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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34화 (434/475)

〈 434화 〉 410화 : 대재앙의 강림 (3)

* * *

여러모로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인형이 눈살을 찌푸려서 화난 표정을 짓고 있어!

봉제인형인데!

그뿐 아니라, 말소리를 낼 때마다 입을 그린 실이 둥근 원을 그리기도 한다!

그래도 둥글둥글한 인형인 만큼 겉보기엔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어찌하여 내가 밀려난 것이란 말이냐! 분명히 비어 있었을 터인데!

“히익!”

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름이 쫙 돋아, 나도 모르게 메린을 꽉 붙잡았다.

무서워. 저거 자체가 공포야, 공포!

메린을 닮은 귀여운 얼굴에서 더럽게 굵직하고 가래 끓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고!

위화감 장난 아니야!

기분 나빠, 끔찍해!

“어으, 근육 우락부락한 중년 아저씨가 속에 들어가 있는 거 같아!! 세상에, 어떻게 저런 끔찍한 생물이……! 아니, 생물이 아니라 인형이긴 한데!”

메린을 붙잡은 채 바들바들 떨며 중얼거리자, 위슨인지 파랑새인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툭 던졌다.

“야, 공중에 떠서 지 혼자 움직이는 건 아무렇지도 않냐?”

“그게 뭐 어쨌다고! 귀신 들린 인형이 다 그렇지!”

“아, 그래.”

말을 말자는 듯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치만 저딴 건 처음보는걸!

온갖 괴생명체가 날뛰는 우리 마을에도, 아저씨 목소리 내는 여자아이 인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보다 보통 인형에 들어가면 콧소리 비슷한 간드러진 소리가 나야 되는 거 아냐?

왜 수정에 처박혀 있을 때랑 목소리가 똑같고 지랄이야?!

목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소리를 내는 거라서 그런 거야?!

­네놈,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윽?!”

갑자기 몸이 바닥에 끌리면서 공중에 떠올려지려 했다!

반사적으로 인형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빛 한 줄기가 쏘아지면서 붙잡는 느낌이 사라졌다.

성검의 공격을 피한 인형…이 아니라 아트라토스는, 나를 놓치고서 수정에 찰싹 붙더니 주먹으로 퐁퐁 두드리며 소리쳤다.

­튕겨져 나가며 이 안에 들어온 걸로 모자라, 다시 나갈 수가 없다니……!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음……”

놈이 절규하는 걸 정리하면, 지금 이런 상태이란 건가?

메린의 몸을 빼앗으려고 영혼 상태로 들어갔다가, 어째서인지 튕겨져 나가면서 인형에 들어간 다음, 그대로 갇혀버린 거지.

한 마디로,

“개같이 망했네! 앗하하하학!!”

배를 잡고 폭소하는 율리아의 말처럼,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내가 실패작이면 넌 병신 도마뱀이네! 푸하하핫! 다 이겼다고 신나게 으스대더니 완전 털렸잖아!! 아, 이거 진짜 웃기네!!”

­크으으윽! 꿈으로 연결될 때만 해도 공백이 있었거늘……! 네놈들,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게냐!!

꿈으로 연결……?

혹시 메린이 꾸었다는 악몽들을 얘기하는 건가?

나는 신기한 듯이 인형을 쳐다보고 있는 메린에게 물었다.

“야, 너 악몽 마지막으로 꾼 게 언제냐?”

“엉? 그저께.”

“………”

엄청 최근이잖아!

우와, 그럼 진짜 종이 한 장 차이로 저 놈의 침입을 막을 만큼 영혼을 채울 수 있었던 거야?

되게 아슬아슬했네!

“이야~”

그리고 이럴 때에도 긴장 하나 하지 않는 내 동료들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어젯밤에도 또 엄청나게 해댔구만? 아주 그냥 빵빵해지도록 쏟아 부은 모양이야?”

“왜 아니겠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털었겠지.”

“뭘 상상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 영혼이야! 이 녀석의 영혼이 채워졌단 소리라고!”

시큰둥하게 헛소리를 하는 마법사와 엘프에게 발끈하기가 무섭게, 로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손을 잡고 크게 붕붕 흔들면서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카엘 님……! 거사를 앞두고서도 속을 꽉 채우도록 힘을 쓰시다니……! 그런데도 별 기운이 안 떨어지시고 정말 대단하세요!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요?!”

“뭔 소리야, 짜샤! 넌 그런 얘기 아닌 거 알잖아!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당연하죠.”

당당하고 뻔뻔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로나.

이딴 녀석이 사제라니, 역시 교단은 망했어.

“속을 꽉 채워……? 야, 혹시 그거 정,”

“넌 진짜 말하지 마라.”

“근데 어제 한 번밖에,”

“하지마하지마하지마, 제발 하지 좀 마, 제발!”

손으로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흔들게 하면서 빽 소리질렀다.

돌겠네, 진짜.

어떻게 이런 데에서까지 평소랑 똑같이 구냐?

그냥 여행길도 아니고 대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인데!

인형에 처박혔지만!

­가증스러운 놈……!

