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화 〉 394화 : 오랜 숙원의 끝
* * *
나와 개놈의 고함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파앗!
“?!”
갑자기 ‘그림자’들의 뒤, 즉 숲에서 빛이 확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가 다시 천천히 앞을 향했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깜빡이길 수차례, 곧 초점이 제대로 잡히면서……
“끄아아악! 내 누우우운!!”
“캬아아아악?!”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벽 바깥의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안쪽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두 손으로 하나씩 눈두덩이를 덮은 채.
어째 숲 속에서도 희미하게 포효가 들리는 것 같은데?
블루벨을 포함해서 사람들, 즉 자경단은 로나 때문에 쓰러져 있느라 제때 눈을 가리지 못한 듯했다.
저 ‘그림자’들은…… 뭐, 숲 속에서 소리가 나니까 무심코 돌아봤다가 그대로 맞아버린 거겠지.
덕분에 숲 입구엔 상당히 기이한 광경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숲.
하늘도, 우리가 지금 있는 마을 주변에도 전부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데, 혼자 대낮처럼 환히 밝다.
나무의 옹이구멍이 또렷이 보일 만큼.
그 바로 앞에 있던 ‘그림자’들은 상당히 괴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늑대인간이나 흡혈거미처럼 밤에 다니는 몬스터의 형체를 지닌 놈들은, 하나 둘, 몸이 완전히 뭉그러지더니 그대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아무래도 대상의 모습과 기억뿐 아니라, 특성까지도 그대로 가져오는 듯했다.
달과 별빛 속에서 살아가는 ‘밤의 존재’는, 일정 수준 이상의 빛 속에선 살지 못한다는 큰 특징이 있다.
몸이 뭉그러진 걸 보아, 아마 ‘그림자’가 뒤집어쓴 존재가 빛에 태워지면서 본모습이 드러나버렸고, 그 탓에 놈 자신도 빛에 스러진 것이리라.
그림자에 빛을 쬐면 사라지는 것처럼.
그 근거가 아직 살아있는 ‘그림자’들이다.
인간이나 오크, 또는 나무귀신이나 버섯귀신 등, 낮에 활동하는 놈들은 눈가를 가린 채 웅크리거나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을 뿐, 몸에서 연기가 나거나 하진 않고 있다.
지금 바닥을 구르고 있는 진짜 인간들처럼, 빛을 쬐어도 눈만 아프지 죽지는 않는 것이다.
“아으, 이거 그 까만 새끼 짓이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야, 이 할망구야, 색깔 얘기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위슨 녀석이야 뻔하지.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으니까 빛이든 섬광이든 갈겨버린 걸 거야.”
밤에 튀어나오는 몬스터 대부분은 그걸로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나쁜 방법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아군까지 죄다 쓰러뜨려서 그렇지.
……그나저나 저 빛,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네.
우리야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니 좋지만, 숲이 작살나는 거 아니야?
몬스터는 어쨌든, 짐승이랑 벌레 중에 밤에 다니는 놈들이 있을 텐데 말이지?
“위슨 자식, 남의 동네 박살내네…….”
“하룻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아무튼 카엘 님, 다 없애면 되죠?”
확연히 들뜬 목소리로 묻는 로나.
당장이라도 튀어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게 눈에 보인다.
메린도 검을 땅에 꽂은 채 기지개를 켜고 있고, 나도시력은 다 회복되었다.
블루벨도 비실비실 일어나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터.
우리 넷은 언제든 출격할 수 있다.
문제는……
“누우운! 내 누우우운!”
“어떤 새끼가 섬광 터뜨렸냐! 로완, 너 이 새끼!!”
“저 아니거든요!”
자경단이 여전히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둬도 되나?
“으으윽, 루크 사제님, 정말 너무하십시다!”
“괜히 나한테 덮어씌우려 하지 마, 새꺄!”
퍼억!
루크 사제가 빽 소리를 지르며 어느 자경단원의 허리를 힘차게 걷어찼다.
사람의 몸을 돌보는 치유사제가 오히려 해치고 있어!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 경악하는 시선을 마주하며 툭 내뱉었다.
“야, 저거 너네가 처리해. 이 지랄을 떨었으니 피난소의 놈들도 깼을 거야. 한 놈도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돼. 사범놈이랑 자경단원 몇 명만으론 힘들 거다.”
놈들을 우리 네 명이서 해치우라고?
대충 세어도 서른은 될 거 같은데?
그것도 인간 서른이 아니라 곰이랑 나무귀신이랑 기타 등등이 섞여 있는데, 그걸 네 명만으로 다 해치우라니.
“그러지, 뭐.”
