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화 〉 420화 : 마지막 선택 (4)
* * *
인사말에 이어 국왕이 입에 올린 건, 간단히 말하면 ‘수고했다.’는 뜻이었다.
“대재앙을 훌륭히 물리쳐주셨소. 비록 무수한 백성들이 고난을 겪었으나, 그대들이 다시 찾아온 평화에서 위로를 얻겠지.”
“……”
“그대들의 용기 덕에 이 왕국이 멸망을 피했으니, 국왕으로서 그 공로를 치하하고자 하오.”
그렇게 말하는 국왕의 표정은 상당히 엄숙하다.
그 때문인지, 알현실에 떠도는 분위기가 되게 무겁다.
……그러고보니 사람이 진짜 없네.
왕좌의 양옆, 각각 왕비와 왕태자가 앉는 의자는 텅 비어 있다.
왕좌가 놓인 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도 아무도 없고.
석 달 전엔 의자들이 전부 채워져 있었는데.
왕태자 말고 다른 왕자가 앉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처럼 텅텅 비어 있진 않았다.
계단 근처에도 대신들이 서 있었고 말야.
게다가 우리가 밟고 있는 붉은 융단, 그 좌우에 서 있는 근위병들의 시선도 무지하게 따갑다.
내가 정치는 하나도 모르지만,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겠어.
아니, 상 주기 싫으면 주지 말든가.
누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구만!
속으로 투덜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국왕이 말을 이었다.
“먼저 용사, 카엘 에스트렐. 그대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변경백으로 임명하고자 하오.”
“……?!”
“그대의 고향을 비롯한 일대를 영지로 선사할 테니, 그대와 그대의 후손이 영구히 다스리어 왕국의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오.”
…………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작위를 준다고? 고향…… 놋지빌이랑 그 일대가 내 영지가 될 거라고?
그러니까,
“제가……귀족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
마른 세수를 하고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예법에 어긋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지럼증이 느껴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뒤, 숨을 길게 내쉬며 주변을 힐끗 둘러보았다.
메린과 위슨, 블루벨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나를 보고 있다.
로나와 알스 사제는 그냥 무표정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고.
이 두 사람은 사제이니, 속세 일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두 사제의 수장인 율리아는 상당히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국왕의 제안이 마음에 안 들어도 아주 톡톡히 들지 않는 듯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다행이다.역시 조건이 있는 제안이구나!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왕은 여전히 왕좌에 꼿꼿이 앉은 채, 엄숙히 말을 꺼냈다.
“내 제안을 수락하는 대신, 귀족의 여식과 혼인을 올려야 하오.”
“………예?”
바위에 머리를 들이받은 기분이다.
이번에도 제대로 들은 이야기라는 게, 그리고 그딴 소리를 맨 정신으로 하는 국왕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아마 내 표정이 잘 보이고 있을 터임에도, 그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대는 평민이지. 아무리 세상과 왕국을 구한 용사라 해도, 평민에게 변경백의 직위를 선사할 수는 없는 법. 아마 반대가 극심하겠지.
허나 그대가 귀족과 혼인한다면, 그 가문의 명망을 힘입어 그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아…… 그런 얘기구나.
속이 저 아래 심연까지 가라앉는 기분인데, 오히려 머릿속은 점점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아무 가문과 이을 수는 없으니, 왕실에서 신붓감을 찾아 선보일 예정이오. 그 후보들 중에서 자유로이 택하면 되니,”
“송구합니다만, 폐하,”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낮은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국왕을 올려다보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그 아래에 있는 계단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저는 결혼식을 올리러 여기 온 것입니다.”
“알고 있소. 다음주에 대예배당에서 식을 올릴 것이라지? 교단이 무척 분주하더군.”
근처에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하는 국왕의 시선도 잠시 율리아에게 향했는데,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것 치고는 상당히 차갑고 딱딱한 눈초리였다.
“허나 날짜는 미루면 될 일이오. 서너 달이면 신붓감을 찾고 식을 준비하는 데에 충분하겠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절로 고개가 들렸다.
다시금 마주한 국왕의 얼굴엔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길과 함께.
“따로 연을 이어가면 되지 않소? 원한다면, 그 숙녀의 거처도 함께 마련해줄 수 있소만.”
“싫습니다.”
메린의 손을 꽉 잡는 걸로 속이 끓어오르는 걸 참으면서 단칼에 거절했다.
“제가 결혼할 사람은 이 여자밖에 없어요. 그러니 모처럼 주신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어명을 내린다면?”
이 새끼가……!
“누가 명령하든 거절이에요! 신탁이 내려와도 절대 안 할 겁니다!”