둥글둥글한 눈이 나를 노려보면서 지하 그 너머, 심연 아래에서 울리는 듯한 굵은 목소리를 냈다.

슬슬 저것도 익숙해지려는 게,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한 거 같다.

­말해라, 비열한 대행자야! 이 인형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헛소리마라! 이 인형이 액받이를 위한 것인 줄 내 모르는 줄 아느냐!! 허나 단순한 액받이 인형이 나를 묶을 수는 없어! 여기에 무엇을 담은 게냐!!

“모른다니까 그러네…….”

인형을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남쪽의 어느 마을에 사는 은빛머리 인형사이다.

메린의 머리카락에 뭘 했는지 아는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라고.

뭐, 브로치가 계속 연한 푸른빛을 내면서 반짝이는 걸 보면 저게 무슨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적인데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놈의 계획은 무너졌다.

그래도 명색이 ‘대재앙’이라 불리니 인형 상태에서도 무언가 힘을 부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몸으로 하는 공격은 못하겠지.

놈이 들어간 건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한 봉제인형이니까!

“이제 끝이다, 아트라토스!! 오랜 기간동안 개수작 부린 만큼 허망하게 죽어라!!”

­하……! 기고만장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도다!

놈은 성검을 잡고 선 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내가 이 모습으로 아무것도 못할 줄 아느냐? 그리 여겼다면, 네놈은 참으로 어리석은 버러지이리라! 하찮은 인상에 걸맞은 아둔함이로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자꾸……!!”

­환상을 보고 네놈이 아닌 엘프를 공격한 점에서, 나의 그릇 또한 아둔함의 극치이도다. 통탄스럽기 그지없구나.

한숨을 쉬듯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놈은 뭉툭한 두 팔을 쳐들며 말을 이었다.

­허나 끝을 짓기엔 한참이나 이르다! 나는 하늘 위의 하늘, 드높은 천상에 자리했던 자, 아트라토스!

자그마한 인형의 몸으로 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치며, 놈은 마치 춤을 추듯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의 권능은 아직 건재하나니! 목도하라, 하등한 미물들아! ‘옆’의 가능성을 ‘이곳’으로 불러와주마!!

“뭐?!”

율리아와 로나의 얼굴이 단숨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법사인 위슨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니, 놈이 말한 ‘옆’이 단순히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일이 벌어지면 난처하다는 거지?

그럼 손을 쓸 틈을 안 주면 되는 거 아냐?

“블루벨! 쏴버려!”

놈에게 검을 휘두르며 소리치자, 빛줄기와 함께 화살 여러 발이 놈을 향해 날아갔다.

그에 더불어,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트라토스,침묵하라!!”

율리아의 힘있는 외침이 홀을 울리며 놈에게 작렬했으나,

­소용없다!!

캬아아아아—!!

놈이 빛과 화살을 피하면서 포효를 내질렀다!

귓속으로 거친 진동이 들어오면서, 핏줄을 타고 온 몸을 마구 헤집는 듯했다!

“큭……!”

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절로 풀렸다.

그래도 산에서 당했을 때처럼 기절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근데 인형 상태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이 크기로는 다 못 막는구만.”

위슨이 파랑새의 입으로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뒤, 어깨 위에 앉은 파랑새를 마주하며 녀석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는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그러자 파랑새가 연기로 변하며 뭉실뭉실 피어오르더니, 녀석을 감싸듯이 뭉치면서 커다란 푸른 새가 되었다.

부엉이탑에서 봤던 이후로 보지 못했던 모습.

파랑새의 힘을 더 개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트라토스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춤추며 크게 웃었다.

­나는 반란자! 하늘 위의 하늘, 그 위에 좌정한 자를 거스르는 자로다!! 네 주인의 명에 기꺼이 거역하리!!

“으으! 성가시고 건방진 놈 같으니!!”

씩씩대는 율리아의 모습이 만족스럽다는 듯, 놈은 한차례 더 크게 웃은 후에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너무 높이 올라가서 잘 안 보이는데, 위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걸 보니 날 쳐다보는 것 같아.

목 아프니까 내려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필히 ‘옆’에는 네놈이 절망에 빠져 복수자가 되어 있을 터! 무수한 곁가지의 가능성을 보는 나의 힘 앞에 엎드려라!!

오너라, 세상의 복수자여! 네놈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부수어라!!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무시무시한 걸 불러오려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문제없어!

뭐가 오든 전부 다 없애버릴 거야!

바짝 긴장한 손으로 성검을 굳게 쥐었다.

나를 들먹인 거 같아서, 내 복사판이라도 튀어나오려나 했는데……

“………”

조용하다.

그것도 엄청 심각하게 조용해!

뭐 바람이 불거나 속삭임이 들리거나 하는 것도 없고!

뭐지?

기습이라도 하려는 건가?

­………어째서?!

아니구나.

놈이 또 다시 수정에 머리를 박으며 마구 성을 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하나도 없는 것이냐!! 나의 그릇을 죽인 통곡과 비통은 들리거늘! 어째서 그 이후에 원한에 빠지지 않고 잠잠해지는 것이냐!!

“아……”

뭔 소리인지 조금 알 거 같아.

