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413화 : 붉은 거룡, 아트라토스 (3)
* * *
드넓은 홀 곳곳에서 터진 주황빛 분수, 그 물방울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며 한데 뭉쳐 흐르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도 끈적해보이는 그 물 속엔 녹다 만 돌가루와 돌멩이가 덕지덕지 붙어서 함께 흐르고 있다.
본래 품고 있던 게 아닌, 시시각각으로 바닥을 녹이면서 제 몸에 붙인 것이리라.
스라소니 덕에 몸을 태울 듯한 열기는 그 조짐이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사라졌다.
하지만 불의 정령인 그의 힘으로도, 저 불의 물이 나오는 걸 막거나 그 물이 품은 열기까지 흡수할 수는 없는 듯했다.
즉, 저 물에 닿으면 우리도 살살 녹아버린다!
점성이 있어서 바닥이 삼켜지는 속도는 무척 느리지만, 분수가 여러 지점에서 계속 펑펑 터지고 있으니 그것도 시간 문제일 거야!
바닥이 전부 없어지기 전에 놈을 처치해야 한다!
……근데 길목에 분수 여러 개 깔아놨단 말이지?!
아트라토스의 바로 근처에서도 굉장히 큰 분수가 솟구치면서 놈의 몸에 물을 끼얹고 있다!
게다가 놈은 그 바위를 녹이는 물을 맞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고!
“저, 저저, 저런 비겁한 새끼를 봤나! 수작 부릴 게 없어서 바닥을 없애?! 그보다 넌 왜 멀쩡한 거냐!!”
“이 몸의 본체는 이보다 더 뜨거운 구덩이 속에 떨어졌노라. 화신인 내가 이 정도 열기를 미지근하게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거참 더럽게 좋겠다, 치사한 새꺄!!”
아, 저 여유로운 태도, 존나 열받네.
분수를 피해서 다가가려고 해도, 바닥을 흐르는 물 때문에 오히려 점점 더 뒤로 물러나야 할 지경이다.
빌어먹을, 진짜 이거 어떻게 해야 되지?
“율리아 님, 기도로 어떻게 안 되나요?!”
“마그마를 없애달라고라도 하라는 건가요? 안 돼요. 원래 이 지하 속에 있던 거라서 들어주지 않으실 거예요.”
“물을 끼얹는 건요?!”
“수증기에 시야가 가려져서 죽을걸요?”
상당히 그럴싸한 이유였다.
제길, 그래서 거북이도 가만히 있는 거였나!
“우리도 저 속에 있어도 멀쩡해지게 해달라는 건요?”
율리아는 메린의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안 돼요. 그게 가능해지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게 돼요. 창조주가 임의로 베푸시는 기적이어야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 이대로 녹는 것밖에 없다는 건가요?!”
“아니, 또 하나 있지.”
내 절규에, 놈이 낮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또 있다고?
설마 저 자식, 이 상황에서 육탄공격을 할 셈인가?
……아, 그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잘하면 놈의 몸에 올라타서 공세를 펼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트라토스는 킬킬 웃으며,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잿더미가 되는 길도 있으니!!”
허공을 향해 크게 포효하는 것으로 내 기대를 철저히 부숴버렸다.
크와아아아—!
놈의 포효에 공간이 떨리는 게 느껴진다.
이번엔 우릴 노린 게 아닌지, 그냥 시끄러운 소리라는 것 말고는 아무 느낌도 없다.
그럼에도 충격에 몸이 굳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진홍빛 마법진이 천장을 채우듯이 한가득 그려지고,
“……!!”
그곳에서 자그마한 불덩이 수십 개가 맺히기 시작했으니까!
비 어쩌고 한 게 저걸 가리킨 거였나!
“야, 이 비열한 새끼야,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살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 어찌 비열한 행위일꼬? 네놈들도 적을 상대할 때 그리 하지 않느냐.”
“인간은 이 마그마인지 뭔지 하는 거 못 내잖아, 양심 없는 도마뱀 새끼야아아아!!”
