한 다음 블루벨에게 말했다.

“그……. 다, 다친 곳 없지? 어, 어디 안 좋거든 로나한테 이야기하고…… 어어, 그…… 이, 일단 여기서 나가자. 여기 그 몬스터가 만든 공간이나 뭐 그런 곳일지도 모르잖아.”

그 말과 함께 돌아본 몬스터의 시체는, 성검의 힘에 산산조각이 난 채 활활 타고 있었다.

아직 큰 덩어리가 몇 개 남아있지만, 조금 있으면 그것도 재가 되어 사라질 터.

이 공간이 몬스터가 만든 것이라면, 시체가 완전히 타버리면서 여기도 같이 없어지는 거 아냐?

이야기책에선 보통 그랬으니까.

“어차피 여기서 뭐 할 것도 없고……. 얼른 나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과 함께, 숲의 풍경이 비치는 네모난 공간으로 향했다.

아직도 앞을 막고 있는 뿌리인지 가지인지 모를 것을 없애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와.”

화창한 하늘과 뜨거운 태양, 물기 촉촉한 흙바닥과 싱그러운 향취.

생기가 한껏 느껴지는 여름 숲으로 돌아온 건데, 왠지 처음 찾아온 것 같은 기묘한 착각이 들었다.

그 탓에 절로 터져나온 내 감탄을 들었는지, 울타리 근처에 풀어놓은 말이 날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푸흥.”

“또 도졌구만…… 라는데.”

“도지긴 뭘 도져, 짜샤!”

곧바로 빽 소리질렀으나, 말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망할, 이젠 저 놈까지 날 미친놈 취급하네.

……근데 잠깐, 생각해보니 좀 대단한 거 아냐?

사람이 정신나가 있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거잖아.

자신의 이름을 직접 대던 것도 그렇고, 역시 보통 놈이 아닌 게 분명해.

왕국 수도의 신전에 있던 놈이니, 어쩌면 엄청난 영물인지도 몰라!

녀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 나중엔 사람 말 배우는 거 아냐?”

“……푸르르.”

말 녀석은 고개를 흔들며 콧김을 내뿜었다.

왠지 한숨 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에이, 착각이겠지.

메린과 로나의 말도 근처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걸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벽처럼 꼿꼿이 선 나무 울타리들을 보았다.

웅장할 만큼 높이 자라 있던 나무만 사라졌을 뿐, 울타리는 여전히 입구가 뚫린 채로 세워져 있다.

이대로 내버려둬도 되는 건가?

“로나, 저 틈을 막아 두는 게 좋을까?”

“네? 왜요?”

“그 이상한 공간이 계속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로나는 울타리 틈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울타리를 전부 부숴야 돼요. 공간을 넘나드는 문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건, 공간과 공간을 나누는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기준점 역할을 하는 울타리를 없애면, 자연히 경계가 허물어지며 틈새가 닫힐 거에요.”

“어………”

울타리를 부숴야 한다는 거 말곤 뭔 얘기인지 전혀 모르겠어!

로나는 그런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은 뒤, 작은 돌멩이를 주워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해주었다.

“예를 들어, 들판에 벽으로 둘러싸인 집이 하나 있다고 해요. 들판이랑 이 집은 각각 별개의 공간을 가지고 있죠? 들판에선 집 안을 볼 수 없고, 집에선 들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근데 집의 벽에 갑자기 구멍이 뻥 뚫린 거에요!”

그 순간,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던 두 개의 공간은 그 구멍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럼 이제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게 되었는가?

아니, 구멍이 뚫렸어도 여전히 집이다.

사람이 나다닐 정도로 큰 틈이 생기고 벽의 높이가 반쪽이 난다고 해도, 그곳은 여전히 ‘집’이지 들판이 아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벽이 있는 한, 그리고 그 벽이 영역을 나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 한, 그곳엔 여전히 ‘집’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벽을 완전히 허물어버리면 어떨까요? 굴러다니는 돌만 남았으니, 이제 집이 아니라 들판의 일부가 되겠죠? 누구도 이걸 집으로 보지 않을 테고요.”

“음…… 그럼 하나로 합쳐지는 게 되지 않아?”

“이 세계 위에 다른 공간을 만든 거라면 그렇죠. 하지만 저건 세계와 세계를 연결한 거라서, 단순히 통로를 없애는 거라 보시면 돼요. 방과 방을 연결하는 복도를 무너뜨리는 거죠.