못할 거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인 후, 세 아가씨를 차례차례 쳐다보며 말했다.
“블루벨, 저 놈들에게 화살 통해?”
“당연하지. 엘프의 화살인걸. 실체만 있다면 다 죽일 수 있어.”
“그럼 저 벽 위에서 화살 쏘면 될 거야. 저거 돌로 쌓은 거거든. 메린이랑 로나는 뭐, 알아서 해. 근데,”
나는 슬슬 시력을 회복하고 있는지 눈을 크게 끔벅거리는 개놈을 노려보았다.
“난 무조건 저 새끼 먼저 족칠 거야. 그것만 알아둬.”
“그래라.” “네!”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메린과, 힘차게 대답하는 로나.
전투의 귀재인 두 사람이 반대하지 않는 건, 나도 충분히 강해졌기 때문일까?
그런 거면 좋겠지만, 딱히 아니어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개놈은 내 손으로 조질 거니까.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성검을 꽉 쥐고서 외쳤다.
“……좋아, 가자!”
그와 함께 곧바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들리는 발소리는 오직 내 것, 단 한 사람 것뿐이다.
나머지 셋은 벽 위를 뛰어넘으며 달려들었으니까.
곧이어 전장의 소리가 울린다.
바닥을 부수는 소리. 묵직한 것이 땅을 울리는 소리.
고통을 호소하는 포효. 짧고 우렁찬 기합소리.
목숨이 끊어지는 단말마의 비명. 내 앞에 끼어든 잡놈이 하얗게 불타는 소리.
그 모든 잡음을 흘려버리며, 내 유일한 목표를 향해 달려든다.
검게 물든 눈 속에 살의를 가득 담은 채 부릅뜨는 개 같은 놈,
꿈에도 잊지 못하는 원수 새끼를 향해!!
“결투다, 튜르 벤스! 이 개 같은 새끼야!!”
“뒈져버려어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튜르 벤스.
촌장님의 막내자식이자 유일한 아들이며, 나랑 동갑인 개망나니 새끼.
어렸을 때부터 마을 아이들을 괴롭히던 이 인성 터진 놈은, 유독 나만 보면 지랄을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냥 지나가고 있으면 발을 걸고, 심부름하는 중이면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게 만들었으며, 군것질거리를 들고 있으면 반드시 빼앗아갔다.
다른 더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도 내 것을 노렸으니, 정말 개 같은 새끼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씨발! 너 새끼 때문에! 강도가 제일 싫어, 개새끼야! 알아?!”
한 마디씩 끊어 소리치면서 검을 내려친다.
놈의 머리를 막고 있는 검과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긴다.
뭔 짓을 하건 이빨이 안 나가는 성검인데다, 루크 사제가 저녁 먹고 몸을 치유해줘서 할 수 있는 막돼먹은 공격법이다.
사제놈이 나를 주의 깊게 보더니 ‘뭔 지랄을 했길래 이 꼬라지냐’고 머리를 후려치고, 기도를 끝낸 뒤엔 ‘한 번에 안 끝나잖아’라면서 또 한 번 후려치는 걸 당한 보람이 있었어.
힘주어 팔을 크게 여러 번 휘두르는데도 평소처럼 팔이 저리지 않는다.
루크 사제놈은 정말 고마운 씹새끼야.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네.
아니, 내 몸에 독기가 존나 쌓여 있는 게 내 탓이야?
내가 독기 주워 먹었어? 부모님 손에 붙잡혀서 먹혔던 거구만, 왜 나한테 지랄이야?!
간이 맛탱이 간 게 내 잘못이냐고!
“크아아아! 사제면 다냐, 씨바아알! 또 존나 패고 싶다아아!!”
원한을 담아 외치며 연이어 내리쳤다.
채앵! 챙! 챙!
“근데 네가 더한 놈이야!! 네가 훨씬 더 개 같아!!”
“미친 새끼가! 혼자 뭐라 지껄이냐!”
놈이 으르렁거리듯이 소리치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검이 쳐내지면서 몸이 흔들린다.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사선으로 올려 벤다.
허공을 베는 감각에 혀를 차고,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땅을 박차고 놈에게 달려든다.
허리를 노린 횡베기. 역시 피해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곧바로 찔러들어온다.
칼날로 툭 쳐서 궤도를 틀어버리는 동시에, 몸을 옆으로 틀면서 팔꿈치로 놈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컥!”
“그간 좋았냐?! 나 존나 패고 비웃으니까 기분 째졌었지?!”
뒤로 물러나는 놈을 쫓아가며 검을 휘두른다.
도중에 끼어드는 나무의 뿌리를, 곰의 주둥이를 잘라서 놈에게 던진다.
