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66화 (466/475)

〈 466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1)

* * *

봄.

차디찬 눈 속에 묻히는 걸로 끝을 맞이한 대지가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 계절이며, 얼어붙어 있던 모든 생명들이 다시 활기를 찾는 때이다.

그러나 인간의 달력상으론 이미 한 해가 시작된 지 서너 달은 지난 시기이다.

그러므로 모든 짐승과 꽃나무들이 봄을 맞이하며 기뻐 날뛰는 중, 인간만은 홀로 태평하게 ‘날이 풀려서 좋다’며 기지개만 켜는 걸로 그친다.

애초에 그들이 정한 ‘새해’의 개념이 이상하다.

인간의 1월 1일은 여전히 한겨울이기에,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됐다고 실컷 축하하더라도 한동안은 계속 눈과 얼음 속에서 지내야 한다.

그러니 고난이 끝났다는 기쁨을 맛보지도 못할 텐데,어째서 인간들은 그러한 텅 빈 ‘새해’를 성대하게 축하하는가?

블루벨의 그 의문에, 골든로드는 뭉툭해진 깃펜 끝을 깎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인간의 ‘새해’는 이치를 따른 게 아니라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거거든. 쉽게 말해서 기념일이야.”

“뭘 기념한 건데요?”

“아트라토스 봉인. 놈을 물리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니, 그날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겠다는 취지였다나봐. 뭐, 놈이 쑥대밭으로 만든 땅을 다시 일궈야 하니 힘내자고 격려하려던 게 아닐까?”

그리고 인간의 왕들은 대부분,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한다.

연도에 이름을 붙여서 숫자를 따로 세거나, 자신의 즉위일을 국경일로 정하거나, 때로는 왕국명을 다른 것으로 바꿔버리는 식이다.

“그래서 옛날엔 좀 헷갈렸대. 같은 해를, 어떤 나라는 사자력 3년이라고 하고, 또 어디는 리처드2세 14년이라 불렀거든. 어느 인간 나라는 한술 더 떠서, 왕이 즉위하는 날을 새해로 정하고서 해를 다시 셌다더라.”

“우와……”

“그렇게 서로 중구난방으로 쓰다가, 아트라토스를 봉인한 날을 1월 1일로 해서 일 년을 세기로 한 거야. 그리고 맹약을 맺은 종족끼리 공유하기로 했어. 나중에 놈에게 맞서서 또 함께 싸울 때, 날짜 개념 차이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지 않도록.”

정갈하게 깎인 깃펜으로 다시 종이를 채우면서 술술 이야기하는 골든로드.

그가 쓰고 있는 글은 방금 말한 달력 이야기와는 하등 상관없는 종류이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것도 아닌데, 전혀 다른 말과 글을 동시에 자아내면서 어떻게 서로 꼬이지 않는 건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옛 시대의 엘프라서 그런가?’

블루벨은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인간의 1월 1일이 여전히 겨울인 거군요. 그날을 기점으로 봄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렇지.”

모든 인간들이 진심으로 그날부터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고 믿었다면, 세상은 그들의 1월 1일에 새싹이 나도록 스스로를 조정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힘이 있으니까.

용사와의 여정 중에 얻은 지식 덕택에 순조로이 의문을 푼 블루벨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투덜거렸다.

“역시 불공평해요. 왜 인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그게 맘에 안 들어요! 인간이 맘만 먹으면, 자신들만 남기고 다른 종족은 싹 다 없앨 수도 있다는 거 아니에요! 불공평해!”

“아, 그래. 인간들도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한다며? 하하, 누구에게나 불공평하다는 걸로 공평함을 갖추다니. 절대자도 참 심술궂어~”

태평하게 말하면서 사각사각 글씨를 써가던 골든로드는, 일순 블루벨을 힐끗 쳐다보면서 재차 말했다.

“그래서 왜 또 삐친 건데? 아니, 애초에 왜 남편 냅두고 나한테 왔어?”

“남편 없는데요!”

“아, 그래. 그럼 애아빠한테 가서 하소연해라, 이 애엄마야. 얼른 집에 가, 이 녀석아. 쉿쉿.”

“………”

종이를 쳐다본 채로 나가라는 손짓을 하는 골든로드.

블루벨은 아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한쪽 벽에 등을 대고서 주저앉더니,

“……흑.”

그대로 무릎을 모으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든로드는 곧바로 손을 멈추고,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면서 그녀를 향해 톡 쏘아붙였다.

“야, 이 녀석아, 갑자기 왜 울고 난리야?! 집에 가기 싫어? 너희 둘, 또 싸웠냐? 그래서 또 가출한 거야?”

“……어차피 거기 내 집 아닌걸. 블루스타랑 애들 집이지. 내 방도 없다고요.”

