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 418화 : 마지막 선택 (2)
* * *
그 후,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연회가 시작되었다.
창고에 비축해둔 분량에 율리아가 가져온 식량을 더해서 풍성히 준비한 요리들을 먹으며, 축제 때처럼 광장 중앙에 피운 커다란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출 뿐이지만,모두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기색이 만연하다.
그리고 나와 메린도 당연히 그 자리에 함께 했다.
특히 메린은 지난번 데이트 때에 샀던 슈미즈와 오버드레스 차림으로, 치마자락을 휘날리면서 통통 뛰듯이 춤을 추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걸 보고 놀라워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뭐, 녀석이 환히 웃는 거에 놀란 걸 수도 있지만.
……그나저나 참 다행이다.
수확제 같은 큰 축제는 아니어도, 이렇게 모닥불에서 춤추자고 한 걸 이룰 수 있어서.
다른 데선 이런 거 안 할지도 모르니까 말야.
내가 아니라 촌장이 연회 개막 연설을 하기도 했고.
여전히 율리아를 보면 조금 움츠러들긴 했지만, 그럭저럭 멀쩡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걸 보면 정신이 많이 돌아온 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연회는 시간이 흘러도 끝날 줄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오히려 밤이 깊어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고양시킨 걸까?
몇 주간 이어진 고된 전투가 드디어 끝났다는 기쁨?
아니면 위슨과 스라소니가 캄캄한 밤하늘에 띄운 불꽃 그림?
아니, 전부 다 틀렸어. 그냥 다들 취한 거야!
율리아가 ‘역시 술이 빠지면 안 된다’면서 어디서 가져온 나무통, 그 속에 담긴 포도주가 원동력이라고!
아…… 그녀가 통을 연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술이라며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달리, 알스 사제를 비롯한 교단 사제들은 어딘지 미묘한 표정이었지?
의식에 쓰는 포도주라서 그러나 싶었는데,
최고의 사제가 되기 위해 눈치마저 모조리 갖다버린 루크 사제가,
이야…… 술이 그렇게 고프셨어요? 이젠 아예 물까지 기도로 채워서 만들어버리시네.
라고 입을 털고서 쳐맞는 걸 보고 여러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일단 율리아의 주먹은 건장한 사제도 한 방에 기절시킬 만큼 더럽게 세다는 것.
그리고 맹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으며,그걸 평소에도 종종 했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번엔 사제관에서 했던 것처럼 물까지 기도로 채워버렸으니, 그야말로 신이 내려준 술이라 할 수 있겠지.
근데 더 놀라운 게 있다.
바로 포도주가 전혀 줄지를 않는다는 것……!
이 밤이 끝날 때까지 계속 먹게 해달라고 빈 건지, 술잔으로 뜨고 큰 주전자에 부어서 가져가도 나무통의 수위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고급 포도주처럼 맛이 있기까지 한 탓에, 다들 얼굴 가죽까지 포도주로 푹 적셔지도록 줄창 퍼 마시는 중이었다.
“이히히힛~ 기분 째진다아아~”
“……”
모자도 벗어 던진 채 흐느적거리며 지나가는 귀 뾰족한 술꾼.
마찬가지로 맛탱이가 가 있는 자경단원 하나에게 찰싹 들러붙어서 건배하고는 시시덕거리고 있다.
저러다 일 나겠는데.
그만 들어가라고 하는 게 낫겠어.
물론 변태 할망구가 아니라 그에 붙잡힌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야아!”
“윽?!”
그러나 그쪽으로 발을 떼려고 하자마자 엄청난 힘이 내 팔을 확 끌어당겼다!
자연히 돌아간 시선에 비추는 건, 볼이 완전히 빨개진 메린.
모닥불 때문에 발갛게 보인다고 하기엔 눈이 탁 풀려 있다.
거참 희한하네.
밖에 나와있는 동안 계속 같이 있었는데 말이지?
대체 어느 틈에 이렇게 취할 정도로 얻어먹은 거야?!
그보다 맥주를 통으로 마셔도 안 취하더니…….
역시 순수 기도로 만든 신성한 포도주는 뭔가 다른가보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보는 술 취한 메린은 부루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한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너 또오! 관심없다며어어! 없다며어어어!”
