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398화 :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대답 (2)
* * *
벤스 가문의 집을 찾는 건 무척 쉽다.
울타리문에 잎이 둥글고 무성한 나무 문양패가 걸린 집.
그곳이 바로 벤스 성씨를 가진 사람이 사는 집이다.
내 기억으로 놋지빌엔 벤스가 서넛 되는데, 이중에서 촌장 일을 하는 사람의 집을 찾는 건 빵 뜯어먹는 것만큼이나 엄청 쉽다.
이 마을에 딱 한 채 있는 3층집으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자식이 여섯이나, 그것도 죄다 성년까지 안 죽고 살아남았으니, 다른 집들보다 크고 높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딸만 다섯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차례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 빈 자리들을 볼 때마다 쓸쓸했겠지만, 언젠가 막내아들이 도로 채울 거라 기대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 꿈은 이제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막내아들의 몸엔 벤스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고, 가슴으로 품겠다 결심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그 죄를 내내 숨기고 있던 아내와 관계를 회복하는 건, 설령 창조주의 기적이 내리더라도 불가능하다.
이젠 있지도 않은 아들과 둘이서 사는 환상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딸들도 다 출가한 지금, 벤스 촌장은 완전히 혼자이다.
그걸 나타내듯, 촌장님은 무수히 많은 의자가 놓여있는 테이블 한편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엔 임시 촌장인 내 아버지, 그리고 어째서인지 루크 사제가 그 옆에 앉아 있다.
사제까지 동석하다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메린과 함께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왠지 4:1로 대치하는 구도로군.
“저흴 찾으셨다고요?”
조용히 말을 꺼내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했다.
“촌장님과 합의를 봤다.”
“합의라뇨?”
웬 합의? 부인에 대한 피해보상 얘기인가?
메린이 부인을 줘팬 거랑 아버지가 부인의 머리를 차버린 것, 둘 중에 어떤 게 더 배상책임이 큰지 모르겠네.
어쨌든 합의가 꽤 맘에 들었다는 듯,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2주 뒤에 너희 둘 결혼식 올릴 거야.”
“…………네?”
그리고 전혀 예상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니, 이 난리통에 갑자기 뭔 결혼식이야?!
“뭘 그리 놀래냐? 결혼 안 할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요,”
“부인분들이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하셨다는구나. 누비이불을 주겠다는 분도 계셔. 참 고마운 일이야. 아, 너희 둘은 이따 대장간에 들러라. 반지 맞춰야 되니까.”
“때맞춰 신전을 되찾아서 천만다행이야. 역시 결혼식은 신전에서 올려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서로 마주본 채 고개를 끄덕이며 하하 웃는 두 어르신과,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루크 사제였다.
돌겠네, 진짜.
아니, 내가 결혼하지, 본인들이 하시나?
어떻게 당사자를 쏙 빼놓고 본인들끼리 다 정하냐?
게다가 촌장님은 나나 메린과 아무 연도 없잖아!
진짜 어이가 없네.
“하…… 그 말씀하려고 부르셨어요?”
“당연히 아니지.”
툭 내뱉는 루크 사제의 표정은 상당히 찌그러져 있었다.
항상 찡그리고 있긴 하지만, 오늘까지 본 표정 중에 가장 험상궂다.
그새 또 뭔 일이 있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촌장님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걸 보니 저 어르신 때문에 성질이 난 듯했다.
“뭐해? 얼른 본론으로 안 들어가고.”
“……크흠.”
촌장님은 크게 헛기침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엘 군, 부탁이 있네.”
“싫습니다.”
“북쪽…………아니, 그래도 이야기는 들어보고 대답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 아닙니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듯한 촌장님의 눈을 마주하며 똑똑히 대답했다.
“순서를 건너뛰셨으니까요. 부탁하시기 전에 다른 하셔야 할 말씀이 있으실 텐데요?”
“다른 말?”
촌장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한 뒤,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잠시 침묵했다.
그 굳게 닫힌 입이 다시 열린 건, 내가 찻잔을 두 번쯤 기울인 후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는 건가? 전혀 모르겠는데.”
“농담이시죠?”
“진담일세.”
“……”
아버지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언가 체념이라도 한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내가 오기 전에 따져봤던 걸까?
나는 찻잔을 기울이고서 약간 긴 숨을 내쉰 후,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는 촌장님에게 말했다.
