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화 〉 외전 8) 우린 사람이니까 (Side : Tiech) (1)
* * *
녹음이 드리워진 여름의 숲.
조각구름 하나 뜨지 않은 파란 하늘 아래엔, 한껏 물오른 초록 잎들이 하늘하늘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빽빽하게 자리한 이웃 잎사귀들 틈을 지나는 바람에게.
힘차게 가지를 박차며 날아가는 무례한 숲새에게.
그리고 하얀 대지를 붉게 물들인 고깃덩어리들을 향해.
아니, 어쩌면 인사가 아니라 비웃음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기력마저 전부 써버린 남자가 어리석다고.
가지각색의 시체들 사이에 주저앉아, 나무줄기에 기댄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게 한심하다고.
‘아니, 잔소리야.’
거봐라,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그렇게 따지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티치는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본인은 너무하다고 성을 내겠지만, 마지막에 떠올리는 모습으론 그리 나쁘지 않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본 것보다는 몇 백배는 더 낫다.
이른 아침, 문 밖을 나서는 자신을 붙잡고서 가지 말라고 울던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이제 막 첫 돌을 넘긴 둘째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차라리 도망치자고 호소하던 목소리보다 훨씬 듣기도 좋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티치는 붉게 물든 시야로 숲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흰 눈의 싸늘함으로 의식을 붙잡으면서, 몇 시간 전의 일을 되새겨보았다.
‘생각났다.’
입꼬리를 실룩이는 그의 머릿속에, 그 찰나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못 떠나, 클로다. 마을을 위해 싸우는 건 내 의무야. 알잖아.
알아, 나도 알아! 그래도 이건 아니야! 자경단원도 원하면 가족과 같이 피난소로 갈 수 있는데! 왜 당신만……!!
난 빠져선 안 돼. 내가 없으면 자경단이 제대로 싸우지 못해. 난 지휘관이야. 그게 유사시의 내 역할이라고. 너도 알잖아, 클로다. 알면서 자꾸 이럴 거야?
흐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가.
그러기에 그는 더더욱 무정하게 말해야 했다.
난 옛적에 각오했어. 나와 결혼할 때 너도 각오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지켜, 클로다.
티치…….
애들과 피난소로 가. 나 기다리지 말고.
티치이이!!
자신을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의 뜻대로 마을과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수 없어. 그래서는 안 돼.’
그녀를 어르듯이 재차 속삭인다.
쓰라리는 아픔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발톱에 긁힌 상처에서 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그는 환상 속의 아내에게 전했다.
‘사범인 나는, 너를 우선할 수 없어.’
그는 전장에 서야 한다.
마을을 지키기 위한 병력, 자경단원들을 거느리고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이 검술 사범인 그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앞에 서면서도 몸을 사려야 하건만.
퇴각하는 도중, 제자…… 자경단원 하나의 목숨이 위험해진 걸 본 순간, 몸을 던져서 그를 지키고 부상을 입고 말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전부 후퇴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겠다고 전장에 남기까지 했다.
마을의 유일한 지휘관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선택이었다.
어째서 그랬던 걸까?
자신의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숲 속에서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일단 지친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무엇에 지치고 신물이 난 것이란 말인가?
연이은 싸움?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전황?
하나 둘 죽어가는 제자들?
그것도 아니면, 남편이나 자식을 잃고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에 지친 걸까?
어쩌면 그 전부인지도 모른다.
그 광경들을 묵묵히 마음속에 묻어버리고 나아가기엔, 서른도 안 된 나이는 너무 젊었다.
‘네가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메린.
그 아이가 남아있었다면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에 맞서, 지금처럼 버티는 게 아니라 아예 물리칠 수 있었을 터.
그 덕에 하루이틀의 틈을 얻어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자경단원들도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축 쳐진 팔이 아니라 원기충만한 상태로 검을 휘둘렀겠지.
나날이 사기(??)가 떨어지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메린은 이곳에 없다.
촌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마을이 내쫓아버렸으니까.
실제로 데려간 건 용사가 된 카엘이지만, 메린이 나간 것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으니 마을이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의 이 상황은 그 어리석음의 결실이다.
숲과 마을을 흐르는 피와 눈물, 시시각각 다가오는 멸망의 그림자는 그들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러할지라도 그들에겐 죄가 없다.
그들은 그저 계기를 만들고 길을 텄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멸망의 길을 택하고 받아들인 것은,
공들여 벼려낸 최강의 검을 놓아버린 것은,
다름아닌 티치 플린, 그 자신이다.
‘너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가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다면,
메린을 쫓아내려는 목소리를 일축했다면,
메린의 필요성을 용사와 그 아이 자신에게 피력했더라면,
메린은 마을에 남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뒤를 이어 사범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훨씬 전부터, 그래야 했다.
‘네가 되었어야 했어.’
메린이 아니라 자신이 사범의 직책을 이은 순간부터, 이 마을의 운명은 이미 기울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죠? 할아버지.’
속삭임을 실은 숨결을 내보내는 그의 눈이, 먼 과거를 더듬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검법과 기술을 가르치는 자.
그를 검술 사범이라 칭한다.
그러나 이곳, 숲에 삼켜진 마을인 놋지빌에서는 조금 다르다.
품고 있는 의미가 다르기에, 맡겨지는 의무와 그 범위도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다.
놋지빌의 검술 사범은 두 의무를 가진다.
하나는 사범의 의무.
그러나 명칭과 달리, 가르치는 것은 응당 검만이 아니다.
창, 둔기, 도끼, 심지어 지팡이까지, 전반적인 무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어떠한 작전에도 수월히 응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가, 유사시에 요구되는 지휘관의 의무이다.