“네 누나 년이랑 같이 부모 얼굴에 거름 칠하고 다니는 게 그리 좋았냐?!”
촌장님의 넷째 딸인 뮤티.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 딸이 사람이 되고자 내버린 성질머리를 다 주워먹은 쌍년이며, 저 개놈이랑 같이 염병을 떨고 다니던 지랄병 환자이기도 하다.
내가 어느 정도 힘이 붙으니까 안 그랬던 척 말 걸던 게 어찌나 구역질이 나던지.
제일 신기한 건 그 여자가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헤벌쭉 웃는 남편을 보면서 눈이 참 삐었다 싶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새끼가 더 나쁜 놈이야.
그 여자는 입만 나불댔지만, 이 개놈은 주둥이랑 손을 같이 놀렸으니까!
“대답해, 개새끼야!! 그림자여도 기억은 다 가지고 있을 거 아냐!!”
“입 닥치고 뒈지기나 해라, 병신아!”
놈이 내가 던진 흙더미를 피하며 베려고 파고든다.
그 검격을 흘리면서 빠르게 반격한다.
사각.
목 대신 머리카락이 조금 잘려나가는 게 보였다.
귀 끝도 조금 잘라진 것 같다.
“큭……! 개병신 주제에……!”
“내가 석 달 동안 논 줄 알아?! 너처럼 존나 농땡이 까고 산 줄 아냐고!”
검을 몇 번 맞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놈은 석 달 전이랑 똑같다.
칼솜씨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
실상은 어쨌든 촌장 자식으로 산 놈이, 그것도 나처럼 허약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넌 씨발, 친아들이었어도 구더기야!! 여자나 후리고 다니는 놈한테 촌장 물려줄 정도로 네 아버지가 멍청한 줄 알았냐?! 아니면 검이라도 잘 쓰든가!!”
“닥쳐, 닥쳐! 그 입 닥쳐, 씨발 새끼야!!”
미친듯이 소리지르면서 놈이 검을 마구 휘두른다.
주변에 있던 몬스터…… ‘그림자’가 그 칼날에 베여서 형체를 잃고 빛 속에 스러져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이 두 눈을 부라리며 검을 내려친다.
채앵—!
그대로 짓누르려는 듯이 힘을 주는 놈을, 반대로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다.
다른 몬스터에겐 무척이나 노리기 쉬운 먹잇감일 터.
그러나 달리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동료들이 알아서 치워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맙기도 하지.
“네가 뭘 알아!”
불꽃이 튀기는 가운데, 놈이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뭘 하건 에스트렐, 에스트렐!! 아버지는 늘 네놈을 들먹였어! 어린 에스트렐은 벌써 글을 뗐다는데 넌 뭐냐! 부모님 드리겠다고 낚시에 꼈다는데 넌 뭐냐!!
단 한 번도! 아버지는 날 본 적이 없어!!”
놈이 목이 터져라 소리치면서 한 발짝 물러나더니, 가볍게 도약하면서 내려친다.
옆으로 피하자, 그걸 예상했다는 듯이 몸을 낮춘 상태로 발목을 베려 든다.
그럴 줄 알았기에 앞으로 뛰면서 놈의 턱을 걷어찼다.
“으아아아아!!”
놈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달려든다.
왠지 전보다 빨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이 빠진 건 아닐 거야.
이 새끼 면상을 볼 때마다 기운이 새로 솟구치고 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놈은 느리다.
바닷가 마을에서 싸웠던 그 기사놈보다도 못해.
그러니 그때보다 더 확실하게, 철저하게 죽일 수 있어!!
“네놈만 없었어도 이렇게는 안 됐어!!”
또 다시 튀기는 불꽃.
또 다시 시작된 힘겨루기.
그 속에서, 놈이 또 한 번 울분을 토한다.
“네까짓 게 뭔데 존나 재미없는 글공부를 하게 만들어?! 검 대련에 이겨도 기쁘지 않게 하고! 쓸모없는 개병신 주제에, 왜 내가 네놈이랑 비교당해야 했냐고!!”
“어쩌라고, 개새끼야! 내가 촌장님한테 그러라고 부탁했냐?! 너 씨발, 그딴 이유로 나한테 개지랄 떤 거였어?! 이 새끼, 진짜 대가리 병신이었구만?!”
나는 명색이 필경사, 글 쓰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 놈이 또래보다 글을 모르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글공부 존나 열심히 했다.
제대로 뛰지도 못할 정도로 병약한 탓에, 그거 말고는 달리 할 게 없기도 했지만.
난 내 아버지 아들답게 살려고 애썼을 뿐이야.
