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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69화 (469/475)

〈 469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4)

* * *

자주 집을 비우고 있었지만, 아이를 가졌을 때엔 당연히 집에 머물렀다.

여전히 자신에게 광적인 관심을 가지는 엘프들 때문에 해가 진 뒤에나 겨우 바람을 쐴 수 있었으나,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에 행복을 느꼈다.

블루벨은 다시금 잔을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몸이 가느다랗잖니? 엉덩이도 작고. 그래서 아이 낳을 때 무척 힘들었어. 몸이 전부 다 찢기는 것처럼 아팠고.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태어나서 건강했지만, 나는 침대에서 내려오기까지 꽤 걸렸어.”

그래도 좋았다.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경험을 했지만, 괜히 아이를 가졌다는 후회 따위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아기가 사랑스러웠고, 아이 아버지인 블루스타도 무척 기뻐했으니까.

그러니 결혼을 통해 부부가 되지 않았어도,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다음날, 젖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전까진.

“안 나왔다고? 양이 적은 게 아니고?”

“한 방울도 안 나왔어. 가슴에 차는 느낌도 없었고.”

메린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귀가 둥글다는 것만 빼고는 무척 익숙한 시선이다.

젖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성 엘프들도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걸, 블루벨은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눈길을 마주하면서, 그녀는 자신 대신 젖을 먹여줄 사람, 즉 유모를 구해야 했다.

다행히 엘프의 자유분방한 문화 덕에 쉬이 유모를 구할 수 있었고, 그렇게 첫째와 둘째 아이를 다른 사람의 젖으로 길러낼 수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두 아이에겐 각각 무지하게 친한 친구가 생겼고, 유모로 일해준 사람과도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으니까. 아이들도 나를 엄마로 봐주고 있고.”

그저 자신이 직접 젖을 먹여서 기르지 못한 게 아쉽고 서글플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훔친 후, 블루벨은 이어서 말을 꺼냈다.

“근데 셋째를 낳고나서 문제가 생겼어. 난산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블루스타가 잠자리를 안 하려고 해.”

“카엘이랑 똑같네.”

“똑같아……? 정말……?”

의외라는 생각에 되묻는 블루벨에게, 메린은 무척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

“멜이랑 케임이 쌍둥이이거든. 뱃속에서 둘 다 거꾸로 서 있었다나? 아무튼 그래서 그냥 못 낳고 신전에서 수술받았어.”

“수술?”

처음 듣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몰라? 배 째고 애 꺼내는 건데. 아, 그쪽 동네는 사제님이 없지? 그러니 모르겠구나.”

“그, 그런 일을 당하고도 괜찮은 거야?!”

“괜찮지. 사제님이 흉터 안 남게 말끔히 붙였으니까. 기운은 좀 늦게 차리기는 했어.”

그뿐 아니라, 진통과 출혈로 꽤 위험한 상태까지 갔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메린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없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덤덤히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괜찮았는데…… 카엘이 괜찮지 않았어.”

평소에도 의존하는 성향이 있던 만큼, 카엘은 메린을 잃을 뻔했다는 공포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온종일 옆에 있으려 하고, 그녀가 몸을 뒤척이는 것만으로도 잘못될까봐 겁을 먹었다.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려서 제대로 잠을 못 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 탓에 며칠간 아무 일도 못했을 정도라고 말하는 메린의 표정은, 방금까지 철벽처럼 견고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눈에 띄게 무너져 있었다.

8년 전, 블루벨이 두 사람과 함께 여행하면서 직접 보아왔던 것처럼, 메린의 감정은 여전히 그에게 상당부분 쏠려 있는 듯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도, 블루벨은 메린의 그러한 모습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역시 사이좋구나.’

변하지 않는 엘프인 자신들은 틀어지고 말았건만, 변화에 민감한 종족인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하게 지내고 있다니.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도,

‘좋겠다.’

