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화 〉 358화 : 내일을 고대하는 밤
* * *
비극이 벌어졌던 숲을 떠난 지 나흘째.
주변 풍경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해보니, 내일 오후쯤 목적지에 도착할 듯했다.
“그러니 블루벨, 오늘은 혼자 수프 끓여봐. 재료 써는 것까진 같이 해줄게.”
야채 껍질을 벗기며 말을 전하자, 블루벨이 말끔히 손질된 야채를 손에 든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뭐 그리 놀랄 일이라고…….
“……갑자기 왜?”
한참 걸린 것 치곤 굉장히 짧은 질문이 돌아왔다.
이 할망구, 방금 그 한 마디를 입에 올리기까지 수십 개의 생각을 돌렸겠지?
누가 보면 내가 저녁밥이 아니라 사람 잡으러 오라고 한 줄 알겠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니, 어떻게든 숨을 뱉고 싶었던 건지 하품이 크게 나와버렸다.
아직 해도 다 지지 않았건만, 요즘 자꾸 잠을 설친 탓에 피로가 쌓여버린 듯했다.
왼쪽 손등으로 대강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자, 메린이 옆에서 덤덤히 말을 던졌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다 되면 깨워줄게.”
“그 정돈 아냐. 들어가봤자 그냥 뒤척이기만 하지, 잠은 안 들걸?”
그간 쭉 밤에 잠들고 있었으니, 아마 눕자마자 눈이 뜨여버릴 것이다.
어스름이 아직 오지 않아서 환한 낮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지.
그리고 입 밖으론 낼 수 없지만, 혼자 들어가서 자기엔,
“메린 님이 없으니 말이죠~ 혼자선 허전해서 못 주무시겠죠~”
“………아니야! 낮처럼 환하니까 잠이 안 들어서 그런 거지!”
“예에~ 그래요~”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지나가는 로나.
바구니를 들고 물가로 가는 걸 보니, 근처 숲에서 무언가 따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 녀석, 내 속을 어떻게 안 거지?
등 뒤를 지나고 있었으니 얼굴 본 것도 아닐 텐데.
설마 속마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로나의 말에 나를 물끄러미 보기 시작한 메린이 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기 전에, 나는 황급히 블루벨에게 말을 꺼냈다.
“아무튼 블루벨, 댁은 이제 수프 정도는 혼자 끓일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던 거 다 기억하고 있을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갑자기 왜 혼자 해보라는 거야?”
“내일 점심 지나고서 마을 도착할 거 같은데, 어차피 위슨 올 때까지 거기 있어야 하잖아? 블루벨, 그동안 잠깐 집에 다녀와.”
“……뭐?”
되묻는 건 블루벨 혼자였지만, 메린도 같이 놀랐는지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왜, 대륙 중앙에 엘프가 남아있는지 찾고 싶다며. 그리고 진짜 아직까지 따로 살고 있다면 연락망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근데 여행 끝난 뒤에 한다고 했을 텐데? 너 혹시……”
“아, 끝까지 들어보세요, 할머니. 내가 잘 모르기는 해도, 댁이 생각하는 그 일이 그 자리에서 바로 할지 말지 결정할 게 아닌 것 정도는 알아. 논의 같은 것도 할 거고.”
사냥이나 낚시도 사전에 이것저것 검토하는데, 있을지도 모르는 동족을 찾는 건 얼마나 더 많이 따져보겠는가?
설령 그 연노랑머리 왕이 당장 하자고 결정해도, 사람을 뽑고 물자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릴 터.
이 여행이 끝나려면 아직 좀더 있어야 한다.
그러니 미리 말을 해두면, 블루벨이 완전히 여행을 마치고 숲에 돌아갈 때까지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어 있겠지.
적어도 그녀의 제안을 승낙할지 말지는 결정이 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뭐냐…… 중간보고? 댁도 그런 거 해야 되지 않아? 로나는 자주 하던데.”
“난 굳이 할 필요 없지. 그냥 너 따라가서 드래곤 처치하기만 하면 되는걸. 로나야 교단 사제이고, 교단은 이번 원정의 중심 세력이니까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런 거야? 뭐, 아무튼 가서 그 제안도 하고, 애인이랑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와. 밥상도 손수 차려드리고.”
생고기는 아직 안 건드려봐서 조금 불안하지만, 그래도 야채와 생선은 손질해봤고 굽거나 끓이기도 해봤으니 괜찮겠지.
