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외전 7) 떠나는 발걸음에 축복을 (Side : Shoull) (3)
* * *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슐은 한층 더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다.
신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날 외엔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책도 읽지 않으면서 그저 방에 누워만 있었다.
심부름 때문에 꼭 나가야 할 때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길에만 시선을 향한 채 종종걸음으로 다녀와버렸다.
에스트렐 가족 중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저히 눈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심부름 때문에 시장에 갔던 슐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들었어요? 어제 에스트렐 씨가 촌장님을 해치려 했대요!”
“왜 아니에요, 전 직접 봤는걸요! 촌장님이 그 집 문을 두드리자마자 검 들고 튀어나오시지 뭐에요! 어휴, 어찌나 놀랐는지!”
‘그래서 아버지의 수염이 이상하게 잘렸었구나.’
무심히 생각하면서, 슐은 감자와 당근 등의 야채를 바구니에 담아갔다.
두 아낙네는 그 집 딸인 슐이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른 채, 자신들의 수다에만 집중하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그 점잖으신 분이 갑자기 왜 그랬대요?”
“글쎄, 그 집 아드님이 촌장님 자제분들 때문에 죽을 뻔했대요! 근데 그 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있나봐요.”
“어머, 세상에!”
“애들 투닥이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죠! 우리 애들한테 들었는데, 거기 자제분들 중에 싹수가 좀 노란 애가 있다나봐요.”
‘조금 노란 게 아니라 까맣게 썩었지.’
속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값을 치른 후, 슐은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러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중 무엇 하나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서.
“촌장님께 여길떠날 거라고 막 소리지르더라.”
“……”
슐은 자신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빠르게 움직이던 발이 갑자기 세워진 탓인지, 슐의 바구니에 담겨 있던 야채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떠난다고?’
누구 이야기인지는 자명했다.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슐은, 바구니가 가벼워진 걸 깨닫고 그제야 허둥지둥 야채를 줍기 시작했다.
‘여길, 떠난다…….’
카엘이 가족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난다.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니 기뻐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좋겠다.’
나도 떠나고 싶은데.
슐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모르는 채, 멍하니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적한 골목으로 왔을 무렵,
“야.”
“힉?!”
누군가가 뒤에서 슐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슐의 몸이 중심을 잃었지만, 그 누군가가 팔을 붙잡아준 덕에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설 수 있었다.
도와준 걸 보니 보복하러 온 아이들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챙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풍기는 메마른 분위기에, 슐은 몸이 절로 잔뜩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누, 누구……?”
“이거.”
흙먼지가 잔뜩 묻은 손이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자신의 손수건이다.
아무래도 서둘러 걷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이거, 네 거?”
“아, 네, 네에……. 고, 고마,”
“야, 이 자식아!!”
감사 인사를 하려던 슐의 말을 덮어버린 고함소리.
익히 들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남자애의 목소리에, 슐은 마저 인사하는 걸 잊은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이내 느릿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잔기침 섞인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 너어…… 가, 갑자, 갑자기 가면……!”
“빨리 줘야 한다며.”
“이, 사람도, 노, 콜록콜록! 이 사람도, 놀랐잖아! 하아, 하……!”
“숨이나 쉬어라.”
툭툭.
등이라도 두드리는 듯한 소리.
그에 이어 몇 마디 더 투덜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들린 후, 챙에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애가 말했다.
“미안해요. 얘 때문에 놀랐죠? 손수건, 떨어뜨리셨길래요.”
“아……”
‘이 목소리.’
차분히 말을 자아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슐은 지금 앞에 서있는 남자애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챙을 꽉 잡으며, 슐은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아, 아냐, 놀랐긴. 주, 주워줘서 고마워. 그럼.”
알아보기 전에 얼른 가야 한다.
그래서 황급히 말을 마치고 떠나려는데,
“응? 잠깐…….”
미심쩍어하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그가 별안간 몸을 홱 낮추어 모자 속을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탓에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한 슐은, 그대로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슐 누나?”
“아……”
“슐 누나 맞죠? 저 카엘이에요. 기억 안 나요? 그새 까먹었어요?”
“아, 아니, 기억해……!”
반쯤 필사적으로 대답하며 모자를 들어올린 슐의 눈에,
“역시 슐 누나이네. 안녕하세요.”
전처럼 방긋 웃으며 꾸벅 인사하는 카엘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신을 괴롭히던 놈들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카엘은 무척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으읏… 흑……!”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슐은 눈물이 솟구쳐올라왔다.
카엘에게 인사를 받은 게 기뻐서인지, 그때 전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걸 또렷이 구분하기엔, 열 한 살이란 나이는 너무 어렸다.
“어라?! 어, 누나, 갑자기 왜 울어요?!”
“와, 울렸다~ 이 새끼가 울렸대요~ 나쁜 놈이래요~!”
“시끄러, 임마! 어어, 누나, 무슨 일 있어요? 누가 또 괴롭혔어요?”
“으아아앙—!”
“왜 더 우는 거에요?!”
