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 369화 : 마음을 다잡는 휴식 (4)
* * *
마을이 고의로 나에게 독을 먹였다.
원래라면 그 말이 나오자마자 온갖 소음에 묻혀야 할 터.
그러나 슐 누나의 말은 허공을 울리며 조용히 사라지기만 했다.
뒤이어 울린 것도, 호로록 하고 찻물을 머금는 소리뿐이었다.
그 이상스러운 평온을, 누나는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으며 물었다.
“안 놀라네. 알고 있었니?”
“어떤 치료사제님이 그러셨어요. 바깥의 독기를 견딜 수 있도록 일부러 독을 먹인 것 같다고요.”
“듣고 놀랐지?”
“안 놀라면 사람이 아니죠.”
“원망스럽니?”
“아니요.”
“……”
쉼없이 주고받던 말이 거기서 뚝 끊겼다.
슐 누나는 말없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왠지 이유를 물을 것 같아, 나는 누나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덕에 제가 산 거잖아요. 원망 안 해요.”
그 사제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하자, 누나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네 행복을 바라고 한 게 아니야. 그래도 상관없니?”
“………네. 어떤 목적이 있었든, 그것 때문에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독을 먹은 탓에 다른 사람보다 더 빌빌대고, 조금만 무리해도 열이 끓고, 나 스스로 오래 못 살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해도.
그 일에 한해선 그들을 원망할 수 없다.
어쨌든 내가 살기를 바라고 한 거니까.
“뭐, 팔다리 못 움직이는 신세였다면 다를지도 모르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겉은 멀쩡해요. 머리도 잘 돌아가고, 눈코입도, 귀도 다 괜찮고요.”
“머리는 맛탱이 갔는데.”
“시끄러, 임마, 끼어들지 마! ……아무튼 고맙다고는 못하지만 왜 그랬냐고 탓하지도 않을 거에요.
그 덕에 살아서……이 녀석을 만났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빛을 만났다.
원망하지 않을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슐 누나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할 거 같았어. 정말, 여전히 착한 아이구나.”
“어. 여전히 호구 새끼야.”
“이 자식이, 호구 아니라니까 진짜!”
그리고 여전히 내 항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메린이었다.
나쁜 자식.
“후후,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 메린밖에 안 보이는 것도 여전하구나.
……그런 너이니까 좋아했던 거겠지. 네가 그런 사람이란 걸 아니까, 나 스스로 알아서 포기했던 걸 거야. 이루어질 리가 없으니까.”
“음…… 저기, 누나……”
“참 잘됐어, 안 그래?”
환한 웃음꽃을 피운 채, 슐 누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끝나준 덕분에, 계속 내 가족보다도 소중한 동생 둘과 지낼 수 있었어. 그 두 아이가 서로 이어지는 것도 보게 됐고! 너희 둘이 결혼할 때 내가 메린 들러리 서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결혼해버렸네.”
뺨을 긁적이며 머쓱해하는 누나를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누나가 어딘지 후련한 듯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 탓인지, 저절로 입이 움직이면서 실없는 소리를 내었다.
“들러리는 못해도 어머니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아요?”
“뭐?! 세상에, 아직 신혼도 안 끝난 신부에게 뭐라는 거니?!”
이전엔 건네지 않았을 농담을 하고, 받을 일이 없었던 핀잔을 듣는다.
“결혼했으니까 어쨌든 이제 아낙네잖아요. 어머니 역할 할 수 있네, 뭐.”
“내 자식 낳은 뒤면 몰라도 싫어, 얘! 언니 역할 할 거야!”
“자식? 몇 명 생각 중이에요?”
“셋. 아들이랑 딸 생기면 너희 이름 딸까 해.”
……평생 없을 줄 알았던, 미래의 인연을 맺었다.
“흠흠……그럼 어차피 나중에 어머니 될 거, 미리 역할 맡아도 되지 않나?”
“죽을래?”
서로 그었던 선을 훌쩍 뛰어넘는 느낌.