“뭔 소리야!! 아, 블루벨?! 관심 없어! 없다고! 없다니까!”
“근데 왜 또 눈을 돌려! 왜 가려고 하냐고오!”
으아아, 목 부러질 거 같아!
나도 취기가 오른 상태라서 어지러움이 급속도로 올라오고 있어!
살려줘!
“블루벨 말고 그 옆사람! 옆에 있는 사람 구하려는 거야! 변태한테 붙잡힌 사람!”
혼신의 힘을 다해 외치자, 메린은 우뚝 손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블루벨 아니야아…? 진짜아……?”
“진짜 아니야…….”
“관심 없어어……?”
“없다니까…….”
아니, 결혼식 날짜도 대강 잡힌 마당에 아직도 의심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말해야 돼? 설마 평생……?
아으, 그럴 거면 적어도 본인처럼 성숙한 여자를 두고 갈궜으면 좋겠다.
하필이면 블루벨이 걸려 가지고……!
하씨, 누가 보면 내가 그런 취향을 숨기는 줄 알겠네!
“진짜진짜진짜~로 관심없어?”
“없어……. 없다고…….”
아, 울고 싶다.
덤으로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동네 사람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어.
메린은 내 말을 듣고도 부루퉁하더니, 이번엔 갑자기 배시시 웃으며 나를 껴안아왔다.
“으응… 없구나아…. 히힛, 히히히~ 없어~ 푸힛, 블루벨은 가슴이 없어~”
“이건 또 뭔 소리야…….”
“으히힛~”
돌겠네, 진짜!대체 누구야?!
이 녀석이 이렇게 될 때까지 술 먹인 사람!!
“메린도 취하니까 귀엽네요. 옷차림도 그렇고, 완전 딴 사람 같아요.”
“술은 본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아주아주 탁월한 약이야. 즉, 메린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부터 귀여웠던 거지.”
그때 들려온 밀렌 누나와 치료사 아저씨의 말.
어째서인지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도 너무 취한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역시 한 사발을 단번에 먹인 건 조금 과했어요, 사범님. 저러다 무슨 소란이 나기라도 하면……”
“괜찮아, 밀렌. 카엘이 알아서 막을 거야.”
“뭔 소리예요, 제가 이 녀석을 어떻게 막아요! 사범님, 아니 티치 형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하하, 우리 사이에 고맙기는 뭘. 그간 고생한 만큼 신나게 즐겨!”
사범님은 그렇게 헛소리를 하고는 손을 흔들며 저만치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누가 고맙다고 했냐고.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 와중에 메린은 또 포도주를 받아서는 벌컥벌컥 마시고 있고!
황급히 그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버렸다.
“야야야야, 그만 먹어!!”
“에에엥, 시러어어, 마싯딴 마랴아~ 줘어~”
“안 돼, 임마. 너 취했어! 혀까지 다 풀렸구만!”
“안 취해써! 하~나도 안 취햇따구~ 혀도 안 풀렷눈뎅?”
“하…………”
진짜 안 되겠구만.
연회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법은 없으니 집에 가야겠다.
그래도 일단 아버지께 인사는 하고 가는 게 낫겠지?
그 생각에 제대로 걸음도 못 걷는 메린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가자, 술집에서 항상 잔을 나누던 친구분들과 모여 앉아 껄껄 웃고 계셨다.
포도주에 푹 담근 듯한 얼굴로.
아니나다를까, 아버지는 내가 다가가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리 두 사람을 보시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셨다.
“하~ 저거 봐, 저거. 저걸 보고도 안 믿긴다니까? 세에~상에 이 놈이 결혼을 한대! 그것도 메린이랑! 엇허허허! 아니, 둘이 볼 거 다 봤으면서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되나 몰라.”
“보긴 뭘 봐요, 안 봤었거든요!!”
“그러냐? 뭐, 어쨌든 메린은 너 아니면 늙어 죽을 판이었어. 네 번데기가 소시지로 자라기까지 쭉 봐왔으니까. 그러니 네가 책임지고 데려가야 하는 거지! 안 그런가?!”
