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화 〉 359화 : 서로가 필요한 이유 (1)
* * *
툭툭.
어깨가 두드려지는 느낌과 함께 왁자지껄한 소음이 귓가에 울리기 시작한다.
벌써 밤이 찾아온 건지, 눈앞에는 까만 공간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내 머리가 일을 시작하면서, 지금 보이는 어둠은 내가 눈을 감아서 생긴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
“굳이 깨울 필요 없는데.”
“인사는 빠뜨리면 안 되는 법이야. 이 놈도 왜 안 깨웠냐고 나중에 지랄할걸?”
익숙한 두 목소리가 들린 후, 이번엔 어깨가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뜨길 바라는 것 같은데, 좀처럼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뜻을 전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으으’하는 소리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야, 일어나, 카엘. 일어나라고.”
“으으……”
미안, 메린. 눈이 안 떠져.
앓는 듯한 소리에서 내 뜻을 알아챈 건지, 메린은 내 어깨를 흔들기를 멈추었다.
그냥 냅두기로 한 건가 싶은 순간, 녀석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안 일어나면 잡아먹는다.”
잡아먹는다고……?
그 말이 귓속에 들어오자마자 여러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릴 때의 술래잡기, 요전의 바닷속.
누가 주변에서 보든 말든 내 목덜미를 물거나 핥아대던 모습.
할 거야. 이 녀석은 진짜로 저지를 거다……!
진짜 잡아먹힐 거야!!
확신이 들며 눈이 번쩍 뜨였다!
“히익!! 살려주세요!”
“……너희 평소에 그러고 노니?”
몸을 벌떡 일으킨 내 귀에, 블루벨이 질색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새 얼굴을 적신 식은땀을 닦으면서 고개를 돌리자, 작거나 큰 아가씨 셋이 모두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메린과 로나는 내 바로 옆에, 그리고 블루벨은 우리 셋과 조금 떨어져서 서 있는 게, 꼭 마주보면서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여기 어디야……?”
“성문 근처. 블루벨 간대.”
“간다고……?”
가긴 어디를…… 아, 맞아, 고향 다녀오라고 했었지?
와, 마침 하품 크게 나와서 다행이다.하마터면 어디 가냐고 물어볼 뻔했어!
나는 말에서 내린 다음, 깜빡한 적이 전혀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래, 출발하는구나.”
“응, 너희 들어갈 때 출발하려 했는데 성문이 열릴 기색이 없네. 더 늦기 전에 그냥 가려고.”
성문이 안 열린다고?
눈을 끔벅이며 마을 쪽을 돌아보니, 두툼한 외벽 사이의 문에 철창이 내려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 병사 몇 명이 일렬로 서서 피난민들과 대치하고 있는데,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했다.
뭐, 그건 이따 알아보면 되겠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블루벨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잘 다녀와. 그 아저씨들에게 안부 전해주고.”
“선물 가져오세요~”
“어제 내가 말해준 거 기억해. 밥할 땐 꼭 계속 맛을 봐.”
블루벨은 우리 셋 각자의 인사를 받으며 쓴웃음을 지은 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알았어. 노파심에 말하는 건데, 너희 나 까먹지 마. 그래 봐, 곧바로 쫓아가서 엉덩이에 화살 박아버릴 테니까!”
“어휴, 댁이나 날짜 까먹지 마.”
“아, 그리고……”
블루벨은 말끝을 흐리면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수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카엘. 네가 이런 배려를 해줄 줄은 정말 몰랐어.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야.”
“얼굴 보니까 대충 알겠네, 뭐.”
고향에 돌아가서……아니, 블루벨도 고향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
고향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게 기쁜 거겠지.
그 만남이 기대되기도 할 거고.
솔직히 그게 얼마나 기쁘고 기대되는지는 잘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멀리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 또래 여자애처럼 잔뜩 들떠 있는 블루벨을 보니, 왠지 나까지 조금 기분이 고양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잘 다녀와. 나흘 뒤에 보자!”
“응! 헤헷, 다녀올게!”
블루벨은 손을 흔들며 활기차게 인사한 뒤, 가볍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약간 거리가 멀어지자마자,
“와.”
눈 깜짝할 새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간 말이랑 같은 속도로 뛰던 건, 우리에게 맞추느라 좀 천천히 달렸던 거였구나.
