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1화 〉 외전 10) 여기, 바깥에서 (Side : Rlona) (4)
* * *
툭.
바닥에 손을 떨어뜨린 위슨은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대로 털어놓은 로나에게 눈길을 주지도, 덩그러니 놓인 잔에 다시 술을 채우지도 않았다.
아마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리라.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길 바랐던 것인가?
그는 이 세상에 흐르고 있는 또 다른 힘,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구현하는 ‘신비’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 능력으로 보통 인간은 꿈에서나 꿀 법한 일을 이루고, 몇 배나 오랜 삶을 살아가게 될, 그러면서도 멀쩡한 감정을 지닌‘사람’인 것이다.
성장환경이 조금 많이 특수하긴 했지만, 그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그녀가 ‘사람’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터인데.
‘그보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그녀는 와인이 담긴 잔을 매만지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마녀와의 사건 이후, 로나는 그에게 용사의 건강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마녀에 대한 건 들어봤으나, 마법이 담긴 부적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이것저것 물으면서 관심을 표했었다.
‘또…… 여러 신전에 같이 갔었지?’
그리고 거기 있는 치유사제의 힘으로는 그의 목을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격려해주었다.
말리스의 무도회에 갔을 때엔, 용사와 그의 짝사랑 상대가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호화요리를 맛보았다.
그때 그와 춤을 추지도 않았고, 그 후에 둘이서만 따로 시간을 보낸 적도 없다.
그저 다 모여 있을 때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잡담 길이만 따지면, 위슨보다는 그의 파랑새가 훨씬 더 길다.
주로 새가 혼자 떠드는 걸 들으면서 맞장구를 친 것이지만.
여하튼, 단지 그뿐인 관계이다.
그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냐’면서 물을 것도, ‘별 영향을 못 주는 사람이다’는 대답에 좌절할 것도 없는 사이였을 텐데.
이제 보니 그녀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로나는 속으로 한숨 쉬며 잔을 홀짝였다.
“………그래.”
기나긴 침묵 끝에 나온 한 마디.
그걸로 다 정리했다는 듯이, 위슨은 잔에 와인을 채우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기나긴 숨을 내쉬더니,
“그럼 앞으로도 계속 만날 수 있겠네.”
“푸흡?!”
무척이나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로나는 그만 와인을 홀짝이다가 사레가 들려버렸다.
“케헥! 켁! 아니, 왜 그렇게……!”
“응? 뭐가?”
“왜 계속 만나는 걸로 얘기가 이어져요?! 그보다 충격 받으신 거 아니었어요?!”
“뭐, 솔직히 좀 충격이긴 한데…….”
위슨은 독주가 담긴 병에 마개를 꽂으면서 싱긋 웃었다.
“나를 봐도, 나 때문에 그 둘을 떠올려도 별 영향 없다는 건…… 즉, 그 둘은 어쨌든 나는 계속 만나도 된다는 소리잖아. 발상의 전환이라는 거지.”
“아니, 그렇기는 한데…… 이해가 안 돼요, 위슨 씨. 왜 그렇게 저를 신경 쓰시는 거예요?”
결국 대놓고 물어버렸다.
그러자 되려 의외라는 듯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대답했다.
“생사가 걸린 모험을 함께한 동료잖아. 당연히 신경 쓰지.”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기까지 했는데.”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잖아? 그리고,”
위슨은 잔을 내려놓고, 베일로 덮인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똑바로 그녀를 마주하는 두 눈.
모닥불의 불빛 때문인지, 왠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모습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6년 전과 같은 검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사제님은……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
“네가 그리웠어.”
속삭이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는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감싸인다.
정면에서 느껴지던 모닥불의 열기 대신, 잔잔한 온기가 몸을 휘감는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기묘한 향.
세이지와 박하, 맨드레이크 등의 여러 약초들이 뒤섞인 향취가 풍겨온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곧 느껴온 익숙한 그의 향기에, 로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다.
“정말…… 많이 보고싶었어. 로나.”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모닥불보다도 더 따뜻한 것 같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워, 로나는 소리 없이 홀로 자조했다.
그리고 여전히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저 좋아해요?”
“응.”
“사랑하세요?”
“글쎄. 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데려가버리고 싶긴 해.”
“엥, 그거 마녀가 하던 짓 아니에요?”
“그래서 안 하고 참았지.”
그의 말에서 거짓이 담긴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산뜻한 봄을 품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아마 그가 마신 딸기 와인의 향취이리라.
“그러니 가끔이라도 만나자. 안 그러면 진짜로 너 잡아가버릴지도 몰라.”
“그냥 다른 여자를 찾으세요. 그래야 보답 받죠.”
그녀는 사제.
창조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랑하며, 그의 뜻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도구이다.
아무리 그녀가 감정억제 시술을 받지 않았다 해도, 사제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영혼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기껏해야 친근함을 느끼는 게 전부이니, 그는 필히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야 할 터.
