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3화 〉 365화 : 어깨가 무거운 휴식 (2)
* * *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
그것은 세계에 멸망이 찾아오고 있음을 알리는 가장 뚜렷한 징조이자, 세상 바깥의 초월자가 이에 개입하고 있다는 걸 보이는 상징이기도 했다.
7월 1일.
그 날을 기점으로, 심장을 지닌 모든 생물이 제 핏줄을 잇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악마가 제 상징으로 삼은 염소 외엔, 땅 위를 다니며 물 속을 거니는 모든 짐승들이 새끼를 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대대적인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가, 세상을 만든 창조주 외에 누가 할 수 있을까?
그 탓에 우유와 양젖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희한하게 알은 계속 얻을 수 있었는데, 아마 네발 짐승과는 구조가 좀 다른 것이겠지.
새 병아리를 못 보게 된 건 똑같지만.
여하튼 그 저주스러운 징조의 손길은 인간을 비롯한 지성체들도 피할 수 없었다.
이 왕국뿐 아니라 대륙 전체를 뒤져도, 약 한 달 반보다 더 어린 아기는 찾을 수 없겠지.
만약 여기서 그쳤다면, ‘대재앙의 징조’는 되었겠지만 ‘세계멸망의 징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지성체는 몰라도, 인간이 불임으로 멸망의 공포를 느끼기엔 일 년은 너무 짧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늘 위의 존재가 몇 가지 더 예외를 둔 것이리라.
“나 있던 데도 똑같아요. 밀이고 보리이고 알이 하나도 안 맺혔었어요.”
“그래요? 여기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이런, 올 겨울은 어떻게 나야 하지? 안 그래도 먹을 게 별로 없는데!”
외지인과 이 마을 사람인 듯한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온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해본 대로, 한 귀로 들어온 그 말들을 다른 쪽 귀로 그대로 내보내면서 스튜를 한 스푼 입에 넣었다.
아주 잘게 잘린 훈제고기와 야채조각이 입 안을 구르다 목 안으로 들어갔는데,왠지 바깥의 말들도 함께 삼켜버린 것 같았다.
“왜요? 다른 건 괜찮던데요. 다른 과일이나 야채, 심지어는 귀리나 호밀도 멀쩡하더군요. 몬스터만 아니었어도 거기서 무사히 겨울 날 수 있었을 텐데.”
“여기 꼴 못 보셨어요? 안 그래도 힘든 판에, 피난민들이 와글와글 몰려왔잖아요. 그 사람들이 빵집이랑 식당을 아주 싹 쓸었다니까요!
그 탓에 여기 야채랑 밀가루 값이 장난 아니게 올라버렸어요.”
이어지는 크나큰 한숨.
아니, 내 앞에서 스푼을 후후 불고 있는 메린의 입김인가?
어쩌면 돼지고기의 매운 양념에 기습을 당한 내가 끙끙대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말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어느 자리에서 하는 대화인지 궁금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게다가 오크들이 밖에 돌아다닌다고 합디다. 우리 마을 사냥꾼이 숲에 못 간지 좀 됐을 거에요.”
“아, 그건 저도 들었어요. 그 탓에 저도 여기 더 머물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 참, 이래서 수도까지 언제나 갈런지…….”
몬스터 때문에 숲을 들어가지도,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에 오르지도 못한다.
그 탓에 이 마을은 숲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고, 다른 목적지가 있는 피난민의 일정은 계속 지체되기만 한다.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그나마 이 마을이 우물을 쓰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거다.
아마 바깥 개울에서 물을 얻고 있었다면 훨씬 더 처참했을 거야.
하지만 그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될까?
여전히 앞날은 암담한데.
그러니 저 사람들이 한숨을 쉬며 한탄해도 할 수 없다.
“수도라…… 맞아, 두 달도 전에 거기서 용사가 나타났다죠? 혹시 본 적 있으세요?”
“에이, 당연히 못 봤죠! 저 있던 마을은 수도에서 동남쪽에 있는걸요. 용사가 할 일이 북쪽 산에 있는 드래곤을 죽이는 거라던데, 그쪽에 올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기는 하네요. 그러고보니 이 일들이 다 그 드래곤 때문에 일어난 거라죠? 용사라는 놈은 대체 뭐하길래 아직도 그 놈 안 잡고 있는 건지, 원.”
불평을 늘어놓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하…… 후딱 안 잡을 거면 몬스터라도 없애고 다니든가! 만나면 ‘네가 시간 질질 끌고 있어서 다들 죽어나가고 있다’고 멱살 잡고 말해주고 싶네요.”
“소문으론 좀 어린 놈이라고 하던데, 겁먹고 꽁무니 뺀 게 아닐까요? 아니면 수행을 핑계로 어디서 놀고 있거나. 그러니 두 달도 넘게 이 꼴이지.”
“진짜 그러기만 해봐. 내가 아주 그냥 묵사발을 만들 겁니다. 솔직히 드래곤보다 그 놈이 더 원망스러워요. 신께 선택받은 사람이라면서 하는 게 없잖아요?
