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 393화 : 어두운 초대 (5)
* * *
내 이름을 가장 먼저 부른 엄마는,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입에 올렸다.
“오스카. 로완. 아실링. 키란. 오를라……”
그렇게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이름을 쭉 부른 후,
“……그리고 엘리아스, 내 사랑. 내가 왔어.”
아버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숲에서 혼자 살아남는 게 정말 가능한 것인지 타진하는 목소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경악하는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온다.
……그딴 거 다 알게 뭐야. 엄마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
살아 계셨어. 살아서 돌아오셨다고!
왜 2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돌아오셨어!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며 곧바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황급히 눈을 닦으며 다시 정면을 본다.
기껏 현실에서 엄마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됐는데, 흐리게 비치도록 할 순 없으니까.
마음 한켠에서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런 거에 귀 기울일 틈은 없어.
그러다 엄마의 목소리를 놓치면 어떡해?
“피아……? 정말 피아, 당신이야……?”
그럼 저 사람이 달리 누구란 말인가?
모습과 목소리를 흉내내는 몬스터가 있긴 하지만, 저 사람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불러 맞췄다.
변형 따위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은 맑은 목소리로.
그러니 틀림없어.
엄마야. 나를 낳은 사람이자 아버지의 아내인 피아 에스트렐이라고!
“그래. 나야, 피아. 많이 놀랐지? 당연히 그럴 거야, 이해해.”
서늘한 눈초리 속의 눈동자가 조금 슬픈 빛을 띠는 것도 잠시, 엄마는 다시 나를 보며 두 팔을 벌리고 환히 웃었다.
“카엘, 우리 아들. 그간 많이 컸구나. 어른이 다 됐어. 자, 이리 온? 모처럼이니 엄마가 한 번 안아보자.”
“엄마……!”
곧바로 달려나가려는 순간,
“윽?!”
갑자기 옆에서 억센 힘이 허리를 꽉 감싸며 나를 붙들었다.
익숙한 온기와 향취가 느껴지면서, 항상 느껴지던 안도감 대신 당혹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막는 거야?
“메린?! 왜 이래? 이거 놔! 엄마가 부르시잖아!”
“안 돼.”
딱 잘라 거절하는 메린의 눈초리는 상당히 사나워져 있었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엄마를 보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무척 따랐으면서, 대체 왜?
“아주머니 아니야.”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무슨 소리야? 엄마잖아. 어디를 봐도,”
“아니야! 네 엄마 아니라고!”
메린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한층 더 험악한 눈으로 엄마를 쏘아보았다.
“너 뭐하는 놈이냐! 정체를 밝혀!!”
“어머, 메린……. 나야, 피아 아주머니. 날 못 알아보는 거니? 조금 섭섭한걸?”
“지랄하지 마! 너 아주머니 아니잖아! 아니, 아예 인간이 아니잖아!!”
메린의 외침에, 엄마는 한층 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엄마가 아닌 것도 모자라서 인간이 아니라고?
대체 뭘 보고 그런 심한 소리를……!
‘정신 좀 차리라고!!’
“?!”
갑자기 머릿속이 지잉 울리면서 가슴이 크게 덜컥했다!
한순간 숨이 막히는 느낌에, 나는 기침을 토해내며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써야 했다.
‘눈 똑바로 크게 뜨고 잘 봐, 멍청아!!’
남의 마음 속에서 떠들곤 하던 그 목소리이다.
왠지 평소보다 엄청 크게 들리는 것 같은데?
정말로 누가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아.
그나저나 눈 크게 뜨고 잘 보라니, 대체 뭘………
“………”
기침 때문에 숙여졌던 고개를 드는데, 무언가 눈에 잡히는 것 같았다.
혹시 잘못 본 걸까 싶어, 두 눈을 비비고서 다시 살펴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광경이 비친다.
발치를 밝히는 횃불의 주황색 불빛 속에서,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
자경단원이 던진 횃불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위쪽으로 갈수록 빛이 약하긴 하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래, 횃불은 엄마의 발치를 밝히고 있다.
굉장히 환하게.
엄마의 발 주변에 자리해야 할 검은 그림자 하나 없이.
그림자가,
하나도 없다.
“……!”
바닥에 그려져야 할 검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몸에 걸친 옷에는 그림자가 껴 있는데, 얼굴과 목에도 제대로 음영이 그려져 있는데.
두 발로 딛고 선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다.
불빛의 건너편에 반드시 자리해야 할 그림자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
“엄마,”
“응, 우리 아들. 왜?”
내 표정을 보고 있을 터임에도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미소를 띤 채,
“왜, 그림자가 없어요?”
“왜냐니, 그야,”
엄마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림자이니까.”
“그림…자……?”
“네가 포기한 엄마. 당신이 단념한 아내. 너희들이 버린 피아 에스트렐의 그림자. 그게 나야.”