“마음을 고치는 게 좋을 것이다, 용사.”
존대를 치워버리고, 국왕은 두 손을 모아 잡아 깍지를 끼면서 낮게 말했다.
“이 나라에 계속 발을 붙이며 살고 싶다면.”
그 말뜻을 못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린조차 놀란 눈으로 망연히 있는 가운데, 내내 얼굴을 구기고 있던 율리아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추방이라도 하시겠단 겁니까?!”
“그보다 더한 경고이지. 그리고 대언자는 나서지 마시오. 이는 사람의 일. 교단과는 무관한 일이니.”
딱딱한 말투로 대꾸하는 국왕.
게다가 무슨 원수를 보는 듯한 눈으로 율리아를 보고 있다.
왕성을 점령한 게 좀 많이 서운했나봐.
근데 그거, 율리아를 탑에 가둬서 그렇게 된 거잖아.
국왕이 먼저 잘못한 거 아냐?
자세한 사정은 안 물어봐서 모르지만.
국왕의 말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율리아는 곧바로 정색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요. 이건 저희의 일입니다. 용사의 결혼식은 그가 사명을 완수했음을 알리고, 그 수고를 기리기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이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힘써준 용사를 위한 일이에요.
이를 막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국왕.”
율리아는 ‘국왕’이라는 호칭에 유독 힘을 주어 말한 후,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그를 냉담히 마주보았다.
“용납할 수 없다? 또 이 왕좌를 차지하기라도 하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나! 이 나라를 교단에 바치려는 속셈이렷다!”
쿵!
국왕은 팔걸이를 거세게 내려치고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더는 아무것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아들과 딸을 빼앗긴 걸로 충분해!”
“그렇다면 방해하지 마시지요. 그 왕좌에 계속 앉고 싶으시다면.”
싸늘한 얼굴로 비꼬는 율리아.
국왕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 이내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서 다시 근엄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런 뒤, 나를 무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작위를 내리진 않겠다. 대신, 식을 올린 뒤에 거처를 하사할 테니 그곳에 거하도록 하라. 결코 수도를 떠나서는 안 될 것이야.”
“이유를 알려주세요.”
“솔직히 말하지. 나는 그대가 다른 귀족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아. 그대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 세력이 그대에게 연락을 취할 터.”
그렇기에 선수를 쳐서 작위를 내리려 했다.
온전히 국왕의 세력으로 삼아서, 오로지 왕실을 지킬 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어째 국왕이라는 자리에 걸맞지 않게 술술 다 이야기해준다 싶었는데,
“이는 어명이다. 거역한다면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느니라.”
“………”
아니나다를까,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는 선포를 해왔다.
돌겠네, 진짜.
“……폐하,”
착잡할 대로 착잡해진 마음으로, 한숨 섞인 말을 꺼냈다.
“저는 권력이나 부를 바라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살겠다는 약속으론 안 되겠습니까?”
“말뿐인 약조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있을까.”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딱 잘라 거절한 후, 국왕은 나를 똑바로 마주하면서 엄숙히 말했다.
“나 역시 은인에게 무도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부디 내 뜻을 따르도록.”
“…………”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밑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탓에, 입을 열었다간 욕이 튀어나갈 거 같았으니까.
국왕도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여길 나가고 싶을 뿐.
“……”
……수도를 떠나면 죽일 거라고?
하, 진짜 웃기고 있어.
저따위로 나오는 걸 보면, 분명 살 곳을 마련해주면서 감시를 붙이겠지.
이 수도 전체가, 우리 두 사람을 가두는 감옥이 되는 것이다.
진짜 거지 같구만.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편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알현 후, 우리는 왕성 바깥으로 나왔다.
화를 참느라 못 들었는데, 위슨과 블루벨은 각각 부엉이탑과 숲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수장에게 ‘국왕이 회담을 가지고 싶다’는 말을 전하기로 한 듯했다.
“아마 네 결혼식날에 모이게 될 거야.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임시 왕께서도 네 결혼식 보고 싶으실 테니까.”
“우리 수장님도.”
“그래, 그렇겠지. 딱 좋은 명분이니까 말야.”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하…… 명분은 뭔 명분이야, 멍청아.
그 사람들은 진짜 순수하게 나를 축하해주고 싶어서 오는 걸 텐데.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둘 다 미안, 방금 말은 잊어줘. 헛말이 나오는 걸 보니 피곤한가봐.”
“네 헛소리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 뭘 새삼 사과하고 그러니?”
“그래요, 형. 신경 쓰지 마세요. 평소에 듣던 것보단 훨씬 멀쩡한 소리인데요, 뭐.”
“……”
음, 알현실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빡침이 올라오는군.
