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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388화 (388/475)

〈 388화 〉 370화 : “기적을 믿으라.”

* * *

이야기꾼의 새 인형극은 무대 단상이 아닌 길바닥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직 이야기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장식을 만든 게 없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인형들이 굉장했으니까.

그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자, 알아서 자리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 이거 그냥 마법 아냐?!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마을에 소년과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년은 평범하고 몸이 약하지만 머리가 좋았고, 소녀는 칼솜씨가 아주 뛰어나고 욕을 잘했죠.”

……어디서 많이 본 인물상이군.

근데 여주인공이 욕을 잘한다는 설정이 꼭 있어야 하나?

나는 뭐,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하니 상관없지만.

“소년은 몸이 약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놀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신과 달리 거의 날아다니는 거나 다름없는 소녀를 동경했죠. 소녀는 또, 소년이 가진 평범함과 다정함에 매료되었고요.”

줄거리를 들려준다고 했던 대로, 이야기꾼은 아까처럼 대사를 읊지 않고 이야기만 쭉 풀었다.

서로 상반된 특성을 가진 소년과 소녀.

소녀는 힘이 부족한 소년을 돌봐주었고, 소년은 다정함이 부족한 소녀가 곤란해질 때마다 대신 나서주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개인적으로 엄청 기시감이 드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먼 산에 둥지를 틀고 있던 드래곤이 쳐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을 죄다 먹어버렸다!

놈은 두 사람의 부모님도 꿀꺽 삼켜버린 후, 유유히 둥지로 돌아간 것이었다.

“보통 괴롭혔다고 하지 않아요?”

“애들이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뭐,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먼 둥지로 날아간 드래곤을 쫓아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실제라면 삼켜진 시점에서 이미 죽었겠지.

그러나 이건 이야기이다.

씹지 않았으니 아직 안 죽은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소녀는 소년을 지키면서 나쁜 사람이나 몬스터를 물리쳤고, 소년은 힘만으론 어쩌지 못하는 때에 지혜를 짜내어 돌파구를 찾았다.

두 사람은 서로 부족한 면을 지탱하며, 함께 여행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에 마법사를 만나기도 하고, 숲의 엘프와 투닥거리기도 하고, 곤란에 처한 다른 마을을 돕기도 했다.

걸맞은 인형이나 배경이 없어서 그냥 말로 때웠지만.

“그리고 끝내주는 계기로 서로 사랑에 빠져서, 불타는 밤을 보내기도 하고요.”

“이거 애들용 아니죠?”

“애들이 이런 거 좋아한다니까요!”

어린애들이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하면서 흔들흔들거리는 의미를 알고 좋아한다고? 진짜로?

그 부모들 때문에 이런 장면 넣는 게 아니고?

……어쨌든 두 사람은 여행을 계속했고, 마침내 드래곤의 둥지에 다다랐다.

이제 드래곤을 물리치기만 하면, 놈이 집어삼킨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

용케 소화되지 않은 채, 놈의 뱃속을 두드리며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소년과 소녀를 향해 입맛을 다시는 드래곤.

두 사람은 여행 중에 만난, 인형이 없어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존재하는 친구들과 함께 드래곤에 맞섰다.

서로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당연히 드래곤이 점점 열세에 몰려갔다.

놈은 결국 소녀의 검에 치명상을 입었는데, 곧 죽어도 엿을 먹이겠다는 심산으로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소녀에게 저주를 걸어버렸다.

그건 점차 광기에 빠져, 살육과 멸망만을 바라는 괴물이 되는 저주였다.

원래도 강했던 소녀는 모험을 거치면서 훨씬 더 강해졌고, 그 때문에 저주를 어쩌지 못하면 세계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단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썩을!!”

아니, 제일 중요한 데에서 끊겨버렸잖아!!

아니 뭐, 시작 전에 아직 완성이 안 되었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으, 죄송해요! 그래도 이건 참……! 진짜 화가 치밀어오르네요!”

“하하, 아니요, 제가 죄송하죠! 이야~ 줄거리만으로도 이렇게 즐겨주시다니, 완성되면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네요!”

이야기꾼이 너털웃음을 짓자, 길바닥에 선 인형들도 하하 웃는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진짜 마법인가?

그건 그렇고, 이야기가 여기서 끊긴 게……

아니, 끊길 수가 있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뒤엔 결말밖에 없는데, 그건 이미 다 정해져 있지 않나?

“보통 드래곤 물리치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걸로 끝나지 않나요? 혹시 드래곤은 진정한 적이 아니었다~ 같은 것도 생각 중이신가요?”

“에이, 그건 인형극으로 하기엔 너무 길죠. 드래곤이 마지막 상대에요. 근데…… 음……”

그는 팔짱을 끼고, 길바닥에 서서 그의 동작을 따라하는 인형들을 보며 말했다.