자경단장의 손으론 대처할 수 없는 큰 싸움이 있을 시, 적을 물리칠 전략을 짜고 작전을 세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검술 사범은 마을의 촌장만큼이나 큰 권위를 가지며, 마을의 안전과 관련된 사항에선 촌장보다도 더 높은 발언권을 발휘한다.
티치의 조부, 전대 검술 사범이 메린을 들일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일부터 메린 소더가 검을 배울 것이다.
촌장집에서 돌아온 조부가 그 말을 전한 순간, 열 살의 티치는 조부가 드디어 노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간 숲을 쏘다녀서 잡기 번거로웠는데, 마침 에스트렐이 붙잡았다는구나. 좋은 기회야.”
“진짜로 가르치시려고요?! 주먹으로 멧돼지 뱃가죽 뚫은 애잖아요! 날뛰면 어쩌시려고……!”
정수리에 솟은 혹을 매만지면서 티치가 기겁하자, 조부는 서늘히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 겉이 같다고 다 사람이 아니다, 티치. 본능에 맡겨 손발을 휘두르는 것이 어찌 사람일까? 이빨만 안 썼지, ‘그것’은 털 없는 짐승 새끼다. 내가 아무리 늙었다 한들, 짐승 새끼 하나 못 당하겠느냐?”
“어…… 그럼 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사람이 써도 위험하잖아요.”
“아니, 그러기에 더더욱 검을 쥐어야 해.”
단언하는 조부의 눈은 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티치는 조부가 검을 지도하는 스승이 아닌, 마을의 안전을 지키는 자로서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통 사람은 검을 쥠으로써 힘을 얻지. 그러나 ‘그것’에겐 오히려 족쇄가 될 거야.”
“음……”
“생각해보거라, 티치. 짐승이 이빨이나 발톱, 둘 중 하나만 써서 사냥한다면 성공할 수 있겠느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손자에게, 조부는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티치는 흠칫 놀란 뒤, 약간 뜸을 들이고서 대답했다.
“이빨만 쓴다면 먹이를 움켜쥘 수 없고, 발톱만으로는 숨통을 끊기 어려워서요.”
“그래. 그러기에 내가 ‘그것’에게 검을 쥐려 한다. 온 몸으로 뿜어내는 힘을, 오로지 검끝으로만 발휘하게 하는 거지. 그렇게 놈을 사람으로 만들 게다. 더 늦기 전에 말이야.”
“음…… 족쇄라는 건 알겠어요. 근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짐승이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지금의 너에겐 어려울 테지. 그러니 지금은 기억만 해두거라.”
조부는 여전히 엄한 눈으로, 그러나 다정한 손길로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티치,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다. 너나 나는 물론이고, 누구든 태어났을 때엔 모두 털 없는 짐승이야. 우리는 사람으로 살도록 배웠기에 사람이 된 거란다.”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서서 걷도록, 울부짖음이 아닌 혀를 굴려서 말을 만들도록 배웠다.
손가락을 움직여서 막대를 쥐고, 그 막대로 나무를 두드려서 열매를 따거나 불씨를 일으키는 가르침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본능을 어느 정도 억눌러야 함을 깨우쳤다.
“우리는 본능을 제어할 수 있기에 사람이라 불리는 게다. ‘그것’은 비록 짐승으로 전락했으나, 일단은 사람의 배에서 나온 데다 어린 새끼이니 아직 기회가 있을 터. 에스트렐이 놈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건 너도 들었지?”
“네, 게시판 봤어요. 그 놈 관련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에스트렐 씨에게 알리라고도 써 있었어요.”
“그 눈 좋은 외부인이 공연히 나섰을 리가 없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어.”
“음…… 근데 할아버지,”
티치는 약간 머뭇거린 끝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검이랑 본능이랑 무슨 상관인지…… 아니, 본능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허허,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란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 본능이다. 그러나 검을 배우면,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 상대의 호흡을 재게 되지.”
“……아, 알았어요. 기다릴 줄 알게 되는 거군요.”
티치의 대답에, 조부는 흡족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내를 배우게 될 게다.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조부의 얼굴에 또 다시 서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찟한 느낌에, 티치는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폈다.
“복종.”
“……”
“허허,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큰 교훈을 배우게 될 게야.”
주먹으로 멧돼지 뱃가죽을 뚫어버리는 ‘짐승’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칠 것이다.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자신하는 조부의 모습에, 티치는 그 ‘짐승’이 무척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럼 할아버지, 만약 그 놈이 배우지 못하면요?”
그 ‘짐승’이 만약 사람으로 돌아갈 기회를 이미 잃어버린 뒤라면?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검의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활이나 단창 등의 다른 무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그 의미를 담은 질문에, 조부는 서늘하게 웃는 그대로,
“죽일 게다.”
무정하게 선언했다.
“놈이 더 자라서 힘을 붙이면 마을에 위협이 될 터. 끝까지 짐승으로 남는다면, 미리 싹을 뽑아버려야지.”
한 달.그것이 조부가 세운 기한이었다.
만약 에스트렐이 그 전에 손을 뗀다면, 예정대로 한 달 뒤에 놈이 사람의 가능성이 있는지 판정할 것이다.
그러나 혹 한 달 뒤에도 그 외부인이 ‘짐승’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가 손을 떼는 날이 ‘짐승’의 운명을 가리는 날이 되리라.
“‘그것’은 사람의 가죽을 쓴 짐승이다. 놈을 대할 땐 이를 항시 명심해라.”
“……네.”
조부의 신신당부에, 티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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