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53화 (453/475)

〈 453화 〉 Epilogue (完)

* * *

예정에 없던 손님이 하나 끼긴 했지만, 다행히 음식이 모자랄 것 같진 않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낯이 두꺼워진 위슨 녀석이, 그래도 양심도 같이 자랐는지 뱃속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과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람 얼굴만 한 크기에 검은 줄이 죽죽 그어진 녹색 열매, 길쭉하면서 약간 구부러진 노란색 과일, 뾰족한 가시가 송송 박혀 잇는 뭔지 잘 알 수 없는 열매 등등, 진짜 이 근방에선 볼 수 없는 과일들뿐이었다.

“삼촌~ 이번엔 어디 갔다 왔어요?”

두 입 뜯은 샌드위치를 손에 든 채 묻는 카린.

그러자 위슨이 늑대에게 닭고기를 먹이면서 대답했다.

“오빠라고 부르면 말해줄게.”

“오빠~”

“그래그래~ 오빠란다~”

다들 나를 성자라 불러야 할 거다.

히죽거리면서 남의 귀한 딸내미의 뺨을 닦아주는 놈팽이에게 잔을 던지지 않았으니까.

이내 위슨은 카린을 번쩍 안아 올려서 자신의 앞에 앉히고는, 허공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바다 위의 수많은 섬들 중, 이 대륙의 중앙 부분만큼이나 큰 곳에서 가져온 과일들이라는 듯했다.

그에게 안긴 카린은 물론이고, 쌍둥이와 메린도 멍하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손과 입은 열심히 움직이면서.

잠시 후, 위슨이 이야기를 마치자, 샌드위치를 다 먹어서 빈손이 된 카린이 박수를 치며 까륵 웃었다.

“신기해, 신기해~! 나도 가보고 싶어요~”

“그래? 카린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지만, 일단 어른이 되자. 그 다음에 ‘위슨 오빠, 날 데려가줘’라고 부탁하면 데려가줄게. 약속해.”

“너 이 새끼, 무슨 개수작이야! 안 돼, 카린! 그런 몹쓸 약속은 절대 하지 마!”

아무리 성자라도 이딴 소리를 들으면 욕을 날릴 거다!

이 자식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이젠 아예 대놓고 꼬시려 드네?!

카린은 실실 웃고 있는 위슨과, 벌컥 화내는 나를 번갈아 보더니,

“어른이 된 다음엔 안 돼요.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되니까!”

활짝 웃으면서 크게 선언하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 딸이야. 아으, 귀여워.

“아빠 같은 사람? 아빠가 아니고?”

“응. 아빠는 엄마 거니까. 난 아빠 같은 사람 찾아야 돼요.”

“오빠는 어때?”

“오빠는 안 돼. 아빠 같지 않으니까.”

“흑.”

처절하게 차이고서 고개를 떨구는 위슨 녀석이었다.

하, 꼴 좋다.

그보다 왜 스물 한 살이나 먹은 놈이 다섯 살짜리 애한테 지랄인지 모르겠어.

“야, 위슨, 애인 고프면 네 또래 아가씨나 찾아. 왜 애한테 자꾸 그래?”

“카린이 누나 쏙 빼닮았잖아요. 크면 얼마나 예쁘겠어요? 게다가 내 은인이기도 하고.”

“은인? ……아, 그거.”

아직 잊히지 않은 그날의 일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대충 5년 전, 그러니까 카린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밥 얻어먹을 겸 아이를 보러 온 위슨이 메린의 품에 안긴 카린을 보다가,

­­헷.

­­으아아아악!

그 자그마한 손에 눈을 폭 찔려버린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면서 한참 바닥을 구르던 위슨은, 돌연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목을 멍하니 매만졌다.

한쪽 눈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아… 아아……?

­­야, 너 충격받은 건 이해하는데 멍하니 있지 말고 얼른 치료부터 받아!

­­아니… 어라… 나, 말이……?

­­말이든 뭐든 일단 치료받으라고!

그렇게 다급히 사제님께 데려가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서야, 어째서 녀석이 목을 만지면서 아연해했는지 알게 되었다.

카린이 눈을 찌르던 그 순간, 위슨은 파랑새를 밖에 꺼내놓고 있던 것이었다.

식사 시간마다 늘 하던 버릇대로, 본인은 계속 밥을 먹고 파랑새에게 말을 시키기 위해서.

즉, 본래라면 그는 소리를 낼 수 없어야 했다.

