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5화 〉 381화 : 귀성길 (2)
* * *
상식.
그것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몸소 연구하여 얻어낸 성과 중, 일반 사람들도 받아들인 지식을 가리킨다.
일평생 바다를 본 적 없는 촌구석 시골 사람도 ‘바닷물은 짜다’는 걸 알고,옆마을이나 고작 갈까 말까 한 사람이 ‘대륙의 동쪽과 남쪽엔 바다가 있고, 서쪽에는 산맥이 있다’고 태연히 말하듯이,
몸소 겪으며 깨닫지 않고서도 인지하는 불변의 사실이다.
그 상식 중 하나가 바로, 대륙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따뜻하고,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시원하다는 것이다.
장거리 여행하는 사람들만 알 법한 지식이, 편지나 직접 방문하는 등의 교류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건만.
지금,
그 상식이 깨지려 하고 있었다.
“왜…… 점점 더 더워지는 거야……?”
바싹 마른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 중얼거렸다.
시원한 기운을 담은 천이 눈을 덮어서 하늘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징그럽게 맑고 밝은 상태이겠지.
나는 원래 다른 사람들처럼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맑은 하늘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왜냐? 해가 떠 있으면 더럽게 뜨겁고 더우니까!
물론 지금은 8월 후순, 아직 한창 여름이다.
저 놈의 해가 지랄맞게 뜨거운 것도 당연해.
근데 왜,
“존나게 올라왔는데… 씨발… 왜 더 덥냐고……!”
사흘 전보다 지금이 더 더운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조금씩 더워지는 게 아니라, 중부 지역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그래도 어제는 나무 그늘이 종종 보인 데다, 오후 내내 비가 퍼부어서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오늘은 종일 땡볕이어서, 아침에 잠깐 움직인 게 고작이었다.
그것도 길을 가기보단 햇빛을 피할 곳을 찾으려는 거였고.
이야, 동이 트자마자 땅과 공기가 지글지글 끓는 게……
근처에 숲이 없었다면 곧바로 쓰러져 죽었을 거야.
그리고 위슨의 거북이가 없었으면 지금쯤 거품 물고 있었을 거다.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열기 때문에, 숲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렸으니까.
“으으… 어지러 죽겠네…….”
“떠드니까 그렇지, 등신아.”
‘맞아.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을 나불거리면서 더 빼고 있네.’
메린이 툭 쏘아붙이면서 찬물에 적신 천으로 내 목과 팔을 닦았다.
원래라면 위아래 전부 벗고 찬물을 마구 끼얹어야 하겠지만, 위슨이 곧바로 거북이를 꺼내서 나에게 붙였던 덕에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 거북이가 계속 나에게 붙어 있었다면, 메린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말들에게 물 뿌려주고 근처에 물웅덩이 만든다는 이유로 위슨이 거북이를 도로 데려가버렸다.
그 탓에 도로 더위가 찾아와, 땀과 함께 기운이 차츰차츰 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눈가를 덮은 천이 시원하고, 그늘에 누워 있고, 또 간간이 메린이 소금 탄 물을 먹여줘서 이렇게 생각이라도 멀쩡히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방금 환청이 들린 거 같은데.
내가 지금 진짜 뒤져가긴 하나보다.
얌전히 있어야지…….
“끼잉……”
앓는 소리와 함께, 촉촉한 것이 내 뺨을 슥슥 문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숲으로 안내해준 늑대가 아직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왠지 기운 내라는 것처럼 느껴져, 저절로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괜찮아…. 좀 누워 있으면 돼…….”
중얼거리면서 대충 옆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잠시 허공을 젓다가 푹신함에 폭 잠기는 게 느껴진다.
그대로 살살 쓰다듬자,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덥네요. 이 주변에 살던 분들은 어떻게 버틴 걸까요?”
“아냐, 사제님. 이 주변이 매년 이렇게 더웠을 리가 없어. 산에 둘러싸인 것도 아니고 평원이잖아. 이상해.”
로나와 위슨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동시에, 누군가의 손에 고개가 들리면서 입 속으로 무언가 흘러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이 굳으며 그걸 뱉으려는 순간, 코와 입이 동시에 막히면서 두 손목까지 한꺼번에 붙잡혀버렸다!
이 새끼가 또……!
재빨리 입 안에 담긴 걸 삼켜버린 다음, 몸을 벌떡 일으키며 눈을 덮고 있던 천을 범인 새끼에게 휙 던져버렸다.
“야, 이 새꺄, 몇 번을 말하냐! 먹이기 전에 먼저 말을 하라고!!”
“아, 그랬지. 미안해요, 날씨 생각하느라 깜빡했어요. 이게 좀 이상해야죠.”
위슨은 내가 던진 천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며 멋쩍게 웃었다.
한두 발짝만 떨어져 있는 거리였는데 이걸 받네.
반사신경 하나는 참 좋은 녀석이다.
