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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04화 (404/475)

〈 404화 〉 380화 : 귀성길 (1)

* * *

과일과 귀리빵으로 점심을 때운 후, 기묘한 시선을 던지는 할머니와 두 사춘기 꼬마를 무시하며 말을 끌고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려, 마침내 숲을 빠져나와 초원으로 들어섰다.

하얀 구름이 한 조각 떠가는 푸른 하늘.

그 아래엔 한껏 기세가 오른 풀들로 이루어진 초록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

뜨거운 바람만 아니었으면 기분 좋게 질주할 수 있었을 텐데.

마주쳐오는 바람을 맞으니, 땀이 식긴커녕 오히려 더 배는 것 같았다.

정말 띄엄띄엄 있는 나무 그늘에서 숨을 돌려도, 숲만큼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찌나 더운지, 해가 진 뒤에도 그 열기가 다 식지 않고 땅에 남아있을 정도였다.

천막을 치는 정도로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데, 불가에 있는 사람은 아주 죽을 맛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한창 저녁을 만들고 있는 메린의 머리 위엔 위슨의 거북이가 올려져 있었다.

물의 정령인 거북이의 힘을 빌려, 몸의 열기를 식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 근처에선 블루벨이 모닥불에 꽂은 꼬치들을 살피고 있는데, 얼굴에 땀 한 방울도 흐르지 않고 있다.

엘프는 추위랑 더위를 타지 않는다더니…… 역시 사기야.

야채 껍질도 저절로 벗길 수 있고, 진짜 부러워 죽겠다!

참고로 블루벨은 고향숲에서, 자신의 두 보호자에게 굉장히 훌륭한 ‘싱거운 수프’를 대접한 듯했다.

그 보답이라면서 블루벨을 통해 보낸 물자 중에 소금이 있었는데, 꽤 모자란 모양이라면서 한 포대나 보내온 것이었다!

아마 싱겁게 만들고선 ‘나한테 배운 대로 간 맞춘 것’이라는 개소리를 한 거겠지.

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와, 근데 진짜 덥네요. 원래 이런가요?”

덥다는 말과 달리, 로나는 평소처럼 장갑만 벗은 상태이다.

위슨은 코트에 모자를 벗고, 머리까지 한데 모아서 꽉 묶고 있는데 말야.

로나 녀석, 블루벨 다음으로 더위 안 타는 것 같아.

지난번에 더위를 견디는 훈련을 받았다고 했던가?

무슨 훈련을 어떻게 받으면 저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지하 신전은 여름에도 시원했는데 말이죠~ 역시 바깥의 여름은 다르네요!”

“여기가 남쪽이라서 그런 거 아냐? 우리 마을은 여름에도 가끔 쌀쌀했거든.”

아마 대륙 북쪽에 있는 마을이란 이유만으로 그런 건 아닐 거다.

내가 추위를 타는 체질이라 그런 것도 아닐 거고.

“꼭 보름달이 뜨면 춥더라. 이불을 덮다 못해 아주 둘둘 말고 자야 할 정도였어.”

“오~ 카엘 님 고향이 점점 더 기대가 되는데요!”

“왜? 여기보다 시원해서?”

“네! 보름달마다 그렇게 온도가 확 내려갈 정도로 온갖 존재가 판치고 있다는 거잖아요! 아, 벌써부터 가슴이 막 두근거려요!!”

그렇게 말을 마친 후, 로나는 옆에 둔 철퇴를 껴안으며 헤헤 웃었다.

음, 두근거릴 요소가 어디에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그보다 괜히 불안해지니까 철퇴 치워줬으면 좋겠다.

“형한텐 미안하지만 저도 기대돼요. 귀한 버섯이나 약초들을 엄청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물가에서 돌아오다가 이야기를 들었는지, 위슨이 과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오면서 말했다.

“맨드레이크가 지천에 깔려 있고, 토끼 대신 재칼로프가 뛰어다니고, 말에는 날개 달려 있고 그런 거 아니에요?”

“무슨 마경이냐?! 그렇게 맛탱이 간 데는 아니야! 몬스터가 좀 많이 다닐 뿐이지, 우리도 딴 데랑 똑같이 소랑 양 키우고 살거든? 말도 저거랑 똑같이 생겼어. 날개 같은 거 안 달렸다고.”

우리 고향의 목화가 특이한 건 인정한다.

드워프 연구소의 부소장이 설명해주는 걸 들었을 땐 정말 놀랐어.

어쩐지 다른 마을에선 잘 안 보이더라.

어쩌다 발견해도 되게 비싸고 말야.

“소 뿔은 두 개인가요?”

“당연한 거 아니냐.”

“양은 풀 먹고요? 막 늑대 잡아먹고 그러지 않아요?”

“너 같으면 그딴 걸 키우겠냐? 허브만 처먹긴 하지만, 어쨌든 풀만 먹고 살아. 평범하다고.”