간이야 뭐, 잘 못 맞추더라도 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안 쓸 거다.
짜거나 싱거운 게 뭐가 중요한가?
블루벨이 백 몇 년 만에 사람 먹을 것을 만들었는데!!
……라는 식으로 감격해하지 않을까?
나라면 그럴 거 같아.
“내일 도착하는 시간 봐서, 그날 바로 아니면 다음날 새벽에 출발해.”
감자를 크게 썩둑썩둑 썰면서 말하자, 블루벨이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로?”
“어.”
“말없이 먼저 출발하고 그런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뭐야, 요리까지 가르쳐줬는데도 아직 못 믿는 거야?”
칼을 쓰던 손을 멈추고 블루벨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그런 거라면 좀 많이 섭섭할 것 같다.
내가 이거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는데.
다행히 블루벨은 내 시선을 받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그냥 그… 네가 그런 제안을 해줄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그럼 다행이고. 음…… 근데 거기서 산맥 너머까지 얼마나 걸릴까 모르겠네.”
뭐, 대충 하루 정도 걸린다고 보면 되겠지.
엘프는 초원이랑 흙 위에선 별 힘 안 들이고 질주할 수 있으니까.
오가는 것 합쳐서 사흘이 걸린다면, 일주일 뒤에 보자고 하면 된다.
애인의 품에 안기는 걸로 이 할망구의 그 변태적인 발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일주일쯤이야 기꺼이 내줄 수 있어!
“아무튼 오늘 저녁은, 댁이 집에서 그 사람들에게 해준다고 생각하면서 해봐. 그래야 가서 덜 허둥거리지.”
“어? 어어, 응. ………뭐, 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까짓거 해주지! 펴, 평생 못 먹어봤을 엄청난 수프를 먹게 될 테니까 기대하라고!”
내가 평생 못 먹어봤을 엄청난 수프?그거 독수프 아니냐?
……아잇, 젠장,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잖아!
나는 입꼬리가 씰룩이는 블루벨의 어깨를 턱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보통 수프 해줘.”
“뭐? 아니, 엄청나게,”
“보통.”
“……”
“절대로 단연코 반드시 꼭 보통 수프로 해. 알았어? 알았냐고!”
“알았어…….”
건조한 눈빛의 블루벨에게 여러 번 확답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 후, 정말 다행스럽게도 블루벨은 무척 평범한 야채수프를 만들었고, 우리는 같이 지도를 보면서 블루벨과 다시 만날 날짜를 정했다.
“넉넉하게 잡아서, 출발하고 나흘 뒤 아침에 보자.”
“만약 그 전날 밤에 도착하시거든 신전으로 가세요. 제 이름 대시면 방 내줄 거에요.”
나와 로나의 말에, 블루벨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기와 잘 준비를 마친 뒤의 천막 안.
내 개인적인 마지막 일과인 수첩 기록까지 마쳤을 무렵,
“야, 카엘, 자냐?”
바깥에서 메린이 나지막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의문에 찬 채로 녀석에게 들어오라고 답하자, 두툼한 천이 약간 걷히면서 메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둘둘 만 담요를 손에 들고.
웬 담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고개만 갸웃하는데, 녀석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담요를 베개처럼 품에 안으며 입을 열었다.
“너랑 같이 자도 되지?”
“어? 너 나랑 자면 불침번 교대 때 못 일어나서 안 된다며?”
“같이 잘래.”
녀석은 담요를 꼭 껴안으면서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시선만 위로 올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 되냐?”
“…………”
큰일났다.
그냥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가슴이 마구 두근거려.
담요를 꼭 껴안은 채로 나를 힐끗힐끗 보는 모습이 미치도록 귀엽다……!
“안 되는 건, 아닌데, 그……”
“같이 자고 싶어. 맨날 너랑 붙어서 자서 그런지 혼자선 잠이 잘 안 와. 아예 습관 됐나봐.”
“………”
“네 냄새랑 체온이랑 심장 소리가 없으니까 왠지 여기가 쌀쌀한 거 같기도 하고………근데 왜 그러고 있냐?”
혼자 계속 중얼거리더니, 이제야 내가 손으로 얼굴 덮고 있는 걸 본 모양이다.
그보다 뭐? 왜 이러고 있냐고?
이 자식이 몰라서 묻나!