“뭔 소리야. 부부, 아니지, 같이 애 만드는 사이니까 블루스타 방이 곧 네 방 아냐. 아무튼 또 싸웠구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쉰 다음,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물었다.

“이번엔 또 뭔데? 네가 애인이랑 같이 셋이서 하자고 했는데 블루스타가 싫대?”

“무슨 소리예요, 애인 없거든요?!”

“그럼 잠든 아이 옆에서 하자는 걸 거절한 거야? 뭐, 그건 나도 동의해. 소리 참다가 실수로 내버려서 아이에게 들켜봐. 꽤 충격 받을걸? 그러니 블루벨, 이상한 제안은 그만하고 그냥 평소처럼 꽁꽁 묶이기나 해. 아이 재우고 하는 거 잊지 말고.”

“무슨 말을 지어내는 거예요! 그딴 소리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블루벨은 기가 막힌 나머지 훌쩍이던 것도 잊고서 빽 소리질렀다.

“애초에 잠자리 자체를 잘 안 하고 있다고요! 하더라도 맨날 만지기만 하고 끝내버리는데 무슨……!”

“……”

우뚝, 펜을 놀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종이가 사각사각 긁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흐에에엥……!!”

이내 그녀가 어깨를 떨며 크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시간이 잘 흐르고 있다는 걸 손수 보여주었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면서 잉크병을 닫은 후, 골든로드는 꺼이꺼이 우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헝클어뜨리듯이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뭐, 뭐, 뭐! 나보고 어쩌라고! 블루스타한테 가서 네가 외로워한다고 좀 박아주라고 해줘?!”

“흐에에에… 뭔 개소리에요…! 필요 없거든요…!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뭐 때문에 또 그러는데!”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다그치는 그에게, 블루벨은 머리가 산발이 된 채 훌쩍이며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카엘네 가족이랑 만나려고 하는데… 연락해봤더니 지금은 바쁘다고… 좀 있으면 신년축제이니까 그때 보자고…….”

“근데.”

“근데…… 우으……”

눈물이 목까지 차버렸는지, 그녀는 바닥에 커다란 눈물방울을 대여섯 개쯤 떨어뜨리고 나서야 겨우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근데 블루스타가…! 애들만 두고 갈 수는 없다면서, 자기는 안 가겠다고 하잖아요……!”

“네 살에 두 살, 그리고 이제 돌 지났던가? 뭐, 안 간다고 할 만하네.”

“하루 정도, 대신 돌보아줄 사람 찾으면 되는데……!”

그녀의 짝인 블루스타는, 무려 눈앞에 있는 왕을 호위하는 사람이자 직접 수발을 드는 위치에 있다.

그러니 그를 대신해 아이를 돌볼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터.

애초에 지금도 낮에는 다른 사람이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그러니 하루쯤 아이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못해도 별 문제없을 게 아닌가?

그런데도 블루스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은 것이었다.

“안 그래도 낮에 같이 못 있어주는데… 밤에도 자리를 비우면 아이들이 섭섭해한다고……!”

“첫째는 그럴 거 같은데? 네 살이잖아.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다 할 수 있는 나이 아냐.”

“그러니 잘 말해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그냥 나랑 같이 가기 싫은 게 틀림없어……!”

그렇게 울분을 토하고서, 블루벨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녀 스스로도 남 앞에서 이런 식으로 울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눈물이 솟아오르는 탓에, 바깥으로 흘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는 새에 여러모로 차곡차곡 쌓인 것이리라.

그 사실을 깊이 실감하며, 그녀는 기왕 시작한 거 다 털어놓자는 심산으로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셋이나 가졌으면 됐다면서 잠자리도 잘 안 하려고 하고…. 내가 집에 가도 그다지 반기지도 않고…. 아니, 처음부터 별로 안 반겼어요…. 그날 바로 ‘언제 떠날 거냐’는 식으로 물었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처음 아이가 생긴 걸 안 그녀가 결혼해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블루스타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결혼하지 않아도 내 자식으로서 기르면 되는 것을.

그 결과, 블루스타의 가계도에는 아내의 이름 없이 세 아이의 이름만 달랑 올라가게 되었다.

즉, 세 아이는 그대로 사생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여러모로 욕구가 왕성한 엘프들 사이에서 사생아란 무척 흔한 존재이다.

두 사람처럼 다른 애인을 두지 않고서도 결혼하지 않는 연인들도 있는 만큼, 그 삶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묶이고 싶을 뿐.

언제든 헤어져서 흐지부지될 수 있는 연인이 아니라, 한 번 이어지면 풀어내기 성가신 부부가 되어 그에게 완전히 속박되고 싶었다.

그래야 그의 마음이 식더라도 그를 떠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만약 둘이 지금 부부 사이였다면, 블루벨은 그가 말한 ‘아이는 더 갖지 말자’는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으리라.