평생을 허브만 처먹기 때문에, 목초지에 일부러 박하나 세이지, 라벤더 같은 허브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그렇게 허브만 먹어서 그런지, 아무리 늙은 걸 잡아도 고기에서 노린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

다른 마을에서 양고기 먹을 땐 냄새가 나서 내심 놀랐었지.

“닭도 머리 하나 달렸고, 눈 쳐다본다고 돌이 되고 그러지 않아. 알도 암탉이 낳고.

그냥 몬스터랑 요정이 많을 뿐이야. 달리 특이한 거 없다니까.”

“괜히 네가 몬스터를 꽤 아는 게 아니구나.그렇게 많다면, 너희 동네에서 나오는 몬스터 중에, 여기서 못 본 것도 있겠네?”

완성된 꼬치구이를 가져오면서 묻는 블루벨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버섯귀신이랑 나무귀신, 리자드맨, 늑대인간, 독거북이, 동굴벌레. 그리고 요정들은 거의 못 봤지? 위슨네 섬에서는 좀 본 거 같은데.”

“………”

응? 어째 세 녀석 다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네.

메린이 완성된 수프를 솥째로 들고 와서, 각각 한 그릇씩 나눠주는 동안에도 얼이 나간 것처럼 입만 벌리고 있다가,

“와아, 와아!! 엄청 끝내주는데요!! 지금 거기도 몬스터 때문에 힘들다고 들었는데, 꼭 방어전에 나서고 싶네요!!”

소리 높여 환호하는 로나를 시작해,

“진짜 장난 아니네. 버섯귀신은 또 뭐에요? 버섯이니까 약재료로 쓸 수 있으려나?”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위슨에 이어,

“세상에…… 그딴 데에서 사람이 사는 거야? 진짜로?!”

블루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색해하는 것이었다!

로나야 그간 쭉 수도에만 살았으니 그럴 만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본인들 동네에도 몬스터 있으면서!

“카엘 형, 반대로 생각하셔야죠.”

위슨이 수프를 한 스푼 뜨면서 말했다.

“저랑 귀…가 긴 블루벨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형네 고향은 있죠,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에 뒤지지 않는 거에요.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네요. 인형으로 액막이 의식도 한다고 했으니.”

“액막이 의식이요? 와, 그거 저희도 요즈음엔 신년축제 때에만 하는데 신기하네요!”

인형을 태우려고 불을 피우다 사고가 나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인 액막이 의식은 권하지 않고 있다는 듯했다.

신년축제에서 하는 것도, 액막이보단 ‘지난해의 묵은 것을 버린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하며, 로나가 활짝 웃었다.

“그 마을에서 놋지빌까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었죠? 이야~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아, 그래.”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그 뒷말을 수프와 함께 삼키며, 메린을 뺀 나머지 세 사람을 슬쩍 바라보았다.

몬스터를 사냥할 기대에 부푼 사제.

신기한 약재료를 잔뜩 찾을 수 있겠다고 싱글벙글 웃는 마법사.

그리고 ‘그런 마을에서 살다니, 사실 인간 아닌 거 아니냐’는, 굉장히 실례되는 말을 하는 변태 엘프.

……이 녀석들을 고향에 데려가도 좋은 걸까?

진심으로 그런 고민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밤을 보낸 후, 동이 트는 시간에 맞추어 다시 길을 떠났다.

대략 나흘에 걸쳐, 우리는 초원에서 또 다른 숲으로 들어가, 약간 지대가 높은 평원으로 나와서 길을 따라 쭉 질주했다.

그동안 날씨는 점점 더 더워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툭하면 짙은 구름이 끼면서 비가 퍼부었다.

빗줄기도 꽤 굵은 편이어서, 나는 블루벨에게 메린의 천막을 쓰라고 권했다.

그녀가 고향에 다시 다녀올 때 챙겨온 천막은, 매섭게 쏟아지는 빗방울을 버티기엔 너무 얇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엘프가 더위와 추위를 안 탄다고 해도, 홀딱 젖은 채로 밤을 보내는 건 좋지 않을 테니까.

“이제 메린은 나랑 천막 같이 쓰잖아. 어차피 남는데 그냥 댁이 써. 드워프가 손본 거라서 꽤 튼튼해. 공간도 제법 넓고.”

“……그래~ 애인끼리 꼭 껴안고 잘 수 있어서 좋겠다~ 진짜 시도때도 없이 염장을 지르는구나.”

“그런 뜻이 아니잖아, 이 주책바가지야. 집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 됐구만, 벌써 병이 도졌어?”

“내가 무슨 어린애이니? 닷새만에 향수병 걸리게!”

욕구불만 말하는 거였는데.

지적했다간 괜히 더 귀찮아질 게 뻔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블루벨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홱 돌리며 말을 이었다.

“……뭐, 네가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써줄게. 그 지하 난쟁이 놈들, 성격은 맘에 안 들어도 손재주는 봐줄 만했으니까.

근데 그거 어쨌든 메린 거 아냐? 네가 맘대로 나한테 쓰라고 하면 안 되잖아.”

