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1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6)
* * *
점심을 먹은 후, 블루벨은 준비를 마친 메린과 함께 뒤뜰로 나갔다.
구름이 조금 끼긴 했으나, 그 사이로 해가 비추고 있는 걸 보니 눈이 내릴 것 같진 않다.
새벽에 눈을 말끔히 치웠던 덕에 땅도 적당히 말라 있어서, 발이 미끄러질 위험도 전혀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마음껏 날뛰기 딱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눈 치울 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세상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헛웃음 섞인 한숨을 쉬며, 블루벨은 팔다리와 허리를 가볍게 돌려 몸을 푼 다음, 자신처럼 가벼운 체조를 하는 메린과 마주섰다.
셔츠에 바지, 그리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부츠.
거기다 드워프가 벼린 롱소드를 들고 있는 메린을 보자, 왠지 8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면서 약간 고양되는 것 같았다.
‘뭐, 쟤나 나나 그때보다 약해졌겠지만…….’
그래도 그녀보다는 메린이 훨씬 더 실력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검을 놓은 시간도 그녀보다 긴 데다, 간간이 들짐승과 몬스터를 퇴치하기도 했던 그녀와 달리, 메린은 그저 대련만 조금 해왔기 때문이다.
즉, 안전한 환경에서 세월을 보냈으니 메린의 감은 분명 무디어졌을 터.
희박하더라도 항상 목숨을 잃을 위험에 노출되고, 그걸 계속 이겨낸 그녀보다 둔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수명이 짧은 인간에게 8년은 긴 시간일 터.
생물은 나이를 먹을 때마다 신체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니, 분명 메린도 몸을 놀리는 게 옛날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집 안에서 구경하는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이긴다……!’
8년 전에 잔뜩 쌓았던 패배의 굴욕을 오늘 전부 씻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확신하며 양손에 하나씩 단검을 잡았건만,
역시 세상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챙!
몇 번째일지 모를 공격이 막힌다.
엘프 고유의 빠른 기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눈으론 쫓지 못할 속도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데.
그 속도 때문에 두 자루의 단검이 거의 동시에 공격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하아… 하아……!”
칼이 닿지 않는다.
태세를 무너뜨릴 수 없다.
숨이 턱까지 차 있는 그녀와 달리, 맞은편에 선 메린은 아주 약간 호흡이 흐트러졌을 뿐.
늘 그랬듯이 동요도, 초조함도 없는 덤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 그녀가 대치하고 있는 검사는 일이 년도 넘는 공백기간을 가졌을 뿐 아니라, 죽을 위험 하나 없는 안락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것도 무려 8년이나.
사냥을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감이 전혀 무디어지지 않은 것인가?
어떻게 여전히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8년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혼자 수련하나? 으, 아니야. 그런 거 할 틈 따위 전혀 안 보이던걸!’
오늘 이렇게 대련을 할 수 있는 건, 메린이 할 집안일 일부를 그녀가 맡아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살림하면서 아이 넷을 키우고, 이따금 손님까지 맞는 생활인데 검술 훈련을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이다.
‘내가 얕보고 있던 거야……!’
그랬다는 자각은 전혀 없으나, 달리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정신차려, 블루벨. 상대는 메린이야! 네가 단 한 번도 쓰러뜨리지 못한 그 메린이라고!’
사실 딱 한 번 쓰러뜨렸었다.
8년 전, 그녀가 카엘 일행과 적대하고 있을 때, 대륙 서쪽의 산맥에서 메린을 기습해 절벽에 떨어뜨렸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카엘을 노린 그녀의 공격을 막으면서 벌어진 일이니 이긴 게 아니다.
기습이건 정면공격이건, 이기고자 하는 상대를 노려서 쓰러뜨려야 비로소 승리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메린이 여러모로 약해졌을 지금, 드디어 첫 승리를 따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여전히 메린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굳건히 서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다.
역시 이길 수 없는 것일까?
‘아니야. 아직 단념하긴 일러!’
기세가 꺾이는 순간,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블루벨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마음을 굳게 먹은 후,
“하앗……!”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면서 단검을 휘둘렀다.
메린의 어깨를 향한 빠르고 깊은 일격.