처음 시도하는 것일 텐데,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뺨은 사정없이 잡아당겨져서 엄청 아팠지만.
으으, 힘은 이미 애 셋 낳은 어머니 그 자체구만, 뭐!
“후후후, 카엘~ 또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입 찢어버린다?”
“가련했던 누나를 돌려줘……. 아야.”
식사와 차에 이어 꿀밤까지 얻어먹고 말았다.
후, 이렇게까지 퍼주지 않아도 되는데.
“근데 누나는 그거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독 먹은 거.”
“이래봬도 내가 촌장 딸이잖니? 다 아는 수가 있어.”
“아, 예.”
하긴, 결혼한 언니들과 망나니 동생 대신 마을 경조사에 참석하곤 했으니, 그때 치료사 아저씨나 뭐 그런 사람에게 들었겠지.
“아무튼 뭐, 그거 아니어도 거기 계속 살 생각은 없었어요.”
“뭐? 그럼 왜……,너 혹시 나 떠본 거니? 이야~ 카엘 너, 그런 짓도 할 줄 아는구나~ 대견한걸~”
누나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또 내 뺨을 쭉쭉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누나, 아파, 진짜 아파요! 말이랑 행동이 완전 딴판이잖아!!”
“어머, 무슨 소리이니? 너 귀여워해주는 거잖아?”
“웃기고 있, 아아아아! 진짜 아프다니까요, 아아아, 잘못했어, 미안해요, 누나아아!!”
……그렇게 잠시 소란이 있은 후,한층 더 화끈해진 뺨을 문지르며 차를 마시는데,
“슐 언니.”
덤덤히 차를 홀짝이던 메린이 별안간 입을 떼었다.
“나 물어볼 거 있어.”
“응? 뭔데?”
“음…… 카엘 없어야 되는데.”
“그래? 카엘, 너 그만 가라.”
“푸흡?!”
곧바로 사레가 들렸다!
아니, 너무 매끄럽게 이어진 거 아냐?
이 누나가 진짜 선 넘네!
“아니, 누나, 나 아낀다며! 날 속였던 거야?!”
“아끼는 거 맞는데, 메린이 전보다 더 귀여워졌잖니? 그래서 너보다 더 귀해졌을 뿐이란다.”
“이 녀석이 귀여운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메린 너도 임마, 뭔 얘기를 하려고 날 내쫓는 건데? 내가 못 들을 얘기가 뭐가 있다고!”
메린은 씩씩대는 나를 보면서, 입술 앞에 검지손가락을 세웠다.
“비밀.”
“그 놈의 비밀, 진짜 돌겠네!”
“어머, 카엘, 여자는 누구든 비밀을 가지는 법이야. 그보다 메린이 여자끼리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잖아. 남자 주제에 어디 끼려고 하니? 그만 방해하고 얼른 나가렴. 쉿쉿.”
“와, 진짜 나빴다. 여기서 남녀차별을 해? 와, 누나 그렇게 안 봤는데. 와.”
남은 차를 쭉 마셔버리고, 투덜투덜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보는 슐 누나의 얼굴은, 상황에 걸맞지 않게 무척 밝기만 했다.
“후후,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와인도 맛있었고 다른 선물들도 고맙지만, 네 건강한 모습을 본 게 나에겐 가장 큰 선물이야. 정말 고마워.”
“흥이다. 훈훈하게 끝내려고 해도 소용없거든요? 내가 이거 꼭 기억해둔다, 두고 봐!”
“내일 되면 까먹을 거면서.”
“시끄러, 임마, 넌 저녁 전까지 여관으로 오기나 해! 누나, 메린 꼭 돌려보내요! 꼭이야!”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면서 부엌을 뒤로 했다.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까지, 슐 누나의 얼굴엔 무척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뒤, 문을 두 개쯤 열고 닫은 뒤에야 다시 치료사집으로 나올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선반을 정리하고 있던 브랜은, 내가 혼자 나온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쫓겨나셨어요?”
“여자들끼리 대화하고 싶대요…….”