놈은 내가 큰 소리로 비난해도 끌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와, 드래곤 대가리 아니랄까봐 면상 존나 두꺼운 거봐!
우리에게 미물이니 어쩌니 했으면서 이 따위 수법을 쓰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진짜 더럽게 뻔뻔하다!!
이윽고 천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어서 스라소니가 크게 울부짖자,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더니 작은 돌멩이가 나타났다!
이야, 순수한 불이 아니라 돌멩이를 불로 감싼 거였어?
그냥 불만 던지면 스라소니가 없앨 테니까?
우와, 진짜 갖가지 수는 다 쓰는구나!!
딱 봐도 주먹만 한 돌멩이라서 그냥 맞기도 뭐하다.
맞아도 죽지는 않겠지만 아플 거 아냐. 통증을 느끼면 싫어도 몸이 굳게 되어 있다고!
게다가 돌 한두 개도 아니고 진짜 비처럼 수십 개가 쏟아지잖아.
저것도 맞다 보면 피가 나서 죽게 될 거야!
“크으윽……!!”
“크하하하! 참으로 좋은 표정이로다!!”
“닥쳐, 개새끼야!!”
성질을 부려도 놈의 기쁨만 더 커질 뿐, 당연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바닥에는 주황빛 물이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있다.
안 그래도 움직일 곳이 적어지는데, 쓸데없이 기운을 더 빼앗아갈 돌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진짜 방도가 없는 건가?
이대로 돌 맞아 죽거나 녹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거야?!
“길은 아직 있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마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우리 위로 쏟아지던 무수한 돌멩이들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이 흔들리면서 갑자기 하늘로 솟기 시작했다!
“?!”
반사적으로 땅에 검을 꽂아 몸을 지탱하며 주위를 살폈다.
우리 세 사람이 딛은 자리는 물론이고, 아직 불의 물에 삼켜지지 않은 바닥도 높이 솟아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은 섬과 섬 사이를, 허공에 뜬 돌멩이들이 채우며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 다리가 좌우로 넓어지면서 하나의 지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대지의 품 속. 즉, 나의 뱃속이나 다름없으니!”
부드러우면서 엄숙한 목소리가 천장에서 들려왔다.
자연히 올려다본 시선 끝에, 바위와 흙을 섞은 듯한 빛깔의 거대한 늑대가 입을 벌려 마법진을 깨무는 게 보였다!
파사아악—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사라졌다!
저거 물리적으로 없앨 수 있는 거였나?
아연해하는 사이, 늑대는 모래가 되어 흩어지고는 방금 새로 만들어진 평지에 뭉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귀는 물론이고, 몸 여기저기에 빛나는 광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 그 이마의 중앙에도 커다란 보석이 박혀서 반짝이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짐승이었지만, 앞서 보고 느꼈던 세 녀석처럼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테라.”
가만히 뻗은 손에 자신의 주둥이를 대며, 늑대가 빙그레 웃음지었다.
“말했지요? 우리가 길을 만들겠다고. 불과 물, 그리고 땅이 그대와 함께합니다. 심지어 심술쟁이 소리조차도.”
머리 위에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핀잔이 내려오는 것 같았지만, 늑대는 꼬리를 한 번 휘두르며 깔끔히 무시해버렸다.
“그러니 나아가세요, 용사. 우리를… 나를 아껴준 그대를 위해 전력을 다할 테니!”
우우우우……!
늑대가 소리 높여 울부짖으면서 다시금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이번에는 아무 곳에도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듯, 허공에 먼지 같은 것이 한데 뭉치면서 커다란 바위가 여럿 만들어졌다.
곳곳에 생겨난 바위들은 그대로 바닥에 쿵쿵 떨어졌고,
“오.”
신나게 뿜어져 나오던 분수를 죄다 막아버렸다!
그것도 한 방울도 새어나오지 않도록 아주아주 말끔하게!