“암, 그렇고 말고! 당연히 책임져야지!!”
상당히 이해하기 싫은 말을 떠들며 와하하하 웃는 아저씨들이었다.
어흑. 제정신인 사람이 진짜 하나도 없네.
“소시지…? 그러고보니 머근 적 업써…….”
“뭔 소리야, 아까 먹었잖아.”
“네 소시지 머근 적 업짜나아~ 네가 못 먹게 해서어~”
“………”
이젠 배를 잡고 웃기까지 하는 아저씨들 사이에서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아니,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한 녀석이 그 말은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저런, 카엘 군! 먹고 싶다는데 왜 못 먹게 해? 그러면 안 되지!”
“내 맘이에요!”
“혹시 너무 작아서……?”
“안 자가여~ 이러케 딱 손가락 맞물리는, 우읍.”
“그딴 거 말하지 마, 짜샤!!”
아, 진짜 울고 싶다.
다들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데, 왜 나는 혼자 울적해야 하는 것인가?
그보다 이 사람들, 진짜 웃기네.
내가 책임지고 데려가야 한다고?
그럼 왜 이 녀석한테 촌장이 그딴 제안을 하게 둔 건데?
특히 아버지가 가장 어이가 없다.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실 적에 우리 둘을 붙이려고 생각하셨다면서 왜 가만히 계셨던 거야?
“그러면서 촌장님이 이 녀석을 며느리로 삼으려는 걸 안 막아요? 한 입 갖고 두 말 하시네들?”
“아, 그거?”
울컥 솟은 마음에 투덜거리자, 아버지는 술잔을 내려놓고 씨익 웃으시면서,
“그래야 네가 저지를 거 아니냐? 그래서일부러냅뒀지.”
“허?!”
상당히 충격적인 답변을 하시는 것이었다!
일부러 안 말린 거라고……?!
“서… 설마 그날 저에게 양 치고 오라고 내쫓은 것도……!”
“촌장님 말씀을 들은 메린이, 베 짜기 싫다면서 양치기 당번의 지팡이를 빼앗아서는 나가버리더구나. 원래 하기로 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마침 잘됐다 싶어서 너 내보낸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일을 저질러버렸다.
결혼할 바에야 싸우다 죽겠다는 녀석에게 어쨌든 결혼하자고 소리쳐버렸고, 어떤 과정이었건 그 일이 마을에 쫙 퍼져버린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용사가 되어서 녀석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도, 튜르 놈과의 혼담은 없던 일이 되었을 게 뻔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쭉 말씀하신 후, 잔 속에 든 술을 쭉 비워버렸다.
“뭐, 용사가 될 줄은 진짜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행을 해야 한다고 하니 또 잘됐다 싶었지. 같이 여행 다니면 싫어도 계속 붙어있어야 되니까. 근데 네가 또 등신 같이 미적대니 억지로 보내야 하나 했는데…… 하하, 마침 벤스 부인이 도와주었지! 본인은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잔을 채우고는 친구분들과 건배를 하는 아버지.
교활하니 영악하니 하는 말에 칭찬 고맙다고 더 크게 웃는 게 정말 무섭기 그지없었다.
내 생각과 행동이 전부 창조주의 의도가 아닌지 의심했을 때보다 더 무시무시해!
“세상에…… 내가 아버지 손에 놀아난 거였다니……!”
“임마,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냐? 자네들도 알지? 이 놈 이거, 지가 메린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튼 저희 먼저 들어갈게요, 적당히 드시고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더 이상한 소리를 듣기 전에 거의 빽 소리지르듯이 인사하고서, 나는 메린을 질질 끌듯이 그 자리를 떠나 임시로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만난 로나가 우리를 졸졸 따라오면서 이 얘기 저 얘기 들었다면서 신나게 놀려먹었지만, 아무튼 무사히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 진짜 술이 원수야, 원수.
한숨을 쉬면서 메린을 데리고 침실로 가려는 순간,
“카에엘~”
“윽?!”
돌아오는 내내 꾸벅꾸벅 졸던 메린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면서 입을 맞춰왔다!
달큰한 포도향을 품은 숨결이 밀려들면서 머릿속이 한순간에 뿌옇게 흐려져 버렸다.
