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화 〉 423화 :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너에게
* * *
그새 손이 차가워진 건지, 로나의 작은 손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와 함께, 내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덜덜 떨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티치 님 말씀 들으셨죠?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니 너무 겁먹지 마세요!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꼿꼿이 서셨으면서 뭘 떨고 그러세요?”
“나도, 아는데……… 하………”
“카엘 님이 그러시면 메린 님도 걱정하실걸요? 무지무지 예쁘게 입으셨는데, 그거 죄다 벗어 던지면서 다 때려치우자고 하면 어떡해요?”
“아니, 걔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깽판을 치진 않아…….”
막무가내이긴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부로 난장판을 부릴 정도는 아니다.
자신이 이 순간, 이 자리에 왜 있는지도 알고 있고 말야.
하지만 로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주위를 한번 슥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난장판 벌이실걸요? 카엘 님이 국왕이나 다른 귀족한테 협박받은 줄 아시고요.”
“……나 그렇게 안색 안 좋냐?”
“네. 금방이라도 토하면서 엎어질 거 같아요.”
“……”
구체적인 설명 참 고맙군, 그래.
어쨌든 메린이 그런 착각을 해서 죄다 뒤엎게 할 순 없다.
모처럼 율리아가 많은 힘을 써줬고, 사람들도 이렇게 많이 축하하러 와줬으니까.
그러니 힘내자.
로나의 손을 잡은 채 크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후우……”
……한 번 할 때마다, 술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것도 세 번으로 한계인지, 그 이상 심호흡을 해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숨이 막힐 것 같지 않다.
쇠막대기 같던 다리도 부드러워졌고.
……이 정도면 됐어.
“……준비됐어. 이제 괜찮아.”
“진짜요? 아직 손 엄청 떨리는데요.”
“이 정도는, 누구나 긴장하는…… 수준일 거야.”
“히히! 하긴, 완전히 긴장을 푸는 게 더 이상하긴 해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기절하더라도 카엘 님이 결혼식장에서 기절한 최초의 신랑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전혀 힘이 되지 않는 격려를 하면서, 녀석은 진행 도우미를 맡은 사제에게 나를 데려갔다.
그런 뒤, 오늘 하늘처럼 맑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놓았다.
“힘내세요, 카엘 님! 오늘은 당신의 행복이 시작되는 날이니까요!”
“………그래. 고마워, 로나.”
손인사를 보내며 나를 배웅하는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사제를 따라갔다.
기이할 정도로 묵묵한 사제는 천막에서 나를 기다리게 하더니, 이내 다시 따라오라면서 대예배당 앞뜰로 나갔다.
그러자 간간이 사람이 돌아다니던 앞뜰이 휑해져 있는 게 아닌가!
되게 짧은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던 거 같은데,사제들 몇 명과 각 손님들이 데려온 병사들이 서 있을 뿐, 누구 한 사람 돌아다니고 있지 않다.
그새 사람들을 안에 들여보낸 건가?
행동력 하나는 진짜 대단하다니까.
크게 숨을 쉬면서, 리허설대로 굳게 닫힌 대예배당의 문 앞에 섰다.
끊임없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금이라도 주의를 돌리고자 틈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스친 꽃잎에 뒤를 돌아보자, 계절에 맞지 않게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진짜 신기하네.
지금 9월인데 장미가 활짝 피어 있다니.
혹시 저것도 율리아가 기도의 힘으로 만든 건가?
그렇게 펑펑 써도 되는 거야?
“후우우………”
몇 번인지 모를 심호흡을 한다.
진정을 위한 게 아닌, 더 초조해지지 않도록.
이 안에 가득 있을 사람들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도록.
아마 지금쯤 초를 다 피웠겠지?
그럼 곧 문이 열리겠다…… 싶은 순간 진짜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진정해, 카엘!!
심호흡이야, 심호흡!!
사, 사회자가 입장하라고 할 때까진 서 있는 거였어.
그때까지 그냥 눈 감고 있자!!
“자, 여러분! 우리들의 영웅을 맞이할 때가 왔습니다!”
영웅은 개뿔!!
누가 저딴 대본을 허가한 거야?!
괜히 긴장만 더 되잖아!!
“깊고 어두운 밤을 물리치고 빛을 되찾아준 용사가! 이제 한 사람이자 남자로서 행복을 맞이합니다! 부디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신랑, 입장!”
“………”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휘파람과 환호성도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몰라, 귀가 먹먹해서 아무것도 안 들려!!
옆을 돌아볼 여유는 당연히 없었기에, 단상만 똑바로 쳐다보면서 걸어갔다.
다리가 상당히 뻣뻣했지만, 그래도 중간에 걸음이 꼬이거나 하는 일 없이 지정된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
오늘의 주례를 맡은 율리아는, 그런 나를 보면서 정말로 유쾌하다는 듯이 히죽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으, 진짜 성질 고약하다니까!
아무튼 내가 입장을 마치니, 사회를 맡은 교단의 수련생은 또 한차례 말을 죽 늘어놓았다.
“이어서 또 다른 주인공을 모시겠습니다! 자고로 영웅에겐 아름다운 여인이 따르는 법! 기적의 가을에 걸맞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을 맞이하십시오!
신부, 입자아앙!!”
사회자가 나를 부를 때보다 한층 더 힘차게 외치자, 오르간의 부드러운 선율이 대예배당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면서,
“……!”
시간이,
굉장히 느릿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곳에 있는 건 한 송이의 순결한 꽃.
본래라면 결코 손이 닿지 못할,
눈부시게 환히 빛나는 하얀 별이었다.
