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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20화 (420/475)

〈 420화 〉 396화 : 반복되지 않는 역사 (2)

* * *

무슨 상황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제자리에 선 채, 나는 배에 힘을 주어 크게 소리쳤다.

“메린!! 그만해!!”

그리고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끼며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아, 존나 아프다는 말도 모자랄 만큼 존나 아파……!!

원래도 소리지르면 상처까지 울려서 아픈 법인데, 하필 다친 데가 목이라서 더 직접적으로 진동이 가해지는 듯했다.

소리를 질러서 시선이 쏠리는 것도 안중에 없을 만큼 격심한 통증에, 저절로 신음하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런 내 귀로, 메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그만하라고? 나? 저 씨발년이 아니라 내가?! 미친놈아, 너 저 개년한테 죽을 뻔했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뒤졌다고!! 호구 짓 작작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등신 새끼야!!”

아잇, 진짜! 누가 호구야, 호구는?!

빌어먹을, 내 입으로 쏘아붙이고 싶은데 목이 아파서 못하겠어.

또 크게 소리지르면 이번엔 정말로 기절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터덜터덜 녀석에게 다가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는 주먹을 감싸 쥐고 속삭였다.

“……나 안 죽었잖아.”

격통 때문인지, 내가 듣기에도 목소리가 꽤 갈라져 있다.

게다가 상처를 막느라 목을 누르고 있는 탓에, 제대로 말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다.

“저만큼 했으면 됐어. 저 사람 죽인다고, 이거 낫는 거 아냐. 마을에서, 사람 죽이면, 큭, 안 된다고 한 거 잊었어?”

“저 씨발년은 해도 되고?!”

“안 되니까, 윽, 붙잡혀 있잖아.……메린, 나 지금, 말할 때마다 존나, 아프거든? 일단 말 들어. 그만해.”

“끄으으으으!!”

메린은 이를 악물고 분노 어린 소리를 지르면서 발을 힘껏 굴렀다.

콰아앙!

……우와, 방금 발이 공중에 떴어!

게다가 녀석의 주위로 구멍이가 패여버렸고!

메린의 손을 붙잡고 있던 덕에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설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마주한 메린의 얼굴은 여전히 잔뜩 찡그려져 있다.

발구르기 한 방으로 땅을 파버리기까지 했건만,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은 것이리라.

그래도 촌장부인을 끝장내는 건 포기한 모양인지, 메린은 긴 숨을 내쉬고 제자리에 바로 섰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두 어깨와 다리를 잡고 있던 블루벨과 로나가 각각 손을 떼고 한숨을 푹 쉬었다.

여전히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는 촌장부인엔 눈길 하나 주지 않으며, 메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로나, 이 병신 좀 봐줘.”

“저보다는 루크 사제님이 보시는 게 훨씬 나아요. 다른 데도 아니고 목이니까요.”

“……그럼 데려올게.”

“아냐, 메린. 그럴 필요 없어. 여기 오고 있거든.”

블루벨이 귀를 쫑긋거리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바람이 살랑거렸다.

왠지 희미하게 비명이 들린다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 강풍이 몰아치며 엘크가 하늘에서 훅 내려오더니 사뿐히 착지했다.

즐겁다는 듯이 껄껄 웃는 엘크의 등에는, 고삐를 잡은 채 등을 꼿꼿이 펴고 있는 위슨과 거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는 루크 사제가 타고 있었다.

그래도 누구 한 명은 사제놈을 부르러 갈 정도의 정신머리가 있었던 듯했다.

고삐를 놓고 엘크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위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깊게 한숨 쉬었다.

“뭐야, 개판 났다더니……. 이미 다 끝난 거야? 또 나만 못 봤어? 환장하겠네.”

“……아니, 그게 그렇게 보고싶냐?”

“나중에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더 재밌잖아요. ……응? 뭐야, 형 목 다쳤어요? 어쩌다?”

태평하게 재잘대던 위슨의 눈초리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위슨은 갓난아기일 때 목에 손상을 입어서 정령의 힘이 없으면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아마 그 때문에 내 상처를 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리라.

그냥 스쳤을 뿐이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저 년이 칼로 그었어.”

메린이 분노가 절절 끓는 듯한 목소리로 촌장부인을 가리키며 툭 내뱉었다.

“………”

일순, 공터가 정적에 잠겼다.