“너 있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태연하게 하냐……? 내, 내 냄새이니 체온이니……! 아으……!”
“엉? 그게 왜? 진짜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건데. 네 냄새 못 맡으니까 여기가, 뭔가 비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이상한 느낌 든단 말야.”
그러면서 자신의 가슴 위를 손가락으로 콕콕 두드렸다.
돌겠네, 진짜.
어쨌든 내가 옆에 없는 게 쓸쓸해서 잠이 안 온다는 거 아냐.
아으, 그 말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얘밖에 없을 거야!
으으으, 야영만 아니었다면……!!
나는 크게크게 숨을 한 번 쉰 다음, 손을 살짝 떼고 녀석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잠만 잘 거다.”
“엉? 그럼 잠만 자지, 딴 거 뭘 하냐? ………아.”
고개를 갸웃하던 녀석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에 맞춰서, 나도 모르게 담요로 몸을 덮으며 살짝 옆으로 틀어버렸다.
“너 쌓였,”
“시끄러, 임마, 잘 거면 얼른 눕기나 해!”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빽 소리지르면서 내가 먼저 드러누워 버렸다!
망할, 맨날 나만 혼자……!
담요를 머리까지 쓴 채 속으로 투덜투덜거리는데, 옆에서 스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콕콕, 손가락으로 어깨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눈까지만 담요를 내리자, 메린이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바로 옆에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뭐.”
“너 뭐 들었냐? 네 냄새랑 체온이랑 심장 소리 없어서 잠이 안 온다고 했잖아, 등신아. 근데 네가 그러고 있으면 어쩌냐? 따로 자는 거랑 차이 없잖아.”
“………안에 들어오든가.”
“싫어. 네가 안아줘.”
아아아아!! 미치겠네, 진짜!왜 하필 저 말을……!
아~ 아아, 진정해, 카엘!
저건 말 그대로 껴안아달라는 거잖아, 다른 뜻이 아니라고!
근데 진짜 돌겠네,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나흘만에 만난 거면 몰라, 맨날 보던 얼굴이 나흘만에 바로 앞에 있을 뿐이잖아!
“안아줘~ 안아달라고~ 저번처럼 꼭 안아줘~”
“………”
으으, 그래, 이 녀석이 계속 콕콕 찌르면서 이 따위로 졸라대서 그런 거야, 틀림없어!!
살려줘요! 밤잠이 아니라 영면에 들 거 같아요!
그보다 열이 막 올라와서 머리 익어버릴 거 같아……!
“안아주기 싫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메린.
그게 눈에 들어온 순간, 어떠한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한 팔로 녀석의 목을 받치며 어깨를 안고, 다른 팔로는 등을 감싸면서 살며시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나흘만에 느끼는 뺨의 감촉과 체취에,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울컥하면서 깊은 안도감이 온 몸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아, 오늘밤은 적어도 꿈 때문에 잠을 설치진 않겠구나.
그런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하아…… 메린……”
지독히 그리웠던 온기를 안은 채 이마와 뺨에 키스한다.
자꾸만 입술로 가려는 얼굴을 다른 데로 애써 틀면서, 눈가와 콧잔등, 턱에 입을 맞춘다.
입술은 안 돼.
지금 이 상황에서 녀석과 입을 맞댔다간, 진짜 여러모로 터져버릴 거야.
그래서 가장 원하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에 한가득 입맞춤을 남겼고, 그동안 메린은 간지럽다는 듯이 작게 웃으며 계속 몸을 꼼지락거렸다.
“히히. 으응…… 너 역시 쌓였지?”
“………시끄러. 꼬시지 말고 얼른 눈이나 감아.”
“소리 안 내면,”
“자라고……!”
소리가 안 날 리가 없구만!
작게 일갈하며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킥킥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잠시, 이내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들리는 느릿한 숨소리에, 나는 메린이 잠에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야영만 아니었다면, 마음껏 널 느끼고 사랑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오늘만 참으면 돼.
내일은 성벽이 쳐져서 안전한 마을에서 묵을 테니까.
그럼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바깥을 경계할 필요도 없이 너에게만 온 신경을 쏟을 수 있겠지.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녀석의 이마에 또 한 번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음날, 거의 다 와서 두 번이나 전투를 치르긴 했지만, 어쨌든 점심이 좀 지나서 목표 마을 근방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두툼한 외벽과 성의 탑들.