……꿈꾸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가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이 시기에 볼 수 없는 선홍색 장미꽃다발을 들고, 얇은 면사포로 덮인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주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맞추는 티치 형도, 그녀의 뒤에서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들도.
오로지 메린,
내 아름다운 신부만 보일 뿐.
오늘 그녀의 아버지 역할을 맡은 티치 형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엘프분의 환약이 잘 들었나보다? 이 모습을 보고도 멀쩡히 서 있다니.”
“아뇨…, 죽을 거 같은데요…. 아으, 너무 예뻐서 심장이 아파…. 울 거 같아…….”
“너희 둘 역할 바뀐 거 아니냐? 나 참, 얼른 데려가기나 해, 팔불출아.”
툭 쏘아붙이면서도, 티치 형은 상당히 정중한 손놀림으로 나에게 메린의 옆자리를 넘겨주었다.
팔짱을 끼고 걷기 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속삭였다.
“농담 아니야……. 정말 아름다워, 메린.”
“그래? 히히, 너도 괜찮아.”
“……야, 빈말로라도 멋있다고 해주면 덧나냐?”
“멋있다? 그건 그리폰을 타고 날아다니는 기사한테 하는 거잖아.”
“아, 그래.”
……나 참, 신부가 되어도 역시 메린은 메린이구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덕에 긴장이 반쯤 풀려버려,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그녀와 함께 율리아의 앞에 설 수 있었다.
율리아는 그런 우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자, 신랑, 신부와 마주할 때입니다.”
나에게 그녀의 면사포를 벗기도록 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얇은 천을 그녀의 머리 뒤로 넘긴다.
그동안 지그시 감겨져 있던 눈이 서서히 열리며, 잠시 감춰져 있던 주홍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반짝인다.
……아, 진짜 울 거 같아.
그래도 모처럼 긴장이 풀렸는데, 눈물로 망쳐선 안 되지.
크게 숨을 내쉬어 속을 달래며, 그녀와 나란히 서서 율리아를 마주보았다.
이어서 율리아는 순서대로 결혼 서약을 하고, 서로 반지를 끼워주도록 했다.
녹색 페리도트의 하트형 보석이 달린, 결혼 반지로선 조금 화려할지도 모르는 금반지.
그래도 그녀에게 부적 겸 청혼반지로 끼웠던 것보다는 훨씬 소박했다.
손이 너무 떨려서 반지를 떨어뜨리는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장갑을 끼고 있어서 그런 추태는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와, 진짜 하나하나가 힘드네.
“두 분은 석 달 전부터 지난주까지, 보통 사람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들을 함께 헤쳐왔습니다.”
무사히 반지 교환을 마치자, 율리아가 우리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물론 이후에도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간 헤쳐온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 두 분이 오늘을 맞이하기까지 거쳐온 수많은 역경들처럼, 서로 힘을 합쳐 이겨내면서 함께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한 두 분의 모습에서, 우리 역시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갈 용기와 희망을 계속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후, 율리아는 좌중을 둘러보면서 힘있게 선포했다.
“창조주께서 오늘 이 결합을 허락하셨으니, 그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순간,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자, 신랑과 신부! 조금 전에 했던 서약을 되새기면서 맹세의 입맞춤을 하십시오!”
“………”
할 수 있겠냐!!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키, 키스라니……!!
어떻게 어깨는 잡고, 한쪽 뺨을 감싸긴 했지만……그 이상 좀처럼 나아갈 수가 없었다!
“뭐하냐? 순서잖아.”
“………”
알아, 안다고.
원래 그런 순서인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으으으……!
“어휴, 쫄보 새끼.”
메린은 내가 계속 머뭇거리는 게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우읍?!”
한손으로 내 뒤통수를 붙잡고 들이밀면서 입술을 꽉 포개버렸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여기저기서 마구 터지는 탄성이 들려온다.
바로 가까운 곳에서도 “어우, 대담해라” 같은 중얼거림도 들리고.
잠시 후, 나를 놓아준 메린은 씨익 웃으면서 속삭였다.
“역시 넌 나 없으면 안 되겠다.”
“………시끄러, 임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율리아는 한순간에 열기가 달아오른 좌중을 가라앉힐 생각은 없는지, 그대로 즐겁게 웃으면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바깥에 두 분의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그 걸음을 축복하시리니! 방금 보인 그 대담한 입맞춤처럼 담대히 걸어나가세요! 여러분도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에 축복을 더해주시기 바랍니다!”
힘찬 오르간 연주에 더해, 또 한차례 폭포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진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기뻐해주고 있는 게 보인다.
그 감정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왠지 모르게 들떠버려서,
“메린, 든다?”
“엉? 와앗!”
문 가까이에서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한 바퀴 빙 돌아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활짝 열린 문 바깥, 밝은 빛 속으로 뛰쳐나가버렸다!
가을이 아니라는 것처럼 한껏 용모를 뽐내는 선홍색 장미꽃들.
가을이 맞다고 주장하듯이 높고 푸르게 펼쳐진 하늘.
축복을 알리는 종소리가 널리널리 울려퍼지고, 살랑이는 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주변으로 꽃잎을 흩뿌리며 춤을 춘다.
그 가운데 서서, 메린과 얼굴을 마주하며 환히 웃었다.
……사회자가 그랬었지?
기적의 가을이라고 말야.
그 말에 백 번 동의한다.
맞아. 이건 기적이야.
우리가 태어나고 이 순간을 맞이한 것은, 수많은 사람이 보내온 사랑으로 만들어진 기적 덕분이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랑을 지킬 것이다.
절대신의 대리자 앞에서 서약한 것처럼, 끝까지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사랑해, 메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영원히, 너를 사랑해.”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다시금 맹세하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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