어렸을 때 목에 입었던 상처는 다 나았지만, 양모였던 미친 마녀가 ‘말을 못한다’는 저주를 걸어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와장창 깨져버린 것이다.

무려 갓난아기의 눈 찌르기 공격으로.

저주라는 게 그런 식으로 풀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후로 위슨은 파랑새 없이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히 카린을 무척 예뻐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태어난 멜이 마법의 소양을 가졌다는 걸 알고 나서도, 녀석은 우리집에 올 때마다 늘 카린을 먼저 찾곤 했다.

내 자식이 다른 사람에게 예쁨 받는 걸 싫어할 부모는 없겠지만…….

“형, 카린 나 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꺼져.”

칼 같이 잘라버리자,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는 위슨이었다.

이 자식은 아무리 봐도 그냥 귀여워하는 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녀석을 고깝게 쳐다보고 있자, 메린이 산딸기 케이크를 먹으며 불쑥 말했다.

“그럼 영주님 아드님이랑 결혼시킬 거냐? 전에 얘기 나왔었잖아.”

“그랬지. 그리고 내가 절대 안 한다고 했었고 말야.”

우리가 귀족이면 몰라, 완전 순수한 평민인데 미쳤다고 귀족 가문에 시집을 보낼까.

마티아스의 가신들이 나를 걸고 넘어졌던 것처럼, 다른 귀족들이 카린의 출신을 가지고 깎아내리겠지. 뻔해.

왜 내가 내 소중한 보물을 그런 생고생 속에 밀어 넣어야 하는가?

“뭣보다도 거기 시집가면 매트랑 사돈이 되는 거 아냐! 싫어! 가족이란 핑계로 무보수로 부려먹힐 거라고!”

“에이, 설마.”

“네가 몰라서 그래, 그 양반이 그럴 사람이라니까! 아, 그래. 슐 누나네 아들이랑 결혼시키는 게 제일 낫겠네. 나이도 비슷하고!”

슐 누나는 우리처럼 첫 아이로 딸을 낳은 후, 곧바로 일 년 뒤에 아들을 또 낳았다.

지난주에 받은 편지에 의하면, 서너 달 뒤에 셋째가 태어날 예정이라나?

남편인 브랜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그 부부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여러 물품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비슷한 나이보단 연상이 낫죠. 안 그래, 카린? 동네 애들이랑 위슨 오빠 중에 누가 더 좋아?”

“위슨 오빠~”

“하하, 그래~ 이 오빠도 카린이 제일 좋단다~ 얼른 무럭무럭 자라렴~ 꼭 데리러 올게~”

“오지 마, 새꺄!”

매섭게 일갈하며, 실없이 벌어진 놈의 입에 파이 조각을 우겨 넣었다.

적당한 포만감과 취기가 불러오는 나른함을 즐기며, 각자 신나게 놀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꽃을 좋아하는 멜은, 점심을 먹자마자 다시 꽃밭에서 작품을 만드느라 열심이다.

이따금 스라소니와 파랑새에게 말을 거는 걸 보면, 무슨 의견이라도 묻는 것 같다.

온가족은 물론이고, 위슨과 늑대에게도 화관을 걸어준 걸로는 성이 안 차나보네.

그때, 메린이 쾌활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던진다!”

그녀의 손을 떠나 하늘 높이 날아가는 막대기.

그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카린과 케임, 그리고 늑대.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졌던 막대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고,

“이야아아~!!”

“멍!”

두 아이와 한 마리가 거의 동시에 그를 향해 뛰쳐나갔다.

바닥을 박차며 크게 도약하는 늑대…의 등을 밟고 뛰어오르는 케임…의 손을 툭 쳐서 막대를 떨어뜨리는 카린…에게 고맙다는 듯이, 늑대는 멍 하고 짖으며 꼬리로 막대기를 옆으로 툭 쳐버렸다.

그런 뒤, 땅에 떨어진 막대기를 향해 다같이 질주하고는 서로 뒤엉킨 채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다.

……참 역동적으로 노는구만.

그보다 아무리 늑대가 몸집을 줄여서 새끼의 형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걸 따라잡는 우리 애들이 참 놀라우면서 걱정스럽다.

“왜요? 여기 마을 사람들도 다 알잖아요. 심지어 이젠 나나 정령들이 튀어나와도 별 놀라지도 않던데, 뭐.”

“그래도 여긴 놋지빌이 아니잖아. 소문나면 잔챙이가 꼬일 거라고.”

