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 421화 : 마지막 선택 (5)
* * *
그렇게 시작된 수도에서의 생활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9월에 접어들면서 날이 선선해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머니가 두둑하다 못해 터지려는 게 더 클 것이다.
거의 쓸 일이 없어서 짐만 됐던 지원금을 교단에 반납하려 했는데, 그걸 보상으로 생각하라면서 한사코 받지 않았으니까.
그뿐 아니라, 신전에 맡겼던 돈에 더해서 ‘이것도 당신 앞으로 온 것이다’라며 묵직한 주머니를 척 내놓는 것이었다!
세상에, 다 합쳐서 금화 200개라니……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겠네.
물론 그걸 몽땅 다 들고 다니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무거운 것도 있지만, 도둑 들까봐 괜히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거야.
게다가 아직 수중에 얼마 남아있기도 하니, 지원금이자 보수가 된 돈은 전부 신전에 맡기기로 했다.
치유사제가 있는 신전이라면, 어디서든 내 이름을 대는 걸로 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나?
그래야 본인이 맞다는 걸 알아볼 수 있거든요.
치유사제는 사람을 살피면서 핏속에 담긴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안 가서 그냥 그러려니 해버렸다.
어쨌든 교단에서 보내준 결혼식 준비일정을 따르면서, 중간중간 옷 구경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등 꽤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왠지 한 발 앞서서 신혼 생활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거의 매일 같이 손님이 오지만 않았다면 ‘꽤 즐거운 시간’이 아니라 ‘최고로 즐거운 시간’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비어 있는 시간을 안 건지, 정말 갖가지 가문에서 사람이 찾아와서는 제안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예상하기도 했고, 국왕도 반쯤 확신했던 대로.
가끔 로나가 심심하다고 놀러 오지 않았다면, 손님 사절이라고 문에 써 붙였을 거다.
그 녀석 말고 반가운 손님이 있기도 하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중 하나이다.
햇빛만 받으면 알아서 휘광을 만드는 금발머리와, 쓸데없이 큰 목소리가 특징인 피터 왕자.
본래는 연을 맺을 일이 없었을 왕자님은, 내 기나긴 넋두리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결혼식 준비는 잘된 모양이네요.”
“거의 교단에서 했으니까요.”
청첩장 시안과 문구, 하객 목록작성과 숙박 및 교통편, 피로연 음식 등등, 진짜 거의 대부분을 교단에서 처리해버렸다.
심지어 메린이 입을 드레스 모양까지 알아서 준비하겠다며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미리 보여드리면 재미없죠! 최고로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실 테니 걱정 마세요!
그렇게 장담하면서 재단사와 함께 엄지손가락만 척 올리던 율리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심지어 리허설도 따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탓에, 메린 혼자서 대예배당에 가 있는 상황이다.
나 참, 내 눈에 안 차기만 해봐.
뭐, 아무튼 율리아를 위시한 교단에서 준비해주는 덕에, 우리는 지정된 재단사를 찾아가 몸 치수를 재고, 보석세공사와 결혼반지 모양을 정하고,
교단에서 보내준 결혼식 순서를 보고 경악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대예배당을 나와서 마차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니.
우리가 무슨 왕족이냐고.
“하하하! 당연히 해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을 구한 용사님인데!”
“하……… 웃을 일 아니에요.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고요.”
그 전에 대예배당에서 결혼식 올리다가 기절할 거야. 뻔해.
리허설과 의상 때문에 미리 온 아버지와 사범님…이 아닌 티치 형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메린이 입을 드레스보다 내가 기절하는 꼴이 더 기대된다나?
하,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그래서 여러 제안을 받으셨다고요? 어디로 갈지 결정하셨나요?”
“아니요~ 다 거절했어요~”
“네? 아니, 무엇 때문에…… 혹시 아바마마의 뜻대로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제안들이 다 맘에 안 들었을 뿐이죠.”
귀족들의 제안은 이랬다.
결혼식 중간에 수도를 빠져나가, 그들의 영지에서 기사 서임을 받는다.
그러면서 성씨를 바꾸면 왕실에서 무어라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니, 그대로 영주의 최측근이 되어서 살면 된다.
각각 다른 가문에서 거의 동일한 제안을 하는 게 좀 우스웠지만, 여길 빠져나가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리라.
왕자는 내 말에 고개를 약간 기우뚱거렸다.
