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화 〉 400화 : 마지막 준비 (1)
* * *
루크 사제가 한 걸음 물러난 것과 동시에, 검은색 치마가 물결치며 문 안쪽으로 성큼 들어왔다.
율리아 공주는 지난번에 보았던 그 웃는 얼굴 그대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씩 찬찬히 둘러보았다.
“흠흠, 카엘 님에 메린 씨, 에스트렐 씨에 멍청이. 그리고……”
공주의 눈길이 루크 사제에게서 촌장으로 옮겨갔다.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녹색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자, 어째서인지 촌장이 움찔하며 뒤로 주춤거렸다.
공주는 그 모습을 잠시 의아하게 바라본 후, 이내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어요. 저는 율리아 디왈리. 창조주의 대언자랍니다. 당신이 이곳의 촌장이지요?”
“……”
“으응……?”
공주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만도 하지.
기껏 정중하게 인사했는데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시선도 피하고 있으니까.
근데 진짜 왜 저러시는 거래?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아, 처음 보시는 거구나.
저 촌장이 직접 만났던 건, 율리아 공주가 아니라 그 모습을 흉내낸 악마였으니까.
……아냐, 그래도 이상해.
분명 우리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터.
지금 생전 처음으로 공주를 뵙는 건데, 촌장으로서 예를 표하지 않고 있는 거잖아.
엄청 이상한데?
“촌장님?”
아버지 역시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인지, 촌장의 얼굴을 살피며 나지막이 불렀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옆구리를 쿡 찌르자,
“히이익!! 악마다아아!!”
촌장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더니,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버렸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야, 촌장님 왜 저래?”
“몰라…….”
진짜 미쳤나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벽에 세워 둔 내 검을 스륵 뽑아보았다.
매끈하게 빠진 은검이 불빛에 반짝이며 내 얼굴을 비추었다.
음, 그렇군.
“악마 아니네.”
“당연히 아니죠!!”
빽 소리를 지른 후, 공주는 의자를 거의 던지듯이 잡아 빼고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 참, 사람을 보자마자 악마라며 도망가다니! 아무리 그 짐승년이 내 모습으로 분장하고 여기 왔어도 그렇지!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예요?! 으으, 그 년, 여기서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야?!”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 역시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는 건 그 가짜 공주의 요청으로 특별 무투대회를 연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짜가 이 마을에 오고 사흘인가, 그 뒤에 대회가 열렸던가?
뭐,그동안 촌장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다 해도 이상하진 않지?
“괘씸하니 이따 검사해봐야지! 뭐 나오기만 해봐, 아주 그냥 조져버릴 거야!!”
“크흐흠!”
품위라는 글자와는 저 하늘의 별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공주의 모습을 더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아버지가 돌연 크게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꺼냈다.
“우선 공주님,”
“대언자라니까요? 저 이제 공주 아니에요. 때려쳤거든요~”
말을 꺼내자마자, 공주가 아버지의 말을 똑 끊어먹으며 굉장한 소리를 했다.
공주라는 게 때려칠 수 있는 거였구나.
전혀 몰랐어.
“네?! 때려치다니요, 그게 무슨……!”
“왕성에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거 정리하면서, 국왕에게 당신 딸 그만하겠다고 인장반지 던져버렸어요. 어으, 속이 다 시원하네.”
아, 그래서 대언자라는 소개만 한 건가?
공주라는 신분이 그렇게 없어질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주…… 아니, 율리아는 이제 완전히 교단 사람으로 돌아섰다고 보면 되겠지.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한 후, 싱글벙글 웃고 있는 율리아에게 다시 말했다.
“우선,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언자님.”
“네. 저도 여러분이 모두 건강한 것 같아서 정말 기뻐요! 특히 에스트렐 씨, 우리 멍청이가 굉장히 골머리 썩혔을 텐데, 위장과 머리에 아무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멍청이……?
분위기상 사제놈을 말하는 거 같긴 한데.
아니나다를까, 슬쩍 쳐다본 사제놈은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우와, 저 놈, 율리아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있어!
게다가 그걸 창피해하고 있고!
신나게 떵떵거리던 놈이, 상급자가 오니까 바로 깨갱거리고 있네.
사제놈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너무나도 고소하고 짜릿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흡.”
“………”
앗. 엄청나게 노려보고 있어.