나랑 메린의 고향, 놋지빌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북쪽 끝을 지키고 있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다들 이름만 들어보고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로.

그러니 메린이 어렸을 때엔 숲을 쏘다니며 살고, 커서는 마을의 이 일 저 일을 하며 살 수 있었던 거겠지.

다른 마을에 살고 있었다면, 분명 어렸을 때부터 병기로 쓰였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될지도 몰라.

“그런 거에 엮이기 싫어서 일부러 이렇게 외진 데로 온 건데…. 하… 오히려 더 눈에 띄어버렸으니 망했어…….”

“술 들어가니 또 쭈그러드네. 형도 참 별 걱정을 다한다. 여기 영주님은 출세욕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다.

‘이제 남편 죽을까 걱정 안 하고 싶다’는 마님……토레스햄 부인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일부러 이런 한지(??)를 맡은 것이니까.

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바로 멜, 꽃과 춤을 좋아하는 우리 귀여운 꼬마 아가씨 때문이다.

그 아이가 지닌 특별하고도 특별한 힘은, 마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일 뿐이니까.

“……게다가 그때 섬에서 탈출한 마녀들이 아직도 깽판부리고 있다며? 괜히 싸잡혀서 해코지당할까 걱정이야.”

“그것도 괜찮아요. 부엉이탑이 가능한 빨리 없애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중이니까. 아마 내년 안에 다 끝날걸요?

그리고 멜은 영리한 아이예요. 경솔하게 일을 저지를 아이가 아닌 건 형이 더 잘 알죠? 마력을 다루는 소질이 뛰어나니, 통제가 안 되어서 사고가 터지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지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잔을 홀짝였다.

상큼한 딸기향이 입 안을 그윽하게 맴도는 느낌에도, 마음속은 여전히 무언가 엉킨 것 같다.

메린이 막대기를 카린에게 넘겨주고 내 옆에 앉아서 기지개를 켜는 걸 봐도, 완전히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형은 역시 걱정이 많다니까요.”

“그게 부모 마음이란 거다, 임마. 하……그건 어쨌든, 다들 어때?”

“여전하죠, 뭐.”

위슨은 저 앞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위슨의 집인 부엉이탑은, 마녀로 타락했던 여성 마법사들을 고치면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비록 영혼에 이상이 있던 거라 완전히 고치진 못했지만, 이전처럼 제 욕망에만 미쳐서 마법을 쓰고 다니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세계 곳곳으로 도망친 마녀들을 찾아 없애는 중인데, 위슨 역시 세계를 여행할 겸 마녀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블루벨은 숲과 인간 마을을 오가며 모험가 일을 하고 있다.

블루스타와는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인데, 그러면서 아이는 몇 낳았다나?

진짜 이해가 안 되는 문화야.

그 블루스타는 여전히 엘프의 공식이자 정식 왕, 골든로드를 보좌하고 있다.

내 예상대로, 골든로드는 정식 왕을 뽑는 자리에서 당당히 왕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절규하긴커녕, 오히려 허탈하게 웃으면서 함께 축배를 들었다는 듯했다.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겠지.

어쩌면 ‘임시’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떼어버리려고 일부러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

“드워프는 뭐, 여전히 땅 밑에서 잘 살고 있어요. 인어는…… 슬슬 수가 불어나고 있던데요.”

“그래?”

“네. 걸리프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잖아요. 형이 만났다는 그 인어가 그 사람들에게서 씨를 받은 거겠죠.”

……다행이야.

멸족은 하지 않게 됐구나.

나는 메린의 보석함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팔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일은 형이 더 잘 알지 않아요?”

“뭐, 그렇지.”

시골이긴 해도, 영주의 옆에 있는 만큼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흘러 넘칠 듯이 끓던 ‘불구덩이’는, 아트라토스가 소멸되면서 함께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거기에 진짜 맹물이 가득 차 있는데, 하도 깊어서 누구도 그 끝을 확인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탓에 ‘구덩이 바닥은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버려서, 혈기와 호기심이 넘치는 탐험가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듯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역시 국왕이 바뀌었다는 거겠지.

나랑 메린이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사라진 후, 국왕은 누군가 우리를 내세워서 반역을 일으킬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잘 만큼.

그러다 결국은 정신이 피폐해졌는지, ‘왕국 전역의 갈색머리 남녀를 체포하라’는 미친 명령을 내리다가, 얼마 뒤에 병으로 급사해버렸다.