자세한 원리는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놈은 그 뭐냐, 평행세계인가 뭔가 하는 데에 있는 ‘나’를 이 자리로 불러오려던 것 같다.

장서관의 관장 놈이 평행세계에 있는 ‘여자 카엘’의 껍질만 복사해서 나한테 씌웠던 것처럼 말야.

그 설명을 듣던 로나가 곁가지 어쩌고 했던 걸 보면, 지금 인형의 몸으로 자해하고 있는 아트라토스가 말한 ‘옆’과 ‘곁가지’ 모두 평행세계를 말한 것이리라.

즉, 놈은 어느 세계의 나…… 메린을 죽이고 세상을 원망하는 나를 여기로 불러오려 했던 것이다.

그럼 당연히 실패하지.

놈이 그런 ‘나’를 찾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세세한 부분은 다르겠지만, ‘카엘 에스트렐’이라면 분명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메린이 몸을 빼앗겼다면, 나는 그녀와 함께 아트라토스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저주하고 슬퍼하면서…… 메린과의 시간을 되새기며 행복에 잠기겠지.

그런 다음,

­머저리의 극치가 아니냐! 어찌하여 하나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냔 말이다!!

주저없이 그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말려도, 반드시 내 손으로 나를 죽일 거야.

“야, 카엘…….”

“……”

와, 시선이 엄청 따가워.

눈에서 바늘을 막 쏘는 거 같아.

아트라토스가 내려다보거나 포효할 때보다 더 몸이 떨리는데?

“너, 나 죽인 다음에 죽을 생각이었냐?”

“………그, 글쎄? 왜 그렇게,”

“저 새끼가 방금 그랬잖아!! 하나같이 다 자살했다고!!”

“히으!”

으악, 귀 울려!

누가 드래곤이 손을 댄 그릇 아니랄까봐 목청 더럽게 좋네!

뒤이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 두 어깨가 콱 붙잡히면서 몸이 앞뒤로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새꺄, 왜!! 내 몫까지 더 살 생각은 안 하고 왜 그딴 짓을 하려 들어, 등신아!! 정신머리 글러먹은 것도 작작해야 될 거 아냐!!”

……맞는 말이다. 응, 구구절절 옳은 소리야.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 하면 안 되지.

더러운 운명 때문에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면서, 그녀 몫까지 세상을 보면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메린 소더를 사랑하게 된 카엘 에스트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야.

“용서 못하니까!!”

“뭐……?”

어깨를 흔드는 손이 우뚝 멈추었다.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짚고 고개를 살짝 흔든 후, 정면에 서 있는 메린을 보았다.

그새 울상이 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대답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아, 나는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너를 죽인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 당연히 벌해야지.”

“그게 뭔……!”

“그리고,”

그녀의 대꾸를 뚝 잘라먹어버린 후, 손을 들어 그녀의 정수리에 뻗어나와 있는 더듬이 같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이어 말했다.

“말했잖아. 네가 어디로 가든 쫓아가겠다고. 벼랑에서도 뛰어내렸는데, 저세상을 못 따라갈까.”

“내가 그랬잖아! 너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내 말 무시하는 거야?!”

“아니? 오히려 따르는 거지. 음…… 네가 엄청 화낼 거 같아서 그간 말 안 했는데, 내가 너 죽여야 할 거란 얘기 듣고 좀 기뻤어.”

몸이 엄청 약했을 때는, 메린을 두고 먼저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울적했다.

내가 없으면 분명 마을 사람들이랑 갈등이 터질 텐데, 또 다시 혼자가 되어버릴 게 뻔한 그녀를 두고 가야 한다는 게 정말 원통했다.

그러던 중에, 메린이 대재앙의 그릇이라서 용사인 내가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처음엔 왜 그딴 팔자밖에 안 되는 거냐 싶었어. 근데 생각해보니까 나한텐 되게 좋은 이야기이더라? 잘하면 한날한시, 아니면 한날에 같이 죽을 수 있으니까 말야.”

그간 쭉, 알게 모르게 바라왔던 대로.

메린은 아연해하는 얼굴로 잠시 멍하니 나와 마주보다가,

“………미친놈아아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 정강이랑 등이랑 어깨랑, 아무튼 머리랑 목 빼고 전부 다 두들기기 시작했다!

“악! 메린, 아파, 진짜 아프다니까!”

“병신! 머저리! 개 같은 돼지 새끼! 얼간이! 등신 호구!!”

“호구 아냐! 호구는 절대 아니라고!!”

“닥쳐, 멍청아!!”

찰싹. 퍽. 툭. 빠악.

그야말로 신나게 두들겨지는데, 기가 막히게도 누구 한 사람 메린을 말리지 않았다.

야박한 자식들……!

“누구 좋아하면 저렇게 돌아버리는 거냐? 너도 그래?”

“아니.”

위슨이 묻는 말에, 블루벨이 단호히 선을 긋는 게 들렸다.

“저 놈이 미친 거야.”

“그렇구나.”

“그렇군요.”

‘그렇지.’

“수긍하지 마, 새끼들아!”

메린에게 얻어맞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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