나에게서 아버지로,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둘러보듯 한쪽에서 다른 끝까지 시선을 옮기며 말을 마친 엄마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나…… 아니, 메린을 보며 더욱 크게 미소지었다.
“후후후! 역시 넌 대단해, 메린! 내 아들의 짝으로 두기엔 아까울 정도야. 정말정말 아까워!”
“닥쳐! 아주머니 얼굴이랑 목소리로 떠들지 마! 지껄이고 싶거든 네 본모습으로나 해!”
“그건 안 되겠는데? 나는 피아 에스트렐의 그림자이니까. 하지만 목소리라면……”
엄마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의 목에 손바닥을 스윽 문지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내 본질을 섞을 수 있지.”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섞인 듯한 기묘한 목소리.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차가움이 느껴진다.
엄마의 그림자라는 존재는 어떠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사범님이 안 보이는구나. 혹시 그대로 죽은 거니? 기껏 도와줬는데……. 죽어버릴 줄 알았다면 그대로 삼켜버릴 걸 그랬어. 티치, 그 애도 제법 쓸 만한 몸뚱이이니까.”
엄마의 얼굴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엄마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존재가, 엄마가 절대 할 리 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
나를 보는 엄마의 눈동자가 을씨년스럽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따로 있지.”
그 지독한 괴리감 탓일까?
속이 울렁거리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범님을 구한 건 역시 당신인가? 원하는 게 뭐지?”
“딱딱하네. 내가 진짜 피아가 아닌 걸 알자마자 그렇게 매몰차게 나오기 있어? 섭섭해, 리.”
하지만 넌 아니야.그렇지?
……속삭임이 들려온다.
힘있게 울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덮을 만큼 큰 목소리로.
“네놈은 내 아내를 모욕하는 존재일 뿐이다. 대체 정체가 뭐지? 뭘 협의하자는 거고?!”
“말했잖아? 나는 피아 에스트렐의 그림자야. 네놈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숲의 주민이기도 하고.
음……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쉬운가? 나는 출입금지 구역 너머에서 왔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
그 안에 던져지는 순간까지,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는 늑대에 물려가셨어.
늑대가 그런 지능이 있을 리가……!
“카엘? 왜 그래?”
메린이 경계심 어린 말투로 묻는 게 들려왔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긴 했는데, 녀석에 이어서 로나까지 말을 거는 걸 보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가……
어지러워.
“거기엔 나 같은 ‘그림자’ 말고도 여럿 있어. 근데 알다시피 요즈음 숲이 소란스럽잖니? 그래서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
“거래?”
“메린을 우리에게 줘.”
보고싶었어, 카엘.
우리와 함께하자.
엄마에게 오렴.
꿈에서만 들을 수 있던 목소리가 달콤하게 속삭인다.
근데, 방금 그보다 더 중요한 말이 들린 것 같은데……?
메린을 뭐 어째?
달라고?
“메린을 넘기라고? 우리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거 같아?!”
자경단원 중 하나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자’는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왜? 어차피 버리려고 했잖아. 그럴 거면 우리에게 줘. 그럼 너희가 더는 몬스터에게 시달리지 않게 해줄게.”
“……협의는 끝이군. 그만 물러가라.”
“후후, 리. 그럼 이건 어때? 메린을 주면, 카엘을 풀어줄게.”
자아, 우리에게 오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우윽!!”
어지러워. 속이 뒤집어질 거 같아.
자연히 숙여진 고개가, 다시 들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도 무겁다.
카엘. 카엘 님. 카엘 군.
아득히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여전히 나를 꽉 붙든 채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 소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
나를 보렴. 아가.
아까부터 귓가를 웅웅 울리던 속삭임이 한층 더 커지며 그 소리를 덮어버렸다.
고개를 들고, 나를 보려므나.
들면 안 돼. 더는 쳐다보면 안 돼.
본능이 애걸하듯이 소리친다.
그 간청을 짓밟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쿵쿵 울려댄다.
자, 어서.
너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잖니?
안 돼. 저 말을 들으면 안 돼.
끌려가버릴 거야……!
고개를 들어.
나를 봐.
나에게 와……!
안 돼. 절대 안 돼.
안 되…는데……!
‘그래. 안 돼.’
……어딘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가 맑게 울려퍼지며, 무언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내 입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면서 몸의 감각이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한겨울 호수에 빠졌던 때처럼 뼛속까지 시리는 것 같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건 그 때문이리라.
무릎으론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는데, 언제 무릎을 꿇은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대체 언제 검을 뽑았길래, 내 오른손엔 성검이 쥐어져 있는 걸까?
메린은 왜 내 얼굴을 붙잡고 있고?
“정신차려, 카엘! 나를 봐, 내 눈을 봐!!”