왕실에서 그렇게 발표했으니 믿어야지, 뭐.

아무튼 넷째인 프레데릭 왕자가 새 국왕이 되었고, 국장(國?)을 치르는 게 그의 첫 국무가 되었다.

그 조문을 위해 마티아스를 따라 수도에 갔었는데, 진짜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는 걸 보니 조금 복잡한 기분이었다.

‘진짜 자네가 흔한 인상이긴 하구만’이라며 껄껄 웃는 우리 영주님의 말씀이 무척 황송해서, 마을로 돌아오는 날, 그의 옷주머니에 예쁜 레이스 손수건을 몰래 넣어드렸었지.

빨간 분으로 입술 모양을 그려서.

그날 마님에게 아주 열렬한 응대를 받으시는 걸 보고 어찌나 마음이 훈훈하던지.

아무튼 장례식에서, 피터 왕자가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옐리카 왕자비와 함께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금슬 좋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장례식을 인도하는 율리아도 여전히 대언자로서 교단에 군림하고 있고.

조만간 전국 순례를 한다고 하니, 머지않아 직접 만나게 되겠지.

그렇게 다들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단 한 명,

로나를 제외하고.

6년 전에 헤어진 뒤로, 오직 그녀의 소식만 듣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쯤 다 컸을 텐데.”

“그러겠죠.”

중얼거리면서 와인을 홀짝이는 위슨.

그런 뒤, 그는 포도주보다 더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와인을 빤히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살아는 있어요. 끝에서 끝도 가는 걸 보면, 아주 왕성하게 다니고 있나봐요.”

“보기만 하는 거야? 우린 어쨌든 너는 만나도 괜찮은 거 아냐?”

“아뇨. 안 괜찮아요.”

그는 고개를 저은 후, 잔을 기울이고서 희미하게 웃었다.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찾아가기로 했거든요. 사제님이 그랬어요. 나나 블루벨 씨를 보면 두 분이 생각날 거고, 그러면 소식이 듣고 싶어질 거고, 그러다 흔들릴 거라고.

하지만 상상하는 건 별로 영향이 없을 테니, 그냥 두 분이 쭉 행복하게 지낸다고 생각하기만 할 거라고요. 그걸로 충분하대요.”

로나는 메린과는 다른 이유로, 태어나면서부터 감정이 희박했다.

그래서 다른 사제들이 거치는 감정억제 처치를 받지 않았다는 듯했다.

……즉, 그녀는 다른 사제들과 다르게 사람의 감정에 감화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와 함께 석 달간 여행하면서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제, 특히 전투사제는 사람의 마음을 가진 상태로는 결코 의무를 다할 수 없다.

이단과 악마숭배자가 제 주인의 강림을 위해 마련하는 그릇은, 나이든 노인부터 갓 태어난 어린아이까지 가리지 않으며,

그 그릇을 비롯해, 그를 숭배하고 사람을 현혹하는 모든 자를, 손에 든 철퇴로 부숴버리는 게 그녀의 일이기에.

……그러니 로나는 우리를 만나서는 안 된다.

행여나 감정이 생겨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또 다른 미련이 움트지 않도록.

“사제 일 잘하면서 살고 있으면 됐지, 뭐. 그게 걔가 가장 바라는 모습이잖아.”

덤덤히 말하고서 잔을 홀짝이는 메린.

와인을 마시나 했더니, 웬걸, 딸기 주스였다.

딸기 와인 좋아하더니 웬일이지?

아무튼 메린의 말이 맞긴 해.

그런 삶을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로나 자신이니까.

달리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로나는 자신이 사제인 걸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니 그녀가 항상 무사하기를 빌어주는 게 최선이리라.

“아니면 다음에 딸 낳을 때 걔 이름 따서 짓든가.”

“뭐? 싫어. 왠지 죽은 거 같잖아.”

“그럼 뭘로 할 거냐? 딸이면… 어머님 이름 따서 피아? 아들이면… 할 만한 사람이 없네. 전대 사범님 거라도 딸까?”

전대 사범님?

아, 놋지빌 얘기겠군.

그럼 ‘칼라드’인가? 왠지 너무 강해보이는데.

……근데 얘는 뭘,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애를 이름부터 지으려고 난리야?

“너 너무 열심인 거 아냐……? 좀 여유를 가져…… 겸사겸사 나 잠 좀 자게 해주고…….”

“걱정 마. 오늘부터 아주 푹 잘 테니까.”

………응?

