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5화 〉 391화 : 어두운 초대 (3)
* * *
신전에서 다시 우리집… 임시 촌장집으로 돌아가니, 아버지가 몇몇 사람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한창 회의를 하고 계셨다.
문이 아직 활짝 열려 있었으므로 밖에서도 그 모습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엉? 자리 없네. 야, 내 방 가자.”
쿵쿵쿵쿵.
루크라는 이명을 가진 미친놈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발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내가 쓰던 방의 문을 열고는 쏙 들어가버렸다.
이야, 이 집에서 19년을 산 나보다도 더 당당하고 힘찬 발걸음인데?
누가 보면 저 놈이 이 집안 사람인 줄 알겠어.
그 탓에 기껏 돌아온 넋이 또 뛰쳐나가려 했지만, 다행히 테이블에서 보내오는 시선이 굉장히 따가운 덕분에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
………뭐가 다행이야, 다행은?!
저 놈이 신전에서 가지고 나온 짐더미 중 일부를 떠안긴 것도 억울하구만!
왜 내가 저 놈 몫까지 못마땅해하는 눈초리를 받아야 돼?!
으으, 아무리 인성이 터졌어도 그렇지, 회의하는 거 뻔히 알면서 저렇게 지랄하는 건 무슨 심보야?
꼭 저런 놈이지가 얘기할 때 누가 방해하면 엄청 지랄하더라!
그리고 저 놈 방금 자기 방으로 가자고 했지?
아니, 내가 원래 그 방 주인인 거 뻔히 알 텐데……
보통 이럴 땐 ‘내 방 가자’가 아니라 ‘네 방 가자’고 하지 않나?
하…… 저딴 놈도 사제를 하고 있다니, 정말 세상이 망하긴 하려나봐.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는데, 우리 쪽을 빤히 보며 눈을 깜빡이던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카엘,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메린도 그렇고.”
……사제놈의 발소리가 아니라 나와 메린의 얼굴이 눈길을 끈 것이었다.
저 놈이 저러는 건 이미 익숙해진 모양이군.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굉장해.
뭐, 아버지가 나와 메린을 보고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다.
반시간 전까지 멀쩡했던 얼굴이 팅팅 부어 있으니까.
메린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눈이 토끼처럼 빨개져 있겠지.
후후, 진짜 메린 녀석이 돌아오는 길에 울음을 그쳐서 망정이지.
얘가 눈물 뚝뚝 흘리면서 들어왔어봐, 아버지가 말이 아니라 목조르기를 걸어왔을 거다.
“신전 간다더니 뭔 일 있었냐? 보기엔 셋 다 멀쩡해보이는데…… 아, 엘프 아가씨는? 혹시 그 아가씨한테 일이 생긴 거냐?”
“……아뇨. 블루벨은 숲 쪽 초소로 갔어요.”
“그래……. 자경단원들이 한시름 놓겠구나.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주시다니 참 고맙기도 하지.”
아버지는 물론이고,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고마워하는 눈치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가슴 따뜻한 의도는 없었을 거 같아.
그냥 메린 눈에 띄기 싫어서 도망간 거 아냐?
하지만 굳이 동료의 평판을 깎을 필요는 없으니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럼 너희 왜 운 거냐?”
“음……”
이걸 뭐라고 둘러대야 내 머리가 쪼개지지 않고, ‘어휴, 등신 머저리 새끼’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눈물 때문에 조금 지끈거리는 머리로 열심히 궁리하는데,
“리, 굳이 뭘 묻고 그러나? 자네 아들 원래 눈물 많잖아. 고향이 이 꼴이 된 게 마음이 아픈가보지.”
“그래요, 엘리아스. 그냥 모른 척해요.”
“소더가 운 건 좀 신기하긴 하지만…… 뭐, 카엘과 같이 있을 땐 깔깔 웃고 그랬었으니 울기도 하겠지. 그냥 냅두시죠.”
아버지보다 연배가 많은 분을 시작으로, 저마다 두둔 아닌 두둔을 해준 덕에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그보다 소더가 돌아왔으니 사냥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틈에 식량을 더 비축하는 게……”
“식량은 아직 충분하잖아요. 우선은 자경단원들을 쉬게 해야 해요. 촌장님, 소더에게 야간 경비를 맡기시지요. 소더가 맡아준다면 든든할 거예요.”
“호숫가 쪽을 지키게 하는 게 더 나아. 이번에 탈환하면 그쪽에 또 몰릴 테니, 마을에 남는 자경단원은 그만큼 쉴 수 있겠지.”
……그 다음에 바로 쌉소리를 지껄였지만.
이야, 진짜 철면피이네.
누구 맘대로 일을 시키려는 거야?
특히 야간 경비 맡기라는 저 여자.
메린에게 맨날 ‘힘만 세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으면서, 뭐? 든든할 거라고?
다른 사람들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쉴 틈을 안 주고 부려먹으려고 하냐?