표정이 굳어버린 위슨이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는 동안, 엘크가 몸을 가볍게 흔들어서 루크 사제를 툭 떨어뜨리는 게 보였다.

마침내 위슨의 시선이 촌장부인을 향한 순간,

땅 속에서 늑대가 튀어 올라오더니 촌장부인을 향해 크게 울부짖었다.

“우우우—!!”

“아아악?!”

흙더미가 밧줄처럼 부인의 몸을 감싸며 꽁꽁 묶어버리기 시작했다!

부인의 팔을 각각 붙잡고 있던 아버지와 사범님을 뒤로 밀어버린 건 덤이었다.

순식간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촌장부인은 한층 더 격하게 몸부림치면서 소리쳤다.

“이거 뭐야!! 풀어줘, 이 망할 놈들아!! 저 년을, 저 새끼를 죽여야 한단 말야아아!!”

“으르르르!!”

늑대가 부인을 보며 으르렁거리자, 부인의 주변 땅이 홱 꺼지더니 머리 외에는 전부 땅 속에 묻힌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뒤에도 부인이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걸 보아, 메린에게 했던 것처럼 땅 속에서 몸을 조여버리고 있는 듯했다.

“아아아아! 이 저주받을 놈들!! 반드시 내 아들의 원수를 갚아줄 거다아아!!”

꽤 아플 텐데, 부인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냥 기절시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순간,

“그 빌어먹을 원수는 내가 먼저 갚겠다, 망할 여편네야!!”

갑자기 아버지가 더 큰 고함을 지르면서 부인에게 뛰어오더니 그 머리를 세게 걷어차버렸다!

완전히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는 험악한 눈초리로 축 늘어진 부인의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내 아들을 건드려? 어미나 자식 새끼나……!”

“아……”

그 옆에서 넋을 놓고 싶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범님.

전대 사범님이라도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먼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이 놈의 마을은 진짜 하루도 안 빼놓고 지랄들이네. 아오, 이걸 확 멸망시킬 수도 없고!”

“………”

그리고 비실비실 일어나며, 담당사제로서 해선 안 되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는 루크 사제였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여전히 뜨뜻한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은 채,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을 쉬었다.

한차례 난리가 끝난 후, 나는 그대로 루크 사제에게 붙잡혀 우리집 맞은편의 임시 병동으로 끌려갔다.

목의 상처만 고치면 되니 그냥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려도 될 것을, 사제놈은 위중환자를 위해 따로 마련한 방이라면서 나를 굳이 그 안에 집어넣으려 했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로나가 내 치료를 사제놈에게 넘겼기에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앉아라.”

“……”

시키는 대로 바닥에 주저앉자,루크 사제가 내 맞은편에 앉아서 한 손은 내 목에 대고, 다른 손으로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괜히 최고 수준의 치유사제가 아니라는 듯이, 그가 입을 떼자마자 통증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루크 사제가 손을 뗀 것은 그로부터 조금 더 뒤였다.

그는 긴 숨을 내쉬더니, 멍하니 목을 매만지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말 나오지?”

“어? 어어, 응. 되게 잘 나와. 고마워.”

말이 나오는 중에 아프지 않을 뿐 아니라, 갈라진 듯한 느낌도 전혀 들지 않는다.

두 손과 발로도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치유 기도를 받았지만, 결과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항상 놀랍다.

정반대 방향으로 꺾였던 팔이 도로 멀쩡해지고, 으스러진 발이 제 형태를 되찾아서는언제 뭉개졌냐는 듯이 평소처럼 발가락을 꼬물거릴 수 있으니까.

칼에 베여서 피가 철철 흐르던 목도, 자그마한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하게 고쳐지고 말야.

진짜 신기하다니까.

“그래? 그럼 다음 거 하자.”

“다음 거?”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않고, 사제놈은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랍 위에 올려진 세숫대야를 가져와서는 내 앞에 툭 두는 것이었다!

이, 이거 설마……!!

“어차피 할 거 지금 끝내버리자고.”

“……!”

놈의 말에 가슴이 철렁였다.

틀림없어. 이 새끼, 지금 독기 치료할 생각이야!

이러려고 이 방에 끌고 왔구만?!

곧바로 자리를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꽉 닫혀 있는 문을 부술 기세로 뛰려 했건만,

“어딜.”

“크헉?!”

놈이 내 발을 걸어버리면서 팔뚝으로 배를 콱 눌러버렸다!