그 탓에 다리가 풀려버려, 녀석을 껴안은 채 바닥에 드러누운 꼴이 되고 말았다.
“잠, 깐…! 하… 메린, 잠깐… 진정해……!”
“히히, 후흐흐… 카엘~ 조아해애~”
“……”
귀여워.
지금 좀 크게 두근거렸다.
……하지만 안 돼, 정신차려, 카엘!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돼!
말 늘어뜨리는 게 귀엽긴 하지만 귀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근데 이 상황에서 말하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나는 이 녀석의 힘을 당해낼 수 없으니까.
힘으로 뿌리칠 수 있으면 저번에 강제로 안 당했다고.
“조아해애… 후으… 이히힛…….”
“으, 메린, 알았… 하아… 나도 좋아하니까 이제 좀……!”
그러나 애석하게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메린은 좋아한다고 중얼거리면서 연신 입을 맞춰댔고,
이윽고,
“히히~ 소시지이~ 소시지이~”
괴상망측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마구 손을 뻗어오는 것이었다!
“야, 야야, 안 돼! 메린, 안 된다고! 메린메린메린, 하지 말라니까하으?!”
“이거 봐라아~ 바로 딱딱해졋따아~ 후히히… 잘 먹겠습니다아~”
“먹지 마아아!! 아아아, 메린, 제발, 여기, 여기선 안 돼! 안 된다니까요?! 하, 할 거면 적어도 침대에서…! 아, 안 돼앳……!”
………내 처절한 간청은 언제나 그렇듯이 묵살되어버렸고, 그대로 거실 겸 부엌 바닥을 적시고 나서야 겨우 침대로 갈 수 있었다.
아니, 침대에 던져졌다고 하는 게 맞겠군.
“히히, 이히히힛~”
“……”
메린이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침대 위를 기어온다.
입맛을 다시듯 입술을 핥으며.
아…… 나 또 잡아먹히는구나.
이틀 뒤에 출발하기로 해서 다행이다.
몽롱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그녀가 내뿜는 열기에 다시 휩싸여버렸다.
“귀여워어… 카엘, 귀여워어~”
“네가, 더 귀엽거든?”
힘껏 항의하며 입을 맞춘다.
눅진한 포도향을 품은 타액에, 머릿속이 완전히 녹아버리는 것 같다.
이미 헤롱헤롱 녹은 그녀의 웃음과, 다시 느낄 줄 몰랐던 온기에 한결 더 취하며 그녀에게 안긴다.
단숨에 내 이성을 녹여버린 그녀를 맘껏 귀여워하며 사랑을 전한다.
다시 되찾은 한여름을 만끽하듯이,
그렇게 서로의 열기를 나누며 깊은 밤에 잠겨갔다.
그 후, 바깥의 소란스러움조차 고요 속에 잠겼을 무렵,
“있잖아, 메린.”
“……”
포근한 피로감 속에서, 이미 잠에 빠진 그녀를 토닥이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메린은 자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놋지빌에 남지 않겠다고 했더니, 율리아가 우리를 데려가려는 이 상황……
좋게 봐야 하는 걸까?
율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수도의 지하 신전에서 살게 될 터.
아트라토스가 없는 지금도 여전히 대언자인 만큼, 그 곁에 있을 우리도 섭섭지 않은 대접을 받겠지.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거야.
바닷가 마을에서 보았던 알스 사제와 귀족 아가씨의 대립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복잡한 일들에 휘말릴 테니까.
……그러고보니 그 아가씨가 그랬던가.
여하튼 당신은 이미 정치판에 발을 들인 거나 마찬가지에요. 용사 일을 마치시는 순간, 손을 뻗어오기 시작할 거라고요.
“………”
그때는 일이 끝나는 즉시 숨어버리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대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됐으니 얼굴과 이름이 널리널리 알려질 게 분명하다.
적어도 왕성에 있는 귀족들은 다 알게 되겠지.
어쩌면 수도에 머무는 동안, 율리아처럼 제안을 하려고 연락해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냥 너랑 같이 조용히 살고 싶은데, 다들 귀찮게 하네.”
