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7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2)
* * *
그 이후에 언제 잠들었던 걸까?
부스스 몸을 일으킨 블루벨은, 어스름에 잠긴 방 안을 멍하니 둘러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몇 시이지……?’
눈을 비비며 벽시계를 보자, 시침이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터덜터덜 창가에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히자, 굵직한 나뭇가지들이 하얀 눈에 덮여 있는 게 보인다.
그 틈 사이로 펼쳐진 검푸른 하늘에서는 별이 조금씩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다.
‘새벽이구나.’
블루벨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차디찬 공기에 잠기운이 모조리 내쫓기면서, 지난밤 일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집무를 마친 골든로드를 찾아가, 엘프의 긴긴 역사를 종이에 옮기고 있는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것.
그러다가 넋두리를 늘어놓고, 결국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통곡을 해버린 것.
마지막으로는 골든로드가 자신의 손에 술병을 쥐여주곤 방에 밀어넣었다는 것까지, 아주 세세하고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으…… 뭔 꼴을 보인 거야…….’
숙취와는 다른 이유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해, 블루벨은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며 창문을 닫았다.
그대로 뒤를 돌자, 침대 옆 협탁에 텅텅 빈 술병이 놓여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줬을 때까지는 꽉 차 있었건만, 지금은 한두 방울만 바닥에 겨우 고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팔뚝만 한 병을, 혼자 하룻밤만에 싹 비워버린 것이었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그저 블루스타의 뒷담을 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좀 달래려 했을 뿐,세상 무너진 듯이 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간만에 술을 실컷 마셨다는 것도, 그 맛을 유유히 즐긴 게 아니라 벌컥벌컥 들이켰다는 점에서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블루벨은 텅 빈 술병을 기울여, 병 속에 고이 남아있던 한 방울을 머금었다.
혀가 마비될 정도로 알싸한 맛이 느껴지는 동시에 진한 꿀향기가 풍겨온다.
단 한 방울로도 이렇게 그윽한데, 한 모금은 얼마나 감미로웠으랴.
‘아까워.’
정말 좋은 벌꿀술을 허투루 날려버리고 말았다.
블루스타도, 아이들도, 그리고 골든로드도 모두 간만에 만나는 것이건만, 해후의 기쁨을 느껴야 할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고 말았다.
“하………”
그 사실에 무거운 한숨을 쉬며, 블루벨은 터덜터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어느 방의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라벤더 향이 은은히 흘러나오는 문틈으로, 귀마개를 쓴 채 잠에 빠져 있는 골든로드의 모습이 보인다.
왕의 하루는 빨리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잘됐네.’
블루벨은 다시 살며시 문을 닫은 후, 조금 들뜬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 뒤, 기억을 더듬어 찬장과 창고에서 재료를 모아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곱게 빻은 귀리가루로 빵을 굽고, 채소와 날개사슴의 젖으로 수프를 끓인다.
이어서 새알 대신 보관되어 있는 달걀로 오믈렛을 만들 즈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집주인이 눈을 반쯤 감은 채 테이블에 앉았다.
“뭐야… 좋은 냄새가 나길래 오지랖 넓은 사람이 쳐들어온 줄 알았는데, 블루벨 너였어? 괜히 경계했네.”
“따질 부분이 엄청 많은데, 아침이니까 하나만 해드릴게요. 저도 이제 웬만큼 요리하거든요? 저번에 제가 만든 거 직접 드시기도 했잖아요. 왜 아직도 의심하시는 거예요?”
그릇에 수프를 담아 그의 앞에 놓으면서 따지는 블루벨.
부루퉁한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골든로드는 컵에 물을 따르면서 진중히 대답했다.
“블루벨아, 내가 널 본 게 올해로 178년째란다. 그리고 네가 거의 150년간 요리라는 이름의 독을 쓰는 걸 봐왔지. 진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지는 고작 8년밖에 안 된 데다, 내가 맛본 건 또 손에 꼽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할 수 있겠어?”
“요 8년간 아무도 안 쓰러졌잖아요! 내가 직접 애들 이유식 만들기도 했구만!”
“8년간 간접적으로 겪은 평온은 말이지, 150년간 목격해온 참상 앞에선 새빨갛게 달궈진 쇳덩어리에 떨어지는 이슬이나 마찬가지야. 있으나 마나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골든로드는 거리낌없이 수프를 한 술 떴다.