아버지처럼 사냥을 잘하는 건 꿈도 못 꾸지만, 글을 잘 쓰고 읽는다는 것만이라도 이으려고 했을 뿐이다!
“난 필경사 아들이야!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등신아! 넌 씨발, 촌장 아들이었잖아! 당연히 기대치가 다르지!!”
놋지빌의 촌장은 대를 물려서 이어진다.
혈연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마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촌장 자식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의 일을 옆에서 보고, 마을 일에 대해 논의하는 걸 들으며, 나이를 좀더 먹은 후엔 직접 여기저기를 다니며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관리하는 법이 몸에 배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하나는 자식이 너무 어리거나, 또 하나는 자식이 사고를 당해서 죽었거나, 마지막은 굉장히 드물지만 자식이 너무 병신인 경우에 다른 사람을 세운다.
그리고 이 새끼는 그 희귀하다는 마지막 경우에 해당된다.
“네가 하도 병신 같이 구니까 외지인인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 다니신 거 아냐!!”
그 탓에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셔야 했다.
축제가 열릴 때마다 며칠 밤을 새셔야 했고,정초마다 나와 엄마를 두고 수도로 가야 했다.
올해는 하마터면 ‘며칠 집을 비우는 사이에 아들이 죽었다’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지?
그게 다 이 새끼가 개 같이 산 탓이다.
이 새끼가 성실했으면 좀 덜 바쁘게 사셨을 거야.
엄마도 좀 덜 외로웠을 거고!
“하아앗!!”
“으윽!!”
젖 먹던 힘을 다해 밀어낸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마을의 구심점이 돼야 할 놈이! 앞장서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니는데! 너 같으면 잔소리 안 까겠냐, 등신 새꺄!!”
“닥쳐!! 저주덩어리 주제에……!!”
“저주? 하, 말 잘했다, 병신아! 네 꼬라지를 봐! 넌 네가 아직도 사람인 줄 아냐?! 나한테 저주덩어리라고 하던 놈이, 메린에게 괴물이라 하던 놈이 참 꼴 좋다! 이제 누가 저주덩어리이지? 누가 괴물이냐고!!”
“아아아! 으아아아!!”
채앵—!
놈이 쳐내면 쳐내는 대로 몸을 가누고서 휘두른다.
피하면 피하는 대로 쫓아가서 벤다.
팔이 잘리건 귀가 떨어지건, 뺨에 생채기가 생기건 손가락이 똑똑 떨어져가건 내 알 바 아니야.
놈의 모가지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휘두른다!!
“넌 내가 없었어도 이 꼬라지가 됐을 거다! 인성이 글러먹었으니까! 입양이 아니라 친아들로 속여서 키운 남의 새끼이고!”
“아아아아!! 닥쳐! 닥쳐어어!!”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놈의 검을, 강하게 후려치듯이 한 번 쳐낸다.
채애앵—!
손이 떨릴 정도로 큰 충격과 함께, 놈의 시커먼 검이 숲 속 어딘가로 날아간다.
그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놈은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난 촌장 아들이야! 촌장 아들이라고! 나한테 남은 특별함은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어째서! 어째서어어!!”
등신다운 단말마로군.
‘그림자’가 아니라 진짜 그 개놈이 서 있는 거 같아.
놈이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었다면 뒷목이나 명치를 갈기고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은 튜르 벤스의 그림자.
이미 죽은 놈의 망령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놈의 허리를 가르고, 가슴을 쪼개는 데에 망설일 이유 따위 하나도 없었다.
휘익.
“커허……!”
숨이 막힌 것처럼 소리를 내지만, 말끔히 양단된 몸뚱이와 놈의 입에서 피는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나올 리가 있나. 그냥 그림자인데.
“어째서……! 나는 촌장, 아들인데……!”
“지랄. 새끼 뻐꾸기이겠지.”
끝까지 헛소리하는 놈의 대가리를 갈라버렸다.
성검으로 베어서 그런지, 놈의 형태는 뭉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하얀 불꽃에 삼켜져 갔다.
튜르 벤스의 ‘그림자’는, 끝까지 튜르 벤스인 채로 하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잘 가라, 개놈 새끼야.”
이리저리 흩날려 사라지는 하얀 재를 보며 툭 쏘아붙였다.
놈의 껍데기를 완전히 없앴으니 또 다른 ‘그림자’가 저 놈의 모습으로 튀어나오는지는 않겠지.
돌아서서, 아직 끝나지 않은 전장으로 향했다.
웅장히 서서 가지와 뿌리를 흔드는 나무귀신을 태우고,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그림자를 없애버렸다.
이제 미련은 없다.
……어째서인지 한층 더 또렷해진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