우리 여기 돌아온 지 한두 시간밖에 안 됐구만!
열불이 나서 한 마디 하려던 순간,
“야, 용사 새끼야, 왜 아직도 안 들어오고 지랄이야?! 너 바쁘다며! 나도 바빠, 새꺄! 얼른 들어와!”
사제놈이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놈’답게 방에서 불쑥 튀어나와선 내 등을 쭉쭉 밀기 시작했다!
“으와아아, 밀지 마, 미친놈아!! 이거 떨어뜨리는 꼴 보고싶어?!”
“뒤의 녀석이 알아서 주워오겠지! 얼른 들어오라고!”
아니, 나한테 들고 오라고 할 때는 엄청 중요한 거라고 했으면서!
이 자식, 속였구나!
하지만 놈은 내가 분통에 차든 말든, 발이 걸리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쭉쭉 밀어댔고, 그 탓에 철면피 인간들에게 한 마디도 못하고 그대로 방에 들어서고 말았다.
철컥.
뒤따라온 메린이 문을 닫자, 사제놈이 내 손에서 짐더미를 가져가서는 막자사발과 작은 공이, 그리고 여러 약초를 꺼내어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제놈의 요청대로 내 방에 짐을 옮겨줬으니 여기서 더 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지금 바깥에 나갔다간 또 이런저런 쌉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그럴 바에야 이 놈이 떠드는 걸 듣는 게 더 낫…………지는 않군.
둘 다 거지 같아!
“야, 용사,”
그리고 내가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놈이 몇몇 약초를 사발에 넣고 으깨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여기가 그렇게 싫냐?”
“……뜬금없이 뭔 소리야?”
“여기가 더 버티려면 호숫가를 완전히 확보하거나, 피로에 절은 자경단원을 쉬게 해줘야 돼. 근데 너, 방금 또 아까처럼 ‘누구 맘대로 시키려는 거냐’면서 지랄하려 했잖아.”
“그래서 여기 밀어넣었냐? 내가 거기서 소란 피울까봐?”
그렇게 묻자, 루크 사제가 손을 멈추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왜? 난 그냥 재료가 너한테 다 있는데 쓸데없이 미적대서 민 건데? 바쁘다고 했잖아.”
“아, 그래.”
“뭐, 안 그래도 없는 사기가 너 때문에 저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면 존나 엿 같긴 해. 근데 결계 깔아두면 다시 살아날 게 뻔하니, 네가 저 놈들이랑 목청을 높이든 드잡이질을 하든 상관없어.”
………음, 이 사제에 대한 평가를 고쳐야겠다.
루크 사제는 눈치가 없는 게 아니야
풀풀 풍기는 분위기를 그냥 무시하는 거지.
인성이 존나 터져서.
나는 한숨을 쉬며, 옆에 앉은 메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메린. 역시 네가 ‘세상에서 가장 눈치 없는 애’인 거 같아.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마. 인성이 뒤져서 없는 것보단 훨씬 낫거든.”
“……너 지금 나 욕하는 거지?”
“너 좋은 애라고 칭찬하는 건데?”
메린은 감정이 부족해서 공감을 못하는 것뿐, 인성이 없는 게 아니다.
마음의 빈 자리를 합리와 논리로 채워버려서 냉혹해보이는 거지, 이 사제놈처럼 다 알면서 일부러 무시하거나 악용하는 그런 사악한 놈이 아니야.
“네가 참 좋은 애라는 걸 새삼 깨닫게 돼서 기뻐.”
“……”
진심으로 말한 건데, 메린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감정이 채워지면서 의심도 강해진 모양이군.
그래도 어깨를 껴안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곧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뺨을 나에게 부비기 시작했다.
아, 귀여워.
“이렇게 귀여운 녀석을 잘 알려고 하지도 않고 신나게 부려먹기만 한 사람들이야. 그리고는 수틀리니까 내쫓으려고 했고. 인성 터진 사제님아, 너라면 도와주고 싶겠냐?”
“어쩌냐, 등신 용사야? 난 지금도 하기 싫은데.”
“………”
이 새끼 왜 사제가 된 거지?
사제는 다 자원모집이라고 로나가 그랬었는데.
율리아 공주가 강제로 자원시킨 건가?
“그래도 어쩌겠냐? 어쨌든 나는 사제이고, 또 여기 담당이 되어버렸는데. 네가 존나 싫어하는 저 바깥 놈들도 일단은 사람이니 어떻게든 살리는 게 내 일인 것을.”
“……”
루크 사제는 사발에 기름처럼 보이는 액체와, 어떤 하얀 가루를 넣고 공이로 휘휘 저었다.
그저 물기가 조금 어린 가루였던 것이 질척하게 반죽되기 시작했다.
마을을 보호하는 결계를 친다더니, 뭘 만드는 거지?