그러나 그는, 오히려 더욱 가까이에서 그녀를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며칠씩 머무르고 그랬었는데, 신부로 삼고 싶은 여자는 너 포함해서 둘밖에 없더라.”
“하나 더 있다는 거잖아요. 그 분한테 가세요.”
“아직 다섯 살이라서 안 돼. 그리고 그 애는 좀 달라. 내 쪽에서 신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거든. 그 애가 삼아달라고 부탁하면 받아줄 거지만.”
그러나 그의 팔 안에 들어온 로나는 다르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가서 신부로 삼아버리고 싶다.
일평생 붉은 사제복을 입고 피를 뒤집어쓰며 살아가는 전투사제 로나가 아닌, 그냥 로나라는 이름의 평범한 여자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으나, 두 눈 속에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눈물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네가 그걸 바라지 않겠지.”
“네.”
“진짜 단호하네. 하나도 안 변했어.”
위슨은 한숨을 쉬면서도 그녀의 뺨에서 손을 떼지 않고, 오히려 쓴웃음을 지으면서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덮은 베일을 벗겼다.
그러자 흠칫 놀라는 로나의 얼굴 주변으로, 연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갑자기 뭐하시는 거예요?”
“어차피 잘 때 벗잖아.”
“취침기도 하고나서 벗거든요?”
“베일 있어야만 들리는 것도 아닐 텐데, 뭐.”
벗겨낸 베일을 근처에 내려놓고서, 위슨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흘러내려진 연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예쁘다.”
“저기, 위슨 씨,”
살짝 간질거리는 느낌에 어깨를 살짝 움츠러뜨린 채 그녀가 물었다.
“왜 저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여자이기 전에 사제인데.”
“그러게.”
“몰라요?”
“응.”
굉장히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냥, 네가 계속 생각나.”
과일을 보면, 그녀가 사과나 복숭아 같은 단 과일을 좋아했던 게 떠오른다.
간이 안 맞는 음식을 먹을 때엔 그녀가 음식에 이러쿵저러쿵 잡소리를 하던 모습이,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을 볼 때엔 그녀가 용사와 그 연인을 보면서 히죽대던 모습이 기억난다.
마녀를 찾거나 순수한 호기심으로 방문한 곳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그의 정령과 노닥거리는 걸 볼 때도 그녀가 생각났다.
어디서 무엇을 하건, 무시무시한 철퇴를 등에 맨 자그마한 사제가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진 것이었다.
“신기하지? 나도 그래. 우리 둘은 그냥 같이 있었을 뿐이니까.”
둘 중 한쪽이 앓아 누운 적도, 부상으로 쓰러진 적도 없다.
둘이서만 따로 시간을 보낸 적도 없다.
그녀의 기억대로, 석 달 동안 둘이 한 것이라고는 대화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네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어.”
마치 물안개 속을 거닐다가 나온 기분이다.
위슨은 그렇게 덧붙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어서 더 생각난 게 아닐까 해. 즉,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지.”
“엥? 저한테 책임 돌리시는 거예요?”
“그럼 아니야? 죽기 직전에나 만나자고 해서 안달나게 만들었잖아. 네가 그런 소리 안 해서 간간이 얼굴 봤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담담한 목소리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원망이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어.’
남녀관계에서, 때로는 상대가 자신에게 더 집중하도록 일부러 밀어내기도 한다.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상대가 질투하도록 만들기도 한다는 듯했다.
즉, 6년 전에 선을 그어버린 게 그를 더 자극한 꼴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그럴 의도는 모래알만큼도 없었지만, 그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탓이리라.
“로나.”
애달프게 이름을 부르면서, 위슨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눈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는데도, 그녀는 몸을 뒤로 빼는 등의 거부의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따스함을 품은 촉촉한 무언가에 입술이 덮인다.
술 특유의 알싸함이 섞인 달큰한 딸기 향이 느껴진다.
그간 읽어온 수많은 머릿속에서 종이 치지도, 벼락에 맞은 것처럼 몸이 바짝 굳지도 않는다.
입술을 매만지는 물컹한 느낌이 불쾌하지 않은 대신, 그와 입을 맞춘 이 상황에서 어떤 기쁨이 올라오지도 않는다.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잔잔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늘 그래야 하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 다행스럽다.
자연히 떠오른 엷은 미소와 함께, 로나는 입술을 떼고 자신을 마주보는 그에게 속삭였다.
“역시 별 영향 없네요.”
“……도발하는 거야?”
“글쎄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그에게로 손을 뻗는 로나.
그의 머리카락을 한데 묶은 머리끈을 잡고, 슬며시 풀어버렸다.
“……뭐해?”
“잘 때 풀지 않아요?”
“자려면 멀었는데.”
속삭이면서 그가 다시금 입을 맞춰온다.
6년 전에 비해 제법 커진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녀 역시 그의 머리카락을, 기억보다 훨씬 다부지게 된 어깨를 되새기듯 쓰다듬었다.