우리 마을도 그렇고, 여기나 다른 데도 몬스터 때문에 망했거나 망해가는데 코빼기도 안 비추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불행의 원인을 찾고, 그에 책임을 묻고 비난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거다.
“예배 때마다 사제님이 용사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나 참, 뭐 하는 게 있다고!”
“어쩌면 그 놈이 나타나서 드래곤이 이 깽판을 부리는지도 몰라요. ‘불구덩이’가 살아난 것도, 몬스터들이 난리치는 것도 다 그 용사 놈이 나타난 뒤부터 그런 거라잖아요.”
“그럼 더 몹쓸 놈이네. 지 때문에 이런 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어디 박혀 있다는 거 아니에요? 하, 용사를 죽여야 고난이 끝난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구만!”
……그러니 그 이야기를 듣는 내가 손을 떠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몸 속의 피가 전부 꽁꽁 얼어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맞은편 자리에서 보내오는 염려의 시선에 웃으며 괜찮다고 중얼거렸지만, 나 자신조차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아~ 그 종이요?이 재앙들은 다 신의 분노로 일어난 거니, 그 선택을 받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던가요?”
“예, 그거요. 사제님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시지만, 원래 제물은 신이 점지한 걸로 바치는 법 아닙니까? 어쩌면 드래곤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놈의 제물로 바쳐지는 게 용사의 역할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어디 처박혀 있는 거 아닐까요?”
“내 앞에 있다면 당장 바쳐버릴 텐데! 누구인지 모르니 잡을 수도 없고, 참 답답하네요.”
“우리 사제님도 모르신다고 하더군요. 진짜 꽁꽁 감추고 숨어있는 모양입니다. 쯧, 사내 새끼가 빠져 가지고.”
포크를 꽉 쥐는 메린의 손을 잡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들의 말에 발끈해버리면, 결국 내가 용사라는 걸 들키게 될 거다.
‘용사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종이가 나돌고 있다고 하니, 정체가 드러나면 온 마을 사람의 표적이 될지도 몰라!
우린 여기 머물러야 한다.
정 깽판을 치고 싶으면 떠나는 날에나 해야지, 지금은 안 돼……!
“사내가 아니라 계집이란 소문도 있던데요.”
“그래요? 계집이면 재미라도 볼 텐데.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몸으로 사죄하게,”
콰앙!
갑자기 큰 소리가 울려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침 입 안이 비어서 망정이지, 뭔가 먹고 있었으면 사레 들렸을 거야!
다른 이유로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가다듬으려 애쓰면서 고개를 돌렸다.
괜히 말소리가 들린 게 아닌지, 내 뒷담을 하던 사람들은 우리와 굉장히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한 번도 대화에 끼지 않은 여주인이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두 남자는, 여주인의 입이 천천히 열리면서 점차 얼굴이 파래졌다.
“티미. 내가 말 안 했나? 우리집에선 용사 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 아니, 누님, 그,”
“네가 방금 제물로 던지거나 따먹고 싶다고 한 용사가 내 은인이랑 동향인 거 몰라? 그리고 네 형이 용사 덕분에 자식 새끼 찾았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 놈이 뭐? 애미 뒤진 고아 새끼가 양심도 팔아처먹었나, 어디서 함부로 나불거려!”
“아니, 누님, 거 말이 좀 심하시네! 까놓고 말해, 내가 뭐 틀린 소리한 것도 아니잖아요!”
두 남자 중에 좀더 젊어보이는 쪽이 여주인에게 대꾸했다.
모욕을 들은 분노인지, 그냥 여자에게 지기 싫다는 오기인지 몰라도, 그게 여주인의 성질을 단단히 건드려버린 듯했다.
“그래, 맞아, 병신 쓰레기 새끼야. 뒤지게 쳐맞아라!!”
빠악!
여주인이 테이블 위의 나무접시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쳐버렸다!
그런 뒤,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접시와 발로 두들겨 패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용사가 일 안 하고 노닥거린다고?! 그럼 네 조카 구한 것도! 서쪽 산맥에 있던 산신이니 뭐니 한 걸 잡은 것도! 죄다 개짓한 거네?!
그 덕에 거기서 자라는 약초 구할 수 있어서! 내 새끼가 살았는데!!”
퍼억! 퍽!
사정없이 날아드는 접시와 발길질에, 남자는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슬슬 누가 말리려 나설 법도 하건만, 누구 하나 나설 기색이 없었다!
저러다 죽을 거 같은데……! 아니, 이 사람들이 단체로 정신이 나갔나?
아무리 여주인이 무서워도 그렇지, 왜 아무도 안 말려? 같은 동네 사람 아냐?!
아잇, 씨발, 뒷담으로 산제물 소리까지 들은 내가 나서야 돼?!
“저, 저기, 그쯤 하시는 게……”
그래서 큰 맘 먹고 말을 꺼내보았으나,
“뭐요?!”
“히으!”
……시선을 받자마자 뒤로 물러나서 아예 벽에 붙어버렸다.