블루벨은 처음으로,

메린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한 일, 어쩌면 더 힘든 상황을 겪었음에도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되도록 극복한 두 사람이, 정말 부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카엘이 잘 추슬렀나보네. 또 아이를 가진 걸 보면. 역시 네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구나.”

그러나 실상은 조금 다른지, 메린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엥? 아닌데. 나 건드리려고도 안 했는데? 껴안고 뽀뽀하는 게 다였어.”

“뭐? 하지만 아까 그 애……”

“응. 그래서 설득하고 덮쳤지.”

“…………”

어디선가 와장창 부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블루벨은 거의 인간 두 명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설득한다’는 행위가 ‘덮친다’는 것과 맞물려서 행해진 걸 난생 처음 보았다.

그야말로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뭐, 진짜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할 순 없으니까 그런 기분이 들게 이것저것 하면서 허락받았지만.”

“그거 그냥 포기한 거 아니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카엘은 메린의 힘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까.

그러니 잠자리를 수락한 게 아니라, 어차피 당할 게 뻔하니 체념했다는 말이 더 적절할 성싶었다.

‘나는 그런 거 못하지만 말야.’

왕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블루스타는, 동시에 그를 지키는 친위대장이기도 하다.

블루벨이 장난으로 기습하더라도 쉽게 풀어나오는 등, 블루스타는 그녀가 쉽게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포기?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엘은 그딴 거 안 해. 얼마나 고집이 센데. 아이 가지기로 해놓고도 맨날 싫다고 해서 내가 발정시키고 있구만.”

“바, 발정……?!”

“응. 키스하면서 고간이랑 여기저기 만지고, 또 그러면서 몇 마디 속삭이면 발정해.”

그렇게 한 번 고양되면, 하기 싫다고 하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달려든다.

나머지는 그가 행여나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단단히 끌어안고 허리를 꽉 붙잡으면 된다.

그런 식으로 매일매일 세 번에서 많게는 여섯 번까지 하면서 한 달을 보낸 적도 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메린을 보며,

‘불쌍해…….’

블루벨은 진심으로 카엘이 가엾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말라 비틀어지도록 짜이고 있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른 나뭇가지,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해골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블루벨은 도저히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얘, 그러다 카엘 죽겠다.”

“왜 죽냐? 탈 안 나도록 맛있는 거 먹이는데. 영주님이랑 자주 대련도 해. 나랑도 가끔 하고.”

“아, 그래.”

‘용케 살아있네.’

역시 괜히 용사가 된 게 아닌 듯했다.

전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마음가짐에 병약해서 그렇지, 신체적인 소질은 충분했던 것이리라.

홀로 납득하며 따끈한 포도주를 홀짝이는 그녀의 귀에, 메린의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드는 향초를 몰래 피우기도 해. 그쪽도 한 번 써볼래? 아는 언니네 남편이 치료사라서 얻은 건데, 효과 꽤 좋아.”

“뭐? 돼, 됐어!”

아무래도 벽난로의 열기 때문에 술기운이 빠르게 올라오는 듯했다.

블루벨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예, 예전보다 덜한다는 거지, 아예 안 하는 게 아니야! 안 넣고 만지기만 하지만…….”

“졸라봤어? 씨 가득 뿌려줘~ 같은 말로 조르면 완전 정신 놓던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보* 기분 좋다’나 ‘자*에 쑤셔져서 가버린다’면 몰라도, 씨, 씨를 뿌려달라니…! 난 그런 민망한 말 못해……!”

“존나 잘할 거 같은데.”

뚱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딱 잘라 말한 뒤, 메린은 작게 한숨을 쉬고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넘어뜨리고 올라타는 건?”

“되, 될 리가 없잖아……! 블루스타가 나보다 훨씬 더 세다고!”

“딴 여자들도 남자보다 약해, 등신아. 그래도 다들 하거든? 해보기나 하고 말해. 아무것도 안 하고 징징대기만 하면 뭐 풀리냐?”