하긴, 블루벨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메린도 말보다 더 빠르게 뛸 수 있잖아.
엘프와는 달리 기운이 쭉쭉 빠져서 그렇지.
약 하루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휴가이지만, 그래도 앞으로 발작 안 할 만큼 만끽하고 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기지개를 켠 후, 굳게 닫혀 있는 성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 이제 문 뚫으러 가자.”
“응? 부술 거냐?”
“비유야, 비유. 어쨌든 가보자고.”
조금 잔 덕분에 머리도 맑아졌겠다, 무엇 때문에 문이 막혔던지 반드시 뚫을 것이다.
내 뒤를 따라오는 메린을 향해 엷게 웃으며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우리 셋은 성문을 지나 마을 안을 걷고 있었다.
성문에선 아직도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통과하기 전보다는 기세가 많이 수그러들어 있다.
바깥에 있던 피난민들은, 한 시간 전까진 문을 열어 달라고 한마음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굳게 내려져 있던 철창문이 올라가면서, 그들은 지갑의 무게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가슴을 쓸며 성문을 통과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위병들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었다.
“돈이라니요, 우리가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무, 물건! 물건은 안 되는 건가요?!”
“부탁이에요! 아이만이라도 들여보내주세요!”
길을 따라 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이내 길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이시나봐요?”
“응? 아…… 뭐, 조금.”
고삐를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하자, 로나가 헤실 웃으며 재차 물었다.
“저도 궁금하긴 해요! 아까 사실대로 말했다면 무슨 상을 받았을까요?”
응? 웬 상?
아…… 혹시 아까 성문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가?
한 시간 전, 우리는 성문 바깥의 위병들에게 왜 문을 안 열어주는 건지 물었다.
그 질문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지, 하나같이 얼굴을 구긴 채 오크들이 여길 쳐들어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폐쇄 중이라고 대답했다.
오크? 저기 숲 쪽에 있는 놈들이었나요?
그쪽에 진영을 펼쳤다고 들었어요. 보아하니 좀 난리를 겪은 모양인데, 오크를 만난 거요? 그럼 우리 대신 저 사람들에게 말 좀 해줘요. 오크가 실제로 저 멀리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다 죽었는데요?
……네?
짜증 때문에 한껏 찌푸려져 있던 위병의 표정이 한순간에 벙벙해졌다.
멍한 목소리로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지금 막 그쪽 숲에서 온 거다.
이 근방 평원에 오크들이 모여 있던 건 사실이긴 한데, 아까 보니까 대부분이 죽어 있더라.
아직 돌아다니던 잔당 놈들을 없애고 오는 길이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여주었다.
놈들이 있던 방향을 아시니, 한번 확인해보라고 하세요.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 위병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말을 탄 병사 셋이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그 세 명이 다시 돌아오고서 잠시 지난 뒤에 성문이 열렸고, 그대로 마을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즉, 나는 이 마을을 위협하던 오크들을 우리가 없앴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 탓에 오크들을 해치운 답례로 받은 건, ‘알려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뿐이다.
근데 딱히 그게 아쉽거나 한 건 아닌데 말이지?
포상에 미련 가질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거야.
사제인 로나가 있으니, 고작 네 명이서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해치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도 충분히 믿었을 테니까.
“그 대신 엄청나게 귀찮아졌겠지. 몬스터가 많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여기 오래 머물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을 거야. 아니면 어디 숲 속에 있을 오크 대장을 처치해달라고 하거나.”
“흠흠, 그렇게 되면 좀 곤란했을 거 같네요! 이런 데서 너무 미적거리면 안 되니까요. 역시 카엘 님, 생각이 깊으시다니까요!”
나 참, 잊을 만하면 저러네.
생각이 깊긴, 그냥 엮이기 싫었을 뿐인데.
말없이 쓴웃음을 짓는 나에게, 로나가 의문이 담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럼 왜 한숨 쉬신 건데요?”
“아……”
“뻔한 걸 뭘 묻냐?”
메린이 한숨을 쉬면서 내 답을 가로채버렸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런 거겠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미칠 지경인 거야, 뻔해. 어휴, 호구 새끼.”