“으……”
갑자기 눈앞이 크게 핑 돌면서 주위가 조금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큰 소리를 쳐서 그런가?
“형, 얼른 도로 누워요.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큰일나요.”
“빨리도 말한다…. 애초에 너 때문이잖아…….”
으, 어지러워.
한숨을 쉬며 도로 누운 뒤,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덤덤한 얼굴에게도 툭 쏘아붙였다.
“너도 임마…, 가만있지 말고 말을 해줘야 될 거 아냐…. 너무 더워서 혀 녹았냐……?”
“굳이 왜? 위슨이 기력회복제 먹일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메린은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천으로 내 얼굴을 닦은 다음, 그대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녀석도 이 날씨는 더운지, 위에 튜닉만 입고 양쪽 소매를 바짝 걷어 올리고 있다.
바짓단도 마찬가지라서 지금 내 뒷머리론 부드러우면서 탄탄한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다.
거기다 녀석의 땀냄새에 체취까지……
어찌 보면 진이 빠져 있어서 천만다행인 상황이었다.
“알고 있었어도… 갑자기 먹이면 놀란다고…….”
“그래?”
메린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며 되묻고는, 시선을 살짝 위로 든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눈 위에 천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맞아. 나도 요전에 그랬었지. 네가 향초 맡고 갑자기 덤벼들면서 나 벗겼을 때 놀랐었어. 그럴 거 알고 있었는데 말야.”
“하…………”
왜 하필 예시가 저거인 걸까?
여기 있는 두 애늙은이가 또 한두 마디씩 던지면서 지랄 떨겠구만.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으니 그냥 무시하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그러고보니 블루벨 씨는요? 물약 가져오는 사이에 없어졌네.”
“블루벨? 주변 좀 보고 온대.”
“우와, 이 날씨에요? 더위를 안 탄다더니, 이렇게 뜨거운 날에도 멀쩡한가보네요!”
“땀은 흘리는 거 같던데. 으응…… 근데 나간 지 좀 된 거 같아. 어디 뻗어 있는 거 아냐?”
“어, 그래요? 그럼 제가 한 번 가볼게요.”
그 뒤로 상당히 멀쩡한 얘기들만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 녀석들이 왜 갑자기 멀쩡한 척하는 거지?
나는 눈을 덮은 천을 치우고 두 녀석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거기 어린 놈 둘, 왜 멀쩡한 이야기만 하냐? 특히 빨간 녀석, 너 왜 메린이 별 생각없이 던진 떡밥 안 물어?안 어울리게시리?”
“네? 떡밥? ………아~ 메린 님 벗겼다는 거요?”
로나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엘 님이 이렇게 누워 계시니까 그렇죠. 대꾸할 기력도 없으신 거 같은데, 지금 그런 소리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재미도 없는데요.”
위슨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하하, 이젠 대놓고 나 놀리는 재미로 입 턴다고 하고 있구만?
돌겠네, 진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다시 천으로 눈을 덮었다.
그러자 눈앞이 깜깜해진 중에, 위슨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저는 블루벨 씨 찾으러 갔다 올게요. 메린 누나, 저기 물에 아쿠아 뒀으니 그쪽으로 옮겨요. 여기보다 그늘도 더 짙어요. 그리고 형만 먹이지 말고 누나도 물 마시고요. 사제님도.”
“어. 알았어.”
“잘 다녀오세요~”
“조심해…….”
대강 손을 들고 흔들자, 조금 작은 손이 살짝 붙잡는 게 느껴졌다.
아주 약간 시원할 뿐 아니라, 땀도 하나 배지 않은 뽀송뽀송한 감촉이 전해져온다.
아마 햇볕 아래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무언가 조치를 취한 것이리라.
……역시 정령 사기야.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말고 쉬고 있어요. 테라, 가자.”
“끼잉.”
이름이 불린 늑대는 한 번 더 작게 운 후, 내 뺨을 살짝 핥았다.
눈을 덮은 천을 살짝 치우자, 금빛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잘 다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이니, 그녀가 또 한 번 뺨을 할짝이고서 빠른 걸음으로 위슨을 따라갔다.
참 착한 녀석이야. 계약한 놈이랑은 천지차이라니까.
다시 눈을 덮는데, 메린이 그걸 치워버리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자리 옮긴다.”
자리를 옮겨?
아, 위슨이 말한 못으로 가려는 거군.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이니, 메린이 두 팔로 내 오금과 등을 각각 받치면서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
아니, 왜 하필 이 자세야?
아니, 어깨에 짊어지거나 질질 끌고가는 것보단 낫긴 하지만……!
하……, 진짜 기운이 없어서 다행이야.
로나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고, 꽁꽁 싸맸는데도 여실히 느껴지는 봉긋함에도 덥다는 거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드니까.
얼마 걸은 뒤, 메린이 나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늘이 짙다더니, 정말로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나뭇잎이 한가득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리고 바로 가까이에 물이 있어서 그런지, 머리를 훑으며 지나는 바람도 조금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흠흠, 원래 있던 실개천을 조금 넓힌 거군요. 깊이가 꽤 되는 거 같네요.”