황당해하는 카엘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속을 울리는 듯했다.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지 모르는 채, 슐은 깊이 안도하며 한참을 울었다.
카엘이 난감하다는 듯이 무어라 말을 걸면서 팔을 끌고 갔는데, 울음을 그치고 보니 그의 집 뒤뜰이었다.
“어…… 괜찮아요?”
“……미안.”
“어, 아뇨, 좀 당황하긴 했지만, 뭐……”
“응. 별 거 아냐. 어제 이 놈은 훨씬 더 크게 울었어.”
“시끄러, 임마!”
‘반말……’
하도 울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항상 존댓말을 쓰면서 방긋 웃던 카엘이, 산발머리 여자애에겐 거리낌없이 말을 놓을 뿐 아니라 얼굴을 구기면서 소리치기까지 한다.
완전히 처음 보는 모습임에도, 어째서인지 슐은 그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충격은커녕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원래부터 카엘이 그래왔다는 착각마저 들 만큼.
“그 애, 누구야……?”
그 원인일 게 분명한 산발머리 여자애를 가리키며 묻자, 카엘이 약간 생기를 잃은 눈으로 자신을 보며 대답했다.
“아, 얘요……? 메린이라고…… 엄청 무서운 애에요…….”
“무서워하는 거 같진 않은데…….”
슐은 훌쩍이며 메린이라는 여자애를 살펴보았다.
갈색머리는 눈가를 뒤덮을 정도로 마구 헝클어진 채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보이는 모든 살결은 흙먼지가 묻어 있다.
옷차림은 슐과 다른 여자애들처럼 위아래가 한 벌로 되어 있는 평범한 치마인데, 조금 낡고 흙먼지가 묻어 있긴 해도 머리에 비하면 엄청나게 말끔한 편이었다.
‘신기한 아이네.’
마을에 이런 아이가 있었던가?
그 질문에는 단연코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메린…….’
그러나 그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했다.
굉장히 어렸을 적에,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명히…… 들었는데……’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보는 슐의 눈앞에, 이번엔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슐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크게 움찔거리자, 카엘이 곧바로 기겁하면서 그 얼굴을 밀어내버렸다.
그 찰나의 순간, 슐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붉은빛의 무언가가 반짝이는 걸 본 것 같았다.
‘예쁜 색이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뭐하는 거야, 누나 놀라셨잖아!”
“눈 뜨고 자길래.”
“뭔 소리야, 돌겠네, 진짜! 하, 미안해요, 누나. ……누나?”
카엘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를 흘려버리며, 슐은 천천히 메린에게 손을 뻗었다.
옆에서 그가 숨을 삼키며 경악하는 게 느껴졌지만, 슐의 손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 눈가를 덮은 메린의 앞머리를 살며시 정돈했다.
마침내 훤히 드러난 두 눈동자.
밤이 오기 직전의 노을이 떠오르는 주홍빛이 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쁘다.”
왠지 모르게 섬찟하긴 해도, 무척 아름다운 색깔이다.
가리지 말고 드러내놓고 다니면 좋을 텐데.
그 생각에, 눈을 가리지 않도록 메린의 머리를 정돈해준 후, 슐은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슐이야. 메린…이라고 했지? 어디 사니?”
“숲. 아니, 다라, 아니, 고…아… 응, 고아원.”
“고아원? 그렇구나. 카엘이랑은 언제 친구가 된 거야?”
“친구?”
메린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싶었던 슐이 입을 열려던 찰나, 그 신기한 소녀는 카엘을 돌아보면서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너랑 나 친구냐?”
“아니.”
딱 잘라 부정하는 카엘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린은 다시 슐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래.”
“……친구 아니야? 그럼 뭔데?”
슐의 질문에, 메린은 다시 카엘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너랑 나 뭐냐?”
“여자애처럼 생긴 거머리랑 그에 물린 사람.”
“응, 맞아. 술래잡기 하는 사이.”
“이 자식이?”
투닥투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슐은 입가가 느슨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이좋은 친구구나.”
“친구 아니야.”
“그래, 사이좋은 놀이상대구나. 그래서 언제 만난 거니?”
“지난주. 내가 숲에서 주웠어.”
지난주. 숲.
그 말을 듣는 순간, 슐은 카엘을 데려왔다는 이상한 여자애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산발머리 여자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구해줬구나.’
목숨뿐만이 아니다.
메린은 그 일주일 동안, 카엘의 마음도 구해준 게 분명했다.
그가 전처럼 바깥을 다니고 자신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웃을 수 있는 건, 분명 메린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그 모습을 보여주어서 슐 자신까지 구해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고마워.”
‘카엘을 구해줘서 고마워.’
슐은 메린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또 다시 눈물이 차올라 부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 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정말, 고마워.”
“어…… 손수건? 얘가 본 건데.”
“그렇구나. 응, 고마워, 카엘. 정말정말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슐은 벅찬 마음 그대로 카엘을 꽉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하면서도 자신을 밀치지는 않는 그의 모습에 왠지 모를 안도를 느낀 후, 슐은 자신의 눈가를 닦으며 다시 바구니를 들었다.