“저런. 그럼 혼자 돌아가시는 건가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어차피 이 주변에서 묵고 있는걸요. 겸사겸사 시장도 돌아보죠, 뭐.”
아까는 가지 못했던 식료품점과 청과물점에 가볼 생각이었다.
배낭을 두고 왔으니 사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지금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알 수 있겠지.
사실 결혼 선물을 살 때 슬쩍 보려고 했다.
근데 사람이 좀 몰려 있어야지.
자칫하면 식재료를 둘러싼 난투에 휘말릴 것 같아서, 그냥 빨리 지나가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점심도 지났으니 가게도 좀 한산하겠지.
매대는 텅텅 비었겠지만, 그래도 가격 정보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랜은 무언가 다른 게 염려되는 건지, 잠시 팔짱을 끼고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주변을 살짝 살피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라는 듯이 손짓했다.
이윽고 들려온 속삭임은, 잔뜩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게 만들었다.
“조심하세요. 요즘 좋지 않은 의도로 용사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
“슐이 용사와 동향이란 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엔 당신과 메린 씨, 두 분 외에는 다른 동향 사람이 없어요. 어제 당신이 슐과 이야기하는 걸 들은 사람 중에도 패거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패거리……?”
브랜은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는 가장자리를 보니, 어디 붙어 있던 걸 강제로 뜯은 것 같았다.
다행히 본문이 적힌 부분은 하나도 상하지 않았는데, 갈겨쓴 듯한 글씨로 딱 세 마디 적혀 있었다.
“……허.”
밑도 끝도 없네.
근거는 물론이고, 어디에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도 안 적혀 있어.
어디 사는 누구에게 제보해야 되는지도 안 써 있고.
“알려주면 얼마 준대요? 누구한테 알려줘야 하고요?”
“글쎄요. 이 종이를 불태우면 알아서 찾아온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뭐지? 소환술인가?
어쩌면 여기 쓰인 잉크에 무슨 특별한 처치가 되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브랜은 꼭 닫힌 출입문을 힐끔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서 요 며칠, 슐이 질문 공세를 받았어요. 슐은 이미 이 마을의 일원이니, 모른다고 잡아떼어도 그냥 넘어갔지만…… 당신은 외지인이니까 좀더 거칠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냥 외지인이 아니라 장본인인데.
슐 누나에게 내가 용사라는 얘기를 못 들었나? 놋지빌을 방문했었으니 모를 거 같진 않은데.
“그러니 조심하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더 위험해질 겁니다. 듣기론 다른 마을에도 이런 게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저 아세요?”
“알죠.”
브랜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어떻게 모르겠어요? 다 들었는데. 당신은 처남 같은 분이시죠. 제 아내의 소녀 시절을 같이 보낸 부러운 분이기도 하고요.”
역시 아는구나.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나 참, 누가 들으면 맨날 붙어다닌 줄 알겠네. 아무튼 말씀 감사합니다, 매형 같은 분.”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매형 비슷한 사람이 소리 내어 웃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보통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또 오실 거죠?”
“그럼요. 적어도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러 다시 올 생각입니다.”
“예, 꼭 그래주세요. 슐이 무척 기뻐할 겁니다. 아, 혹시 시간이 되시거든 인형가게에 가보세요. 여기 명물이거든요. 광장 쪽으로 가시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인형이라…….
그런 걸 가지고 놀 나이는 훨씬 지났는데.
하지만 명물이라고 하니 왠지 구미가 당기는군.
여행에서 특이한 음식이랑 지역 명산물은 절대 놓칠 수 없지!
“네, 고마워요, 브랜 씨. 또 뵐게요!”
문가에 선 그에게 손을 흔들며 치료사집을 뒤로 했다.
청과물점을 둘러본 뒤, 곧바로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점심이 지난 오후 시간임에도 두세 명의 손님이 가게를 둘러보고 있다.
아무래도 조미료 등의 부재료를 주로 파는 만큼, 요리의 주재료인 야채가 있는 청과물점보단 인기가 덜한 모양이었다.