지난번에 로나가 비슷한 방법으로 향초를 만들었었는데, 혹시 결계라는 게 향을 말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보려 했는데, 루크 사제가 선수를 치고 먼저 말을 꺼내버렸다.
“너는 모르겠지만, 이 마을은 꽤 오랫동안 사제가 없었어. 옛날에 마을이 크게 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폐품이 됐다더라.”
“폐품이라니 뭔 말을 그렇게……”
“뭐. 망가져서 못 쓰게 된 도구를 그럼 뭐라고 하냐?”
로나도 그렇고, 사제들은 스스로를 ‘창조주의 도구’라 칭한다.
절대자를 섬기는 자라는 뜻의 비유가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을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루크 사제의 저 말도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겠지.
……근데 이상해. 어째 평소보다 더 거슬려!
사제의 기본 사고방식이 아니라, 그냥 성격이 개 같아서 막말하는 거 같아!
이래서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그 교훈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그 습격 때문에 이 마을은 예부터 내려온 지식을 완전히 잃었어. 장서관도 습격 때 무너져버렸지, 신전 보관함을 열 수 있는 사제는 안 오지, 옛것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싹 죽었지…….
원래라면 그 시점에서 이 마을은 멸망했어야 돼. 근데 그걸 오늘까지 끌고 온 거야.”
툭툭.
공이를 쓸 단계는 끝났는지, 사제놈은 사발 가장자리에 공이를 털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놈이 들고 있는사발을 슬쩍 엿보자, 안에 녹색 반죽이 눅진히 퍼져 있는 게 보였다.
로나는 저런 반죽에 기도를 올리고 손으로 모양을 만들었었는데.
하지만 루크 사제는 그에 손을 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녹색 반죽이 든 사발과,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긴 막대기를 제단 위에 나란히 놓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도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지독한 미친놈들이더라고. 독기 어린 물을 마시고, 독기를 풍기는 고기를 구워먹고, 그 물과 양분을 먹고 자란 곡물로 빵을 해먹으면서, 그 때문에 흰 머리 나기 전에 뒤지면서도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온 거다. 여전히 사람인 채로.”
진작에 인간형 몬스터로 변질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 것 같냐?”
“적응해서?”
“반대야. 적응하길 거부해서 아직까지 남아있을 수 있던 거다.”
종교를 유지하고 글을 버리지 않았다.
인간의 형태를 벗어난 아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깊고 깊은 어둠 속의 존재가 속삭이는 것을 무시했다.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아깝지 않겠냐?”
“……그래서, 도우라고?”
“내일까지는 머물러. 오늘밤에 정체 모를 놈이 협의하러 온다잖아. 오늘내일, 이렇게 이틀 양보해. 그 다음엔 네가 싫다고 해도 내가 쫓아낼 테니까.”
그리고 루크 사제는, 내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곧바로 성호를 긋고서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창문도 꽉 닫혀 있는 밀폐된 공간이라 그런지, 나지막한 소리로 기도를 읊고 있음에도 꽤 또렷이 들리고 있었다.
“……하늘 위의 하늘에 좌정하시는 내 주여, 허하소서. 옛 기억을 따라 주의 힘을 표하기를 원하나이다.”
제단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크 사제는 사발 위쪽 허공에 손을 올리고, 왼손 검지를 세우면서 그걸 살포시 쥐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재차 입을 열었다.
“혀를 잃고 목소리를 잃는다 할지라도, 나 주를 찬미하고 주께 외치리이다. 나의 손과 발로써 주의 뜻을 드러내리이다.”
중얼거리면서, 루크 사제는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있던 왼손 검지를 아래로 슥 긋듯이 빼냈다.
그러자 잠시 후, 루크 사제의 오른손에서 핏물이 흐르더니 사발 위로 뚜두둑 떨어졌다.
손톱이 그렇게 날카로운 거 같지도 않은데……!
“나의 목숨을 다하기까지, 주의 자녀를 지키리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사발에 담겨 있던 녹색 반죽이 옆에 두었던 긴 막대에게 날아가 그 위를 덮어씌웠다.
루크 사제의 피도 들어갔는지, 막대기는 조금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내 루크 사제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피가 흐르는 손으로 제단 위의 막대를 집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됐다. 준비 끝. 가자.”
“엉? 어디를?”
“어디 가긴, 임마. 결계 치러 가야 할 거 아냐. 그동안 뭐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너네도 같이 와. 그리고 날 지켜.”
……방금까지 기도하던 모습은 완전 사제 그 자체였는데, 그게 끝나자마자 다시 양아치가 되었다!
하…… 기도말에서 조금 감동했던 내가 바보이지.
고압적인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보는 루크 사제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더 정중하게 부탁하면 생각해주마.”
“이걸로 대가리를 쪼개기 전에 따라오십시오, 형제님.”
“……”
정중하긴 하네.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어서 그렇지.
검붉은 빛의 막대를 자신의 다른 손바닥에 착착 두드리는 루크 사제를 보며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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