그치만 무서운걸!
질투하는 메린보단 덜하지만 어쨌든 무섭다고!
하지만 난 용사이다.
산꼭대기의 빨간 드래곤이랑도 맞대면한 놈이고, 앞으로 그보다 더한 놈과 맞닥뜨려야 하는 용사……!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되는 놈이야!
“그, 그러다 사, 사사, 사람 잡겠어요!”
나는 옆에서 날아오는 뚱한 시선을 무시하면서, 눈빛만으로도 나를 찢어버릴 듯한 여주인과 마주보며 말했다.
“그, 그 사람도 바, 반성하고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손님은 빠져요. 이 씹새끼가 쳐맞아 뒤지는 건 자업자득이니까!!”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 가차없는 폭행.
나무접시가 박살나기까지 하는 모습에 기겁하며 나도 모르게 다가가려는 찰나,
“어머머, 세상에!!”
왠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가 식당 안을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듯한 그 젊은 여자는 타다닥 뛰어오더니, 일말의 주저없이 여주인의 허리를 붙들고서 말리기 시작했다.
“언니언니언니언니, 그만! 그만하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러시면 안 돼요!!”
“아, 왔니? 잠깐만 기다려줘. 이 놈 족치고 금방 갈게.”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여자가 물러날 기색이 없다고 봤는지, 여주인은 한숨을 쉬며 남자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는 남자를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당장 침을 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티미 너, 내 은인 덕분에 산 줄 알아. 앞으론 얘도 누님으로 모셔라. 방금 네 은인이 됐으니까.”
“으으으……”
남자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그걸 두고 보지 못하겠는지, 여자는 몸을 굽혀 그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고, 그 틈에 여주인은 남자와 마주앉아서 용사의 뒷담을 까던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 몸을 움찔거리는 그에게, 여주인이 서늘한 목소리로 단단히 일렀다.
“손님도 계속 여기 머물고 싶으시거든 입조심하세요. 그쪽에겐 용사가 집 지켜주는 개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내 자식 살길을 열어준 사람이니까요. 눈앞에 있으면 잡아서 제물로 바치겠다고요? 어디 그 말, 신전에 가서도 그대로 해보시죠? 아까 보니 빨간 사제님이 오셨던데!”
“빠, 빨간 사제?! 어, 어어, 음, 제, 제가 좀 많이 취한 거 같네요. 오, 올라가봐야겠어요!”
남자는 들고 있던 잔을 급히 비워버리더니,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버렸다.
빨간 사제라면 로나를 말하는 것일 터.
남자가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지만, 거기도 이단을 잡는 전투사제의 악명이 익히 알려져 있는 듯했다.
“흥! 돼먹지 못한 놈 같으니. 어디 함부로 입을 놀려대? 손님만 아니었어도 콱!”
도망치듯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쏘아붙이는 여주인.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보던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언니도 참! 잘은 모르지만 진정하세요. 봐요, 다른 손님들도 죄다 놀라서……”
그리고 고개를 들고 식당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을 마주친 순간, 눈을 휘둥그레 뜨며 멍하니 일어섰다.
나 역시 여주인 때문에 잔뜩 쫄아 있던 것도 잊어버린 채, 멀거니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카엘? 카엘 맞지? 넌 메린이고……!”
우리를 보며 뛸 듯이 기뻐하는 얼굴의 주인은, 나에겐 가깝고도 먼 이웃이자 메린에겐 어쩌면 친언니와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슐 누나……?”
“꺄아아~! 맞구나, 카엘! 메린! 와아, 우와아,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외마디 소리까지 지르면서 내 양손을 잡고 붕붕 흔들기 시작하는 슐 누나.
예전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발랄함이 한껏 묻어나오고 있었다!
아니, 대체 석 달 만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니아니, 그보다 이 누나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게 슐 누나를 알아보자마자 질문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여기 있어요?
여기 수도 남쪽이니, 놋지빌이랑은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데.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에요?
그나저나 여관 주인의 은인이 누나였어요? 아예 여기 눌러 살아요?
왠지 피부도 탄 거 같고,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팔뚝도 굵어진 거 같은데 뭐하고 지내는 거에요?
……그 밖에도 물어볼 것들이 마구마구 샘솟아서 오히려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 탓에 정말 열렬하게 반가워해주는 누나에게, 나는 가까스로 딱 한 마디만 전할 수 있었다.
“그…… 안녕하셨어요?”
“응? 푸흡! 너 정말 그대로이구나! 여행하니까 좀 달라졌을까 싶었는데!”
“아니, 놀라서……. 어떻게 여기 온 거에요? 어어, 혹시 피난……?”
조심스럽게 묻자, 슐 누나는 고개를 젓더니 빙그레 웃으며 왼쪽 손을 세웠다.
기억 속보다도 조금 거칠어진 듯한 손등과 손가락.
그러나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금빛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어, 누나, 설마……?”
“응!”
수줍게 웃으며 슐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결혼했어!”
“허?!”
누나를 알아봤을 때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인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