아무튼 확고한 경계선이 없이는 ‘틈’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아요. 그냥 뻥 뚫린 거죠. 그러니 울타리를 부수면 저 틈새는 ‘문’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허공이 되는 거랍니다.”

음, 알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모르겠어.

이런마법이나 주술적인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걸 보니, 역시 난 이런 쪽엔 재능이 없나보다.

어쨌든 울타리를 전부 부수면, 그 황량한 공간으로 가는 문도 사라진다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려 고개를 돌리니,

“……”

울타리가 전부 눕혀진 채 고이 쌓여 있었다.

원래 어디 세워져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말끔하게.

범인? 뻔하지.

멀뚱히 메린을 쳐다보자, 녀석이 마지막 울타리를 더미 위에 놓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치우는 거 아니었어?”

“아냐, 맞아……. 잘했어…….”

너무 잘해줘서 얼이 좀 나갔을 뿐이지.

“아, 그렇지. 야, 카엘, 이거 땔감으로 써도 되지? 바싹 말라 있으니 되게 잘 탈 거 같은데.”

“응……. 괜찮을 거야…….”

메린은 내 대답에 싱글싱글 웃으면서, 반듯하게 쌓인 울타리를 검으로 삭삭 조각내기 시작했다.

울타리가 말끔하게 똑똑 잘려서 나무조각이 되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행동력 쩌네.”

“메린 님답네요~”

그래도 예전 같으면 곧바로 부쉈을 걸, 한쪽에 차곡차곡 쌓은 건 퍽 인상적이었다.

그간 별별 일을 다 겪어서 좀더 사려 깊어지게 됐나봐.

음음, 좋은 일이야.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말들의 맞은편 울타리 앞에 망토로 몸을 덮은 채 웅크려 앉아 있는 블루벨을 돌아보았다.

좀 울적한 게 아닌지, 블루벨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출 때까지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닥을 보며 우울해할 뿐이었다.

“그…… 블루벨,”

“……”

“이제 곧 여기 떠날 거 같은데, 메린…이 아니라 로나랑 같이 말 타고 갈래?”

……묵묵부답.

돌겠네, 진짜.

뭐, 그런 일을 당한 직후이니남자인 내가 말을 거는 게 부담스러운 거겠지.

민망하기도 할 테고.

음…… 로나를 통해서 말을 전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며 로나를 부르려는데,

“카엘.”

“어?! 아, 응. 왜?”

갑자기 블루벨이 말을 걸어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불러 놓고 뜸을 들이더니, 거의 웅얼거리듯이 짧게 물었다.

“……봤지?”

“응? 어, 뭘?”

“아까 내 모습, 다 봤지?”

“어…… 아까 가지 끊을 때 보긴 했지……?”

“그 전에.”

무릎을 한층 더 깊이 모으며, 블루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창 잡혀 있었을 때, 내가 뭐 당하고 있었는지 봤지?”

“어…… 아니, 못 봤는데.”

솔직하게 대답한 게 맘에 들지 않았는지, 블루벨은 고개를 홱 쳐들며 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못 봤다고? 그렇게 넘어가주려는 거야?”

“아니, 제대로 못 봤다고. 메린이 알려줬을 땐 거리가 좀 멀었거든. 그, 댁이 입에 뭐 물고 있는 것 말곤 모르겠던데.”

“……아까 가까이에선,”

“그땐 그…… 메린에게 좀 들은 게 있어서 좀 짐작이 가다 보니까, 고개가 안 가더라. 소리만 들었어.”

그러니 나는 추측만 할 뿐.

실상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블루벨이 어떤 상태였는지 전혀 모른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블루벨이 먼저 말을 꺼낼 때 외엔, 내 입에서 그 일에 대한 얘기가 나오진 않을 거다.

그렇게 전하자, 블루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툭 내뱉듯이 말을 꺼냈다.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출발은 좀 미뤄줘.”

“아, 응. 알았어.”

“말은 누구와 같이 타든 상관없어. 알아서 정해.”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터벅터벅 마을 쪽으로 들어갔다.

아마 주인이 없어진 집을 잠깐 쓰려는 것이리라.

근데 지금 누구랑 같이 말을 타든 상관없다고 했지?

역시 직접 뛰는 건 힘든 모양이다.

그럼 가다가 졸 수도 있으니 메린이랑 같이 타는 게 낫겠군.

블루벨이 다시 돌아오는 데에 대충 한 시간 걸린다고 치고…….

그동안 길이나 알아보자.

근데 이 마을은 지도에 안 나오잖아? 안 될 거야, 아마.

……그리고 진짜 되는 게 없었다.