“그렇게 나쁜 것 같진 않은데요?”
“나쁘죠.”
“흠, 하긴 그것도 정치에 엮이는 거니……”
“그것도 있는데, 더 거슬리는 게 있어요.”
멀뚱거리는 왕자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메린이 아니라 저를 기사로 세워야 한다고 우기는 거 있죠? 저보다 훨씬 강하다고 얘기해도 전혀 안 믿더라니까요.”
“오히려 믿는 게 이상하죠. 메린 씨 몸집은 일반적인 여성 기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시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녀석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다 거절해버린 것이었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둘뿐.
율리아의 제안대로 교단에 소속되거나, 국왕의 뜻대로 얌전히 처박혀 사는 것이다.
둘 다 싫지만…… 굳이 고르라면 율리아 쪽이 더 낫겠지.
적어도 감시는 안 할 테니까.
“교단도 싫으세요? 으음, 하긴 율리아가 조금 많이 엄격하긴 하죠?”
“엄격한 게 아니라 괴팍…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율리아 님보다는 근무 환경이 상당히 안 좋을 거 같아서요. 폐하를 알현할 때 두 분이 엄청 험악했는데, 교단에 들어가면 저도 거기 끼는 거잖아요. 어으.”
“뭐…… 아바마마께서 그러시는 이유도 이해는 갑니다. 큰형님을 잃으셨거든요.”
율리아가 성을 점령한 날, 왕태자 퍼시벌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를 비롯한 교단에서는 악마가 들린 여자가 죽인 거라 밝혔는데, 증인이 별로 없는 만큼 갖가지 소문이 떠돈다는 듯했다.
“엥? 증인이 왜 없어요?”
“죄다 교단에 심문받으러 끌려가거나, 아바마마께서 반역자로 처형하거나 작위를 박탈해서 내쫓으셨어요.”
“우와.”
“그 와중에 율리아가 ‘공주 안 한다’고 인장을 버리고 떠났으니……. 그 아이를 아끼셨던 만큼 분노가 크신 거겠죠.”
그 때문에 완전히 절연해버린 것이라고 말하며, 피터 왕자는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공주’가 아니라‘대언자’라고 부른 거구나.
율리아가 국왕을 ‘폐하’가 아니라 ‘국왕’이라 부른 것도, 아마 자신을 딸로 여기지 않겠다는 그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겠지.
나 참, 신분을 버렸다고 그녀가 국왕…… 퓰리에스 디왈리라는 남자의 딸이 아닌 것도 아닌데.
하여간 귀하신 분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어.
피터 왕자는 자신의 직계가족 일인만큼, 나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혼자 고개를 작게 젓더니 빙긋 웃었다.
“뭐, 여하튼 제가 오늘 여길 찾아오길 잘한 것 같네요.”
“왜요? 왕자님도 뭐 제안하시려고요?”
“하하, 제안보다는 조언에 가깝죠?”
“조언……”
……그러고보니 그 도시에서도 이 사람의 조언을 받았었지?
무도회에 가는 날, 그는 나에게 마음에 대해 몇 마디 들려주었다.
“그리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아뇨. 왕자님의 조언은 큰 힘이 될 거예요. 이 결혼을 만든 공로자 중 하나이신걸요.”
언제 품었었고, 또 묻었었는지도 모를 사랑이 이렇게 맺어진 건, 내가 그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그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언 덕분에, 나는 메린을 좋아한다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메린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를 평생 몰랐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설마요. 혼자서도 언젠가 깨달으셨을 겁니다. 그 시기를 조금 당겼을 뿐이겠죠.”
“절대 아닐걸요. 아마 목에 칼을 대도 아니라고 우겼을 거예요. 제가 한 고집하거든요. 그래서 무슨 조언을 주실 건데요?”
왕자는 내 물음에 찻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말리스로 가십시오.”
“말리스? 엥? 그 돈독 오른 도시 말씀이세요? 아니, 왜 하필이면…….”
“돈으로 돌아가는 도시이지만 자유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왕국의 법이 닿지 않으니까요. 옐리카도 있으니 당신이 붙잡혀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상인조합의 이사이자 감사인 옐리카는, 그 직책을 적극 활용해서 엘프와 인신매매 거래를 벌인 놈들을 잡아들이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는 듯했다.
