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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470화 (470/475)

〈 470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5)

* * *

바깥 날씨만큼 차가운 대접을 받으며 밤을 보낸 블루벨.

그러나 이튿날 이른 아침, 그녀는 집에서 맞이하는 것만큼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 이유로 짐작되는 건 여럿 있다.

벽난로 불, 따끈한 포도주, 미지근한 물로 한 목욕, 그리고 그녀가 씻는 동안 메린이 덥혀준 따뜻한 침대.

한겨울의 찬바람을 신나게 맞은 몸에 온갖 따뜻한 것들을 들이부었으니, 묵은 피로까지 싹 풀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으리라.

“일어났냐? 오후 티타임 전에 가라.”

“……”

그리고 메린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퇴출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이 지금 느긋하게 노닥거릴 형편이 아님을 새삼 되새겨주는 친절까지 베풀어준 것이었다.

블루벨은 작게 한숨을 쉬면서 웅얼거리듯이 아침 인사를 한 후, 테이블의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 반죽이 든 통을 가져오는 등, 바삐 움직이고 있는 메린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제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넘겨버렸지만, 새삼 메린이 8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게 눈에 보인다.

가장 크게 변한 건 역시 옷차림이다. 위에는 셔츠나 튜닉 위에 서코트를, 아래엔 길다란 바지를 입고 긴 부츠를 신은 차림으로만 다녔었는데, 지금은 다른 평범한 마을 여자들처럼 긴 소매가 달린 원피스에 앞치마를 하고 있다.

얼굴선도 조금 더 갸름해지고, 아이 넷을 낳으면서 골반이 넓어졌는지 엉덩이도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허리는 여전히 날씬해보이지만, 엉덩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리 보이는 것일 터.

나이도 먹었고 출산도 했으니 분명 8년 전보다는 두꺼워졌을 것이었다.

‘가슴도 더 커진 거 같고.’

아마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리라.

블루벨처럼 ‘꽃에서 태어난 엘프’들에겐 해당되지 않으나, 가슴이 커지는 건 자식에게 젖을 먹여서 키우는 모든 어미들이 맞이하는 가장 큰 변화이기 때문이다.

‘메린이 말을 안 했으면 못 알아봤을지도 몰라.’

8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건 목소리, 그리고 머리 모양뿐이었다.

그 메린도 저렇게 많이 변했는데, 카엘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문득 궁금해졌으나, 그를 만나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듯했다.

메린이 ‘오후 티타임 전에 가라’고 시간까지 콕 집어서 얘기한 건, 분명 카엘이 그 즈음에 돌아올 테니 마주치지 말고 가라는 뜻일 터.

섭섭하긴 해도, 간밤을 따뜻하게 보내도록 여러모로 신경 써준 메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지금 그 녀석을 만나면, 또 한차례 주절거리게 될 게 뻔하니…….’

넋두리는 한 번 늘어놓은 걸로 충분하다.

어차피 사흘 뒤에 이 마을에서 보기로 했으니, 적당한 시간에 얌전히 떠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게 결정한 후, 블루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린, 도와줄게. 뭐 하면 돼?”

“됐어.”

“나도 염치는 있거든? 재워준 거랑 밥 얻어먹는 값은 해야지. 뭐든 할 테니 말만 해.”

그러자 메린이 불현듯 반죽을 떼던 손을 멈추더니, 아예 몸까지 돌리면서 그녀를 마주보는 게 아닌가!

평소처럼 덤덤한 시선이니 신경을 거스른 건 아닐 것이나, 블루벨은 어쩐지 몸에 긴장이 차는 게 느껴졌다.

“뭐든? 진짜 무슨 일이든 다 할 거냐?”

메린이 새삼 되묻는 모습에서도 무언가 싸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메린을 힘껏 도와줄 생각이었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

“그래.”

짧게 대답하면서 슬며시 웃는 메린.

겉보기에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미소이건만, 어째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일까?

블루벨은 아주아주 조금, 괜히 말을 꺼낸 게 아닐까 하는 회의를 품었다.

불길한 예감일수록 잘 들어맞는 법.

블루벨은 눈삽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야채를 다듬는 등의 밑준비를 할 줄 알았건만, 거실 벽난로를 지피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작을 나르고 물을 더 길러올 뿐 아니라, 아예 집 근처의 눈을 치우기까지 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그녀의 말대로, 메린은 정말 갖가지 궂은 일을 그녀에게 시킨 것이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힘찬 운동을 한 블루벨은, 하도 허기가 져서 배가 등에 찰싹 붙어버린 것 같았다.