나는 숲만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어제 묵었던 데로 돌아간 다음, 길로 다시 나가는 수밖에 없겠군.

뭐, 여기 왔을 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아마 점심 즈음에 길로 돌아가겠지.

오늘 안에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또 숲에 묵는다 해도,물은 충분하니 굳이 개울을 찾지 않아도 될 거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정리한 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울타리에 등을 기댔다.

마을보단 여기서 시간 때우는 게 여러모로 더 나을 듯했다.

애초에우리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않았으니까.

기지개를 켜자, 바로 이어서 하품이 크게 터져나왔다.

나답지 않게 곡예를 부린 만큼, 조금 지친 듯했다.

조금 있다가 또 쭉 달려야 하니, 블루벨이 올 때까지 잠깐 자자…….

“블루벨 오면 깨워줘.”

아무나 들으라고 말을 던진 뒤, 무릎을 세워서 그 위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부드러운 감촉이 머리를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뒤, 계획대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 다음, 숲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블루벨을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질주한 덕분인지, 노을이 끼기 시작할 무렵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리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을 빨리 떠날 수 있는데다, 어지간한 잡음은 말발굽과 바람 소리에 묻혀서 안 들리니까.

덕분에 아무 소리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숲에서 숨어살던 인간들이 맞이하고 있을 공포도, 본래 이 숲에 살던 작은 요정의 후련함도.

전부 짐작만 할 뿐, 실상은 어떨지 모르는 것이다.

확실시하지 않은 사실은 상상이 되고, 상상은 대개 하룻밤내에 잊히는 법.

내일 아침해를 맞이할 즈음이면, 그 괴상한 나무 몬스터와 싸웠던 일 외엔 흐릿해져 있겠지.

그리고 며칠 뒤엔, 그 놈과 싸웠던 일조차 시간에 깎여서 뭉툭하고 무던한 기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떠올리더라도 쓴웃음만 나올 만큼.

“뭐, 어떤 건 몇 년이 지나도 개 같긴 한데, 대부분은 그래.”

나는 껍질을 벗긴 순무를 썰면서 말을 이었다.

“엘프는 기억력이 엄청 좋으니 다르겠지. 그래도 댁이 끔찍한 기억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댁의 인생이 끝장난 것도 아니니까.”

“……갑자기 그 얘길 왜 하는 건데?”

야채를 썩둑썩둑 썰던 손을 멈추고 묻는 블루벨.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기운 없어 보이길래. 나도 나름대로 나쁜 기억이 더럽게 많으니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너처럼 될까봐?”

……이 할망구가 또 시비 거는 건가?

내가 뭐 어떻다고?

살짝 울컥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블루벨은 내가 옛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아마 그걸 말한 거겠지.

설마 ‘너처럼 미칠까봐 그러냐’는 뜻이었을까.

……캐물어서 확실히 하고 싶다는 마음을 순무와 함께 조각내버렸다.

“글쎄, 그건 모르겠고. 그냥 어떤 기억이든 언젠간 바래지는 법이니까 기운 내라고 하고 싶었어. 댁네 임시 왕은 다르지만.”

내 대답에, 블루벨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상태로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위로받을 줄이야. 아저씨가 알면 또 혀 차겠네.”

“골든? 왜?”

“너 잘 봐주라고 하셨거든. 근데 오히려 내가 신세지고 있잖아.”

낮의 일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건지, 블루벨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이었다.

“……역시 난 모자란 애야. 그러니 아까도 아무것도 못하고 당해버렸지.”

“어……”

“뭐,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치고,”

응? 그렇게 넘겨도 되는 건가?

자기비하로 시무룩해하는 것보단 나은 것 같지만, 왠지 글러먹은 생각처럼 들리는데!

블루벨은 내가 황당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야채를 석석 썰면서 이어 말했다.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네가 생각하는 것 때문에 주눅든 건 아니야.”

“뭐?! 그럼 그 놈한테 당한 거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우와……!”

“………”

“아, 죄송합니다. 물론 힘드시겠죠. 그럼요, 예…….”

난 또 주눅 안 들었다고 하길래 완전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지…….

어우, 눈매 무서워 죽겠네.

그래도 곧바로 고개를 숙여서…… 아니, 메린이 건너편에서 당근 껍질을 벗기고 있어서 그런지, 블루벨은 한숨 쉬기만 하고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내 동족 생각하고 있었어.”

“동족? 엘프?”

“그래. 엘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조차 잊어버린 엘프.”

사각사각, 당근 껍질을 벗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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