그리고 빵과 오믈렛도 각각 한 입씩 입에 넣고 삼킨 다음,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내 의심을 완전히 풀고 싶으면, ‘이런 걸 먹게 되다니 살아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만한 걸 만들어오렴.”
“지금 드시는 건 어떤데요?”
“그냥 그래.”
“되게 맛있게 드시면서.”
“허기라는 최고의 조미료에,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보정이 들어갔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꾸한 후, 골든로드는 앞치마를 벗는 블루벨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넌 안 먹어?”
“으응~ 집에 가서 먹을까 하고요.”
블루벨은 왠지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괜히 시선을 솥으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데, 음, 이거 좀 빌려갈게요. 이따 씻어서 돌려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래라.”
흔쾌히 내려온 수락에, 블루벨은 밝게 웃으면서 솥을 챙겨 들었다.
그런 뒤,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가는 골든로드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가볼게요. 그…… 어제는 죄송했어요.”
“죄송하면 제발 잘 좀 지내. 가출 좀 그만하고.”
툭 쏘아붙이는 말에 쓴웃음을 짓는 블루벨.
그녀는 그대로 살짝 시선을 내리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요. 이것저것.”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그 술 만드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너 다 마셨지? 뻔해. 아…… 한 모금 먹고 줄걸.”
“아으, 진짜! 그냥 좀 받아주면 안 돼요?! 하여간 성격 진짜 배배 꼬였어!”
“남 말하네. 아무튼 잘 가라~”
“안녕히 계세요!!”
블루벨은 얼굴을 찡그리며 빽 소리지르고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씩씩대며 몇 걸음 걸어간 다음, 뒤를 돌아보고서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진짜 변하시질 않네.’
왕이라는 최고직책에 앉은 지 8년이 지났건만, 골든로드는 여전히 쌀쌀맞으면서 다정하다.
묘지기로서 홀로 살다가, 이제는 많은 엘프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됐다는 큰 변화를 맞았으면서도.
문득 그녀는 8년 전에 지켜보았던 한 인간을 떠올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지닌 무감정한 여자는, 단 석 달 만에 질투도 하고 애교도 부리는 ‘여자’가 되었다.
그 여자만이 아니다.
여자…… 메린의 곁에 있는 카엘 또한 여정 중에 많은 것이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체격도 부실하고 어딘지 미덥지 않은 인상이었건만, 끝에 가서는 꽤 믿음직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석 달.
천 년 가까이 사는 엘프에겐 찰나의 순간이나 다름없는 그 시간만에, 두 인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단명종이라 그런가……?’
수명이 짧으니까 변화에 대한 반응도 큰 것일까?
그렇기에 인간에 비하면 몇 배나 수명이 긴 엘프는, 그만큼 세월의 흐름과 풍파에도 덜 흔들려서 변하지 않는 걸까?
‘엘프는 변하지 않는다…….’
속으로 그 말을 되뇌자, 어쩐지 가슴이 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자신에게 추잡한 눈길을 보내는 엘프들.
사랑을 전하고 그 결실인 아이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떠나보내려 하는 블루스타.
블루벨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무쌍한 인간과 두세 달을 함께하고, 간간이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고, 또 어머니라는 존재가 되는 큰 변화를 맞았음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마음이 들뜨다가도 금방 푹 가라앉는 것도 여전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양이 178년의 세월에도 그대로인 것처럼.
추잡한 엘프들, 골든로드, 블루스타……
그들 모두의 겉모습이 오늘날까지 티끌만큼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보니, 다들 이제는 없는 생명수의 꽃에서 태어난 엘프들이다.
혹시 그런 엘프들만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
긴긴 한숨을 쉰 후, 블루벨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구름이 껴서 좋은 날씨라고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아침부터 이렇게 어두운 생각을 하는 건 좋지 않다.
‘바뀌지 않으면 어때?’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도 바뀌지 않을 거 아냐.’
여전히 그녀를 은근히 반기는 골든로드처럼, 블루스타의 마음도 항상 같을 터.
그의 두 눈에서 블루벨이라는 여자를 향한 염려와 애정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차라리 다른 데서 살면 좋을 텐데.’
엘프는 이 숲에만 있지 않다.