그게 기쁘다는 듯, 위슨은 엷게 웃으면서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숨을 쉬었다.
“……유혹하는 거야? 사제가 그래도 돼?”
“이걸로 유혹을 느끼시는 거예요? 약하시네요.”
“자꾸 그렇게 도발하다가 잡아먹히는 수가 있어. 지금도 참고 있구만.”
“안 참아도 되는데.”
흠칫하는 그가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킥킥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전투사제에겐 금지되어 있지 않아요. 정보를 캐내는 수단으로 쓰기도 하거든요.”
“아니, 전투사제는 다들 피하는 거 아니었어? 옷 벗으면 달려드나보네.”
“힘쓰는 게 일이라서 그런지, 은근히 인기가 있는 모양이에요. 전 아직 안 해봤지만.”
“………그래?”
불현듯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딘지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위슨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유혹하고 있잖아.”
쉰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그가 또 다시 다가왔다.
이번엔 좀더 강하게,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깊이 입을 맞추면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갔다.
달빛이 고요히 내리비추는 숲 속으로, 뜨거운 열기가 조용히 퍼져나갔다.
이튿날 새벽, 로나는 평소처럼 기도를 마치고서 조용히 뒤를 돌았다.
마침 오두막을 태운 불꽃을 거두어들인 참인지, 위슨이 스라소니를 다정하게 쓰다듬고서 다시 돌려보내고 있었다.
“다 끝났어?”
“네.”
“어디 갈지 정해져 있으면 데려다 줄 수 있는데.”
그녀는 헤실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뒤질 만한 데는 다 뒤지면서 가려고요. 위슨 씨도 또 다른 데로 가셔야 하잖아요?”
“뭐, 그렇지.”
또 어딘가에 숨어있을 마녀를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다닐 터.
그런 면에선, 그는 부패의 냄새를 쫓아다녀야 하는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라 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와 달리 발로 걸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뿐일까?
위슨은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하늘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자리에 가서 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면서 빙긋 웃었다.
“그럼 또 고파지면 찾아올게.”
“그 말 완전 난봉꾼 같은 거 알아요? 절 욕구 배설용으로 쓰겠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아무리 영향이 없어도 그렇지, 그건 좀 그렇네요.”
“네가 보고싶어 죽을 거 같으면 찾겠다는 뜻이야. 외설물 그만 봐. 영향 없다는 소리도 그만하고!”
“그치만 사실인걸~”
본능에 달구어진 몸을 서로 밤이 깊도록 달랬음에도, 그녀의 마음이 동하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로나는 그 사실을 노래하듯이 되새기며 한쪽 장갑을 벗어, 조금 침울해져 있는 듯한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니 마녀를 찾는 길이든, 그냥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길이든. 언제든 찾아오세요.”
“……응.”
위슨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게 어떤 신호라도 된 듯,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의 몸을 공중에 둥실 띄우기 시작했다.
“……또 만나자, 고집불통 사제님. 항상 몸조심해.”
“네. 또 봬요, 아무 영향 없는 마법사님.”
“나 참, 진짜 끝까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켜면서도, 위슨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내 높이 때문에 저절로 손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가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두고 봐. 다음엔 그 입에서 나랑 떨어지기 싫다고 나오게 만들어주지.”
“와, 무서워라. 못 찾아오게 숨어야겠네.”
“소용없어.”
검은 눈의 마법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굳건히 선언했다.
“어디에 숨든, 반드시 널 찾아낼 테니까.”
후우웅—
눈이 절로 감길 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가 저절로 숙여진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엔, 그 자리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제까지 활활 타오르던 오두막도 까만 재가 되어서 사라진 뒤이다.
어젯밤 일은 전부 꿈이 아니었을까?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배낭이 있는 자리를 보기 전까진.
“응……?”
예쁘장한 와인병 하나가 자그마한 쪽지를 깔아뭉갠 채, 배낭 앞에 놓여 있었다.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새것인지, 붉은빛 액체가 병목 언저리까지 차 있다.
고개를 갸웃하며 병에 깔린 쪽지를 집어 펼쳐보자, 무척 짤막한 말이 적혀 있었다.
마시면서 기다려줘.
– 위슨.>
“……”
어제가 꿈도, 환상도 아니었음을 되새기는 메시지.
로나는 아주 약간 속이 뭉글해지는 걸 느끼며 깊이 미소 지었다.
이윽고 짐을 챙긴 후, 다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끼는 두 사람이 삶을 잇는 곳에서 온 와인은 배낭에, 그녀를 품은 기묘한 사람이 남긴 쪽지는 품속에 고이 넣고서.
사그라드는 어스름 속, 로나는 여전히 별이 머물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뒤, 아직 잠들어 있을 그 두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을 모든 사람을 향해 축복했다.
‘오늘도 평안하기를.’
그를 위해 그녀는 오늘도 철퇴를 휘두를 것이다.
그들의 삶에 어둠이 손을 뻗지 않도록.
여기,
바깥에서.
그렇게 전투사제 로나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