“댁 마누라가 나 죽이려 한 거 몰라요? 그거 사과 안 합니까?”
“굳이 할 필요가 있나?”
“……뭐라고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아저씨가 지금 ‘굳이 사과해야 되냐’고 대답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내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촌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치가 자넬 죽이려 들었지. 그래서 거기 있는 것과, 자네 동료가 보복했지 않은가? 자네에게 무슨 상처가 남은 것도 아닌데, 내 사과까지 더하는 건 과하다고 보네만.”
“제가 지금 대가가 부족해서 더 받아내려는 것 같아요?! 당신 가족이 저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그럼 저를 보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말은, 부탁이 있다는 게 아니라 미안하다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와야 되는 게 사람 도리 아니에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메린 일로 다른 사람에게 지랄할 때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셨다.
혹이라는 이름의 산봉우리를 머리에 올린 나를 끌고서.
자그마한 오해로 엄마에게 화를 냈던 부인의 남편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미안하다.’며 과일바구니를 들고 같이 찾아온 적도 있다.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런 껄끄러운 일을 겪은 사람끼리 만나면 인사 다음으로 사과를 하기 마련이다.
미안하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다. 다 끝난 일이니 괜찮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간 뒤에나 다른 용건을 말하는 게 기본 아니냐고!
……그러나 촌장은 지극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내 가족이 저지른 게 아닌데, 왜 내가 사과를 해야 되나?”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가족이 아니라고? 왜 아니야?
아내잖아. 딸 다섯을 낳아준 명실상부한 마누라!
설마 아들새끼 하나 속여서 키운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물론 그 일은 큰 잘못이야.
촌장이 평생 용서하지 않는 게 당연해.
하지만…… 몇 십 년간 부부로 살았잖아.
그 세월간 쌓인 감정이 있을 텐데, 그게 이렇게 단칼에 잘라질 수 있는 거야?!
“가족이 아니라니요?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두 분이 그 오랜 시간을 같이 살았는데……?”
“……아들 아니랄까봐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카엘 군, 그치랑 나는 같이 살기만 했을 뿐, 부부가 아니었단 게 밝혀졌네. 내 자식 하나 낳아주지 않은 여자를 어찌 아내라 할 수 있겠나?”
옆에서 ‘어휴, 아직도 저 지랄이야. 진짜 돌아버리겠네.’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마 이 사건의 처음 발단이 된 루크 사제가 푸념한 것이리라.
그 개놈의 출생이 밝혀진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촌장은 딸들의 출생을 의심하는 걸 넘어서 다른 남자의 자식이 맞다고 결론지어버린 듯했다.
루크 사제가 친딸들이 맞다고 확인시켜줬는데도.
……부인만 미친 게 아니야.
둘 다 정신 나가버렸어.
부인은 행복한 꿈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 사람은 불행한 환상 속에 잠겼다는 차이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체념한 거야.
따져도 소용없으니까 그냥 눈을 감아버리기로 하신 거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할 수 없으니까.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혀 있는 나를, 촌장은 덤덤한 눈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더 할 말은 없겠지? 그럼 다시 말하겠네.”
“……”
“카엘 군, 북쪽 산에서 돌아오거든 소더가 이곳을 떠나지 않도록 설득해주게나.”
“………설득이라뇨?”
낮은 목소리로 되묻자, 촌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여편네가 소더를 쫓아내겠다고 했다며?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네. 그치도 그렇게 된 마당에, 소더가 이 마을에 사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어. 소더 자신을 제외하고.”
“그래서 설득해달라고요?”
“호되게 당했다고 들었으니 원망하고 있지 않겠는가? 자네 말은 듣는 편이니 잘 좀 설득해주게.”
“제가 왜요?”
“자네는 소더가 다른 마을로 가겠다고 하면 따를 것 아닌가? 나는 슬슬 이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네. 자네 아버지에게 넘길 생각이야.”
그러니 아들인 내가 옆에서 아버지를 돕고,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뒤를 이어야 한다.
그게 촌장의 논리였다.
“나는 마누라 관리도 제대로 못한 놈이야. 그 긴 세월을 속고 산 멍청이이기도 하고. 지금 일어나는 난리를 수습하고 있는 것도 자네 아버지이니, 정식으로 촌장이 되어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을 걸세.”
“……”
“자네가 뒤를 잇기 전까지는 소더가 다른 일을 해도 상관없어. 양을 치든 자경단에 들어가든 좋을대로 할 수 있네. 자네 아버지가 촌장이 되고, 자네가 소더를 아내로 맞이하면 마을 사람들도 더 불평하지 않겠지.”