“그러네. 빨래도 해야 되는데 잘됐다. 음…… 허리까지 오려나?”
나를 내버려둔 채 대화를 나누는 두 아가씨.
참 믿음직스러운 간병인이지 않을 수 없다.
뭐, 그럭저럭 시원하니 그냥 이대로 좀 자면 되겠지……
“한 번 들어가보실래요?”
……싶었는데 저 빨간 사제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어버렸다!
저 자식이 또 무슨 꿍꿍이를……
아, 설마……!
“아쿠아 덕분에 저 웅덩이 차가워졌고, 또 여기도 꽤 시원하잖아요? 메린 님이 들어갔다가 나오시면, 카엘 님에게 꽤 오랫동안 시원~한 무릎베개 해드릴 수 있을 거에요!”
역시 그거냐!!
나는 있는 힘껏 녀석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로나 너 이 자식… 자꾸 메린 꼬드길래…? 아까는 나 안 놀린다더니……!”
“어머, 놀리다니요~ 전 그냥 카엘 님을 순수하게 도와드리려는 건데요~ 좀더 시원한 편이 더 좋으시잖아요? 덤으로 저도 눈 호강 좀 하려는 것뿐이에요!”
“하지 마, 임마…! 누구 맘대로 메린으로 눈 호강을 하려… 아으…….”
으으, 어지러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던 몸이 도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로나가 메린에게 무언가 꾸러미를 주면서 내 시야 바깥으로 밀고 가버렸다!
아주 멀리 간 건 아닌지, 이내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천이 스르륵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벗기고 있는 거야?!
메린이 싫다고 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봐서 억지로 시키는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으, 저 망할 꼬맹이, 진짜 가만 안 둬!
눈을 질끈 감고서 사악한 전투사제에게 가할 응징법을 여럿 떠올리는 동안, 사라락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시원해.”
“허허, 그거 다행이구먼.”
메린의 들뜬 목소리에 이어, 물 속에 잠긴 덕분에 말이 빨라진 거북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하하, 진짜로 물에 들어갔구나.
아무리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지만, 벌건 대낮에……!
하…… 왠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거 같아.
이윽고 차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머리가 들리더니, 또 다시 부드러우면서 탄탄한 감촉이 뒷머리에 전해져왔다.
확실히 시원하긴 한데……
으으, 이 녀석 지금 완전 벗고 있는 거 아냐.
눈을 못 뜨겠잖아!
“카엘 님, 카엘 님, 눈 떠보세요.”
“싫어.”
“메린 님이 좋은 거 입고 계셔서 그래요~ 눈 떠보세요!”
응? 다 벗고 물에 들어간 게 아니었나?
로나는 사제인 만큼, 짓궂기는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좋다’는 건 본인 기준이겠지만.
콕콕콕.
“네? 네? 눈 떠봐요~ 아, 얼른요~”
“……”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자꾸 보채는 걸 보니, 조금 있으면 손으로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올릴 것 같아!
나 참, 할 수 없구만.
작게 한숨을 쉬면서 눈을 뜨자,
“………”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는 매끈한 복부 위에, 큰 동산이 두 개 솟아 있었다.
아, 이래도 얼굴이 보이긴 하는구나.
하긴, 얼굴보다 크기가 작은데 당연히 보이겠지……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야, 이 녀석, 왜 속옷만 입고 있어?!
물론 보통 입던 것과는 모양이 좀 다르다.
천으로 둘둘 싸매는 부분이 없고, 그냥 가슴을 감싸고 어깨에 끈으로 고정하는 구조이다.
근데 어쨌든 이거 속옷이잖아!!
로나 이 자식, 메린을 무슨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있어?!
“이런 썅, 지금 뭔 꼬라지 하고 있는 거야, 얼른 옷 입어!!”
“어, 진짜 기운 났네. 로나, 네 말대로야!”
“히히, 그렇죠?”
“옷 입으라고!!”
그러나 메린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킥킥 웃으며 머리를 꼭 껴안아왔다!
앗, 시원하면서 물컹한 느낌……
왠지 기분 좋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미친놈아아!!
“히히, 왠지 따뜻하고 좋다~ 야, 시원하냐?”
“어? 응…… 아니, 옷 입으라고! 다 큰 아가씨가 어디 벌건 대낮에 속옷만 입고 앉아 있어?!”
“괜찮아. 로나가 그러는데, 이거 속옷 아니래.”
“……”
가슴 절반이랑 국부를 제외하곤 죄다 살결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 속옷이 아니라고?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로나 너 이젠 뻥 치기로 했냐?”
고개를 돌릴 기운이 없어서 메린의 가슴에 묻힌 채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로나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뻥 아닌데요~ 그건 있죠, 수영복이라는 거에요!”
“……”
쟤도 더위 먹었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