‘앞으로 ‘뭐든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

굳게 다짐하면서 뒤뜰 창고에 눈삽을 두고 다시 집 안에 들어가자, 부엌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덤으로 무언가 보글보글 끓고 지글지글 익으면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탓에, 블루벨은 꼬르륵꼬르륵 요동치는 배를 붙잡고서 또 한 번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내 약간 비틀대면서 부엌에 들어서자, 꽤 볼만한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화덕에 걸린 커다란 솥엔 수프가 한가득 담겨서 끓고 있고, 그 옆에선 두 개의 팬에 베이컨과 달걀이 지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건너편의 오븐에서는 메린이 어른 넷이 먹을 양의 빵을 막 꺼내고 있고, 테이블 끝자리엔 어린 여자아이가 턱을 올린 채 졸고 있으며, 그보다 더 어린 남녀 아이는 바닥에 앉아서 아기와 함께 셋이서 손장난을 치고 있다.

그 단란한 모습, 특히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노는 걸 보자, 블루벨은 문득 자신의 세 아이가 떠올랐다.

어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오늘 가면 안 된다’는 듯이 놀라던 첫째.

그보다 한참 어리긴 해도, 자주 집을 비우는 엄마 얼굴을 기억해주고 있는 기특한 둘째와 셋째.

모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녀의 자그마한 보물들이다.

‘보고싶다.’

연인인 블루스타와 틀어진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을 더 보지 못할 수도 있단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더 깊이 저미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그 가증스러운 도우미와 새 살림을 차린다 해도, 아이들에겐 그저 일상이 계속되는 것일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엄마’의 얼굴이 바뀌기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한숨을 쉬자, 막냇동생과 놀던 두 꼬마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인 메린에게 물려받았을 네 개의 주홍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잠시 멍하니 쳐다보더니,

“아빠 같은 사람을 남자친구로 둔 할머니다!”

“우리 아빠 잡아먹으려고 엉기는 불여우 같은 늙은 도둑고양이다!”

방긋 웃는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면서 메린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것이었다!

“아니야! 할머니도, 도둑고양이도 아니라고! 나 너희 아빠한테 관심없거든?!”

곧바로 발끈하며 소리치는 블루벨.

그러나 아마 쌍둥이일 두 꼬마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자신들끼리 재잘거렸다.

“아빠 같은 사람을 남자친구로 둔 할머니에, 우리 아빠 잡아먹으려고 엉기는 불여우 같은 늙은 도둑고양이…… 너무 길다. 그치?”

“응, 길어. 줄이자. 뭘로 하지? 도둑고양이 할머니?”

“재미없어~ 으응…… 멜, 들은 적 있어. 남자 막 꼬시는 예쁜 언니를 꽃뱀이라고 한대. 그러니 불여우 꽃뱀 도둑고양이 할머니로 하자. 줄여서 불꽃 할머니!”

“더 줄여서 불할! 엄마~ 불할 나타났어~”

“아아아아!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마아아!!”

애초에 들어맞지도 않지만, 불릴 거라면 차라리 도둑고양이라고 불리는 게 훨씬 낫다!

블루벨이 절규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이 꺅꺅거리는 쌍둥이.

그리고 이 아이들의 어머니일 메린은, 그녀가 엎드려 있는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무척 덤덤하게 말했다.

“멜, 케임, 그래도 아빠 친구이니까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마. 블루벨 할머니라고 불러.”

“블루벨 할머니…… 블할?”

“블할!”

“이상하게 부르지 말라고!”

아이들은 발끈하는 그녀를 보며 또 한차례 까르르 웃을 뿐, 그녀의 말을 들어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졸지에 괴상망측한 별명이 생겨버린 신세에, 블루벨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린은 솥을 젓던 국자를 치우면서 툭 내뱉듯이 말했다.

“블루벨, 눈 다 치운 거지? 이것들 좀 테이블에 차려놔. 찬장에 잼 있으니까 그것도 놓고.”

“어……”

그리고 그녀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여전히 졸고 있는 자신의 딸을 가볍게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카린, 일어나. 세수하고 옷 갈아입어야지.”

