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4화 〉 376화 : 조금 특별한 인형사 (4)
* * *
땅 위로 뽈록 솟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머리들을 세어보았다.
하나, 셋, 여섯, 아홉.
음음, 다 있군.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도 수고해준 늑대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매번 고마워~”
“웡!”
“히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푹신함……싱그러운 흙과 풀냄새……
아아, 왠지 마음이 치유되는 거 같아…….
정령이라서 그런가? 웬만한 이불보다도 더 푹신한 거 같아.
게다가 지금은 늑대의 몸집도 커서, 털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하는 꼴이다.
그 상태로 껴안으면서 쓰다듬으니, 이내 몸이 포근포근 풀어지면서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헛. 큰일날 뻔했네. 오늘은 여기까지.”
귀가 쳐지면서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바닥에 엎어진 채 벌벌 떨고 있는 금발머리에게 다가갔다.
다른 놈들이 하나, 둘 수면제를 먹고 쓰러지는 동안, 팔다리가 꽁꽁 묶이던 노란 대가리.
지금도 머리만 바깥에 내놓고 땅에 심긴 놈들과 달리,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응?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굳이 소문나야 돼요?”
“그래야 지랄하는 놈이 안 생기지. 나랑 메린에게 잘 해줬던 고향 누나가 여기 치료사랑 결혼했거든.”
놈의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기름과 진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잡았다.
미끌거리면서 축축한 게, 상당히 불쾌한 감촉이다.
“근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잖아. 따박~따박 쫑알대는 게 거슬렸다고. 나대면 어떻게 되는지 교훈 알려주자고 하던 거, 너도 듣지 않았냐?”
“아하, 메린 누나 얘기만으로 빡친 게 아니었구나. 그래도 멱 따려 들면 안 되죠. 맨날 규칙 지켜라, 법 지키라고 잔소리 깠으면서 본인이 어기려고 해요?”
그간 속으로 칼을 갈아왔나, 위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형이 좀 세지긴 했지만, 검 없이는 그냥 일반인이나 다름없잖아요. 아무리 빡쳐도 그렇지, 나처럼 다른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단도 들고 달려들 생각을 해요? 이거 누나랑 사제님이 들으면 기가 막혀서 정신 놓겠네. 볼 만하겠는데?”
으아악, 안 돼! 알려지면 죽을 거야!!
순식간에 몸 안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야야야, 안 돼, 말하지 마. 나 죽어!”
“설마.”
“진짜 죽는다고, 임마! 로나는 저번처럼 말로 엄청 쪼아댈 거고, 메린은 ‘네가 몸이 근질거렸구나’ 같은 소리 지껄이면서 목검으로 존나 팰 거야, 뻔해! 몸은 기도로 고쳐도 마음이 박살나는 건 어떻게 못한다고!”
로나는 내가 왕가의 보검을 훔치는 일에 꼈었다는 걸 알았을 때 무지하게 잔소리를 퍼부었었다.
직접 칼을 맞대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런데 이번엔 내가 손수 사지로 뛰어들었다가 말았잖아!
으으, 싫어, 귀에 딱지가 앉아내릴 때까지 혼날 거야……!
메린도 존나 패면서 잔소리할 거고!
아니, 어쩌면 메린 녀석이 앞으론 날 혼자 안 두려고 할지도 모른다.
계속 옆에서 감시할지도 몰라!
아무리 메린과 하루종일 같이 있는 게 좋다고 해도, 밀착감시나 감금을 당하고 싶진 않은걸?
그러나 위슨은 내 위기감을 조금도 전달받지 못했는지,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이 어깨만 으쓱였다.
“뭐 어때요, 좀전에도 내가 안 껴들었으면 죽었을 텐데. 그냥 그 위기가 좀 늦게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싫어!”
“싫으면 별 수 있고? 아무튼 그 놈은 어쩔 거에요?”
녀석이 턱으로 금발 놈을 가리켰다.
우리가 말을 나누는 동안 얼이 나가 있던 놈은, 다시 자신의 차례가 된 걸 깨닫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음…… 역시 죽일래.”
“어, 진짜로?”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위슨.
당사자인 금발 놈은 아예 거품을 물며 정신 나간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뭐든지 할게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뭐든지 하겠다?
뭐든지……?
……아~ 안 되지, 안 돼.정신 차려라, 카엘아.
개보다 못하긴 해도, 이 새끼도 일단은 사람이야.