“………”

가슴에 푹 꽂히는 말이었다.

메린이 쏘아붙인 대로, 자신은 무언가 할 생각은 하지 않고 푸념만 늘어놓고 있었다.

‘진작에 이것저것 시도했다면, 이런 꼴은 안 됐을지도 몰라.’

블루벨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이미 늦었어. 다 소용없을 거야. 이미 딴 여자가 생겼으니까.”

“확실하진 않다며?”

“그래도 가능성은 커. 왜냐하면……”

깊고 깊은 한숨 뒤, 블루벨의 입이 천천히 말을 자아냈다.

“그 여자, 남편이 없거든. 아까 말했지? 내가 셋째 낳고나서 문제가 생겼다고. 그 여자가 두 번째 문제야.”

두 아이의 유모가 되어줬던 사람은 마침 때가 맞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구해야 했다.

블루벨이 아직 만삭일 때에 유모를 구한다는 공고를 붙이자마자, 젖먹이 아이를 안은 여자가 찾아와서는 얼마 전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며 꼭 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물론 그녀는 유모를 구하기만 하면 될 뿐이니 흔쾌히 승낙했다.

문제는 그녀가 아이를 낳은 시점에,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보니 죽어 있더래. 그렇다고 젖이 갑자기 안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대로 일을 맡겼어.”

처음에는 별 문제없었다.

여자는 아기를 성심성의껏 돌보았고, 아기도 여자의 젖을 먹으면서 건강하게 자랐다.

그러나 한 달 후, 블루벨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여자가 아기를 보는 시선이나 달래는 모습에서, ‘자신의 자식에게 하듯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돌본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한다’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아이를 잃었으니, 자신의 죽은 아이와 겹쳐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블루벨 역시 어머니인만큼, 그 슬픔의 깊이는 모르더라도 ‘아이를 잃는다’는 끔찍함은 알 것 같았기에 이해해주려 했다.

그러나 그 동정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옹알이를 하기 시작한 애한테, ‘엄마야~ 엄마라고 해봐~’라고 했어! 똑똑히 들었다고! 남의 새끼한테 자신이 엄마라고 하는 게 말이 돼?!”

“그걸 그냥 뒀어? 족치지.”

“족치는 건 못했지만, 그날로 바로 내보냈어. 그 탓에 셋째는 다른 아이보다 일찍 젖을 떼게 됐지. 그래도 다행히 이유식 먹고 잘 컸어.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더라.”

젖을 갑자기 뚝 끊어버린 만큼 아기를 훨씬 더 자주 달래주고 어르는 등 여러모로 고생을 했으나, 덕분에 ‘엄마’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도 다 안정을 찾자, 블루스타는 다시금 그녀가 다른 엘프들 때문에 집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걸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기에, 이전처럼 한 달에 일이 주만 돌아오는 생활로 돌아갔다.

때문에 낮 동안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구해야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여자가 또 바로 찾아왔어.”

셋째 아이의 유모였던 여자가 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간 안정적인 일을 구하지 못해서 힘들었다며, 전보다 더 조촐한 차림으로.

지난번에는 정말 죄송했다면서 몇 번이고 사과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여자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블루벨은 그만 보모 일을 하는 걸 수락하고 말았다.

“자업자득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메린이 상당히 건조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바보 아냐? 아니, 호구이네, 호구.”

“바보도, 호구도 아니야! 그리고 내 얘기 아직 다 안 끝났거든? 미리 내 책임이라고 단정짓지 말아줄래?”

포도주가 든 잔을 쥔 채 빽 소리지르는 블루벨.

그러나 메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다.

“그딴 일이 있던 년을 또 쓰기로 했잖아. 그러니 그 뒤에 뭔 일이 있었건 그쪽 책임이지, 뭐.”

“으……! 그치만 순순히 보모 일만 할 줄 알았는걸!”