게다가 율리아 옆으로 옮겨 앉은 탓에 쏘아, 거의 마주하고 앉아 있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쏘아 죽일 듯한 눈길을 보내는 사제놈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서 왜 오셨어요?”
“산 타려고요.”
짤막한 물음에 대한 짧은 답.
덤으로 망연한 기분까지 넉넉히 얹어준 탓에, 다시 말을 꺼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이 동네에 산은 저~기 북쪽에 있는 것밖에 없는데요.”
“네, 저도 거기 가려고 온 거예요! 카엘 님보다 늦게 도착할 줄은 몰랐지만요.”
망연함에 이어, 아연함까지 담뿍 받아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조금 전보다 더 오래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네?”
간만에 상당히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방어 및 거점 탈환을 위한 전투사제 열, 마을 경계를 지키기 위한 보호사제 두 명, 그리고 루크 사제를 보조하기 위한 치유사제 하나.
그 외에도 왕성과 지하 신전에 비축해둔 식량 일부를 가져왔다.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광장에서 짐을 푸는 사람들을 보면서 굉장하지 않냐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확실히 굉장하긴 해.
사제들의 기세가 진짜 장난이 아니야.
특히 전투사제들의 분위기가 압박감이 상당하다.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미소를 짓기는 한데, 만들어진 웃음이라는 게 뻔히 보여!
게다가 왠지 피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로나는 굉장히 살가운 편이었다는 걸, 전투사제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혹시 로나도 다른 사람들 눈엔 그런 분위기로 보이나?
그래서 다들 피했던 건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정말 모르겠어.
우리 마을 사람들은 왜 전투사제들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심지어 수레에 실린 짐을 같이 내리며 하하 웃기까지 하고 있다!
몬스터보다 잘생겨서 그런가?
아무튼 율리아가 데려온 지원군은 다해서 열 세 명.
숫자는 적은 편이지만, 보호사제 중 하나가 그녀의 ‘특별 사제’이기도 한 만큼 전력(戰力)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근데 정말 사제님들을 다 마을에 두고 가실 생각이세요? 그럼 율리아 님은 어쩌시려고요?”
“저요? 싸울 건데요? 제 모닝스타 가져왔으니 걱정 마세요.”
전직 공주에 현직 사제인데,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이 싸울 거라는 소리를 하네.
그래도 맨손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음…… 아니야,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 율리아가 참전한다면 고래 대가리를 부순 그 돌려차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사람도 대언자잖아.
최초의 대언자가 썼다는 그 기적의 돌려차기, 분명 전수되고 있을 거야!
“이야, 율리아 님의 활약이 기대되네요!”
“………으응~ 이상하네요. 왜 기대된다는 말이 기쁘지 않은 걸까요? 카엘 님, 정말 순수하게 기대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럼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대가리를 깨는 돌려차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걸 어떻게 기대를 안 해?
“조금 많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뭐, 됐어요. 카엘 님께 드릴 말씀도 있으니 신전으로 갈까 하는데, 그 전에……”
율리아는 말끝을 흐리더니, 손이 비어 있는 전투사제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을 까닥이고는 그 귀에 무어라 속닥였다.
그러자 전투사제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아! 이거 놔라아아아!”
전투사제가 촌장을 붙잡고서 그녀 앞에 끌고 왔다!
끌려오는 내내 발광하던 촌장은, 율리아를 보자마자 한층 더 크게 몸부림을 쳤다.
입에 게거품까지 물고서.
“이, 이 악마 년! 이번엔 대중 앞에서 날 욕보일 셈이냐!! 카엘 군, 거기 서서 뭣하는 건가! 이 년은 악마야! 성검으로 해치우게!”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검을 뽑았다.
여전히 날씬하고 매끄럽게 빠진 은검이 나타날 뿐, 성검이 모습을 드러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은검을 손에 든 채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성검 안 나오는데요?”
‘그야 아니니까.’
역시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검집에 꽂았다.
“악마 아니네.”
“아까 아닌 거 보셨잖아요! 왜 두 번이나 확인하는 건데요?!”
조금 전보다 더 씩씩대는 율리아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왜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들 하잖아요.”
“그럼 이제 그만 두들겨요! 눈에 파편 튀길 수도 있으니까!”
한 번만 더 하면 날 조져버리겠다.