메린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댄 채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다.
흔들리는 시야 한가득, 주홍빛 눈동자만이 비치고 있다.
“메린…….”
“나 알아보겠어? 이제 괜찮은 거야? 으으, 초점은 맞는 거 같은데 원래부터 맛탱이 간 놈이라 구분이 안 가네!”
“뭐, 임마…? 맛탱이 간 건 네 눈이잖아…….”
내가 블루벨이랑 뭘 하건 이상한 쪽으로 보는 녀석이 말야.
지금 누구한테 맛 갔다고 하는 거야?
어이가 없네.
“책도 별로 안 본 놈이… 뭔 망상이 그렇게 심하냐고…….”
“주둥이 놀리는 거 보니 멀쩡해진 거 맞구나! 우으, 카엘……!”
덥석.
내가 꿍얼거리는 걸 듣자마자 메린이 곧바로 안겨들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또 걱정을 끼쳤나보다.
거의 반사적으로 그 등을 토닥이며 주변을 둘러보자, 어째서인지 두 사제와 메린, 그리고 나를 빼고는 다들 바닥에 쓰러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뭐야…… 다들 왜 저러고 있어……?”
“카엘 님이 이상해지시니까 다들 결계 밖으로 나가려는 거 있죠? 그래서 넘어뜨렸어요.”
로나가 철퇴로 가볍게 땅을 쿵쿵 찍으며 헤실 웃었다.
지난번처럼 철퇴를 울려서 제압해버린 모양이다.
대체 그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뭐,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엄마의 그림자라는 저 존재가 세운 계획이 망했다는 건 알겠다.
굉장히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
“그 검……! 네가 그런 걸 가지고 있다는 기억은 없었는데!”
내 손에 들린 검을 가리키며 ‘그림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야… 엄마는 이게 나오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니야. 아니야! 누구의 기억에도 없었어! 어째서 네가 그 검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야… 용사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림자’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음, 왠지 말하는 걸 보면 우리 마을 사람들을 먹든가 하면서 기억을 가져간 거 같은데, 왜 용사의 존재를 모르는 거지?
………설마 이 사람들, 내가 용사이고 뭐 그런 거 죄다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래서 저 존재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야기인 건 절대 아닐 거야.
음음, 아무렴. 아니고 말고.
“……그랬구나.”
멍하니 서 있던 ‘그림자’가 돌연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뭘 하려는 건지, 엄마의 얼굴이 점차 검은 기운에 싸이기 시작했다.
“놈이 깨어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숲이 소란스러운 거였어.”
목소리에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점점 더 많이 섞여간다.
이윽고 엄마의 모습이 완전히 검게 물들고는 형체가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코입이 없어지고, 몸의 굴곡도 거의 일직선으로 변해간다.
말 그대로, 누군가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것 같았다.
“동의한다. 협의는 끝이다. 네놈들은 몰살이다.”
짤막짤막한 선언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땅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숲 입구 곳곳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더니, 바닥에서 그림자가 불쑥불쑥 솟아나기 시작했다.
사람, 짐승, 거대한 나무.
어디서 많이 본 몬스터의 모양이 있고, 정체가 무엇인지 상상할 수도 없는 윤곽도 보인다.
그렇게 숲의 출입금지 너머, 빛조차 삼키는 어둠 속에 사는 ‘그림자’들이 각각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이윽고 사람 형태의 그림자 하나가 횃불을 향해 걸어왔다.
어깨가 다부진 걸 보니 십중팔구 남자……라 할 수 없는 게 놋지빌이란 말이지?
여하튼 숲에서 실종된 마을 사람일 거다.
누가 튀어나오든 상관없어.
엄마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덤빈다면 맞설 자신은 없지만, 아마 나나 메린을 대신해서 로나가 시원하게 없애줄 것이다.
나머지는 누가 나오건 죄다 없애버릴 거야!
굳게 마음먹고 메린을 의지하며 몸을 일으키는 동안, ‘그림자’가 횃불의 빛 속으로 들어왔다.
구릿빛 피부. 누가 쥐어뜯은 듯이 헝클어져 있는 머리.
사람을 자주 깔보던 재수없는 눈초리.
“해골 같은 병신 새끼가……!”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내뱉는 싹퉁머리 없는 말투.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노란 불빛에 비추인 건, 마을에서 사라진 걸로 알려진 촌장의 전(?) 친아들 튜르였다.
실종됐다더니 그대로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정말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해줄게.
넌 진짜야.
“주제도 모르고 또 깝치냐?!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쳐죽여주마!
“그래! 덤벼봐, 새꺄! 이번엔 아주 끝장을 내줄 테니까!!
그러니 넌 내가 철저하게 죽여주마!
시커먼 검으로 나를 겨누는 놈을 향해, 성검을 꽉 쥐면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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