그뿐 아니라, 이미 뿜어져 나온 주황빛 물이 그를 둘러싸는데도 조금도 녹지 않고 있었다.
스라소니가 바위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저 바위들이 평범한 흙으로 된 게 아닐지도 모르겠군.
“어찌 이런……!!”
그 광경을 본 아트라토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참으로 비겁하구나!! 아무리 계약자의 의사라 해도 네놈들이 이렇게 간섭하다니……!!”
“닥쳐요, 반칙쟁이! 계약자는 아무 상관없어요! 이건 네놈을 쳐부수고 싶은 우리의 의사예요!!”
분노를 품은 으르렁거림이 허공을 울리며 홀을 가득 채웠다.
아니, 홀이 아트라토스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놈과 우리를 둘러싼 바위 벽과 천장이, 또 다른 벽처럼 솟아오른 불꽃이, 홀을 떠다니는 바람이 일제히 놈을 규탄하고 있었다!
“카엘! 가세요! 가서 저 추잡한 놈을 없애버려요!!”
우리가 그 등을 밀어주겠다.
불현듯 바람이 살랑이면서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뛴다.
무언가 속에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야.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실룩거리고 있다.
……그렇구나.
우리만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니야.
그 생각이 들자, 칼자루를 쥔 손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가자!!”
크게 호령하며 땅을 박찬다.
정말로 등을 누가 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급류처럼 세차게 떠내려간다.
사나운 눈초리로 우리를 노려보는 진홍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그 안에 억울한 기색이 일렁이는 게 정말 기가 차기 그지없다!
“뭘 억울해하냐, 비겁한 새끼야!!”
“닥쳐라!! 만물이 어여삐 여기는 자가 어찌 나를 비겁하다고 하느냐!!”
놈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틀어 꼬리를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뛰었는데, 그 순간 다리를 무언가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높이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덕분에 조금 전과 달리, 놈의 꼬리를 완벽히 피할 수 있었다.
“그만한 도약을 순전히 네놈의 힘만으로 이룰 수 있을 성싶으냐!! 나의 날개를 태운 것도, 네놈이 아니라 그 검의 힘이었다! 나의 운명을 비틀 수 있던 것은 네놈이 천상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더냐!!”
놈이 분을 토하며 앞발을 내려친다.
아마 바닥에 착지한 우리를 뭉개려는 것이리라.
내 옆을 달리던 율리아가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그 발을 향해 뛰어들었다.
조금 전에 본 것보다 한층 더 환한 금빛 줄기가 놈의 앞발을 후려치더니, 그대로 팔을 딛고서 놈의 옆얼굴로 돌진했다.
“카아아악!”
충격이 꽤 되는지 놈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러면서, 반동으로 튕겨진 금빛 반짝임을 향해 다른 발을 휘둘렀다!
저대로는 율리아 님이……!
놈의 입이 비틀리는 순간,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가느다란 금빛 줄기가 곧게 뻗으며 놈의 그 발을 쳐버린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공에 빛나던 반짝임이 삭 사라지면서,
“휴.”
블루벨이 율리아를 안은 채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저 꼬맹이는 깨어나자마자 철퇴 들고 뛰쳐나가더니, 수장은 아예 대가리로 달려드네. 뭐 이리 무모해?”
“선수필승. 속전속결. 매일 호신술을 수련하면서 외친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율리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블루벨은 또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에서 폭음이 울리며 매캐한 연기가 하나 둘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바로 근처에서는 금빛 섬광이 마구 번쩍이는 게, 로나가 신나게 철퇴를 휘두르고 있는 듯했다.
그럼 우리도 가야지.
나는 메린과 율리아, 두 사람에게 각각 눈짓하고서 곧바로 그에 합류했다.
우리를 발견하고서, 땅을 무너뜨리려는 건지 마구 내려치는 발 위로 뛰어올라 검으로 내려찍는다.
그런 나를 뭉개려는 다른 쪽 발을, 메린이 크게 뛰어오르면서 칼집을 내버린다.
