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화 〉 371화 : 네가 달래주는 밤
* * *
잉크병을 닫기까지도 메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란 하늘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데도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슐 누나가 억지로 녀석을 잡아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누나가 그럴 사람도 아니고, 메린도 누가 억지로 있게 한다고 얌전히 있을 녀석이 아니니까.
즉, 메린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오는 것이다.
슐 누나와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즐거운 걸까?
고향에 있을 때엔 딱히 가깝게 지낸 것 같진 않았는데.
물론 지금의 메린은 그때와는 완전히 딴 사람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하………”
창가에서 멀어져,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수첩에 여정을 기록하는 건 몸에 밴 일과라서 그럭저럭 할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장비와 도구들을 점검할 의욕도 없다.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의욕이 없는 것도 오랜만이군.
고향에선 억지로 필사라도 했는데.
아니면 괜히 뜰에 나가서 텃밭 쳐다보고 있거나.
물론 텃밭을 멍청히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일은 안 하고 농땡이 친다고 쥐어박았다.
그리고는 양치기 일이나 낚시하고 오라고 날 쫓아냈는데, 희한하게 그때마다 메린을 만났다.
아침에 양을 치러 들판에 가면 녀석이 이미 나와 있고, 오후에 낚시도구를 들고 터벅터벅 숲으로 가면 녀석이 심심하다며 나를 따라오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엔, 며칠 동안은 그 이유 모를 무기력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
………잠깐.
메린을 만나고서 무기력증이 안 왔다는 건, 녀석을 못 봐서 우울했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나?
갑자기 의욕이 없어지던 때가……아, 맞아.
서로 일 때문에 바빠서 얼굴만 비출 때였던 거 같다.
그럼 그때부터 이미 좋아하고 있던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녀석이 비 맞아서 옷 다 젖었을 때 말곤 두근거리거나 얼굴 화끈거린 적이 없었는데.
“………”
언제부터 메린을 좋아했던 걸까?
고향에서 내가 녀석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우리가 그런 사이라는 것에 놀라는 사람은 없는 눈치였다.
아버지도 그렇고.
……안 어울린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냐고 수군댔으면서.
정작 일이 벌어지니까 그럴 줄 알았다고 키득거리고 말야.
정말 맘에 안 들어.
뭐, 그건 어쨌든, 슐 누나는 내가 메린에게 빠져 있어서 2, 3년 전에 나를 좋아했다가 포기했다고 했다.
그럼…… 그때부터 내심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훨씬 더 전부터?
“……하아……”
언제부터 그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게 뭔 상관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녀석이 없으면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며칠을 버텼는데, 이제는 몇 시간도 못 견디네.
메린에게 품은 감정이 그때와는 비교도 못하게 커져서 그런가?
아니면 어제 그 시간만으론, 일주일간 쌓였던 외로움을 다 풀 수 없었던 걸까?
너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었잖아. 책임지라고.
……녀석이 어제 한 말이 떠오른다.
이제 보니 완전 적반하장이었잖아.
지는 훨씬 더 전에 날 이 꼴로 만들었으면서, 나한테 뭔 책임을 물어?
오히려 내가 당한 걸 되갚아준 거 아냐?
……그런 욕구를 가지게 된 건 내 책임이 맞지만.
“……”
책임…….
……난 내 책임 다 졌어.
네가 원하는 대로 어제 너 달래줬으니까.
이제 네 차례야.
너도 책임져.
책임지고, 빨리 돌아와.
와서 나 달래줘.
“메린……”
드러누운 채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녀석이 어제 썼던 베개를 가져와서 얼굴을 묻어보았다.
굉장히 희미한 향기가 느껴지며 가슴이 욱신거렸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그렇게 즐거워?
날 이렇게 혼자 내버려둘 만큼?
난 네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하겠는데.
네 얼굴이 그리워.
네 목소리 듣고 싶어.
네 온기를 느끼고 싶어.
나 외로워.
메린.
“………보고싶어.”
베개를 꽈악 껴안으면서 속삭였다.
그에 파묻힌 눈꺼풀 뒤에서,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떠올라왔다.
아주 조금,
눈가가 촉촉해진 것 같았다.
그 후, 어깨가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나무판자로 짜인 천장이 보이면서, 내가 똑바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나 언제 잔 거지……?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데, 옆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메린이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앉아 있었다.