무사히 여정을 마친 걸 기념해서 딱밤 한 대씩 선물해버릴까?
“근데 너희 왕,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니? 아무리 권력이 중요해도 그렇지, 어떻게 딴 여자랑 결혼하라고 대놓고 말한대?”
“그러게 말이에요~ 본인들이 정부 두고 사랑놀음한다고 그게 옳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알현 내내 잠자코 있던 로나가 푸념을 늘어놓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다음,
“카엘 님, 그냥 확 엎을까요?”
“뭐?!”
지극히 터무니없는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왕성을 엎어버리는 거예요! 국왕이 그리 소중히 여기는 왕좌는 부숴서 땔감으로 써버리고요! 그런 뒤에 유유~히 수도를 떠나는 거죠. 어때요?”
“……농담이지?”
“글쎄요~”
방실방실 웃으면서 다른 데를 보는 로나였다.
와, 존나 진심이구나.
진짜 무시무시한 발상이구만.
나는 질색과 거절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딴 짓을 하면 누가 쫓아올 게 뻔한데, 나보고 평생 숨어 살라고? 싫어, 임마. 절대 안 해.”
“예, 하지 마세요. 국왕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꽤 되거든요. 이 녀석 말은 무시하세요.”
내 말을 거들면서 로나의 머리를 쥐어박는 알스 사제였다.
그는 로나가 입을 비죽 내밀고서 투덜거리는 걸 보고 한숨을 쉰 후,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선은 처소로 가시지요. 여러모로 지치셨을 테니, 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렇네. 그래요, 카엘 님. 일단은 쉬세요. 피곤한 상태에선 좋은 생각도 나지 않는 법이니까요.”
쉰다고 무슨 좋은 생각이 날 것 같진 않은데.
국왕이 저렇게 세게 나오는데 달리 뭘 할 수 있겠어?
………아니야.
이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론 될 것도 안 돼.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메린과 자유롭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나랑 메린이 여기 머무는 동안에 여러 연락이 올 거라 했지?
어쩌면 그 연락들 중에서 타파할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꼭 그럴 거야.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
크게 숨을 내쉰 다음,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위슨과 블루벨에게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뭐, 다 잘 되겠지. 우린 걱정하지 말고 조심히 가. 또 보자.”
그간 고마웠다, 잘 지내길 바란다…… 그런 인사는 다음주에 해야 한다.
그때 만나는 게 정말 마지막일 테니까.
“그래. 또 봐.”
"결혼 준비 잘하세요. 또 봬요.”
두 사람도 같은 생각인지, 밝게 웃으면서 또 보자는 말을 남겼다.
뭐, 위슨은 결혼식 뒤에도 종종 만나러 올 거라고 했으니 영영 작별인사를 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는 걸 배웅한 다음, 나랑 메린은 교단이 마련했다는 거처로 향했다.
사제관의 방 중 하나를 주나 싶었는데, 의외로 지상에 있는 자그마한 이층집 앞에 멈춰 섰다.
“여기예요. 그리 크진 않지만, 두 분이 오붓하게 지내시기엔 딱 좋을 거예요. 광장이랑 가깝기도 하고요.”
“와, 감사합니다. 지하에서 지내나 했는데.”
“지하? 혹시 신전을 생각하셨어요? 어머머, 저는 그런 칙칙하고 삭막한 곳에 머무시게 할 정도로 야박하지 않거든요!”
“……”
부루퉁한 표정으로 톡 쏘아붙이는 율리아는, 그 칙칙하고 삭막한 곳에 사는 사제이자 최고수장이다.
대체 얼마나 좋지 않길래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하는 걸까?
그것도 표정까지 찡그리면서.
율리아도 스스로가 멋쩍은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한 후, 짐짓 밝게 웃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아무튼 편히 쉬세요. 짐도 다 옮겨 놓았으니 적당히 푸시기만 하면 될 거예요. 아, 한 시간 내로 결혼식 준비일정을 보내드릴 테니, 곧바로 침대로 뛰어드시면 안 돼요~”
“안 가요! 해가 아직 떠 있는데 침대는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는 율리아에게 빽 소리질렀다.
메린의 입을 미리 손으로 덮어버리고서.
안 그랬으면 또 민망한 줄도 모르고 ‘에엥~? 저번엔 하루 종일 하기도 했으면서~’ 같은 소리 했을 거다. 뻔해.
“후후, 그럼 또 봬요~”
율리아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 웃으면서 다른 사제들과 함께 떠나갔다.
나 참, 사람 놀리기나 하고 말야.
로나가 그렇게 짓궂은 것도 다 저 사람을 보고 배운 거겠지.
절로 나오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