차기 조합장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돌 만큼, 조합 내에서도 영향력이 커졌다나?
뭐, 그 아가씨가 조합장이 되진 않겠지.
머지않아 왕자비가 될 테니.
왕자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는지, 옐리카를 도우면서 새 직업을 얻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던졌다.
말리스로 가서 옐리카의 도움을 받는다……
“나쁘지 않긴 하네요.”
“그렇죠? 당일이라도 귀띔해주시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될 겁니다. 가는 길이 좀 걸리긴 하지만…… 슬슬 개척단들이 움직일 때니 그에 섞여서 움직이면 괜찮겠죠.”
“개척단? 그게 뭔가요?”
왕자는 멀뚱멀뚱 묻는 나보다도 더 눈을 크게 뜨면서 대답했다.
“못 들으셨어요? 각 영지에 피해 있던 피난민들을 다시 이곳저곳으로 흩뜨린다고 했는데요. 여기 미드랜드에서도 꽤 많이 출발할 겁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별 관심이 없어서 흘려들었었나봐.
그래서 바리바리 짐을 쌓은 수레마차나, 거의 산처럼 등에 짊어진 사람이 자주 보였던 거구나.
다 일꾼인 줄 알았는데.
흠…… 개척단이라…….
즉, 처음부터 기반을 쌓을 수 있는 거군?
“좋은데요?”
“네? 뭐가요?”
“개척단.”
내 짤막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눈만 끔벅이던 왕자는, 이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염려스레 눈썹을 구부렸다.
“진심이세요…? 그러다 붙잡히시면……”
“하하, 저랑 메린을 잡는다고요? 누가 할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왕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안다.
대대적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만큼,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모르는 귀족은 없을 터.
국왕이 왕국 전역에 수배령을 내린다면, 출세하고 싶은 영주가 우릴 잡아서 넘기려고 할지도 몰라.
그래도 별 걱정은 안 된다.그때 가서 협상하면 되지, 뭐.
어쩌면 그게 잘 안 돼서 대륙을 떠돌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꼭 좋은 곳에 정착할 수 있을 거야.
정 안 되면 뭐, 왕자의 말대로 말리스에 가거나……
그래, 메린이 말했던 대로 그냥 산에 들어가버리자.
거기서 부족민들과 살면서 이따금 드워프 동네에 놀러가기도 하는 거지.
어쨌든 다른 사람의 비호를 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보람찬 삶일 거야.
………은근히 선택지가 많았구나.
방금 전까지도 망했다고 내심 한숨 쉬고 있었는데.
역시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었던 거야.
“걱정 마세요, 왕자님.”
나는 이번에도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에게 감사하며,
“다 잘될 거예요.”
담을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을 담아 그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있는 힘껏 들려주었다.
기껏 정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왕자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 겁니다. 다름 아닌 당신의 말이니 분명 그대로 되겠지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저번에……?
맞아.내가 그런 소리를 하고서 보검을 훔치러 갔었지.
왕자나 그 아가씨에겐 비밀이니 그냥 웃기만 해야 했다.
그렇게 한결 밝아진 마음으로 찻잔을 기울이는데, 불현듯 문이 열리고 메린이 뒤를 보면서 안에 들어왔다.
아마 문 밖에 서 있는 마차와 병사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것이리라.
“야, 카엘~ 밖에 뭔 사람들이…… 어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전에 본 왕자님이네.”
“하하, 예, 메린 씨. 그간 잘 지내셨나요?”
“혼자 왔어요? 아가씨는요?”
“옐리카 말씀이시면, 지금 한창 일하느라 바쁘답니다. 그래도 두 분 결혼식에는 올 거예요.”
어떻게든 일정을 비우려고 일을 몰아서 하고 있다는 듯했다.
그러다 괜히 쓰러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저도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는데, 부케 받아야 한다면서 죽어도 가겠다고……”
“……”
미혼 아가씨들은 대개 부케 받는 것에 목숨 건다더니 진짜였구나!
부케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런다더니, 설마 그걸 직접 목격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노파심에 부케를 노릴 만한 사람들을 한 번 떠올려보았다.
……조금 불안해졌다.
“설마 난투극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부케 때문에요? 설마요.”
“그러고보니,”
메린이 자기 몫의 찻잔을 가져오면서 덤덤히 말했다.