“잘 잤냐?”
“메린…….”
무심코 벽을 보았다.
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 온 것 같진 않은데 언제 돌아온 거지?
………아니,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메린이 돌아왔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데……!
“몸 어때? 평소보다 더 개운하지?”
“………”
“어라? 표정이 안 좋네. 왜? 별로였어?”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메린.
무언가 대답을 하는 대신, 녀석에게 기대듯이 그 어깨를 깊이 껴안았다.
메린은 잠깐 흠칫한 후, 내 등 뒤로 팔을 두르고 가만히 토닥였다.
“왜 그래? 나쁜 꿈 꿨냐?”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섯 시에 왔는데? 저녁 전에 오라며.”
“늦어. 엄청 늦게 왔잖아. 저녁 전에 오랬다고 진짜 그때까지 있다가 와? 나 혼자 버려두고 노니까 그렇게 좋디?”
“어……”
당황해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그렇겠지. 메린은그저 내 말대로 해주었을 뿐이니까.
녀석이 더 일찍 오길 바랐다면, 내가 한두 시간 뒤에 오라고 했으면 될 일이다.
……알아. 알고 있어.
이건 그냥 투정부리는 거야.
생트집을 잡는 거라고.
그러면 안 돼.
그건 녀석을 부당하게 대하는 거다.
나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
“……미안, 메린. 방금 건 잊어줘. 네 말이 맞아. 너 늦게 온 거 아니야. 나…… 너없는 동안 쓸쓸했거든. 그래서 심통이 좀 났나봐. 미안해.”
“고작 서너 시간 떨어진 정도로? 네가 뭔 애냐?”
“하하, 그러게. ……미안, 조금만 이러고 있어주라.”
생각보다 훨씬 더 그리웠던 모양이다.
녀석의 체취가 느껴지자, 속이 울컥하면서 어깨가 살짝 떨려오고 있었다.
하, 내가 봐도 난 진짜 어이없는 놈이야.
몇 시간 좀 떨어져 있다가 만났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다니.
무슨 꿈을 꾼 것도 아닌데.
진정하자. 메린은 어디 안 가.
의존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안 그럼 부담만 준다고.
크게 숨을 몇 번 내쉰 후, 메린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웃었다.
“잘 다녀왔어? 누나랑 얘기 잘했고?”
“어. 궁금했던 거 다 풀렸어. 안마에 좋은 오일도 받았고. 너 자길래 써봤는데 효과 없냐?”
“엥? 그래?”
그러고보니 어깨가 눌리던 느낌이 꽤 사라진 것 같다.
왠지 눈도 말똥말똥해진 것 같은데.
녀석에게 안마받으면서 또 푹 자버린 모양이다.
“어깨가 좀더 가벼워진 거 같아. 왠지 기운도 솟는 거 같고.”
“그렇지? 아까 보니까 훨씬 더 푹 자는 거 같더라. 저녁 먹을 거냐?”
“음…… 아니. 배 안 고파. 아까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
어쩌면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몰라.
이 방을 떠나기 싫어서.
겨우 맞이한 메린과의 시간을, 더 잃고 싶지 않다.
“넌 배고파? 그럼 내려가고.”
덤덤히 고개를 젓는 메린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지면서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메린은 간지럽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손등을 살며시 감쌌다.
그리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의 뺨을 슬슬 부비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입맞추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마에 짧게, 입술에는 조금 길게.
조금 따뜻한 한숨을 쉬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안도감에 풀어진 남자의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기분 풀렸어?”
“……아니.”
아직 부족해.
고작 이 정도로 다 풀릴 리가 있나.
그간 쌓였던 외로움에 오늘분이 더 얹어졌는데.
“내일 나랑 하루종일 있어주면 풀릴 거 같아.”
“엉? 새삼 뭔 소리야?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있냐?”
“……”
아, 울컥 와버렸다.
안 돼, 아직 말 안 끝났어.
말할 거 다 한 다음에 키스해야지, 안 그러면 감정에 휩쓸려서 까먹을 거야.
“……같이 시장 구경하고 마을 돌아다니고 싶어. 맛있는 건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건 있을 거야.
아니, 없어도 같이 다녀줘. 오늘 네가 나 내팽개쳐서 엄청 외로웠으니까, 그만큼 나랑 놀아줘.
데이트…해줘. 메린.”