“여럿 생각해둔 결말이 있는데, 이중에 뭘로 할지 고민 중이에요.”

이런 이야기로 여러 결말을 생각했다고……? 굳이……?

인형이 엄청나니까 평범한 이야기를 써도 잘 팔릴 거 같은데.

뭐, 이야기꾼이니까 도구인 인형보다는 이야기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 거겠지.

“그래서 그런데, 의견 좀 들려주세요. 사실 이것 때문에 줄거리를 들려드린 거거든요.”

“저야 좋죠. 어떤 결말 생각 중이신데요?”

이야기꾼은 소녀 인형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하나는 저주를 이기지 못한 소녀가 괴물이 되고, 그걸 소년이 죽이는 것. 그 후, 소년은 소녀의 뒤를 따라 죽습니다.

또 하나는 소년이 소녀를 막는 걸 포기해서, 결국 세상이 멸망하는 겁니다. 그래도 소년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녀와 함께 있었다며 행복해하죠.

또 하나는 동료가 대신 그 저주를 옮겨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겁니다. 두 사람 덕분에 산 목숨이니 기꺼이 바치겠다~ 뭐 그런 거죠. 두 사람은 그 동료를 기리며 행복을 맞이하고요.”

애들 대상이라며!!

뭐야, 이 피와 눈물이 철철 흐르는 결말들은?!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마지막 하나는 굉장히 흔한 결말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이야기꾼은 또 다른 길을 준비해두었다.

“사랑의 힘이든 뭐든 써서, 소녀가 저주를 이겨내는 거죠. 드래곤은 그걸 보고 욕을 내뱉으며 죽고요. 먹혔던 사람들도 다 구하고, 소년과 소녀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전형적이고 좋네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이야기는 결말에서 완성도가 결정되는 법인데, 이 아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흔한 걸로 평가받긴 싫거든요.”

“아하.”

그럭저럭 알 것 같았다.

강한 인상이 없는 흔한 이야기는 빨리 잊히는 법.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 그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잊혀지는 게 싫은 것이다.

아마 이야기와 주인공 남녀에게 애정이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역시 행복한 결말이 좋지 않나요? 동료도,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행복해지는 결말이요.”

“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분명 관객들도 두 사람의 행복을 바랄 테니까요.”

이야기를 지켜보는 관객은 주인공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며, 그 행보에 따른 감정을 주인공에게 보낸다.

그들이 악한 길을 걸었다면 미워하고, 선한 길이었다면 애정을 품는 것이다.

“물론 정반대를 원하는 사람도 있죠. 그래도 착한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는 게 흔한 결말인 건, 그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슬픈 걸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 않나요? 그 편이 기억에도 오래 남고요.”

“그렇기는 한데…… 엄청 공들여서 짜지 않으면 돈 버는 게 아니라 썩은 달걀 맞을걸요?”

“그것도 그렇네요. 하하하!”

이야기꾼은 또 다시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퉁겼다.

그러자 인형들이 일제히 바닥에 털썩 쓰러져버렸다.

드래곤 인형은 구조 때문에 그냥 제자리에 주저앉았지만.

그런 뒤, 이야기꾼은 소년과 소녀 인형을 양손에 각각 쥐고, 나에게 보여주듯이 앞으로 향했다.

“……!”

인형들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소년은 갈색머리에 파란 눈이, 소녀는 그보다 연하긴 하지만 어쨌든 갈색머리에 붉은끼가 도는 눈이 달려 있었다.

마치 나와 메린처럼.

……조금 전까진 이런 색이 아니었는데?

소년은 검은 머리에, 소녀는 금발이었다.

눈 색도 다른 거였고.

이게 대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깜빡이는 내 귀에,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렸다.

“젊은 친구, 행복한 결말을 원하시나요?”

“네? 어어, 네……. 둘이 무사히 사람들을 구하고, 결혼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꿈꾸시는군요? 이 세상은 아직 살아갈 가치가 있다?”

“네? 어어… 그…렇죠? 요즘 힘든 시기이니까 이야기라도 희망이 가득 넘치는 게 좋지 않아요?”

두 인형에서 각각 나와 메린이 비춰보인 탓일까?

행복한 결말을 어느 때보다도 더더욱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현실의 우리가 그를 맞이할 가망이 거의 없어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더러운 세상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법이에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고향에서의 생활을 버틴 것도, 지금 이 여행을 계속해갈 수 있는 것도 전부 메린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좋은 사람들이 함께해준 덕도 있지만, 역시 메린이 가장 지분이 크지.

애초에 녀석이 없었으면 지금 살아있지도 않았고.

“흠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야기꾼은 인형들을 정리하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엉겁결에 따라 일어나서 그 손을 잡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흐름을 거스를 순 없으니 최고의 행복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두 분께 최선의 행복을 약속하지요.”