“누구였는지는 모르는데, 서로 부케 잡겠다고 싸우다가 집이 완전히 아작나고 그랬었대.”
“……”
말없이 왕자와 서로 마주보았다.
이내 한숨을 푹 쉬는 나를 격려하듯, 피터 왕자가 묵묵히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음날, 예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결혼식 리허설을 마친 후, 율리아에게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내 갑작스러운 요청에 의아해하던 그녀는, 곧 그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제 방으로 가시죠.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요.”
“많기는 하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걸 못 견디는 나를 위한답시고, 지하 신전의 수련생들을 대예배당에 집합시킨 상태에서 리허설을 했으니까.
서품을 받은 사제들과 달리, 수련생들은 일반 사람의 감성을 아직 지니고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나?
그 덕에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기진맥진해버렸다.
하…… 이게 진짜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한숨을 푹푹 쉬면서, 메린과 함께 율리아를 따라 신전으로 향했다.
공손히 인사하는 사제들을 지나치면서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간다.
누구 한 사람 다니지 않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복도를 걷는다.
지하에 있어서 그런가?
진짜 어두침침하네.
땅 위에 세워진 신전은 밝고 화사한데 말야.
“칙칙하죠?”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율리아가 갑자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른 신전과 달리, 여기는 사제들을 양성하기도 하거든요. 일반 사람들이 보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니 땅 속에서 해야 된다고 이렇게 만들었대요.”
“왜 귀찮아져요?”
“수련 과정이 엄~청 지독하고 험난하거든요. 살짝 들려드릴까요? 내용만 들어도 악몽 꾸실지도 모르지만.”
“아뇨, 됐어요.”
단칼에 거절했다.
안 그래도 꿈자리 사나운데, 내가 미쳤다고 악몽 소재거리를 더 늘리겠는가?
근데 진짜 무언가 하긴 하나봐.
이따금 뭐가 쾅쾅 두드려지는 소리가 울리는 탓에, 나는 메린의 팔을 꽉 잡은 채 율리아를 따라가야 했다.
바로 옆에서 보내오는 뚱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걸어간 끝에, 겨우겨우 그녀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화사한 봄의 꽃밭을 그린 그림과 사과꽃을 떠올리는 연분홍빛 벽지였다.
신전 분위기가 하도 칙칙해서, 자신의 방만큼은 따스하고 밝은 분위기로 꾸미고 싶었다는 듯했다.
“그래서 카엘 님, 결정하신 거죠?”
우리에게 차를 내어준 후, 율리아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왠지 내가 무슨 답을 할지 다 안다는 듯한 분위기인데, 내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려 하는 줄 아는 걸까?
뭐, 그럴 만해.
국왕은 수도를 떠나려 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한 데다, 다른 귀족들의 제안은 내가 다 거절했으니까.
물론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린 건 아니지만, 아마 알고 있을 거다.
음…… 그럼 나는 또 이 사람의 기대를 와장창 부숴버리는 꼴이 되겠군.
좀 미안한걸.
그 생각에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식을 올린 다음에 여길 빠져나갈 거예요. 그리고 이미 출발한 개척단에 합류할 겁니다. 그게 제 결정이에요.”
“…………”
내 말을 듣자마자 세상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는 율리아.
우와, 이거 조금이 아니라 엄청나게 미안한데?!
그래도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
설령 그녀가 눈물을 터뜨린다고 해도 밀고 나갈 거야……!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은 찰나,
율리아는 기나긴 한숨을 쉬더니 쓰게 웃었다.
“뭐, 이해해요. 정치 같은 골치 아프고 더러운 것에 누가 엮이고 싶겠어요? 두 분께는 그게 가장 좋은 길일 거예요.”
어라, 의외로 그냥 넘어가네.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런 나를 향해 생긋 웃음을 보낸 후, 율리아는 자리에 앉은 채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카엘 님. 당신의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제가 아주아주 확실히 계획을 짜드릴게요!”
“네? 아뇨, 거기까지 신세를 질 수는……”
“괜찮아요. 두 분을 위해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아바마마…… 국왕을 아주아주 크게 골탕 먹일 기회인걸요! 걱정 말고 맡겨주세요!”
“……”
불손한 기대감으로 눈을 아주 번쩍번쩍 빛내고 있는 율리아였다!
……정말 괜찮을까?
어딘지 조금 불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대답하는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엔, 무척이나 화사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