인간의 영역인 대륙 중앙 지대의 오랜 숲에도, 규모는 작지만 엘프들이 살고 있었다.
지난 8년간, 대륙 서쪽의 ‘루 메호’…… ‘노을 숲’의 엘프들은 대륙 중앙에 남아있던 엘프들을 한데 모아서 거주구역을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점점 사라져가는 ‘신비’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다른 숲에 엘프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블루벨은, 그들이 근방에 사는 인간들과 잘 화합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교단의 수장과 인간의 왕이 이들의 이주를 수락하긴 했으나, 근방에 사는 인간들은 갑자기 이웃이 생긴 걸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겉모습부터 시작해 주식(??)으로 삼는 곡물까지 완전히 다르니, 인간들의 시선에는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이 더 강했다.
엘프들이 인간의 아이들을 납치해서 잡아먹었더라는 소문 때문에 적의마저 서려 있었지만, 다행히 8년간 아무 사고도 없었기에 지금은 그저 무심한 눈길을 보내오고 있다.
그러니 고향을 떠나서 다른 숲으로 가더라도, 나름 평온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터.
그러나,
‘될 리가 없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블루스타와 블루벨, 두 사람이 아끼는 골든로드가 여기 ‘노을 숲’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그가 이 숲에 있는 한, 블루스타는 결코 떠나려 하지 않을 게 뻔하고…… 그녀 역시 그 혼자만 남기고 떠나는 건 싫다.
성격 괴팍한 왕은, 이 숲에서 그들 둘 외엔 마음을 터놓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니 바뀌지 않아.’
골든로드에게 자식이 생겨서 왕위를 물려준다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지금과 같은 생활이 계속되겠지.
블루벨은 한 달에 일주일 또는 이주일만 고향 숲에 머물고, 블루스타는 그런 그녀가 곁에 있는 걸 기뻐하는 동시에 그녀가 영영 숲을 떠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 소망이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얼마나 속이 편했을까?
‘하지만……’
골든로드가 말했듯이, 블루스타는 그녀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녀가 떠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괴롭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바깥에서 그녀가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가 ‘자신은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으라’는 말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블루벨은 자조하듯이 웃으면서 집 근처에 도착했고,
“………!!”
저 멀리 보이는 광경에, 발이 저절로 우뚝 서버리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그녀의 가족이 사는 집의 문이 열리더니, 두 엘프가 바깥으로 함께 나오고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집에 사는 블루스타,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몇 번 만난 적 있는 여자로, 낮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도우미였다.
‘왜……?’
도우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말이 된다.
출근해야 하는 블루스타를 대신해, 평소처럼 아이들을 돌보러 온 것일 테니까.
시간이 많이 이른 것 같기도 하지만, 눈이 또 내리기 전에 일찍 온 거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 안에서 함께 나왔다.
블루벨은 어제 집을 뛰쳐나온 건, 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였다.
달이 휘영청 떠 있는,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방문하지 않는 시간이었을 터.
그런데 이렇게 같이 나온다는 건…………
“………”
추위를 느끼지 않고 있었을 손끝이 얼어버린 것처럼 차갑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솥을 꽉 쥔 채, 집 뒤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접근했다.
굳이 바짝 가까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뾰족한 귀는,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주워담을 수 있었으니까.
“간밤엔 실례가 많았소.”
“어머, 그런 말씀 마세요. 의지가 될 수 있어서 기뻤는걸요.”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이 되오.”
같이 있었다.
둘이, 어젯밤 내내.
그 사실이 머리에 들어앉자마자, 블루벨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을 보고 놀라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목례한 후, 들고 있던 솥을 블루스타에게 턱 안겼다.
“수프예요. 아침 아직 안 먹었을 거 같아서. 뭐…… 이제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네요.”
“블루벨? 무언가 일이 있었느냐?”
“아뇨.”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의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갔다.
그리고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미소를 그리면서 또 다른 말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숲을 나가려고요. 그래서 인사하러 왔어요.”
“지금……?”
무언가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는 그를 지나쳐, 블루벨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배낭을 맸다.
그리고 각각 빵과 이유식을 입에 넣은 채,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는 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엄마 갈게. 잘 지내.”
“어……? 그치만 오늘,”
“미안해.”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블루벨은 그 말을 눈물과 함께 삼키며,어리둥절해하는 첫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런 뒤에 돌아서자,어느새 집 안에 다시 들어온 블루스타가 약간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솥은 대강 적당한 곳에 둔 모양이었다.
