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 397화 :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대답 (1)
* * *
경악과 수치심에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른 후, 침대를 비워주려 병동을 나섰다.
나야 기분전환 좀 하면 다시 멀쩡해질 테지만, 자경단원이나 마을 사람들은 연이은 싸움으로 심신 모두 기진맥진해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감기 걸린 사람도 있고.
그래서 밖으로 나온 건 좋은데……
이제 어디로 가야 되지? 갈 데가 없는데.
원래 내가 살던 집은 임시 촌장집이 돼서 계속 사람이 들락거리는데다, 루크 사제가 내 방을 차지해버렸다.
신전도 되찾았는데, 왜 아직도 남의 집에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메린의 집은 거의 반파된 거나 다름없으니, 느긋하게 앉아 있기도 뭐하다.
만만한 광장에 가자니 근처에 피난소가 마련되어 있어서 북적거리지, 담당사제도 안 가는 신전에 가는 것도 좀 그렇지…….
그렇다고 검술 훈련소로 갈 수도 없다. 너무 머니까.
때문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는 동안 이것저것 다 결정됐던 모양이었다.
메린과 사범님이 입에 올린 말은 ‘어디로 가냐’가 아닌 ‘가자’, 그 한 마디였다.
다만 나는 아직 몸이 나른해서 빠르게 걷지 못하기에, 메린의 부축을 받으며 가야 했다.
“……그냥 좀 천천히 걸으면 되지 않냐? 굳이 이러고 가야 돼?”
“왜? 후딱 가서 쉬는 게 좋지 않냐?”
“그것도 그런데…….”
마침 또 한 사람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만 좀 알고 지내던 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사범님을 시작해서 인사를 건넨 후, 우리를 보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
저 사람 방금 ‘어이쿠, 둘이 참 사이좋네.’라고 생각했을 거야.
틀림없어!
이제 만나게 되는 사람에게, 나랑 메린이 여름철 염소처럼 아주 그냥 찰싹 붙어 있더라고 하면서 낄낄 웃겠지?
내가 녀석의 어깨를 두르고 있고, 이 녀석이 그 팔을 꼭 잡으면서 내 허리를 받치고 있으니까.
근데 이건 부축이지 그런 게 아니다.
진짜로 애정 표현 겸 과시하는 중이었다면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텐데!
그 이후에도,
“아, 카엘…… 아하하, 여전히 둘이 사이좋구나. 뭐, 그럴 것 같긴 했지만 말야.”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마주치는 사람 대부분이 인사 대신 사이좋다는 말을 먼저 내뱉었으며,
“하…… 참 좋~겠다~ 누구는 애인도 없어서 외로워 죽겠는데~ 야, 안 덥냐? 덥다고? 하…… 나도 너처럼 더웠으면 좋겠다~”
“아니, 이거 부축이야. 부축. 눈 제대로 뜨고 잘 봐!”
“좋~겠다아~”
“……”
일부는 굉장히 부러워하고, 일부는 조금 굳은 표정을 지으며 지나갔다.
돌겠네, 진짜.
이거 부축이라니까!
“훗.”
“……?”
그런데 어째서인지 메린은 사람들, 특히 여자랑 지나칠 때마다 씨익 웃었다.
내가 몰래 먹으려던 과자를 지켜냈을 때처럼, 굉장히 득의양양한 얼굴로 싱글거리는 것이었다.
특히 여자 자경단원이 지나갈 때마다.
왠지 우쭐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니, 이유는 몰라도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집~ 나 살던 데 박살났으니까 빈집에서 자기로 했어~”
“원래도 많았지만, 몇 군데 더 생겼거든. 청소만 좀 하면 바로 지낼 수 있을 거다.”
메린에 이은 사범님의 말.
빈집이 더 생겼다는 이야기에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사범님은 좀더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동료분들 있잖아. 그래, 그 세 사람. 죄다 대단하더라. 위슨이랬나? 신기한 짐승들을 부리는 아이. 그 아이가 만드는 물약이 보통 뛰어난 게 아닌가봐. 도일 씨가 보조로 밀려나셨더라고.”
블루벨은 경계초소에서 적을 발견하기도 전에 활로 해치워버리고 있고, 로나는 솔선해서 마을 주변을 빙빙 돌면서 몬스터를 없애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보다 더 힘이 철철 넘친다고 말하며, 사범님은 무척 감탄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여유만 됐어도 그 엘프분께 대련 한 번 요청하는 건데 아쉬워. 메린, 넌 붙어봤지? 어때?”
“단검으로 쌍검술 쓰는데, 땅 위를 뛰어다닐 때 힘을 거의 안 써요. 가슴 없는 만큼 날렵하고요.”
……가슴이 상관이 있나?
