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화 〉 361화 : 서로가 필요한 이유 (3)
* * *
내가 널 이용한 거야.
그것이 메린의 답이었다.
농담을 하는 기색은 당연히 없고, 메린의 성격상 날 위로해주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닐 터.
……어이씨, 그럼 진짜로 녀석이 날 이용하고 있었다는 게 되는데?!
“너 진심이야? 진짜 나 이용해먹고 있었다고?”
“거짓말 같냐?”
“……”
메린의 얼굴에선 어떠한 느낌도 전해지지 않는다.
두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고, 입이나 눈가, 손 등등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다.
거짓말이 머물렀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뭘 이용했다는 거야?”
고개를 젓는 대신 던진 질문에, 메린은 지극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성격.”
“……”
“나 알잖아. 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고, 관심도 별로 없는 거.”
어렸을 때는 왜 굳이 맞춰줘야 하는지 몰랐다.
어째서 이 상황에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상대가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메린은 말을 멈추고 약간 긴 숨을 내쉰 뒤, 여전히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근데 나이 먹을수록 그런 걸 몰라서 점점 더 성가신 일이 벌어지더라. 그때 네 성격…… 아니, 네 능력이랑 상황을 본 거지. 넌 딴 사람 대하는 거 잘하는데, 나 없이는 단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없는 꼴이었잖아?”
“……”
“그래서 마침 잘됐다 싶었던 거지. 실제로 내가 딴 사람이랑 뭔 일 터지면 네가 다 해결해줬잖아. 그러니 널 계속 옆에 두자고 생각했던 걸 거야.”
평소처럼 깜빡이는 무감정한 눈.
주저없이 입 밖으로 나오고 있는 무정한 말.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듯한 평탄한 억양.
어디에도 거짓은 없다.
……아마 끝까지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날 계속 돌봤다? 내가 혼자 다녀도 아무 일 없을 때까지 나랑 같이 다니고, 내가 아플 때마다 간병하고……
그게 전부 다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였다고?”
“그렇겠지. 그래야 네가 나한테서 안 떨어질 거 아냐. 실제로 그렇게 됐고.”
“……그럼 그 전에는? 어렸을 때는 왜 그랬는데? 그땐 사회성이 필요한지 몰랐다며.”
낮은 목소리로 묻자, 메린이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마 기억을 더듬는 것이겠지.
이내 다시 나를 향한 주홍빛 눈동자 속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심심해서.”
“심심……”
정말로 단순명확한 동기였다.
하긴, 그 나이 때에 뭔 복잡한 생각을 하겠어?
“너랑 만났을 땐 혼자 노는 게 지루해진 지 좀 됐었거든. 그냥 자러 갈까 했는데, 아는 얼굴이 터벅터벅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뭔가 싶어서 갔었고, 그 다음은 너도 알겠지.”
아는 얼굴……?
뜻밖의 말이 들려서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그 전부터 나 알고 있었어?”
“얼굴이랑 목소리만.”
그럼 나랑 무슨 말을 나눴었다는 거 아냐.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왜 말 안 했냐?”
“그냥. 어차피 너도 기억 못하던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뭐, 그건 어쨌든………”
나는 아무도 없는 방 한쪽을 보면서 한숨을 쉰 후, 다시 메린과 마주보았다.
나 참, 이거 착잡하다고 해야 하나?
좀 복잡한 기분이다.
“메린.”
“응.”
“너 그거 다 추측이지?”
“응.”
녀석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말투가 죄다 ‘그럴 거 같다’는 식이길래 혹시나 했더니……!
“얌마, 확신도 없으면서 뭘 그리 당당하게 얘기하냐? 깜짝 놀랐잖아, 짜샤!”
“이것저것 따져보니까 왠지 그런 거 같아서.”
즉, 이 녀석도 나랑 같은 상황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았다가,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보니 그랬던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정말이지,
“돌겠네, 진짜.”
“그리고 내가 널 이용했다는 게 더 그럴싸하지 않냐?”
“왜?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똑똑하우억.”
갑자기 뒷머리가 눌리면서 베개에 얼굴이 파묻혔다.
머리를 짓누르는 손이 떠나갈 때까지 그대로 바둥거린 다음,
“푸하앗!”
고개를 쳐들고 모자랐던 숨을 몰아쉰 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똑똑하니까 내가 하는 게 더 말이 되지!”