그리고는 오금을 세게 걷어차서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그대로 뒷머리를 꽉 누르며 고개를 숙이게 만들고는, 아예 뒤를 돌도록 방향을 틀어버리는 것이었다!

일말의 주저도 보이지 않고, 약간의 막힘도 없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패다니……!

와, 치유 기도보다 이 새끼가 사제인 게 더 신기해!

“자, 잠깐 기다려! 지금 이거 받으면 오전 완전히 끝나버리잖아!”

“그러겠지.”

“아직 그 난장판 뒤처리가 안 끝났어! 그 썩을 여편네가 왜 뻐꾸기 짓까지 해야 됐는지, 뭐 그런 거 알아야 된다고! 메린도 달래줘야 되고!”

“벤스네 여편네 사정을 알아야 한다고? 왜, 궁금해서?……하하, 구라 치지 마십쇼, 형제님. 마을 얘기도 듣기 싫어한 놈이 퍽이나 궁금하겠다.”

……씨발, 들켰다!

그보다 역시 내가 듣기 싫어하는 거 알고 일부러 더 줄줄 읊었던 거였잖아!

“그리고 네 여자는 밤에 실컷 달래주면 되잖아. 몸으로.”

“사제라는 새끼가 뭔 말을…… 아앗, 잠깐만요, 사제님! 촌장님한테 먼저 사정을……!”

“응, 네 애비가 할 거야. 됐지? 시작한다.”

“아아악! 사람 살려요!!”

세숫대야와 마주보며 소리치는 내 머리 위로, 사악한 사제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그래~ 살려드릴게~ 야, 새꺄, 버둥거리지 마. 다리 분질러버린다!”

“살려줘요! 여기 사람 잡는 미친 사제가 있어어억!!”

복부에 대어진 손에서 열이 느껴진다.

목을 포근히 감쌌던 따스함이 뱃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감쌀 기세로 흘러들어오면서 절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온 몸을 활활 태워버릴 듯이……!

“카하……!!”

숨이 턱 막힌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탓에 나도 모르게 질끈 감아버렸다.

내장이,

쥐어짜이는 거 같아……!!

머리 위에서 들리는 기도 소리는 안중에도 없어질 만큼 격심한 통증.

이때까지 당해온 부상보다 이게 더 아파!!

이윽고 뱃속에서 목으로, 무언가 질척이는 게 올라온다.

이럴 때 기절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멍하니 생각하며 전부 쏟아내버렸다.

잠시 후, 루크 사제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일반환자용 침대에 던져 놓고 어딘가로 휙 가버렸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게, 다들 저 놈한테 한두 번은 무언가 당한 모양이다.

아…… 진짜 죽겠다…….

목구멍은 욱신거리지, 얼굴은 땀이랑 눈물로 엉망진창이지…….

게다가 통증을 견디며 신나게 토하느라 기운을 다 써서, 지금 손가락 까딱일 힘도 없다.

아니, 저 놈이 바닷가 마을의 그 치유사제보다 실력은 월등히 좋은 거 아냐?

그럼 독기를 빼내는 것도 하나도 안 아파야지, 왜 되려 몇 배나 더 아픈 거냐고.

근데 또 기운을 차리면, 치료받기 전보다 몸이 훨씬 가뿐하고 편안하니까 뭐라 불평할 수도 없다.

치료가 끝나고 놈이 낄낄 웃으면서 ‘이제 맘껏 날뛰면서 살라’는 둥 뭐라뭐라 한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라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 일단 눈이나 감자.

뜨고 있기도 힘들다.

그대로 눈꺼풀을 폭 닫아버렸지만, 의식이 가라앉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도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다니, 이 몸뚱이도 참 희한해.

계속 깨어 있어서 뭐 좋을 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지 얼마 안 되어,

“야, 카엘. 자냐?”

인기척이 나면서 나지막이 말을 거는 게 들렸다.

소리가 멀어서 누구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똑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이 담은 온기는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자꾸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그녀의 두 눈동자 빛은 또렷이 보인다.

그 주홍빛에서 느껴지는 건 두 가지.

철철 흘러 넘치도록 가득히 쌓인 불만과 한 줌의 걱정이다.

이따 녀석을 달래려면 어디서 젤리 한 봉지를 구해와야 할 것 같아.

근데 그 전에 일단 불평에 한 번 잠겨서 질식 직전까지 몰릴 듯하다.

왠지 그런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어!