“우응…… 개구리 맛없어……."

“잘 구우면 맛있어. 아무튼 일어나. 멜, 케임, 너네도 옷 입어야지. 가자.”

그런 다음, 아침잠이 많은지 도통 눈을 뜨지 못하는 큰 딸을 한 팔에 들고, 다른 팔로는 아기를 안고서 쌍둥이를 데리고 부엌을 휙 나가버렸다.

잡일을 떠넘긴 것 같은 그림이지만, 블루벨 역시 어린아이 여럿을 돌보는 게 얼마나 정신없는지 알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쟤도 꽤 고생하는구나.’

블루벨이 방에서 부엌에 내려왔을 땐, 이제 막 동이 트려 하는 때였다.

그때 메린은 이미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으니, 그녀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또한 카엘이 집을 비우고 있으니, 그녀가 방금까지 했던 일들도 모두 메린이 해야 했을 터.

그러면서 아기까지 돌봐야 하니 그야말로 하루가 모자랄 만큼 바쁠 것이다.

그걸 가정부 없이 거뜬히 해내고 있는 메린이 무척 존경스러우면서도, 같은 어머니로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고 가자.’

오후 티타임 전에 가라고 했으니, 점심까지 있어도 될 터.

그 밥값까지 하는 셈 치고 돕기로 하며 상차림을 시작했다.

바쁠 줄은 알았으나, 메린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아이들의 얼굴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 몸단장을 시킨다.

그리고 세 아이가 각자 아침을 먹는 동안, 막내에게 젖을 먹인다.

그 다음, 다 식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거실에 모인 아이들에게 막내를 맡기고서 커다란 고기파이를 만든다.

그걸 오븐에 넣자마자, 곧바로 전날 재워 둔 쿠키 반죽을 구울 준비를 한다.

그런 뒤, 파이가 식을 동안에 여러 판의 쿠키를 굽고, 적당히 식은 파이를 싸서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을 남편에게 점심으로 갖다 주는 등, 오전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무척 바빴다.

블루벨이 메린을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집 안의 오수와 오물을 모아서 버리고,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거실 벽난로에 장작을 보충하는 등의 잡일을 해주고 있는데도, 숨 돌릴 틈 없이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진짜 바쁘게 사는구나.”

그녀가 점심 준비를 도우면서 불쑥 말을 꺼내자, 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겨울이라 안 바쁜 편인데?”

봄부터는 뜰에 있는 텃밭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밀밭도 봐야 한다.

자신과 아이들의 먹성이 좋은 탓에, 마을의 부담과 가계지출을 줄일 겸 채소와 밀을 직접 기른다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 밭일까지 하면서 집안일을 하는 건 어려워, 밀 수확이 끝나는 시기까지는 가정부를 두고 있다.

메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척 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카린이 잘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

“네가 힘이 넘쳐서 그런 거겠지. 세상에, 무슨 쿠키를 열 판이나 굽니? 다 아이들 거야?”

“아니, 이따 티타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오기로 했어. 그 사람들 거야.”

신년축제 때 쓸 액받이 인형을 만들면서 바자회 논의를 하기로 했다는 말에, 블루벨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물었다.

“어? 카엘이 그때 오니까 날 보내려는 게 아니었어?”

“내가 언제 그런 소리했냐? 카엘은 오늘 저녁에 와.”

하지만 마을 여인들 중에 엘프를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메린은 버터에 볶은 고기와 야채가 든 솥에 육수를 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못 찾은 아주머니가 몇 있는데, 엘프가 잡아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눈에 안 띄는 게 좋을걸.”

“……그렇구나.”

괜히 음해한다고 화낼 수 없었다.

선대 왕을 비롯한 고위 엘프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인간 아이를, 이미 죽어버린 어머니 나무를 살리겠다며 바쳐버린 대죄.

비록 대대적으로 공표되진 않았으나, 골든로드가 역사서 집필을 마치면 모든 엘프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사실이 인간에게도 알려질 터.

그들이 대가를 무엇으로 요구할지는 모르나, 무엇을 구하든 엘프는 응당 주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얘도 배려라는 걸 할 수 있게 됐구나.’

아마 블루벨 자신이 아닌, 이웃 아주머니들을 생각한 것이리라.

더 나아가서는 모임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목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들에게 말을 하는 모습도 그렇고, 역시 메린은 많이 변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감탄하는 블루벨의 귀에, 메린이 계속 말하는 게 들렸다.