왠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그런 나를 뾰로통하게 쏘아보며 무어라 중얼중얼대면서 투덜투덜거린 후, 신나게 발광 중인 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성호를 긋고, 그 손으로 촌장의 머리를 쓰다듬듯 허공을 휘젓더니, 그에게 손바닥을 보인 채 아래로 쭈욱 손을 내렸다.
바닥에 쪼그려 앉기까지 하면서 그의 발끝까지 손을 내린 후, 율리아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이네요.”
“안 돼애애!”
나도 모르게 옆에서 소리쳐버렸다!
절규하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치만 말이 안 되잖아! 왜 정상이야?!
아니야, 어딘가 이상이 있을 거야!
아직도 그 악마에게 홀려 있든, 그 조각인지 뭔지 하는 게 안에 들어있든 할 거라고!
“율리아 님, 다시 한번만 봐주세요. 정상일 리가 없어요! 특히 머리가 이상한걸!!”
“어머, 카엘 님, 머리 좀 빠졌다고 비정상으로 치는 거예요? 블라이스가 이 말 못 들어서 다행이네. 수정처럼 매끈한데.”
“겉 말고 속이 이상하다고요!”
그러나 율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루크 사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그러시는지 알 것 같긴 한데, 정말 말끔해요. 촌장님이 치매에 걸렸던 거라면 여기 있는 우리 멍청이가 이미 고쳤을 거예요. 그래서 혹시 아스모스의 조각이라도 들었나 했는데, 방금 본 바로는 먼지만큼도 없어요. 그 외에 원인이라 할 만한 건,”
율리아는 잠시 말을 끊고, 여전히 소리를 빽빽 지르는 촌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제정신을 잃은 것밖에 없네요. 아스모스에게 이것저것 당했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일로 큰 충격을 받았든, 무엇이 결정타가 되었든 간에 이성이 망가져버린 거죠.
그런 거라면 창조주 외엔 누구도 손을 쓸 수 없어요. 영혼 쪽 일이거든요.”
큰 충격에 제정신을 잃었다.
즉, 미쳐버린 것이다.
여태 아들인 줄 알았던 놈이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 그동안 아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다른 딸들도 자신의 핏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견딜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미쳐버린 거지.
그래, 그런 거야.
촌장은 아픈 거다.
원래 태생이 말 안 통하는 무시무시한 또라이가 아니라, 최근에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나가버린 거야!
반드시 그래야 돼!
안 그러면 이 마을은 몇 십년 동안 미친 또라이가 관리해온 곳이 된다고!
안 그래도 엿 같은 고향인데 이 이상 더 병신스러움을 더할 순 없어!
슐 누나도 너무 가엾어지고!
“아…… 가엾은 촌장님…….”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면……. 대언자님, 정말 무언가 방도가 없겠습니까?”
……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다.
눈물까지 훔치면서 율리아에게 간곡히 말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우리 아버지야.
괜히 촌장 일을 맡은 게 아니라니까?
“애비나 자식 새끼나……”
그런 우리를 뚱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루크 사제를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율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율리아는 이내 찬찬히 눈을 뜬 후, 무언가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촌장과 마주 서더니,
퍼억!!
“커헉!!”
갑자기 복부에 주먹을 깊이깊이 꽂아넣었다!
그러자 촌장은 입으로 무언가 검은 덩어리를 내뱉은 뒤, 그대로 축 늘어져버렸다.
이야, 이걸 한 방에 보내네.
촌장도 몸집이 꽤 되는데 말이지?
“이런, 잘 안 보였는데 악마의 영향이 있긴 있었나보네요. 검은 핏덩어리라니, 불길해요!”
“정상이라면서요? 아무 이상도 없이 말끔하다고 하신 지 오 분도 안 지났는데요?”
“미세한 건 찾기 힘든 법이에요. 저를 보고 악마라고 박박 우기는 것부터 수상하다 했는데, 역시나였던 거죠!”
그게 짜증나서 때린 게 아니고?
목구멍까지 솟아올라온 말을 힘겹게 삼킨 후, 나는 아버지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힐끔 보시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셨고, 나는 다시 율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역시 대언자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율리아 님! 촌장님이 잘 나으셨으면 좋겠네요.”
“보기보다 강인하신 분이야. 분명 괜찮으실 거다.”
“그럼요, 괜찮으시고 말고요! 루크가 잘 돌볼 테니까요!”
나와 아버지, 그리고 율리아는 그렇게 일단락 지으며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하…… 돌아버리겠네…….”
깊이깊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루크 사제의 말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허공에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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