“블루벨, 갑자기 왜 서두르는 게냐? 말해보거라.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없어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눈길이, 문득 부엌을 향했다.
조리대에 올려져 있는 빈 술병.
사용한 흔적이 여실히 있는 술잔 두 개.
먹다 남은 치즈가 담긴 접시.
지난밤에 함께 술을 마시고, 아침을 맞이한 게 분명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일도, 없어.”
“네 얼굴에 아니라고 다 써 있다. 내 눈은 못 속여. 블루벨, 무슨 일이 있었지?”
“………둘이 어젯밤에 같이 있었나봐요?”
중얼거리듯이 던진 그녀의 물음에, 블루스타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이길래 어젯밤 내내 해요? 내가 그렇게 나갔는데.”
“그건 그……”
“잘 어울리네.”
블루벨은 당황해하는 듯한 도우미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블루스타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번 그 말을 입에 올렸다.
“둘이, 아주 잘 어울려.”
“블루벨, 그게 무슨,”
“갈게요.”
“잠깐, 블루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등진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는 블루벨.
당장 붙잡을 것처럼 불렀으면서 그녀가 바깥에 나오기까지 아무 제지도 없었다.
문 밖을 한참 나와서 살짝 뒤를 돌아보자, 도우미가 그의 팔을 잡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간 그녀를 힐끗 보면서.
“………”
그녀의 다리가 다시 움직였다.
소복이 쌓인 눈을 헤치면서 걷다가, 그 안에 파묻혀 있는 땅을 차면서 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았다.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자신이 방금 본 광경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달렸다.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맞으면서, 살을 에는 듯한 겨울의 칼바람 속에 눈물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정신없이 숲을 헤치고, 산을 넘어서 초원을 지났다.
숨이 차면 잠시 멈추었다가, 호흡이 돌아오는 즉시 다시 뛰었다.
가고 싶은 곳도, 가야 하는 곳도 없이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달리던 그녀는, 어느새 자신이 갈림길 위에 멍하니 서서 이정표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이 써 있기에 그녀의 다리가 멈춰버린 것일까?
부옇게 흐린 눈으로 이정표를 살펴보자,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짤막한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아……”
아는 지명이다.
이정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 뒤에 어떠한 글자들을 이어야 하는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달리 갈 데가 없기 때문일까?
머릿속에 글자들…… 주소가 떠오르자마자, 그녀의 다리가 이정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처럼 뛰지 않고, 발을 끌듯이 터덜터덜 걸어간다.
보초를 서는 위병들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어, 그녀가 기억하는 주소를 찾아서 그림자 속을 헤맨다.
그렇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목표하던 곳에 다다랐을 즈음엔, 사위가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집에선,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블루벨은 집의 처마부터 지붕까지 올려다본 다음,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어라? 뭐 두고 갔나?”
그러자 안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발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낯익은 얼굴을 한 여자…… 메린이 밝게 웃으면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블루벨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블루벨이잖아. 왜 왔냐? 신년축제는 나흘 뒤인데.”
“………들어가도 돼?”
“카엘 없어. 축제 준비 때문에 안 들어올 거야.”
“………상관없는데.”
그러나 메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블루벨을 보면서 눈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으니까.
역시 그녀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이다.
‘예상대로야.’
알고 있었다.
메린이 자신을 반기지 않을 것임을.
이 밤중에, 그것도 숲 바깥에서 그녀를 환대해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래? 그럼 들어와.”
때문에, 블루벨은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한 말에 일순 벙벙해졌다.
“뭐……?”
“못 들었어? 들어오라고. 카엘 없어도 된다며?”
“어……… 진짜로……?”
“그럼 뻥이겠냐? 얼른 들어와. 안에 찬바람 들어가잖아.”
“………”
문을 붙잡은 채 툴툴거리듯이 말하는 메린.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블루벨은,
“우으… 흑……!”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서 울기 시작했다.
“엥?! 갑자기 왜 울어?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메린이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눈에 바람이랑 눈이 들어갔다고 말해야 할 텐데.
그러나 두 다리가 축 늘어져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에, 블루벨은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받아주는구나.’
불쑥 찾아온 자신을 내치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 사실에 북받쳐 올라오는 대로,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