뭐, 달걀과 염소젖, 치즈는 하나도 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가격표를 아직 떼지 않아서 얼마인지는 알 수 있었다.
“……”
달걀 두 개에 동화 열 닢?
돌았네, 원래 한 닢짜리인 걸……!
그리고 치즈는 1/8 조각에 동화 다섯 닢, 염소젖은 한 병에 무려 동화 여섯 닢이라 적혀 있었다!
이야, 대강 한 달 전만 해도 동화 다섯 닢이면 치즈 한 덩어리 살 수 있었는데!
진짜 무시무시하게 올랐구만.
근데 더 무서운 건, 이렇게 값이 몇 배나 올랐는데도 모조리 다 팔렸다는 사실이다.
아까 청과물점도 그렇고, 식량이 귀하긴 귀한가보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청과물점 지나갔을 때, 진짜 장난 아니었지.
순무나 배추를 들고 서로 죽일듯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시간도 아깝다는 듯, 야채들을 향해 정신없이 손을 뻗어서 바구니에 넣고 있었다.
뭘 집었는지 알고 있나 싶은 기세로.
야채 사려면 그 틈에 껴야 한다는 건데,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나저나 야채랑 식료품이 이렇게 비싸다니, 왠지 고기나 빵 같은 것도 보고 싶어졌다.방앗간도 가보고 싶어졌고.
어제 사냥꾼이 며칠이나 일을 못했다고 들었는데, 과연 얼마나 값이 올랐을까?
뭐, 아무리 그래도 은화까지는 가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정육점에 갔는데,
“와……”
잠시 후, 넋 나간 얼굴로 그곳을 나서게 되었다.
세상에, 쇠고기 한 덩어리가 은화 두 닢?!
그 돈이면 수첩용 종이 서른 장이랑 잉크 두 병 살 수 있는데!!
아니면 고급 종이 열 장!!
이렇게 비싸다면……위슨 오거든 고기 좀 팔까?
어차피 숲에 들어가면 또 잡을 거 아냐.
꽤 짭짤할 거 같은데……
……는 뭔 개소리야, 지금 돈 더 벌어서 어디다 쓰려고?!
괜히 무겁기만 할 거 아냐, 멍청아!
정신 안 차려?!
어으, 안 되겠다.
어차피 다른 가게들은 내일 메린이랑 구경할 테니, 얼른 시장을 떠나야겠어.
브랜이 알려준 인형가게만 슬쩍 보고 여관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홀로 뺨을 착착 두드리며 광장으로 나오자,
“……?”
중앙에 놓인 자그마한 분수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주사위 게임이라도 하는지, 이따금 감탄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 소리에 이끌리듯 가까이 다가가보니, 나이 지긋한 남자가 작은 인형극을 벌이고 있었다.
“……기사님이 검을 들고 소리쳤어요. ‘각오해라, 사악한 드래곤아! 네놈의 불꽃이 태운 모든 생명을 대신하여 네놈을 치겠노라!’ 그러자 드래곤이 ‘털 없는 고기덩어리 주제에 가소롭구나.’ 라고 코웃음치는 게 아니겠어요! 기사님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읊는 이야기를 따라, 인형들이 딱, 따닥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드래곤과 여러 사람들의 인형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극 후반부인 듯했다.
기사와 사제, 그리고…… 엘프에 인어, 드워프인가?
후드를 쓴 사람까지 다 합쳐서 총 여덟 개의 인형이, 맞은편의 커다란 드래곤 인형을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거 육백 년 전의 그 싸움을 인형극으로 만든 거 같은데.
멀거니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이내 크게 놀라면서 관객들 틈에 끼어 앉았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기사와 그 동료들이 사악한 드래곤을 물리치고, 기사가 왕이 되어 나라를 세운다.
그 나라의 이름이 이야기꾼의 입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기사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올레이스.
바로 이 왕국, 딱 하나 남은 인간의 나라이다.
다들 잊어버린 탓에, 나도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나 들어서 알았지만.
여하튼 그 내용으로 인형극을 하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성서에 적혀 있으니까.