“방에 숨어있으면 되긴 하지만, 그 사람들 저녁에 돌아갈 거니까 카엘이랑 마주칠 거야. 그럼 자연히 그쪽도 카엘을 보게 되겠지? 그러니 그 전에 가라는 거다.”

“뭐야, 결국 카엘 때문이잖아?!”

“흥.”

‘내 감탄 돌려줘!’

역시 바탕은 변하지 않는 법인 모양이다.

블루벨은 헛웃음을 켜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네가 부녀회도 하고 의외다. 그런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진 않아. 우리집에서 모이더라도 머리 올려야 되고, 재미없는 얘기가 나와도 쭉 들어야 하고…… 얼마나 귀찮은데.”

그러고보니 아침까지 땋은 머리로 있던 메린은, 카엘에게 파이를 가져다주러 나갈 때부터 줄곧 둥글게 틀어 올린 채였다.

어젯밤에도 그냥 땋아 내리고 있던 걸 보면, 밖에 나갈 때나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다른 부인들처럼 올림머리를 하는 듯했다.

재미없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맞추면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무척 뜻밖으로 다가와, 블루벨은 잠시 손을 멈추기까지 하면서 물었다.

“그렇게 귀찮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거야? 왜?”

“그래야 카엘이랑 애들이 편하잖아. 특히 우리 애들, 나 정도는 아니어도 꽤 특이하니까 더 신경 써야 돼.”

메린의 피가 섞였기 때문일까?

세 아이는 물론이고, 아직 돌도 안 된 아기조차 또래보다 힘이 월등히 세다.

특히 맏이인 카린은,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도 열 몇 살짜리 소년을 집어던질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둘째인 멜은 마법 능력까지 발현해버린 탓에, 카린보다도 몇 배는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상태이다.

“그 애는 사제님들이 항시 지켜보고 있어. 전례가 있으니까 사고만 치지 않으면 여기서 쭉 살 수 있을 거래. 아니면 위슨을 따라서 부엉이탑에 가도 되고.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더더욱 마을 여자들이랑 가급적 잘 지내야 돼. 척져서 좋을 거 없는 건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거든.”

“……그렇구나.”

“응.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아. 애들이 다 지 아빠 닮았는지 순하거든. 카린은 겁 많은 것까지 닮아버려서 좀 곤란하지만.”

그래서 귀찮고 번거롭긴 해도 그럭저럭 즐겁게 지내고 있다.

카엘이 성에서 일하는 덕에, 이런저런 편의를 받거나 신기한 물건을 볼 수도 있어서 심심할 틈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메린은, 정말로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행복하구나.”

“행복?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이렇게 지내길 잘하고 있다 싶어. 사냥은 못하게 됐지만, 검까지 완전히 놓은 건 아니니 그리 나쁘지 않아.”

“흐음…… 예전보단 덜 쓰나보네?”

“임신 중엔 못 하잖아.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블루벨 역시 아이가 들어서 있을 때엔 검 대신 바늘을 잡고서 지냈던 걸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손을 움직여 음식 준비를 하면서 메린에게 말했다.

“메린, 혹시 지금 또 아이 가졌니?”

“지난주에 그거 했으니 아닐걸. 왜.”

“한 판 뜨자.”

“엥?”

이번엔 메린이 손을 멈추고서 그녀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곁눈질로 마주한 주홍빛 눈동자에선, ‘얘가 지금 뭔 소리래?’라는 뜻이 다분히 묻어나 있었다.

“간만에 한 판 뜨자고. 너희 집 뒤뜰 넓으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뭐, 텃밭도 쉬고 있으니 상관없긴 한데……. 갑자기 왜?”

“그냥.”

블루벨은 흡사 소풍 가자고 권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빙긋 웃었다.

“넌 내가 손대중 신경 안 써도 되잖아. 그리고 나보다 아이 하나 더 낳으면서 더 쉬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내가 이길 거 같아서.”

“개소리를 참 당당하게 하는구나.”

“어머, 발끈한 거야? 너무 세게 말하면 오히려 약해보이는 거 아니?”

“불륜 목격해서 돌았구나. 그래, 알았어.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두들겨줄게.”

정말 딱하다는 듯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메린.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 블루벨은 여러 의미로 투지를 마구마구 불태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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