“괜찮아.”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블루벨을 향해 빙긋 웃었다.

어쩌면 좀 메마르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대가 치렀거든.”

“어제? 걔한테 뭘 줬는데?”

“……그런 게 있어.”

대답하면서 저절로 눈길이 피해졌다.

아무리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한 어른이라지만, 눈앞의 변태처럼 대놓고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아침인 데다 민망하니까!

그러나 블루벨은 내 얼굴에서 대충 읽어버린 듯했다.

멀뚱거리던 눈을 가늘게 뜨면서,

“아하~ 그~런 거구나~”

말을 죽죽 늘리며노골적으로얼굴을 구겼으니까!

“그, 그런 거긴 뭐가!”

“어제 폐허에서 묵으면서 아주아주 끈적한 밤을 보냈구만?”

“………아냐!”

“아니긴 개뿔. 잡아떼려면 네 얼굴 관리부터 하려므나, 애송아. 완전 빨개져 가지고.”

“으.”

……안 그래도 숙여지려고 하던 고개가 푹 꺾여버렸다.

메린이 천막을 양도하는 대가로 제시한 것은 딱 하나.

지난번에 받은 향초를 써보는 것이었다.

절대 안 쓰겠다고 배낭에 따로 넣어버린, 흥분을 불러 일으키는 향초를.

어차피 야영 중엔, 말 그대로 손만 잡고 자니까 시험할 일이 없겠다 싶어서 수락했는데……

블루벨이 말한 것처럼, 어제는 폐허에서 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후, 며칠간 숲이랑 초원에서 자다 보니 그만 깜빡해버렸어.

숲과 초원 등등에 나 있는 길은, 사람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가면서 자연히 만들어진 것.

그러니 그걸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마을이 있던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걸 말야.

폐허 속에서 집 몇 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서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올 것이 왔다고 깨달았다.

동시에, 그딴 약속을 해버린 과거의 나 자신을 타박했다.

그 다음은 뭐, 메린이 킥킥 웃으면서 향초에 연기를 내고, 내 코에 아예 들이미는 탓에 나도 모르게 깊이 들이마셔버렸고……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헤죽 웃는 얼굴로 나한테 찰싹 붙어서 자는 메린을 토닥이면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되새겨본 결과,

­………!!

입만 벌린 채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던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그게 꿈이 아니었다고?

내가 진짜로 메린이 기절하기까지 몰아붙이고, 정신 잃은 동안에도 계속했다고?

귀하고 소중한 그녀를, 내가 그렇게 막 대했다고?!

으으으, 그 치료사 아저씨……!

뭐가 ‘약간의 흥분’이야.

아주 그냥 정신 놓았잖아!

메린은 어째 더 생기가 돋는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면서 좋았다고 했지만……

아으, 내가 안 좋아.

어쨌든 메린을 함부로 대한 거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니까!

그래서 그 향초를 버리려 했는데, 녀석이 나한테 매달리고 울상까지 지으면서 말리는 바람에, 그냥 배낭 깊숙이 집어넣고 다신 안 꺼내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하…… 메린 녀석, 나중에 나 몰래 향초 쓸 게 뻔한데.

진짜로 그런 욕구에 눈이 팍 뜬 걸로 모자라서 아예 빠져버린 걸까?

거칠게 하는 게 취향인 것도 아니면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로나와 귓속말을 나누면서 킥킥 웃는 메린을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흥. 그래~ 염장 지르고 싶은 대로 실컷 질러.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내가 참지, 뭐.”

장난감도 가져왔고.

……그녀가 작게 덧붙인 말이, 왠지 모르게 무척 신경이 쓰였다.

“뭐? 장난감? 목욕용 인형이라도 가져온 거야?”

“관심 있니? 보여줄까?”

“……아니, 설명 먼저 해줘. 누가 준 건데?”

조심스럽게 묻자, 블루벨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블루스타. 정 애인이 안 생기면 쓰라면서, 본인 크기,”

“됐어, 안 궁금해, 밥이나 먹어!!”

곧바로 그 입에 사과를 쑤셔 넣어버렸다.

아오, 이 변태 할망구가 진짜 주책이야!

“장난감? 그러고보니 장서관의 그 관장이 준 거 있는데 써볼래요? 문어 형태라던데. 꿈틀거린대요.”

“그 새끼는 그딴 건 왜 준 거야, 넌 또 왜 이 얘기를 알아먹는 거고?! 아침부터 그딴 얘기하고 싶냐?!”

“잠 깨고 좋지, 뭘 그래요?”

“시끄러, 임마! 할망구랑 같이 저 푸른 하늘에 사과해, 나쁜 자식들아!”

“기왕 말 나온 거, 형이랑 누나가 어제 썼다는 그 향초 빌려주세요. 어젯밤에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뭘로 만들었나 보고 싶은데.”

“아아아악!!”

……잠이 깨다 못해 돌아버릴 것 같은 아침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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