“객기부리냐?”
“난 진실을 말할 뿐이야. 그래, 네가 머리가 좀 돌아가는 편이긴 해. 하지만 사람을 티 안 나게 이용해먹는 고단수를 쓸 순 없어! 넌 그런 머리가 안 돼!”
내 의도대로 누군가를 움직이려면, 상대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내 말이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할지도 예측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를 이용해먹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채지 못해야 한다.
그러니 말을 돌리는 등의 술수를 부릴 줄 알아야 하는데, 이녀석은 이게 전혀 안 된단 말이지?
게다가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도 가끔 헛다리를 짚고 말야.
거짓말도 더럽게 못하고.
그런 녀석이 뭐? 전부터 날 교묘히 이용해먹고 있었다고?
퍽이나.
애초에 그러고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애써 부정하거나, 녀석이 말한대로 혼자서는 하루를 보내기도 힘드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낌새는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메린은 언제나 순수하게, 거짓 없이 나를 대했다.
팔을 부러뜨리거나 기절을 시켰을 때도, 그 손에 짜증은 담겼을지언정 악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녀석은 날개 없고 엄청나게 큰 요정이나 마찬가지였어.
희로애락이라는 단순한 감정으로만 움직이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
“야생아가 문명인을 어떻게 조종하겠냐고.”
“아, 그래.”
메린은 진실을 들은 답례로 내 얼굴에 베개를 휘둘러버린 다음, 그걸 품에 껴안고 몸을 좌우로 기우뚱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보통 여자가 남자 조종하지 않냐? 몸으로 꼬셔서.”
“뭐, 여자한테 빠져서 망한 군주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근데 네가 처음에 나한테 안아달라고 했을 땐, 내가 너 설득하려고 애쓰던 때였잖아.”
“사실은 그게 다 계략이었던 거지.”
“잘도 그랬겠다.”
코웃음 치며 단칼에 잘라버렸다.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던 대로, 녀석은 킥킥 웃으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녀석의 옆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 자세 그대로 뺨을 부비기 시작한다.
지금 녀석의 이 행동에, 더더욱 귀여워해달라는 뜻 말고 무슨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까?
없지. 아무것도 없어.
“히히.”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으며 뺨을 맞대어도 꺄르르 웃기만 하는데, 무슨 다른 뜻이 담겨 있겠는가?
메린은 그런 거 못해.
아예 안 하면 또 몰라, 어떠한 말이나 행동 뒤에 다른 뜻을 숨기는 건 정말 못한다.
뭘 숨기고 있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니까.
그러니 날 속이면서 이용해먹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무의식적으로 한 거라면 더더욱 비난거리가 안 된다.
그냥 나 혼자 홀딱 빠져서, 자발적으로 녀석을 위해 움직인 거니까.
“그럼 너도 마찬가지 아냐?너도 꿈에서 그딴 소리 듣기 전까진 몰랐었잖아. 즉, 모르는 새에 날 꼬셔서 계속 옆에 붙잡아 둔 거지.”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뭐가 있다고 널 꼬시냐? 네가 날 꼬신 거겠지.”
……그래, 이 녀석이 날 유혹한 거다.
그 경이로운 강함으로.
아름다우면서 공허한 주홍빛 눈동자로.
언제라도 훌쩍 사라져버릴 것 같은 허망한 웃음으로.
너에게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도록, 너는 내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아닌데? 네가 꼬신 건데?”
하지만 메린은 그걸 단호히 부정하며, 베개 대신 나를 껴안고서 속삭였다.
“다들 도망가는데 넌 가만히 있었잖아. 무서워하면서도 어쨌든 안 도망갔어. 오히려 달라붙었지?”
“뭐? 내가 언제,”
“등에 업으면 내 목 안으면서 잠들고, 아파서 누워 있다가 무서운 꿈꾸면 덜덜 떨고 울면서 나 껴안고, 다시 잠들 때까지 손 잡아달라고 조르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날 보기도 했잖아.”
“………으.”
“네가 꼬신 거야.”
그렇게 속삭이면서, 메린은 몸을 떼고 나를 마주보았다.
그대로 그윽하게 웃으면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나 머리 땋은 거 좋다고 했어. 네가 바지 입는 게 더 낫겠다고 했어. 나이 많은 사람에겐 존댓말을 쓰고, 꼬박꼬박 인사해야 한다고 했어. 딴 사람들 틈에서 사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네가 원하던 모습이지?