뭐, 움직일 때 출렁거리면 불편하긴 하지?
앞으로 솟아나와 있을수록 적의 사정거리에 닿고 말야.
그래서 속옷으로 꽉꽉 조이고 누르면서 싸매는데, 그거 꽤 답답하단 말이지…….
사범님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넌 뭘 안다고 고개 끄덕이냐? 너도 붙어봤어?”
“아뇨. 여전사한테 가슴은 정말 불필요한 부위구나 싶어서요.”
“………왜 네가 그걸 공감하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행여나 메린 녀석이 무언가 입을 놀리기 전에 미리 입을 막아버렸다.
어느 대머리 변태 마법사 때문에 하루동안 여자가 됐었다는 이야기까지 퍼지게 할 순 없어……!
그런 내 모습에서 무언가 느낀 건지, 사범님은 참 감사하게도 더 캐묻지 않았다.
후,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는 메린의 입을 막은 손을 치우고 녀석에게 속삭였다.
“야, 너 장서관에서 있었던 일 말하지 마라. 말했다간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혀 깨물어도 안 죽는데?”
“목 찔러서 죽을 거야.”
“내가 막을 건데?”
아잇, 진짜.
뭐 하나 통하는 게 없네.
다른 거 없나?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궁리한 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잘 때 안 안아줄 거야.”
“으, 알았어. 말 안 할게!”
곧바로 사색이 되어서 굳게 약속하는 메린이었다!
아니, 이게 통하네.
꼭 꼬맹이에게 과자 안 준다고 협박하는 것 같아.
뭐, 아무튼 내 동료들은 오늘도 여기저기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내일 아침에 여길 떠날 건데, 안 쉬어도 되나?
덕분에 자경단원들은 잘 쉬겠네.
“아, 맞아. 그러고보니 그 작은 사제님도 상처 치유는 굉장히 뛰어나시더라. 벤스 부인이 아주 말끔해졌어. 정신은 완전히 나가버렸지만.”
“정신이……? 어, 혹시 아버지가 걷어차서……?!”
“아냐아냐, 에스트렐 씨가 촌장님과 부인에게 어제 일어난 이야기를 전하셨거든. 네 어머니랑 튜르, 그 외에도 예전에 사라졌던 사람들을 흉내내는 놈들이 나타났었다고.”
즉, 그 개놈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그날 이후로 며칠 내에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인 건 놈의 망령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아버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촌장부인은,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행복한 환상을 보기로 했다.
아들이 쓰던 베개에 아들의 옷을 입히더니, 튜르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르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혹여나 그 입에서 친아버지의 이름이 나올까 했으나, 애초부터 부인은 아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그냥 아들의 이름만 줄창 부르고 있다나.
“그럼 촌장님은 이제 어쩌신대요?”
“글쎄다. 거기까지 듣고서 너 좀 살펴달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내가 너 보는 동안에 메린이 옷가지를 가져왔고……”
그리고 다들 보는 앞에서 훌훌 벗겨진 건가. 흑.
눈물을 훔치는 동안, 나와 메린이 묵기로 한 빈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여니, 곧바로 거실 겸 부엌 겸 식당이 나타났다.
양쪽 벽에는 문이 총 두 개 나 있는데, 하나는 침실이고 하나는 창고로 이어져 있었다.
침실에는 침대 하나와 자그마한 요람, 그리고 화장대와 서랍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벽 한쪽에는 배낭 두 개가 나란히 뉘여 있는데, 아무래도 메린 녀석이 미리 가져다둔 모양이다.
아무튼 침대 위에 베개가 셋 놓여 있는 걸 보니, 대충 네 식구가 살던 집이겠군.
아마 부부와 어린애, 그리고 갓난아기가 하나 있었을 것이다.
“……”
근데 진짜 집이 빈지 얼마 안 됐나봐.
바닥과 테이블은 물론이고, 심지어 창고 안에도 먼지가 그리 쌓여 있지 않으니 말야.
………어린애가 둘이나 있는 집인데, 몬스터 때문에 죽은 걸까?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식기랑 조리기구는 너희 거 써야 할 거야. 이사하면서 다 가져갔거든.”
이사?
죽은 게 아니고?
놀란 눈으로 사범님을 보자, 메린에게서 주전자를 건네받던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리 놀래? 싹 다 죽어서 빈 줄 알았어? 그런 집도 있긴 한데, 너희에게 내줄 정도로 정신 나가진 않았다.”
“……”
“여기 살던 가족은 지난주에 이사 갔어. 식구가 너무 많아졌거든. 아무리 오순도순 모여 사는 게 좋다고 해도, 이 집에서 다섯 명은 좀 힘들지. 계속 버텼었는데, 결국 안 되겠던 모양이야.”