“난 이만 갈게. 심부름 때문에 나온 거였거든. 늦으면 귀찮아질 거야.”
“어어, 네……. 저기, 누나, 이제 괜찮아요?”
“응. 괜찮아졌어.”
전부 다 괜찮아졌다.
그가 전처럼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순간, 온 몸을 짓누르는 듯했던 무거운 느낌이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야.’
방긋 웃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슐 역시 그를 따라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내 손을 떼고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근데 왜 울었어?”
고개를 갸웃하면서 메린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곧바로 당황한 얼굴이 되어 메린의 입을 막아버리는 카엘.
정말로, 처음 보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얌마, 그런 건 묻는 게 아냐……!”
“아냐, 괜찮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탓일까?
슐 자신도 놀랄 만큼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엄청 반가워서 울었어.”
“반가워서? 반가운데 눈물 나와?”
“응. 이렇게 만날 줄 몰랐거든. 그래서 무지무지 반가워서 운 거야.”
“희한하네.”
덤덤하게 중얼거리는 메린의 머리도 살며시 쓰다듬어주던 슐은, 문득 조금 전에 길가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저기, 카엘.”
“네?”
“어제 아버지가 너희 집에 가셨지? 혹시 너희 가족…… 여기 떠나니?”
조심스레 묻는 슐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축하해줘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마음을 졸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슐을 향해, 카엘은 눈을 잠시 멀뚱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아무데도 안 가는데요.”
“어, 그래?”
“네, 엄마가 안 간대요.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떠나려는 엘리아스를 설득한 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피아였다니.
‘대체 왜?’
왜 이 마을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것인가?
이딴 곳에서 사는 게 뭐 그리 좋다고?
다른 마을, 어쩌면 왕국의 수도에 가면 카엘의 병악한 체질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이 그런 짓을 벌이도록 몰아붙인 역겨운 가족이 있는 이곳에서 살길 고집하는 것인가?
‘가족이 다 여기 있어서?’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외부인인 엘리아스와 달리, 피아는 부모를 비롯한 일가친척이 이 마을에 있으니까.
‘그래도 너무해.’
아무리 가족이 소중하다지만, 그래도 카엘을 이런 곳에 계속 살게 하는 건 부당하다.
그 싹수 썩은 놈들이 지금은 얌전해도, 언제 다시 카엘을 괴롭힐지도 모르는데.
언제 또 다시 카엘이 상처를 입고 밤의 숲으로 들어가버릴지 모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엘 역시 이 마을에서 사는 걸 바라지 않을 터.
만약 이 착한 아이가, 엄마가 슬퍼하는 게 싫어서 강하게 주장하지 못한 거라면, 자신이 그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그런 놈들의 가족인 자신에게 이전처럼 웃어준 그를 위해서.
‘이번엔 꼭 도와줄게!’
슐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카엘의 손을 잡았다.
“카엘, 여기 떠나고 싶지? 나랑 같이 너희 어머니 설득하자. 너희 아버지까지 셋이서 설득하면, 너희 어머니도 마음 돌리실 거야.”
“어……”
그러나 카엘은 한순간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도 안 떠나고 싶거든요.”
“뭐? 왜?! 여긴 너 힘들게 하는 나쁜 놈들이 살잖아!”
“으응…… 다른 곳에 못 갈 거 같아서요. 가는 길에 아프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카엘은 옆에서 바닥을 툭툭 차다가 하품을 하고 있는 메린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떠나버리면, 빚 못 갚으니까요.”
“빚……?”
“어…… 그런 게 있어요. 억지로 빚진 거긴 한데, 그래도 졌으니까 갚아야죠.”
그가 얼버무리는 탓에,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다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
카엘에겐,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가슴속을 무겁게 누르는 한편,
‘다행이다.’
가슴 한켠에, 작게 안도하며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다.
‘다행?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이 나쁜 기집애야!’
그리고 뒤늦게 그런 나쁜 생각을 품은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이곳을 떠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카엘을 나무라도 모자랄 판에, 앞으로도 그를 계속 볼 수 있다고 좋아하다니.
역시 자신도 그 놈들의 가족인 듯했다.
“……슐 누나? 괜찮아요?”
“어? 어어, 응. 괜찮아.”
걱정스레 묻는 카엘에게 애써 웃으며 대답한 후, 슐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갈게. 손수건 주워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조심히 가세요, 누나. ……야, 뭐해. 너도 인사해야지.”
“인사.”
“돌겠네, 진짜. 아무튼 또 봐요, 슐 누나.”
손을 흔드는 두 아이(비록 한 명은 억지로 들려 있었지만)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면서, 슐은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첫째 언니가 결혼해서 떠난 탓에, 보기 싫은 가족이 절반을 넘어버린 집.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그런 자신을 독려하는 듯이, 방금 전에 들은 인사가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또 봐요.
방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던 그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또 봐.’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건네며 슐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 발걸음은, 아주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