외벽은 조금 깨지긴 했지만, 한쪽에 사람이 빼곡히 몰려 있는 걸 보니 아직 건재한 것 같았다.
“와, 저거 죄다 피난민이야? 묵을 데 못 구하는 거 아냐?”
“으…… 안 되는데…….”
절로 힘없이 중얼거리게 되었다.
메린에 대한 것도 있지만, 오늘 치른 두 전투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망이 된 탓이다.
처음 건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두 번째 전투가 상당히 지독한 편이었다.
몬스터가 많아졌다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숲이 아니라평원에서 오크 떼가 튀어나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게다가 그 조합도 되게 특이했다.
무려 늑대를 탄 오크가 열, 활을 든 놈이 스물, 그냥 몽둥이 든 놈이 서른 둘이었다.
그뿐 아니라, 늑대 탄 오크가 기르는 건지 일반 늑대가 열 다섯 마리나 끼어 있기까지 했다!
뭐, 대부분은 제대로 붙기도 전에 블루벨이 화살로 해치워버렸지만.
덕분에 우리가 직접 맞붙은 숫자는 절반 정도였다.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많았잖아!
우리는 넷밖에 없는데!
“근데 진짜 뭐였을까요? 엄청나게 몰려 있던 거 같은데요.”
“오크는 원래 몰려다니잖아…….”
내 대꾸에, 메린이 자신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좀 특이한 거 같던데. 아까 천막 같은 거 있었어.”
“그러냐……. 난 못 봤는데…….”
하하, 역시 메린이야.
신나게 검 휘두르면서도 주변 관찰할 여유가 있었구나.
난 한꺼번에 달려드는 늑대 놈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보다 천막이라……
그러고보니 놈들 구성이 좀 신경 쓰이긴 하다.
활에 몽둥이, 늑대.
인간으로 따지면 보병에 궁수에 기마병 아냐?
허, 아주 그냥 단단히 준비했구만?
“뭐, 몬스터들 요새 극성이라잖아……. 오크들도 이 기회에 한몫 잡으려나보지…….”
“그런 거 치곤 숫자가 좀 많았는데. 근데 카엘, 너 너무 늘어져 있는 거 아니니?”
늘어져 있긴 무슨, 뻗어 있구만……!
나는 뚱한 눈으로 핀잔을 주는 할망구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저는요… 너네처럼 힘이 펄펄 넘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반대이지…? 나무 뽑던 오우거를 잡고 얼마 안 되어서 오크 떼를 상대한 건데… 너네 왜 멀쩡하냐…? 왜 나만 뻗은 건데…?”
“의지의 차이?”
“………”
와, 엄청 빡친다.
백 년 넘게 수련한 할망구가 저딴 말을 하니까 진짜 장난 아니게 빡쳐!
지금 진이 빠져 있지만 않았어도 쌍욕 날렸을 거 같아!
“……얘, 농담한 거야, 농담! 받아칠 줄 알았는데 분위기 살벌한 거 봐.”
“다신 하지 마…….”
“알았어, 안 할게. 미안해. 아무튼 빨리 가자! 뭣하면 내가 대신 말 달려줄, 어, 어어, 무, 물론 메린이 너랑 같이 타면서 말야! 메린, 네 말을 내가 타고 가도 상관없다는 거지! 그 뜻이야!”
뭐 무서운 거라도 봤나?
들뜬 목소리로 시작된 블루벨의 말은, 중간부터 갑자기 바들바들 떨더니 크게 소리치는 것으로 끝났다.
그나저나 메린이랑 같이 탄다…….
말고삐를 잡을 힘은 남아있지만 또 무슨 돌발상황이 터질지 모르니, 그러는 편이 낫겠군.
“그래, 그렇게 하자…….”
대강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락하자, 메린이 곧바로 말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내 뒤에 올라타서는 고삐를 잡았다.
어째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간만에 실컷 검을 휘둘러서 속이 후련한 모양이었다.
“히히, 졸리면 자~”
“뭔 소리야, 어떻게 자…….”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녀석이 등에 찰싹 붙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자도 돼. 뭔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 몸을 감싸는 따스한 온기, 허리를 붙드는 굳건한 힘.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는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눈꺼풀을 마구 내리누르는 듯했다.
안 그래도 기운이 없는데 어떻게 그 압박을 이겨낼 수 있을까?
결국 그대로 눈을 감고 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잘 자.”
잠에 빠지기 직전, 목덜미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