뭐, 다섯?!
그럼 침대에 넷이 자고 있던 거야?
아니, 애들용 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또 어떻게 만들었대?
잠자리 때에만 잠깐 밖에 나갔다 오기라도 했나?
……뭐, 아무튼 이사간 거였구나.
그것도 행복한 이유로 말야.
그 집 가장이야 가족 먹일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겠지만, 그래도 가족이 늘어난 건 좋은 일이다.
“사범님도 자녀가 둘이셨던가요?”
“그냥 이름 불러. 오늘은 비번이야.”
“비번? 사범 일에 그런 게 있었나?”
“오늘부로 생겼다. 루크 사제님이 보호 결계라는 걸 해두셨다며? 에스트렐 씨가, 한동안은 내가 없어도 된다고 하시면서 정신머리 좀 챙겨두라고 혼내시더라.”
사범님… 아니, 티치 형은 씁쓸히 웃으면서 화덕에 주전자를 놓고 불을 피웠다.
자포자기로 몸 던지는 짓을 해버릴 정도로 지쳤었으니, 쉬면서 기운 좀 차리라고 강제로 휴가를 줘버린 모양이군.
그럼 가족이랑 같이 보내는 게 낫지 않나?
나는 배낭에서 찻잎을 꺼내며 물었다.
“기왕에 쉬는 거 가족이랑 보내지 그래요?”
“야, 그건 쉬는 게 아냐. 오히려 기운 더 빠져.”
“엥? 왜요?”
“너도 애 둘 생겨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형은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저 먼 곳을 쳐다보았다.
음……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가족보다는 우리랑 있는 게 휴식이 되는 모양이다.
뭐, 메린이랑 둘이 있고 싶은 게 솔직한 심경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셋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
과자가 없는 게 좀 아쉽지만.
“걱정 마. 차 마신 다음엔 더 있으라고 해도 갈 거야. 한 시간만 나한테 써주고, 나머진 둘이서 오붓~하게 보내라고.”
“………저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얼굴에 다 써 있다, 임마! 내가 네녀석이랑 알고 지낸 게 십 년이야. 그 정도도 모르겠냐?”
“크흠흠.”
제길, 들켰네.
공연히 크게 목을 가다듬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이내 우리는 각자 앞에 찻잔을 두게 되었고, 티치 형은 찻잔을 조금 기울인 후에 빙긋 웃었다.
“그래서 여행은 어땠어?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석 달이나 다녔으니 뭐 이야기할 만한 일은 있을 거 같은데.”
“별별 일이 다 있었죠.”
마녀에게 시달렸었지, 대륙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찾으러 어느 돈독 오른 도시에 갔었지…….
내가 겪은 일만 얘기해도 하루는 꼬박 걸릴 거다.
“그래? 그럼 너랑 메린, 둘 중에 누가 덮쳤냐?”
“………”
아니, 모험 이야기 들으려는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그쪽으로 얘기가 빠지는 건데?!
“티치 형, 피곤하면 그냥 들어가세요. 갑자기 뭔 뜬금없는 소리를……”
“메린, 네가 덮쳤냐?”
곧바로 날 무시하고 메린에게 묻는 티치 형.
십여 년간 우리를 본 사람답게 날린 치명타였다!
아앗, 안 돼!
메린 녀석은……!
“으응…… 내가 하자고 하긴 했는데,”
“그럴 줄 알았어! 야, 임마, 대답하지 마! 이 사람들이 대낮부터 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난 가만히 있었으니까 이 녀석이 날 덮친 거죠?”
“오~”
“말 좀 들어어어!!”
기껏 회복된 마음이 도로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았다.
티치 형이 굉장히 밝은 안색이 되어 집을 떠난 후, 오후가 되기까지 메린과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빨래를 하고, 남은 식량을 확인해보고, 의자를 하나 끌어와서 서로 머리를 다듬어주는 등,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에 비해 꽤 평온한 시간이었다.
뭐, 녀석은 여전히 머리 자르기 싫어했지만.
그래도 ‘땋은 머리가 짧아져도 예쁘다’, ‘사실 넌 뭘 해도 존나 예쁘니까 조금 더 잘라도 된다’는 둥 열심히 구슬려서 허리 길이까지 자르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을 다 마치고서 차 한 잔이나 더 할까 싶은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나가보니, 자경단원이 혼자 문 앞에 서 있었다.
“촌장님이 부르셔. 너랑 메린 둘 다.”
“어어…… 어느 촌장님이요?”
멀뚱거리며 묻자, 자경단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 다. 벤스 촌장님 댁에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
무언가 마음의 정리라도 한 걸까?
고개를 끄덕이며, 곧 가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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