데이트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쑥스러워서 그녀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공연히 다리를 내려다보며 입가를 매만지게 되었다.
“푸흡.”
그러자 가까이에서 웃음소리가 나더니, 따스한 손이 내 두 뺨을 감쌌다.
다시 정면을 향하게 된 시선.
메린의 부드러운 미소가 시야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따끈따끈해. 진짜 별 걸 다 쪽팔려한다.”
“……당연한 거 아냐?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하는 건데.”
“엥? 그래? 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네 입에서 데이트란 말이 나온 건 이게 처음이구나.그간 그냥 놀러가기만 했고.”
한 번은 대련하기 싫어서 억지로 팔을 잡아 끌었고, 또 한 번은 끝나기 직전까지 나 스스로 데이트가 아니라고 우겼다.
그 이후론 놀러간 적이 없지?
바닷가 마을을 돌아봤던 건, 길 외우려고 했던 거니 논외로 쳐야 한다.
아무튼 나는 지금에 와서야, 메린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데이트해줄 거야?”
대답을 채근하는 나를 향해, 메린은 여전히 미소지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흔든 뒤,
“할 거야. 해주는 게 아니라.”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같이 다니고, 같이 놀면서 시간 보내자. 내가 해주는 게 아니라, 너랑 같이 하는 거야.”
“………응. 그러자.”
‘해줄게’가 아닌 ‘하자’.
미묘한 차이이지만, 그녀 앞에선 더더욱 낮아지게 되는 나에겐 무척 큰 의미로 다가왔다.
부탁에 응하는 게 아니라, 서로 함께하고 싶다.
동등하게, 나란히 걷고 싶다는 말이었으니까.
“같이, 데이트…하자. 메린.”
“응!”
만족스러운 듯이 환히 웃는 메린.
히히 웃으며 와락 안기는 그녀와 나란히 누워, 그 따스한 온기를 품에 한껏 받았다.
“결혼하자고도 한 놈이, 데이트하자는 게 아니라 해달라고 하냐?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자신감이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냐?”
“아…… 그야, 넌 나한텐 과분한 사람이니까 그렇지.”
“또 그 소리. 야, 난 네 여자라며? 네 거라며? 근데 왜 등을 못 펴냐, 등신아. 딴 놈들 앞에선 잘만 당당해하면서.”
메린은 툭툭 말을 뱉으면서 쿡쿡 내 뺨을 찔렀다.
가슴속까지 푹푹 박히는 듯한 느낌에, 목소리가 절로 땅을 설설 기었다.
“넌…… 귀한 보물이란 말야. 손에 넣었다고 보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애지중지하고 받들어 모시지.”
“아, 그래? 그래서 어제 네가 내 거라고 했던 거냐?”
“………아으.”
오오, 느껴진다.
얼굴이 활활 타는 게 느껴져……!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분위기라는 게 진짜 무서운 거 같아!
게다가 그녀가 ‘와, 더 따끈해졌다’라는 소리를 귓가에서 해대니까 더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으으, 죽여줘어…….
“그래서 뭐가 맞는 거야? 내가 네 거인 거야, 아니면 네가 내 거인 거냐?”
“……둘 다가 아닐까요?”
“으응……야, 그냥 하나만 하자. 내가 네 거 할래. 그게 더 좋아.”
“………싫어. 나도 네 거 할 거야. 그래야 공평하지.”
그리고 나도, 내가 메린의 것이라는 쪽이 더 좋다.
메린이 나에게 주는 애정이, 내가 원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녀 자신의 의지로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감정을 보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메린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건 아니다.
메린은 내 거야. 누구도 넘보지 못해.
건드는 놈은 죄다 손모가지 자르고 대가리 깨버릴 거다.
나는 그냥……메린의 사랑을 받는 게 조금 더 기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냐?
표현이 극단적이어서 그렇지, 어쨌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인 것이다.
“그래? 그럼 너 내 거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지?”
“……”
이렇게 물건 취급을 하는 게 아니라!
물론 메린이 날 막 취급하진 않…기는 개뿔, 이미몇 번 했잖아!!
지금도 키득키득 웃는 게 불길하다고!
대답도 안 했는데 벌써 손짓이 영 좋지 않고 말이지?!
“너, 말야……!”
“해주고 싶어. 괜찮지? 너 내 거잖아. 그리고 사실……”
녀석이 내 귀에 바싹 입을 대더니 한 마디 말을 흘려넣었다.