그녀의 건강을 염려한 것이나, 각자의 일에 힘쓰면서 세 아이를 잘 키우자는 식으로.

그러나 그런 ‘사슬’이 없는 지금은……

“내가 더는 필요 없어진 거야…! 드디어 딸을 낳았으니까……!”

정말로 그의 애정이 사그라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고 있었다.

머리를 감싼 채 블루벨이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온 골든로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뭐? 딸 낳은 게 뭔 상관이라고?”

“옛날에 저를 키워서 좋아하게 됐던 걸 재현할 수 있잖아요…! 그러고 싶은 게 분명해……!”

“그럼 블루스타가 제 피를 이은 자식과 맺어진 최초의 엘프가 되겠네. 그딴 놈이 옆에 있는 건 싫은데.”

엘프에게 생식욕구가 발생한 지 어언 178년, 온갖 이상취향은 다 보유한 엘프 중에서도 그런 영역에 손을 댄 자는 아직 하나도 없다.

골든로드는 자신의 옛 제자가 그딴 영역을 개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 뒤, 얼굴에 잔뜩 먹구름이 껴버린 블루벨에게 말했다.

“그 놈이 왜 그러는지 알잖아. 블루스타는 여전히 네가 이 지랄 같은 숲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길 바라고 있어. 그래서 결혼 안 하는 거고.”

“……알아요.”

무척 잘 알고 있고, 그녀 스스로도 원하는 바이긴 하다.

그러나 그를 떠나고 싶지 않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놈, 네가 밖에 나가 있을 때에 더 안심하더라. 들었어. 이젠 애엄마인데도 떨어지긴커녕 오히려 더 좋다면서 들러붙는다며? 세상에, 그런 미친놈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니 진짜 소름 끼치네.”

“………세상에 자기 나라랑 백성을 이렇게 욕하는 왕이 또 있을까.”

“사실이잖아. 그리고 집무시간 끝났는데 뭐 어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골든로드였다.

해가 지고 달이 휘영청 뜬 지금, 왕관을 벗은 골든로드는 그저 역사서를 열심히 쓰고 있는 전직 묘지기일 뿐.

그러니 숲과 동족에게 욕을 날려도 아무 문제없다며 코웃음 쳤다.

장로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한탄할 것이다.

그러나 한숨만 쉴 뿐, 누구 한 사람 그를 비난하지 않으리라.

애초에 그러한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왕이 되는 걸 수락한 것이니까.

게다가 골든로드가 동족을 싫어한다는 건 장로를 포함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무려 본인이 직접 개최한 왕 선출식 때, 엘프가 싫다고 대대적으로 연설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정식 왕으로 선출되었으니 세상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다들 그가 명목상 임시 왕이었을 적에 한 통치가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또는 그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로, 그 누구도 왕이 되고 싶지 않았거나.

‘뭐, 누가 되고 싶겠어? 괜히 일만 많은데.’

외부 종족의 사자(?者)를 맞이하고, 또는 반대로 그들을 방문하고 회담을 가지고, 장로들이 판단하지 못하는 사건을 재판하는 등, 누가 봐도 여유 따위 없는 생활이다.

그러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긴 해도, 일시적으로 ‘왕이 아닌 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괴팍해져서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자신의 투정을 들으면서 상대해주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블루벨은 혀를 차면서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골든로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없는 그 자신만의 시간을 뺏는 게 미안하면서도, 그런 귀한 시간을 할애해주는 게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그의 따스함에 자꾸만 기대려고 하는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심중을 모르는 채, 골든로드는 자신이 헝클어뜨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슬슬 정돈해주면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놈이 말을 고를 놈이니? 너랑 같이 가는 게 싫으면 그렇다고 했을걸?”

“………”

“넌 진짜 생각이 너무 부정적이야. 이름값 좀 적당히 해. 애당초 굳이 블루스타랑 갈 필요 없는 거 아냐? 다른 데는 혼자 잘만 돌아다니잖아. 게다가 딴 사람도 아니고 카엘이랑 메린인데.”

“그치만……!”

또 다시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으면서 블루벨이 외쳤다.

“그치만 나 혼자 가면 메린한테 맞을지도 모르는걸요! 게다가 걔네는 부부에 아이까지 주렁주렁 데리고 있는데 나만 혼자 있는 걸 보는 것도 서글픈단 말야!!”

“………”

다시금 서럽게 울어대는 블루벨의 어깨를 두드리며, 골든로드는 또 한차례 깊은 한숨을 쉬고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 대체 내가 뭔 죄를 지었다고 이딴 신세인 건지, 원…….”

“………으아아아앙!!”

“시끄러 죽겠네, 진짜.”

“흐아아아아……!!”

매정한 말이 아파서인지, 아니면 그러면서도 자신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따뜻해서인지, 블루벨은 그야말로 세상 떠나가라 목놓아 울어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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