입장이 불리한 사람을 내키는 대로 굴리면서 괴롭히는 건,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되는 짓이잖아.
그러면 이놈들과 똑같이 개보다도 못한 놈이 될 뿐이다.
잘못하면 버릇 들지도 모르고.
“응, 그러니까 내가 잘라야지. 직접 자르게 하는 건 너무 심해.”
“뭘요? 목젖?”
“아니, 알.”
놈의 가랑이를 가리키며 대답하자, 두 사람의 표정이 일순 굳으면서 각기 다른 시선을 던졌다.
정신이 아픈 사람을 보는 듯한 눈초리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초점이 나가 있는 눈길이 각각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음, 역시 온도차가 좀 있군.
그나저나 처음엔 저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이 되게 거슬렸는데, 요즘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면 좀 허전할 거 같아.
하하,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하다니까.
“농담이에요?”
“아니.”
“해맑게 웃으면서 할 소리가 아닌데요. 그러니까 미친놈 소리 듣지. 어쨌든 뭐, 고환 잘라서 죽인다고요?”
“아니, 안 죽일 거야. 마을 밖에서 만난 도적도 아니고, 말만 지껄이고 직접 하진 않았잖아. 화염병 던지지도 못했고. 죽이는 건 정당하지 않아.”
과하게 거둔 값은 또 다른 빚이 될 뿐.
언젠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현생에서 갚지 않았다면 사후에, 또는 저주가 되어 그 핏줄로 스며든다.
사람끼리 동등한 대가를 주고받는 것.
그것은 가장 바탕이 되는 세상의 법칙이자 대전제이다.
대가를 가늠하는 천칭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창조주의 뜻이래. 성서에 써 있더라.”
“그걸 아는 사람이 멱 따려고 한 거에요?”
“으으, 그치만 너무 열받았는걸!! 이 새끼가… 이 새끼가 누나랑 메린을 가지고……!! 아아악, 씨발, 도로 열 올랐잖아!!”
엎어져 있는 금발 놈의 뒤로 건너가서 등을 세게 걷어찼다.
배는 잘못하면 죽으니까.
“……후, 아무튼 숨통은 못 끊으니, 대신 이 새끼의 생식능력을 죽여버리려고. 그래야 교훈이 되지 않겠냐? 함부로…… 특히 남의 여자를 가지고 입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덤으로 이 마을도 좀더 평화로워질 거다.
고자가 되면 보통 기운이 없어지니까.
여자 종업원들의 엉덩이도 더는 괴롭힘 받지 않겠지.
모두가 기뻐할 만한 앞날이건만, 금발 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안돼요안돼요, 안 돼요, 그것만은 제발……! 선생님, 제발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뭐든지 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며? 죽는 것보다 고자 되는 게 더 싫냐?”
“사내 구실을 못하면 살아서 뭣하겠어요?! 제발, 이렇게 빌게요, 제 거시기를 살려주세요!! 차라리 손을 잘라요!!”
뭐, 어느 누가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걸 좋아하겠는가?
그 피학성애 변태도, 귀가 깎이는 건 싫어하겠지.
……근데 살아서 뭐하냐니, 이 새끼는 허리 놀리는 것 말곤 사는 목적이 없나?
“그럼 더더욱 해야지.”
“안 돼애애애!!”
금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단도의 날을 살피며 말했다.
“위슨, 상처 치료약 같은 것도 있어?”
“지혈가루밖에 없는데요.”
“그거면 됐지, 뭐. 나머지는 브랜 씨…… 치료사가 하면 되니까.”
물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상세하게 전할 생각이다.
안 그러면 외지인이 마을 사람을 해쳤다며, 나랑 같은 고향인 슐 누나가 곤란해질 테니까.
나는 바닥을 구르는 화염병을 주워, 안에 든 기름을 땅에 붓고 불을 붙였다.
그런 뒤, 불 위에 칼날을 대어 달구면서 위슨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녀석은 내 시선을 받고서 늑대를 쳐다보았고, 바닥에 누워서 하품하던 늑대가 일어나서 놈에게 슬슬 다가갔다.
“히, 히이이?!”
금발 놈은 늑대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늑대가 자신의 가슴을 발로 지그시 누르고, 바지를 홱 뜯어버리는데도 제대로 된 신음 하나 내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무리도 아니지.
지금 늑대는 평소와 달리, 사람 머리는 단숨에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 정도로 크니까 말야.
늑대가 계속해서 놈을 빤히 쳐다보는 동안, 위슨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놈의 속옷을 쭉 내려버렸다.