민망한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쏟은 뒤, 녀석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으면서 재차 말했다.
“응, 생각해보니까 맞네. 네가 나 꼬셔서, 네 옆에 있으면서 너 지키게 했어. 키스이든 잠자리이든, 너라면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고는 신나게 하고 있잖아. 그러네, 네가 나 이용한 거네. 와, 이거 존나 나쁜 새끼 아냐?”
“키스랑 그건 다 네가 먼저 해달라고 했잖아?!”
화끈거리는 얼굴로 쏘아붙이자, 녀석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속삭여왔다.
“책임져.”
“……뭐?”
“너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었잖아. 책임지라고.”
“안 되긴 뭐가 안 돼, 임마, 이상한 소리하지 마, 딴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잖아!!”
아잇,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 녀석, 방금 그 말이 뭔 뜻으로 들리는지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건가?!
아냐아냐아냐,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딴 건 몰라도 저건 일부러 한 게 분명해!
아무 사전 지식없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오해? 뭔 오해? 너 없으면 평소 생활이 안 된다는 건데?”
“허……?”
멀뚱멀뚱한 눈. 정말 모르는 눈치이다.
오, 주여, 세상에.
경악하는 내 얼굴이 우스운지, 메린은 작게 키득거린 뒤 내 뺨을 콕콕 건드리면서 말했다.
“너 없이는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됐어.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거리게 됐다고. 아마 너 없으면 밥도 못 먹을걸?”
녀석이 다시금 나를 끌어안으면서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혼자 몸 만지게 됐고.”
“……?!”
“네가 옆에 없으니까, 네 생각이 나면서 네가 심은 ‘좋은 기억’이 떠올랐어. 그러다 네 손을 흉내냈고.”
“메, 메린,”
위험해.
본능이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지만 그 느낌은 들지 않더라. 괜히 심장만 더 조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잠 못 잤다고. 어제를 뺀 사흘 내내. 그러니까 책임져.”
잡아먹힌다.
메린에게,
잡아먹힌다고……!
목덜미를 살짝 훑는 축축함이 그 예감을 확신으로 굳힌다.
그와 동시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면서 체념하라고 속삭인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책임지고 달래줘.”
“잠… 읏…! 메린, 잠깐……! 제발, 잠깐만, 들어줘, 진짜 잠깐이면 돼……!”
튜닉 속을 훑는 손길.
목선을 따라 그리는 촉촉한 입술.
그 움직임들이 불러오는 찌릿한 느낌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며 가까스로 말을 전했다.
“왜? 싫어?”
“아직, 낮이잖아. 로나가,”
로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려는 내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은 뒤, 메린은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로나는 안 와. 이 여관 돌아가는 꼴 보더니, 신전에서 묵겠다고 갔어.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더라.”
“뭐 어떻길래, 읍… 하아, 자, 잠깐, 하읍… 잠깐, 메린…잠깐만……!”
“엉? 또 뭐 있어? 배고프냐?”
고개를 젓고,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뺨을 감싼 뒤, 그대로 그녀와 입술을 포개었다.
짧은 입맞춤을 나눈 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할게. 책임지라며……?”
“……”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살짝 풀어지면서 물기가 어른거린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바닥이, 좀더 따뜻해진 것 같다.
벌써 얕게 붉어진 뺨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귀 가장자리를 살며시 머금었다.
평소보다 더 크게 몸을 들썩이는 어깨를 꼭 안으며, 그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말을 건넸다.
“그래. 달래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하아으…! 귀, 읏, 뜨거어…!”
다른 손으로 건너편 귓불을 어루만진다.
그녀가 짧게 높은 소리를 내며, 잔뜩 열을 품은 숨을 길게 내뱉는다.
계속 귀를 매만지면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그녀를 천천히 눕힌다.
칭얼거리듯이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입꼬리가 풀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그녀의 귀에 또 한 번 속삭였다.
“책임지고 너 달래줄 테니까.”
“히으, 우으읏…! 카엘… 하아, 카에엘……!”
“네 귀여운 모습, 실컷 보게 해줘.”
달뜬 숨결을 내쉬는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대답 대신 새어나오는 그녀의 짧은 숨소리에는, 오로지 기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