화르르륵!
바로 이어서, 성검 자루에 힘을 주어 놈의 발에 하얀 불을 질렀다.
살이 타면서 공간이 넓어져, 아래로 다시 떨어지는 나에게 놈이 입을 쩍 벌린다.
그러자 율리아가 그 옆얼굴을 모닝스타로 후려쳐버린다.
뒤이어 로나가 그 콧잔등을 뭉개려는 듯이 힘있게 내려치고, 블루벨이 그 콧구멍 안으로 화살을 쏘아 넣는다.
내 장담하는데, 이중에 가장 잔인한 공격을 한 건 블루벨이다.
“크아아아아! 이 파렴치한 놈들!! 좋다! 숫자에는 숫자로 상대해주마!!”
“네가 똑같이 하는 게 반칙이라고!!”
캬아아아아—!
시끄럽다는 듯이 놈이 크게 포효했다.
그러자 홀 가장자리에 펼쳐진 불의 벽에서 진홍빛 마법진이 나타나더니, 인형을 난도질했던 그 괴이한 짐승들이 퐁퐁 튀어나왔다!
그것도 대충 세어도 스물은 거뜬히 넘을 숫자로!
“야, 이 더러운 새끼야!! 딱 봐도 우리보다 훨씬 많잖아!!”
“나 또한 전력을 다할 뿐이다!!”
“이 개 같은 새끼!!”
진심을 다해 욕설을 던지며, 삼지창을 내밀고서 달려드는 날짐승들을 베어버렸다.
다른 다섯 명도 일단 놈에게서 떨어져서 그 날파리 같은 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는데……
“이거 왜 안 줄어?!”
놈의 잡스러운 공격을 피하면서 베고 또 베어도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어처구니없어서 던진 말에, 메린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받아 외쳤다.
“가장자리에서 계속 나오고 있어! 끝이 없는 거 같은데!”
뭐야?!
저 씨발 새끼, 진짜 가지가지하네!!
“주여, 바라나이다! 우리의 팔을 붙드시어 지치지 않게 하소서!!”
우렁찬 함성 같은 기도가 들려오자, 무거워지려던 팔이 다시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왠지 성검이 쏘는 빛의 칼날도 더 커진 거 같은데?
덕분에 짐승들이 주위에 모여드는 족족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봤자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그러자 아트라토스가 으르렁거리면서 자신의 바로 앞 바닥을 내려쳤다.
“꼭두각시 년! 어찌 그런 치졸한 기도를 올리느냐!”
“아가리 닥쳐, 졸렬한 새끼야! 사자(?者)가 내려오지 않을 수준으로 온갖 더럽고 치사한 수는 다 쓰고 있는 놈이 뭐라는 거야?!”
율리아는 품위를 모두 내던진 말로 날카롭게 쏘아붙인 후, 팔다리와 이빨 달린 날파리들을 터뜨리면서 소리쳤다.
“카엘 님! 메린 씨! 잔챙이는 신경 쓰지 말고 놈을 상대하세요!”
“맞아요~! 잡것들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큰 놈 잡으세요~!”
“엄호할 테니까 뛰어!”
제각각 건네는 격려에 답하는 대신, 곧바로 메린과 함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따금 앞을 가로막는 잔챙이를 베어버린다.
사각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은 걱정하지 않는다.
화살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벼락이 떨어지는 천둥 소리가 울리고, 금빛이 번쩍이는 것과 함께 까앙 하는 맑은 울림이 들리고 있으니까.
“아트라토스!! 야비한 도마뱀 새끼야, 끝장을 내주마!!”
“둘이서 덤비는 놈이 나를 야비하다 하느냐!! 오냐, 염치없는 대행자야!! 네놈의 운명을 친히 박살내주마!!”
들끓는 고함에 맞선 함성.
타오르는 진홍빛 눈동자를 향해 찬란히 빛나는 성검을 들이대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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