내가 놀란 건, 이야기꾼이 손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인형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몇몇 세부적인 가락도 놀랍긴 했지만, 그딴 거 알게 뭐야, 인형이 지금 혼자 움직이고 있는데!!
저거 혹시 브랜이 말한 인형가게에서 만든 건가?
저게 왜 명물이야, 국보이지, 국보!
그 인형 덕분에, 나도 모르게 굉장히 집중해서 극을 구경하게 되었다.
……마침내 인형극이 끝나고, 사람들이 각자 이야기꾼의 모자 속에 돈을 넣고서 떠나기 시작했다.
나도 주머니를 열어서 그의 모자에 은화 한 닢을 넣어주었다.
세부적인 내용이 독특해서 무척 인상적인 이야기였고, 무엇보다도 인형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이걸 동화 몇 닢으로 퉁치면 양심이 없는 거지.
내가 돈을 넣은 마지막 관객이기 때문일까?
인형들을 정리하던 이야기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통이 크시군요! 감사합니다! 인형극이 무척 만족스러우셨나봐요. 하하, 이거 뿌듯하군요.”
“네? 아, 네. 인형이 굉장하더군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이거 초대 국왕 이야기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가 정리 중인 인형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사가 드래곤을 동정해서 일부러 봉인했고, 그걸 사제가 비난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에요. 그간 드래곤을 봉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만 들었거든요.”
성서에는 그냥 봉인했다고만 적혀 있지, 그 이유까진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그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고, 대부분의 극작가가 채용한 게 바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드래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죽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창조주의 어떠한 뜻 때문에 안 했거나.
“하하, 말도 안 되죠. 이만큼이나 모였는데도 힘이 부족해서 못 죽였다? 얼굴 못 들고 다닐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특히 이 친구는 머리 박고 반성해야 하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후드 쓴 인형을 툭툭 건드렸다.
그 사람이 무슨 역할이길래……?
“그리고 창조주의 뜻이라……글쎄, 그분께 여쭈면 네가 해놓고 뭔 소리냐고 하시지 않을까요? 그분은 지켜보며 허락하실 뿐, 직접 바라시는 건 사람이 세상을 이끄는 것뿐이라던데.”
……그리고 이 이야기꾼은, 어째서 그런 걸 알고 있는 걸까?
아까 인형극도 다른 사람들과는 세부 내용이 조금 많이 다르던데.
“어라……?”
그러고보니 희한하네.
다른 극작가들은 모두 다섯 명이서 드래곤을 상대한 걸로 짜던데.
이 대륙의 대표적인 지성체인 인간과 엘프, 드워프, 그리고 인어에서 하나씩 따고, 최초의 대언자인 조쉬까지 더해서 다섯으로 말야.
근데 이 사람은 여덟 명을 세웠다.
그것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후드 쓴 사람까지 합쳐서.
“여덟…….”
다섯이 아니라 여덟 명이었거든. 전투원이 다섯, 비전투원이 셋이었지?
……연노랑머리 엘프가 했던 말과 함께, 조금 전에 보았던 무대가 떠오른다.
인간 투사와 사제, 엘프 궁수에 정원사, 드워프 현자에 대장장이, 인어 시인, 그리고…… 하늘의 귀인 하나까지 해서 여덟.
분명히, 인형들이………
“아, 그렇지. 젊은 친구, 시간 있어요?”
“어어, 네?”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버렸다.
이야기꾼은 아직 치우지 않은 드래곤 인형을 들더니, 나에게 인사를 시키듯이 살짝 흔들었다.
“내가 새로 하나 짜는 게 있거든. 관람료도 후하게 주셨으니, 특별히 줄거리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시간 되시죠?”
“네에, 뭐. 들려주신다면 저야 좋죠.”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엄청나게 한가하기도 하고.
나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야기꾼이 재빨리 인형들과 무대를 정리하더니, 가방에서 세 개의 인형을 꺼냈다.
하나는 아까 것보다 좀더 작은 드래곤.
또 하나는 왠지 동네 주민 같은 남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검을 든 여자 모습의 인형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