씁쓸히 웃으며 곤히 잠든 메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난리를 겪고서도 여전히 보드라운 느낌이 손에 전해오면서, 조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넌 아직 사람들과 지내는 거에 익숙하지 않지.
그렇다고 둘이서만 살 수는 없어.
우리는 괜찮아도 애들에겐 전혀 좋지 않을 거야.
애초에 사람은 서로 모여 살아야만 가치를 발휘하는 법이지.
더 많아질 가족을 생각하면 수도에서 사는 게 가장 좋겠지만………
“……모르겠어.”
뭐가 가장 좋은 선택인지,
“어떻게 해야 네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다.
뭘 고르는 게 가장 좋은 건지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 저 하늘에 있는 창조주조차.
용사일 때도 안 줬는데, 이젠 그것도 아닌 일반인이잖아.
답을 알려줄 리가 없지.
……진짜 쉽게 풀리는 일이 없구나.
왠지 울적해진다.
“네가 행복하려면… 어디로 가야 될까……?”
낮게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조금 더 깊게 껴안자,
“너만 있으면 돼.”
“……어?”
그녀가,
품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 떨어져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자, 조금 전까지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또렷한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 들었어? 미안, 시끄러워서 깼구나.”
“아니, 그냥 눈이 뜨였어.”
“방금 깬 거지?”
“어. 내가 행복하려면 어디 갈까 하고 꿍얼거릴 때.”
그렇게 말한 후, 메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뺨을 콕콕 찔렀다.
“난 너만 있으면 어디서 살든 상관없어. 여기이든, 신전이든 다 좋아.”
“사람들이 귀찮게 굴 텐데?”
“사람이야 어디든 있잖아. 그리고 너무 심하다 싶으면 네가 알아서 막아주겠지.”
……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거 같다.
마을 사람이야 같은 평민이니까 되는대로 중재할 수 있고, 사제도 말이 통하긴 하니까 괜찮다.
근데 귀족은 아니잖아. 내가 귀족을 어떻게 상대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헛웃음을 켜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좋아서 웃는 거 아니야.
………정말로 아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벅차올라서, 웃음이 아니라 눈물이 나올 거 같았으니까.
“……동굴에 처박혀서 살자고 해도 좋냐?”
“사냥 실컷 하고 좋네. 아, 그럴 거면 그냥 산에 가자. 거기 사람들이랑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냐? 나는 어쨌든, 너는 말상대가 더 필요할 거 아냐.”
그 와중에 나까지 신경 쓰고 있다.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바닷가에 가도?”
“응. 거기선 낚시해야 될 테니, 진짜 네가 나 먹여 살리겠다. 너 낚시 잘하니까. 배도 실컷 타고 좋겠네.”
“나 참.”
어쩌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결정할 수 있을까.
어디서 살든 각각 단점이 있는 법인데.
게다가 다른 사람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둘만 숨어서 사는 걸 에둘러서 거절하기까지 하고 말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을 거란 생각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나에게 떠넘기고 싶나?
어휴, 나쁜 자식.
……그래, 좋아.
진짜 내 맘대로 정해버릴 거야.
“너 나중에 불평하지 마라.”
“어. 안 해. 안 한다고 약속할 테니까, 나 말고 너한테 가장 편한 데로 가. 그러면 돼.”
“……하, 진짜.”
나를 기쁘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고 말야.
또 안아달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건가?
또 다시 혀를 얽어대는 나를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 유혹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너 자꾸 그렇게 꼬실래…? 얼마나 날 짜내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후으… 내가 언제 꼬셨다고.”
어이없다는 투로 시치미를 떼는 괘씸한 입을 막는다.
또 헛소리를 한다고 투덜대는 숨결을 받아 마시며 더더욱 깊이 껴안는다.
나 스스로 그녀의 것임을 온 몸으로 맹세하며, 동시에 그녀가 내 것이라는 증표를 안팎에 잔뜩 새긴다.
“나도 너만 있으면 돼. 하지만…… 응, 열심히 생각해볼게.”
“하아… 카엘…….”
“사랑해… 사랑해, 메린… 하…메린…….”
고마워.
속삭이는 나를 보며 웃는 주홍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