으으, 아까 이 녀석 집에서 내가 그 개놈을 죽였다고 밝힌 걸 따지겠지?

대꾸할 기력도 없으니 녀석이 쏟아붓는 그대로 두들겨 맞을 터.

그래서 내심 바짝 긴장했는데, 메린은 돌연 한숨을 푹 쉬며 물에 적신 천으로 내 얼굴을 살살 닦았다.

그런 뒤,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서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다. 그냥 자라. 불평은 이따 해도 되니까.”

“……”

안 하면 안 될까?

입이 안 되니 눈으로라도 물으려 했지만, 녀석이 내 눈을 손으로 덮어버린 탓에 할 수 없었다.

“한숨 자. 나도 여기 있을게.”

간병할 때마다 그랬듯이, 녀석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속삭였다.

손과 눈가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불러온 건지, 찾아올 기색이 없던 잠기운이 곧바로 몰려와서 바로 곯아떨어져버렸다.

그 후, 다시 눈을 뜬 뒤에도 여전히 오전이었다.

꿈 하나 꾸지 않을 정도로 푹 잔 거 같은데, 목을 다친 것과 독기 치료로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렸는지 몸은 여전히 나른하다.

그래도 혼자 몸을 일으키고 말을 할 정도는 회복되었으므로, 나는 부스스 일어나 앉아 이불을 살짝 들춰본 후, 잠들기 전처럼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있는 메린에게 말했다.

“……야, 너 나 옷 갈아입혔냐?”

“어. 피 묻었으니까.”

“……여기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있는데 그랬다고?”

“뭐 어떠냐? 너 남자잖아. 속옷도 입었고.”

“………”

상당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아니, 어째서인지 뿌듯해하는 얼굴로 일축당했다!

어흑. 여러 사람에게 몸을 보여버렸어!

남자라고 벗은 몸 보이는 게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라고!

근데 이 자식은 뭘 뿌듯해하고 있는 거야?

공공장소에서 약혼자를 벗겨버린 게 자랑스럽다는 거야, 뭐야?!

“히히, 어때? 갈아입히는 거 전혀 몰랐지? 성공이다, 성공!”

“혼자 뭔 소리하는 거야…….”

얼굴을 덮고서 훌쩍였다.

“너희 둘은 진짜 변하지 않는구나.”

쓴웃음이 섞인 말이 들려와 고개를 들자, 대체 언제 온 건지 검술 사범님이 침대 근처에 서 있었다.

“언제 오셨대요…….”

“너 깨기 전부터 있었다, 임마. 여전히 메린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구만?”

“제가 사범님을 눈에 들여서 뭐하겠어요?”

“입 터는 거 보니 멀쩡하네.”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거의 헤집어 놓을 기세로 마구 흩뜨린 후, 사범님은 피식 웃으면서 재차 말을 꺼냈다.

“알맹이는 여전한데, 겉은 그래도 좀 변했더라? 석 달 전에 비하면 좀 사내 티가 나던데?”

“………”

메린 이 자식, 사범님 보는 앞에서 갈아입힌 거야?!

아무리 어렸을 때 좀 가깝게 지냈다고 해도 그렇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은 걸 꾹 참는데, 치료사 아저씨를 돕는 밀렌 누나가 앞을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아, 카엘, 깨어났구나. 다행이야. 몸은 좀 어때?”

“네……. 괜찮아요…….”

정신은 괜찮지 않지만.

내 대답에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누나는, 돌연 입을 살짝 가리면서 키득 웃었다.

“후후, 그래. 역시 기운이 붙은 모양이구나. 보이는 것만큼. 꽤 남자다워졌던데?”

“……”

“뭐, 그만큼 여행이 고되었던 거겠지. 푹 쉬어~”

밀렌 누나는 살짝 손을 흔들며 다시 지나갔다.

기운이 붙었다? 보이는 것만큼?

그리고 꽤 남자다워졌다고?

“………”

그러니까 지금, 저 누나도 봤다는 거지?

내 속옷 차림.

“……………”

주섬주섬, 천천히 이불을 뒤집어쓰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우으으으으……!!”

“엥? 뭐야, 너 우냐? 왜? 쪽팔려서? 나 참, 진짜 별 걸 다 쪽팔려 하네. 안 그래요, 사범님?”

“응, 안 그래, 임마. 하…… 불쌍한 녀석 같으니.”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투박한 손길엔 안쓰러움이 한껏 묻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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