뭐지, 설마 또 삐친 건가?

하지만 메린의 얼굴에선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뾰로통해지긴커녕, 오히려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 푹 잘 거라고? 왜? 슐 누나가 또 뭐 보내준 거야?”

“아니, 네가 밤늦게까지 힘써야 할 필요가 없어져서.”

그러면서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는 메린의 모습에,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안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티 없이 맑은 주홍빛 눈동자가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장난스레 반짝였다.

“아침 일찍 신전에 갔다 왔어. 들어섰대.”

“……!”

“그러니 잠 실컷 자면서 맑은 머리로 좋은 이름 생각해둬.”

“메린……!”

곧바로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또 다른 아이가 생기다니!

드디어……!

드디어 해방이다아아아!!

물론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뱃속 아이가 안정되면 또 다른 걱정거리가 들어서겠지.

무사히 태어날지도 염려스럽고 말야.

하지만 지금은 그딴 거 상관없어!!

이제 관 속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비실대지 않아도 돼!!

“어흑…! 정말 잘됐어…! 고마워, 메린……!”

“울 정도로 좋구나~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나도 좋다.”

“형은 다른 이유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시끄러, 임마, 조용히 해!”

쓸데없는 잡음을 넣는 위슨에게 일갈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외쳤다.

“카린, 멜, 케임! 얘들아~! 너희 내년에 동생 생긴단다~!”

“진짜?!”

쏜살같이 뛰어오는 아이들.

그런데 어째서인지, 늑대가 가장 먼저 뛰어와서는 나에게 와락 안겼다.

영문을 모르겠어.

아무튼 녀석을 쓰다듬고 땅에 내려놓은 뒤, 메린을 둘러싸고서 언제 태어나느냐, 뱃속에 있는 거냐, 어떻게 만든 거냐 등등, 마구마구 물어대는 아이들을 제지했다.

“자, 엄마는 이제 무지무지 조심해야 돼. 서너 달은 너희랑 못 놀아주실 거고, 그 뒤에도 평소처럼 막 뛰어다니진 못하실 거야. 그러니 더더욱 말 잘 들어야 돼. 엄마 많이 도와주고. 알았지?”

“응!”

쌍둥이는 환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멜은 한참 만들고 있던 건지 꽃으로 된 모자를 메린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엄마, 고마워~! 와~ 나도 동생 생긴다~!”

“나도 동생 생긴다~!”

쌍둥이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안기는 반면, 카린은 어딘지 그늘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맏이로서 여러 생각이 들어서 복잡한 것이리라.

나는 뛰어노느라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주며 나직이 말했다.

“우리 귀여운 카린, 괜찮아. 엄마아빠는 여전히 카린을 사랑하니까.”

“응……. 근데 아빠, 이번엔 엄마 괜찮을까? 저번엔 많이 아프셨잖아요.”

“………”

작게 중얼거리는 카린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동생이 새로 생겨서 자신에게 관심이 적어질까 불안해서도, 돌봐야 하는 동생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게 싫어서 어두웠던 게 아니었구나.

3년 전 일을 떠올린 거였어.

메린이 쌍둥이를 힘들게 낳은 뒤에 병상에 누웠던 걸.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착한 딸아이.

그 자그마한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응. 괜찮을 거야. 엄마도 그렇고, 새 동생도 꼭 내년에 무사히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길 열심히 바라면서, 열심히 엄마 도와주자.”

“바라면 그렇게 돼요……?”

“그럼.”

의아해하는 아이의 눈을 마주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단다.”

나와 메린, 우리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가 살기를,

서로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 끝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 내년 봄엔 새 동생까지 다 합쳐서, 여섯 명이서 여기 놀러 오자.”

“응!”

환히 웃는 딸아이를 다시 꼭 안아주고, 이어서 메린과 쌍둥이까지 더해서 두 팔 가득 껴안아주었다.

중간에 늑대가 껴버렸지만, 본인이 그다지 싫어하지 않고 있으니 괜찮겠지, 뭐.

“응, 일곱이서 다시 놀러 와요~”

“……”

카린 쪽으로 뻔뻔하게 끼어드는 어느 놈팽이가 심각하게 거슬렸지만, 분위기가 훈훈하니 그냥 냅두기로 했다.

나는 관대하니까.

……그래, 우리는 무사히 새 가족을 맞이할 거다.

그리고 계속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그야말로,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확신하는 나에게 화답하듯, 따스한 봄 햇살이 머리 위를 밝게 비추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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