허리춤을 매만지는 손길도, 숨결 섞인 속삭임이 주는 간지러움도 아닌, 그 말 한 마디가 지닌 의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버렸다.
“구, 구구, 굳이 안 그래도 돼! 그, 그냥 쉬어……!”
“싫어. 해주고 싶다고 했잖아.”
“읏, 그냥 나 건드리고, 큭, 싶은 게 아니고……?!”
“그것도 있고~”
재차 항의하려고 벌린 입이 막히고, 거부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혀를 감싼다.
몸이 돌려지면서, 그녀의 얼굴 너머로 천장이 보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메린이 내 위에 올라탔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아직 선명한 그날의 기억이 번쩍였다.
“윽……!”
두려움. 비참함. 절망감.
그리고 순수한 고통.
그 감정과 감각이 한데 뭉쳐서 생긴 공포.
뼛속 깊이 새겨졌던 그 감정이 슬쩍 고개를 내밀며 몸을 바짝 굳혔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더해지며 손톱이 세워졌다.
허벅지를 살살 쓸던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너 안 해쳐.”
“아, 알아. 나도 알아. 알고, 있는데.”
아는데, 몸이 믿지 않는다.
머리가 아무리 ‘그때와는 다른 상황이다’고 알려도, 깊숙이 박혀버린 공포를 쓸데없이 되새기며 벌벌 떠는 것이다.
……익숙하지만,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증세이다.
“으, 미, 미안.”
“네가 왜 사과하냐? 애초에 내가 원인인데.”
메린은 눈썹을 약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픔과 미안함이 뒤섞인 슬픈 웃음을 보니, 가슴이 아리는 듯했다.
“괜찮아.”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고, 이어서 어깨를 쓸며 토닥인다.
미세하게 떨리는 숨소리를,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감싸며 안에 품는다.
몇 번이고 울리는 작은 물소리. 입술을 뗄 때마다 살짝 늘어지는 투명한 실.
머릿속이 흐려지면서,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두근거린다.
“괜찮아.”
……차츰차츰, 긴장이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메린…….”
“응, 카엘.괜찮아.”
아직 뻣뻣한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었다.
손톱을 바짝 세웠던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어깨를 만질 때 그녀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튜닉이 잘 막아준 듯했다.
그 안도감이 속을 누그러뜨린 걸까?
이내 빠르게 긴장이 풀어지며, 눅진한 쾌락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배와 허리, 이윽고 더 아래를 더듬고 쓰다듬는 손길에, 몸이 살짝 떨리면서 얕은 숨이 새어나왔다.
“하…메린… 좋긴 한데…읏……!”
“좋아? 히히, 나도 좋아. 지금 네 표정, 엄청 좋아. 심장 쪽이 막 꾸욱거려. 히힛, 더 봐도 되지? 그치? 넌 내 거니까. 내가 보고 싶은 만큼 봐도 되지?”
그녀가 달뜬 목소리로 속삭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엷게 떠올라 있는 고혹적인 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다음날 아침.
묽은 수프를 먹으며, 어제처럼 여관을 찾아온 로나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근데 있잖아요, 카엘 님.”
“엉?”
찻잔을 기울이던 로나가, 별안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메린 님이 손으로 뭔가 하셨나요? 손 힐끔거리다가 얼굴 빨개지고, 닿을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하시네요? 웃기니까 그냥 두고 보려 했는데요, 왠지 이유를 알아둬야 한다 싶네요. 왜 그러시는 거에요?”
“………”
이건 말 못해. 죽어도 못해.
아무리 알 거 다 아는 애늙은이 사제님이라고 해도 절대 말해줄 수 없어!!
……라고 굳게 다짐했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아, 별 거 아냐.”
이 자리엔 나 말고도 당사자가, 그것도 수치 따위 모르는 천연 야생아가 있었으니까!
“내가 손으로 대따,”
“상쾌한 아침부터 무슨 망발이야, 임마, 밥이나 처먹어!!”
“엥? 손으로요? 왜요?”
아니, 이 새끼는 또 왜 알아먹는 거지?
교단에선 대체 애한테 무엇을 어디까지 가르치는 거야?!
“왜냐고? 내가 생,”
“밥 처먹으라고, 새끼들아!!”
……참으로 상쾌하고 힘찬 아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