아이에게 집착하던 여자였으나, 그 기회 아닌 기회가 날아가버렸으니 얌전히 보모 일에 만족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여자는 블루벨의 기대를 간단히 부숴버리고는 더 상상하기도 싫은 짓을 해버린 것이었다.

낮 동안 세 아이를 돌보는 것이니, 어느 정도 집안일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긴 하다.

하지만 대개는 간단한 식사 준비나 설거지, 아이들의 옷을 세탁하는 것에서 그치지, 다른 가족의 옷을 관리하거나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부엌 찬장 정리를 하는 등의 일엔 손을 대지 않을 터.

그러나 그 여자는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블루벨이 집을 비운 동안에.

남자인 블루스타는 그게 어떠한 의미인지 결코 알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같은 여자인 블루벨만이 그 도우미가 품고 있을 속셈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안주인이 되려는 게 분명했어. 블루스타를 빼앗아가려는 속셈이었다고.”

“그걸 냅뒀고?”

“……나한테는 명분이 없으니까.”

홀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살펴야 하는 블루스타를 대신해 집안일까지 해주는 도우미에게, 블루벨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블루스타도, 심지어는 도우미조차 입 밖에 낸 적은 없으나, 그녀에게는 도우미의 선 넘은 행동을 비난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 온전히 집에 있지 못하는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불안해져서…그 사람에게 자주 투정을 부리게 됐어. 통하지 않으면 성질이 나서 집을 나오게 됐고. 그래도 어떻게 계속 지내고 있었는데……,오늘 아침 일이 일어난 거야.”

“흠.”

“틀림없어. 그간 내가 없는 동안에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거야. 블루스타는 그간 욕구가 쌓였을 거고, 그 여자는 보살펴줄 남자가 필요했으니 마침 이해관계도 딱 맞고 좋지.”

어쩌면 두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게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진작에 자신이 사라졌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도 툭하면 집을 비우는 친엄마보다는, 계속 집에 있어주는 그 여자를 더 편히 여기리라.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린 블루벨의 귀에, 이윽고 메린의 덤덤한 목소리가 울렸다.

“즉, 그쪽이 자리 비켜준 거구나?”

“………그렇게 되지.”

“역시 자업자득이잖아.”

“………그렇네.”

결국 전부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블루벨은 목이 메여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자리를 빼앗으러 온 거고?”

“아니라니까, 진짜!”

하지만 메린의 헛소리를 듣고 빽 소리지르면서 도로 트여버린 것이었다!

고개를 쳐들고 씩씩대는 블루벨을 향해, 메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그럼 여기 왜 온 거냐? 다른 엘프들에게 가도 되는 거잖아.”

“………모르겠어. 그냥……”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녀는 메린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너희에게 오고 싶었어. 이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너희밖에 없기도 하고.”

“흐음.”

메린은 그 말에 아무 감흥도 없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뒤,

“그랬구나. 알았어. 그런 줄 알게.”

상당히 시원스럽게 결론을 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블루벨에게 말했다.

“이제 자야 돼. 따라와, 방 알려줄게.”

“어… 어어……? 방……?”

“재워달라며. 손님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

덤덤하게 말하면서 그녀의 배낭을 가뿐히 드는 메린.

블루벨은 상황을 따라갈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멀뚱거리면서 재차 물었다.

“진심…이야……?”

“뭐, 그냥 말만 해본 거냐? 아니면 싫어? 그럼 나가든가.”

“아, 아니야, 고마워! 응! 진짜 고마워, 메린!”

블루벨은 황급히 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서 메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못마땅하면서도 하루 묵게 해주는 메린의 친절에, 정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대로, 눈물을 똑 흘리면서 메린을 끌어안았다.

“정말… 고마워…….”

“떨어져. 징그러.”

“흑.”

따스했던 마음이 곧바로 얼어붙을 만큼 매몰찬 반응이었다.

앞서 가는 메린의 뒤를 따르며, 블루벨은 고마움과는 다른 이유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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