모두가 녀석을 마을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환영할 것이다.
정식 촌장의 며느리이니까.
나와 결혼한 이후부터, 메린은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촌장으로서 부탁하네. 카엘 군, 소더와 함께 이 마을에 남아주게.”
벤스 촌장은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녀석의 뜻만 아니면 여기서 살 줄 아는 모양이야.
진짜, 기가 차서 말이 다 안 나오네.
나는 고개를 돌려, 턱을 괸 채 테이블을 빤히 내려다보는 메린에게 말했다.
“야, 메린, 여기 살기 싫냐?”
“딱히?”
“그래.”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이 약간 밝아진 촌장을 노려보며 입을 떼었다.
“보셨죠? 댁은 착각한 겁니다. 여기 살기 싫은 건 얘가 아니라 저예요. 바로 나, 카엘 에스트렐! 제가 이 녀석을 데리고 여길 나갈 겁니다!”
“뭐……?!”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내 말에 크게 놀란 건 촌장뿐이었다.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였고, 사제놈은 어련하겠냐고 중얼거리며 차를 홀짝였다.
아버지와 달리 내 사정을 아는 건 아니지만, 내가 여길 더럽게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으니 납득한 것이리라.
“아니, 대체 왜? 자네가 여길 떠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다고?!”
“이런 씨발, 지금 그걸,”
울컥 치솟는 대로 쏘아붙이려던 순간, 갑자기 눈앞이 번쩍이며 불똥이 튀었다!
아으, 머리 얼얼해!
불 보듯 뻔한 범인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아버지는 도리어 두 눈을 무척 엄하게 뜨며 입을 떼었다.
“이 새끼가 어디 촌장님 앞에서 그 따위 말버릇을 써?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냐?!”
“………”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런 상황에서도 점잖게 화내야 되는 거야?
그래, 씨발, 나이랑 지위가 깡패이지!
근데 지금 눈앞에 있는 중년 아저씨는 둘 다 있네?
아주 최강이야, 최강!! 암, 그렇고 말고!!
마른 세수를 거칠게 한 후, 다시 촌장을 보며 말을 던졌다.
“진짜 이유가 없다고 보세요? 반대로 여쭈는데, 제가 왜 여기 살고 싶어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자네 고향이잖나! 아버지도 버젓이 살아있고, 게다가 정식으로 촌장이 될 텐데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댁네 아드님이랑 따님한테 엄청나게 시달렸는데 말이죠? 메린을 그간 사람 취급도 안 한 동네이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해도 속이 펄펄 끓는 것 같다.
내가 그 새끼들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 때문에 무슨 짓까지 했는데!
아들새끼는 메린이 나랑 같이 다니게 된 뒤에도 계속 지랄해댔고 말이지?
이 아저씨가 날 자꾸 들먹이면서 지를 쪼아대는 게 빡쳐서라는 별 병신 같은 이유로!!
“난 아들이 없지만, 그래, 그때는 내 아들인 줄 알았으니 그렇다 치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난 일 아닌가? 소더가 그런 대접을 받은 것도 다 그럴 만해서 그랬던 거고.
그리고 내 말했지 않나. 자네 아버지가 정식 촌장이 되고, 자네와 소더가 결혼하면 푸대접 받을 일은 없을 거라니까!”
“그깟 얘기에 귀가 혹할 정도면 처음부터 여기 안 산다고 하지도 않아요! 그 이유가 전부인 것도 아니고요!”
테이블을 내려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댁네 자식뿐만이 아니야. 이 마을 사람들이 내게 했던 말, 전부 다 기억해요! 얼마 못 살 거란 건 나도 알던 사실이니 그렇다 쳐요. 이모라는 사람은 엄마한테 나 그냥 갖다 버리라고 했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 불쌍해 죽겠다고 했어요. 곧 뒤질 게 뻔한 새끼를 어떻게 살리려고 아득바득 애쓴다고!
내가 그 꼬라지였던 게 내 잘못이에요? 아니잖아. 댁이랑 이 마을이 그렇게 만들었던 거잖아! 내 입에 독기를 들이부어서 그랬던 거잖아요!”
촌장의 두 눈에 충격과 경악에 차오르는 게 보인다.
옆쪽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메린을 제외한 모두가,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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