그런 다음, 놈의 다리 한쪽을 깔고 앉으면서 투덜거렸다.
“어휴, 오자마자 뭔 꼴을 보는 거야?”
“교육의 현장.”
“이딴 게 교육이에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켜는 위슨.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칼날을 하늘에 비추어 보며 대답했다.
“함부로 입 놀리지 말 것. 생각없이 행동하지 말 것. 그리고, 내 사람을 건들면 누구든 뒤진다는 걸 알려주고 있잖아. 교육이지.”
메린만이 아니야.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 전부가 소중하다.
고향에 있는 몇몇 사람도,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도.
특히나 이 여정에 함께해주고 있는 세 사람에겐 더더욱 고마울 뿐이다.
하는 거 보면 돌아버리겠지만.
그 중에 누구든, 내 눈과 귀가 닿는 곳에서 곤란에 처한다면 발 벗고 나설 것이다.
괴롭히는 놈이 있으면 반드시 조져버릴 거야.
세상 어디에 있건,
찾아가서 되갚아줄 거다.
“알겠냐, 노란 대가리? 네가 좋아하는 교훈이다.”
놈에게 다시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벌건 기운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열을 품고 있는 칼날.
그 열기를 느낀 건지, 놈이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 으아아아, 아아아아……!!”
“아, 나 이거 전에도 한 번 해봤어. 그러니 너무 걱정 마. 깔끔하게 알만 잘라줄게.”
내가 들어도 안심이 전혀 되지 않을 말을 건네며 손을 움직였다.
누구도 기웃거리지 않는 좁은 골목 안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가랑이가 가벼워진 금발 놈을 치료사집에 데려다주고, 슐 누나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히 전했으니, 브랜도 누나에게 알리거나 하지 않겠지.
어쩌면‘치료사’와 ‘아내를 모욕당한 남편’ 중 뭘 더 우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뒤, 후련해진 마음을 안고 술집으로 향했다.
기운도 썼겠다, 위슨이 무사히 온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돼지고기 구이를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종업원이 음료 두 잔과 노릇하게 구워진 돼지 다리 한쪽을 가져왔다.
고기 위엔 걸쭉한 소스가 끼얹어져 있어, 안 그래도 기름진 고기에 윤기를 더하고 있다.
어제 먹은 것들도 그렇고, 왠지 여관보다 요리 더 잘하는 거 같아.
나는 위슨에게 고기를 덜어주며 물었다.
“그간 어땠어? 사제님들도 있었으니 괜찮았을 거 같긴 한데.”
“괜찮긴요. 진땀 뺀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위슨이 이야기를 풀었는데, 생각보다 공작령까지의 길이 험했던 듯했다.
도중에 몬스터를 만나는 건 물론이고, 식량배급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
갑자기 길이 끊겨서 무리가 나뉘어진 적도 있었다고 말하며, 위슨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뭐, 그래도 하나도 안 죽고 도착했지만요.”
“다행이네. 그래서 아까 온 거고? 고생했다.”
“아뇨, 어제 왔어요. 점심쯤이었을걸요?”
“뭐? 근데 왜 안 찾아왔어?”
“못 간 거죠~”
위슨은 푸념하듯 말끝을 늘어뜨리면서 사과즙을 홀짝였다.
그런 뒤, 또 다시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조사한다면서 초소에 붙잡혀 있었거든요.”
“초소?! 왜?!”
“오크 대장 잡아서.”
“………”
대장?
설마 이 녀석이……?
그리고 이어진 위슨의 설명에, 나는 그저 헛웃음만 켤 뿐이었다.
성문에 도착하고서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만 위슨의 차례에서 문이 닫혀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이유를 물었더니, ‘오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서 제한적으로만 열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잡았어요.”
“……”
마침 열도 받았겠다, 누구 볼 사람도 없으니 시원하게 쓸어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위슨은, 주문을 적은 두루마리와 물약을 펑펑 써서 오크들을 죄다 끝장내버린 것이었다!
“두루마리? 어…… 혹시 벼락도 썼냐?”
“당연하죠. 오크를 벼락에 굽는 건 상식이라고요.”
“어느 세상의 상식이냐?”
벼락이라니, 나 참, 어제 뜬금없이 천둥이 울린 것도 이 녀석 짓이었구만?
숲 몽땅 타버린 거 아냐?