“네? 두 분? 저요? 갑자기 그게 무슨……”

“두 분이 함께 인형가게를 찾으십시오.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인형가게……?

아니, 그보다 이 아저씨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람?

인형 얘기하던 거 아니었어?

“기적을 믿으라, 택함을 얻어낸 자야.”

“……?!”

사람의 것이 아닌, 메아리 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염려하지 말라.내가 그 실현을 바라노라.”

“뭐, 당신, 대체 누구,”

의문을 채 입에 담기도 전에, 이야기꾼이 다른 손을 들어 손가락을 퉁겼다.

일순간 빛이 번쩍여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엔,

“허……?”

눈앞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꾼과 악수했던 손은, 주먹을 쥔 채 허공에 들려 있었다.

손 안에 무언가 쥔 채로.

“……아.”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은화 한 닢이 모습을 드러내며 햇빛에 반짝였다.

내가 이야기꾼의 모자에 넣었던 그 돈이 틀림없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분수대에 앉아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에게, 옆에 있던 이야기꾼 못 봤냐고 물어보았다.

“인형극 하고 있었는데, 못 보셨나요?”

“네? 못 봤는데요.”

그 사람의 지인 역시 아무도 못 봤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인형극을 구경할 때부터 바로 근처에 앉아 있었는데.

분수대에 가려질 위치도 아니었는데, 이 두 사람의 눈엔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당신이 온 것도 몰랐네요. 신기하네, 그렇게 이야기에 열중한 것도 아닌데.”

“……하하, 그런 일도 있죠. 아무튼 제가 착각했나봐요. 실례했습니다.”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닥이곤 돌아섰다.

“……”

착각일 리가 있나.

마지막에 그 이야기꾼의 손을 잡은 감촉이 이렇게 생생한데.

­­기적을 믿으라, 택함을 얻어낸 자야.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는데.

기적을 믿으라.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남긴 말이라 그런지, 그 말이 계속해서 마음속을 울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 말고, 일어날 거라 믿으라는 건가?

그러다 안 일어나면 엄청나게 실망할 거 아냐.

­­염려하지 말라.내가 그 실현을 바라노라.

…………말이 쉽지.

작게 한숨을 쉰 후, 제자리에서 광장을 쭉 둘러보았다.

그 존재가 같은 데를 말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 마을의 명물인 인형가게가 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아.”

찾은 거 같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 위층에 간판이 달려 있는데, 작은 사람이 이라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형태였다.

아마 저기를 말한 거겠지?

이층 건물인 것 같은데, 아래층은 다른 가게인가보네.

그냥 좀 살펴만 보려고 가까이 갔더니,

“……엥.”

팻말이 걸려 있었다!

축일도 아니고 예배일도 아닌데 쉰다고?

설마 폐업한 건 아니겠지?

“젊은이, 인형 보러 왔나?”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집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닫힌 가게를 빤히 보고 있는 게 신경이 쓰인 듯했다.

“아, 네. 명물이라고 들어서요.”

“홋홋, 좀 유명하긴 하지. 그럼 내일 꼭 다시 오시게. 오늘은 가족 일이 있어서 쉰다고 했거든.”

그냥 하루만 닫는 거였군.

다행이다. 구경 못하고 가는 줄 알았네.

크게 안도하며, 할머니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그럴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 이만 가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성 바른 젊은이구먼. 홋홋, 그래, 잘 가시게. 좋은 하루 되고.”

다시 한번 더 고개를 숙인 후, 그 자리를 뒤로 하고 여관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 두 시 반.

슐 누나의 그 기세를 생각하면, 메린이 돌아오기까진 조금 더 걸리겠지?

아까 보니 엄청 반가워하던데, 진짜 저녁 전에 돌려 보내줄까 모르겠네.

혹시 돌아왔다가 ‘오늘 언니 집에서 자기로 했다’며 도로 가버리고 그런 건 아니겠지?

가끔 친한 친구 집에서 묵고 그러기도 한다잖아.

난 안 해봤지만.

………모처럼의 휴식인데.

마을 환경은 좋지 않지만, 어쨌든 방에선 아무 신경 안 쓰고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안 그래도 얼마 안 남았는데.

“……”

왠지 울적해졌다.

‘주인 잃은 개 같네.’

시끄러, 수상쩍은 잡귀 자식!

이젠 아예 내 목소리인 척도 안 하고 말야!

대체 정체가 뭐야?!

“……”

하…… 혼자 속으로 뭔 지랄을 떠는 거냐?

아, 그래, 수첩 쓰자.

이럴 때는 딴 생각하면서 시간 보내는 게 최고야.

방금 전에 희한한 일을 겪기도 했으니, 쓸 거 많고 좋네.

배낭에서 수첩과 필기용구들을 챙기고, 터덜터덜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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