“호구 아냐! 내가 호구였으면 진짜로 저 사람들 몫까지 다 내줬겠지! 근데 안 했잖아!”
“지랄하네. 우리 몫의 통행료에 금화 한 닢 더 낸 시점에서 존나 호구거든? 얼굴도 모르는 사람 열 명분이나 낸 놈이 호구가 아니면 뭐냐?”
“뭐긴, 지혜로운 사람이지. 하아…… 우리 메린, 아직도 눈치가 없구나. 너 아까 그 위병이 통행료 얘기할 때 분위기 못 읽었지?”
남녀노소 상관없이 한 명당 은화 열 닢.
그게 지금 이 마을이 요구하는 통행료였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요금이었기에, 그 말이 평원에 퍼지자마자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이었다.
“그때 내가 따지기라도 해봐, 그 기세를 타고 다들 들고 일어났을걸? 그럼 마을에 들어가긴커녕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했겠지.
메린, 난 동정심 때문에 그 돈을 낸 게 아냐. 위험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거지. 실제로 내가 그렇게 턱 내버리니까 다들 얌전히 따르기 시작했잖아. 이래도 내가 호구냐?”
“어. 존나 호구야. 어쨌든 다른 사람들 몫까지 내줄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냐?”
“………있었어! 아무튼 있었다고!”
박박 우기는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메린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밖의 사람들 도와주고 싶은 거 아니냐는 말엔 부정 안 했다? 어휴, 호구 새끼.”
“………그래, 임마, 가여워 죽겠다! 그 사람들도 여기까지 목숨 걸고 겨우 왔을 텐데, 상황이 안 되어서 못 들어오는 게 안타깝다, 왜!”
특히나 우리에겐 그 사람들 몫을 전부 내고도 남을 돈이 있었기에 한층 더 안타까웠다.
마을 쪽에서 열 명 이상은 안 된다고 딱 선을 그어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피난민으로 터질 지경이에요. 돈을 얼마나 더 내시건 오늘은 이 이상 받을 수 없습니다.
허? 뭐, 내일이 되면 없던 자리가 생기기라도 합니까?
생기죠.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오늘을 못 넘길 테니까요. 여름이라서 피할 수 있는 건 얼어 죽는 것뿐 아니겠습니까?
안에 들어가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말하는 관리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큰 돈을 지불하면서 마을 안에 들어오더라도, 피난민들은 하루하루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것이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길가에 앉아서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중 몇 명은 얼굴에 커다란 멍이 들어있기도 하다.
아마 이 마을 사람이나 다른 피난민에게 얻어맞은 거겠지.
돈이 아니라 먹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지난번 바닷가 마을에서 본 광경과 거의 같았다.
“빵 한 조각만요…… 아니, 감자 한 알만이라도 좋아요……!”
“아이들이 굶고 있어요……! 제발 부탁드려요, 뭐든 드릴 테니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간곡한 목소리에 또 다시 발이 멈추려는 걸, 이번에도 메린이 가차없이 끌어당긴 탓에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그 애원하는 소리가 성문에서 들리던 소리와 한데 섞여,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전부 다 불쌍해. 밖에 있는 사람들도, 여기 안에 있는 사람들도 불쌍하다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뭐가 잘못됐는데?!”
“넌 생각만 하는 것에서 안 끝나잖아! 하나 도와주면 다들 떼로 몰려올 게 뻔하고, 너도 거절 못할 게 뻔한데! 그 사람들 다 도와주면 우리는 뭐 먹냐? 돈으로 식량 구할 수 있는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데!”
“………알아.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잖아.”
바깥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말도,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뭘 주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앞에 서려는 나를 끌고 가는 메린을 탓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메린의 말과 생각이 옳으니까.
내가 너무 물러터진 게 문제인 거다.
“하지만 사방에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자꾸 보게 되고, 또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저절로 어깨가 축 늘어지면서,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모처럼 마을에서 편히 머물 수 있겠다고 들떴었는데, 지금은 저 땅속 깊숙한 곳까지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마을의 풍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뚱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메린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 그래? 그럼 안 보면 되겠네!”
“……뭐? 그게 뭔,”
“어차피 피곤할 텐데 한숨 더 자라!!”
녀석이 잔뜩 구긴 얼굴로 소리친 순간, 의식이 뚝 끊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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