여하간 신나게 오크를 털어버린 후, 위슨은 바싹 타버린 대장의 시체를 위병들 앞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오다가 발견한 거라고 뻥을 친 결과, 그들이 사실여부를 확인할 때까지 초소에서 기다리게 된 것이었다.
“해질 때 나왔는데, 형이랑 누나는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거 같아서 안 찾아갔어요. 그렇다고 신전에 묵기도 좀 거북하니 그냥 딴 데서 묵었죠.”
오늘도 거기 묵을 생각이다.
녀석은 그렇게 덧붙이면서 고기를 한 입 뜯어먹었다.
“형은 별일 없었어요?”
“있었지.”
녀석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짧게 이야기해주었다.
숲에서 만난 나무 몬스터나 용사와 관련된 괴상한 소문, 여기 광장에서 봤던 신기한 인형극, 그리고 기묘한 인형가게 주인까지 전부.
위슨은 그중에서, 인형가게의 은빛머리 여주인에게 가장 관심이 동한 듯했다.
“안 그래도 이 마을에 희한한 기운이 있더라고요. 할 것도 없겠다, 그게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잘됐네. 카엘 형, 인형가게 가신다고 했죠?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되지. 근데 왜? 그 사람이 수상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위슨이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입을 열었다.
“형은 알았어요? 인형이 액받이로도 쓰인다는 거.”
“어. 액막이 의식하잖아.”
“그런 거 안 하는데요.”
“하던데?”
고향 마을에선 갓난아기가 첫 돌을 맞았을 때, 그리고 아이의 다섯 살 생일 때에 자그마한 액막이 의식을 치렀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넣어서 인형을 만들고, 거기에 아이의 이름을 써서 붙인 다음, 생일 전날에 숲에 묻어둔다.
그리고 다음날, 즉 아이의 생일에 그 인형을 활활 태우고 잿가루를 숲에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숲 속 깊은 곳의 존재들이 아이를 노리지 않는다나?
“신년축제 때는 아예 광장에 커다란 불 피우고, 사람들이 각자 인형 가져와서 태워. 소원을 빈 종이도 태우고. 그 잿가루가 거름이 되어서 숲이 울창한 거 아닌지 몰라.”
“아니, 우리 섬에서도 안 하는 걸 왜 거기서 하고 있어요? 진짜 뭐하는 동네야? 아무튼 딴 데선 안 해요. 정령들이 바깥 세상의 축제 모습 알려줄 때, 인형 태운다는 얘긴 단 한 마디도 못 들었다고요.”
“그래? 의외이네. 성서에도 적혀 있던데.”
“아무튼일반 사람은 인형을 장난감으로 보지, 액받이로는 안 봐요.”
그러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면, 그 목적으로 사용해서 효과를 봐야 한다.
인형이 주인을 대신할 수 있음을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그 사실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형이 산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봤다면서요? 말 한 마디 안 꺼냈는데.
틀림없어요. 그 인형가게 주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음……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진 않던데.”
“수상한 사람이 죄다 나쁜 건 아니잖아요? 뭐, 이따 가보면 알겠죠.”
어깨를 으쓱인 후, 위슨은 사과즙이 담긴 잔을 기울였다.
점심을 먹은 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인형가게를 찾아갔다.
어쨌든 점심 때는 지났으니 괜찮겠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면, 인형들을 구경하면서 기다리면 될 일이고.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어제처럼 계단을 올라가 이라 적힌 문을 열었다.
오늘도 방울 소리 대신, 문이 끼이익거리며 우리의 방문을 알리려는 순간,
“이 결혼 반대야!!”
문틈으로 뜬금없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깜짝 놀라서 얼어 있는 사이에 문이 활짝 열려버렸고, 이내 은빛머리 여인이 손을 휘적거리며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신성한 결혼식을 방해하다니! 누구길래 이런 행패를 부립니까?!’
‘나? 저 사람 딸인데요! 아빠, 너무해!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결혼을 하려고 해?!’”
혼자 주절주절 떠들면서.
“……”
“‘딸이라니, 이게 대체’…………”
아마 열린 문으로 바람이라도 들어간 것이리라.
인형을 내려다보던 여주인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
“………”
조용히 문을 닫고, 계단의 맨 아래칸에 걸터앉았다.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지?”
“그러네요. 불쌍한 사람이네.”
계단까지도 쿵쿵 울리는 진동.
귀를 틀어막은 손을 뚫고 들어오는 새된 절규.
우리는 인형이 만들던 그 작은 세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