그러나 롱소드의 검격이 그 앞을 가로막는다.
곧바로 다른 쪽 단검의 손잡이로 목을 노려도, 메린의 빈 손이 손목을 쳐버리면서 조준을 틀어버린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곧바로 어깨를 부딪쳐오더니 그녀를 들어서 메어꽂았다.
“으으읏!”
다리에 힘을 주어 등이 부딪치지 않게 버틴다.
그대로 땅을 차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메린의 팔에 다리를 얽어서 꺾으려 시도한다.
그러자 메린은 곧바로 손을 놓아버리더니, 몸을 홱 틀면서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차버렸다.
“커헉!”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작렬한 발차기에, 블루벨은 숨이 턱 막혀버리는 걸 느끼며 공중을 날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착지하긴 했으나, 격한 기침이 나오는 탓에 제대로 앞을 보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적이었다면 바로 목숨이 끊어졌겠지.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대련이었기에, 메린은 제자리에서 검을 놀리며 그녀가 숨을 돌리길 기다릴 뿐이었다.
“블루벨, 엄청 약해졌네.”
“……!”
그런데 숨통을 끊으려 드는 대신, 혓바닥으로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울컥한 마음에, 블루벨은 기침이 멎자마자 고개를 홱 쳐들며 빽 소리쳤다.
“네가 이상한 거야! 왜 오히려 강해진 건데?! 너 대련밖에 안 한다며! 매일매일 하고 있는 것도 아닐 거 아냐!”
“어. 일주일에 두 번 해. 한 번은 영주님이랑 기사들이랑, 또 한 번은 성의 병사들이랑.”
“임신하고 있을 땐 물론이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한동안은 안 할 거 아냐! 근데 왜……!”
“글쎄, 내가 보기엔 말이지.”
빈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메린이 말을 이었다.
“내가 약해진 것보다 그쪽 실력이 더 크게 떨어진 거 같은데? 속도는 그대로인데, 공격 방식이 단순하고 직선적이게 됐어. 그간 뭐하고 살았길래 그러냐? 칼 놨었어?”
“웃기지 마! 내가 그간 잡은 몬스터랑 짐승이 몇 마리인데……!”
“몬스터에 짐승……. 사람은 안 잡고? 으응, 그러니까 사람이랑 싸운 적은 없고?”
“어? 어, 응. 없는데.”
블루벨은 그간 사람에게 칼을 들이댄 일이 없었다.
대련은 물론이고, 숲과 인간 마을을 습격하는 도적을 내쫓은 적도 없다.
숲에 사는 엘프를 덮치는 도적은 당연히 하나도 없었고, 인간 마을을 덮치는 도적떼는 그녀가 처리할 사안이 아니기에 굳이 나서서 토벌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메린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몸이 굳은 거야.”
“뭐……?”
“몬스터랑 짐승 잡았다고 했지? 그 중에 잡느라 애먹은 놈은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 않냐? 뭐, 당연히 그렇겠지. 어디든 내 고향보다는 약할 테니 그쪽 실력이라면 손쉽게 해치웠을 거야.”
아무리 지능이 낮은 몬스터와 지성이 없는 짐승일지라도 기습은 할 줄 안다.
그러니 블루벨의 감각이 무디어질 일은 결코 없겠지.
그러나 대륙 최북단의 숲과 달리, 칼날이 잘 박히지 않거나 하나 이상의 공격수단을 가진 놈과 마주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늑대나 고블린처럼 여럿이서 한꺼번에 덤비는 정도이리라.
“그런 쉽고 단순한 놈들만 상대했으니, 그쪽 몸도 그 놈들에게 맞춰진 거지. 그냥 휘두르기만 해도 뒤지니까. 그런 놈들을 상대할 땐, 교묘한 공격보단 한 대라도 더 갈기는 게 효율적이기도 하고.”
“그, 그래도 말이 안 돼! 넌 공백기간이 길잖아! 다시 검을 들어도 목숨이 걸린 전투가 아니라 대련이고! 그런데 어째서……!”
“글쎄?”
분통을 터뜨리는 블루벨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메린.
이어서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으음…… 하루는 영주님이랑 기사 다섯. 또 다른 하루는 병사 오십.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씩 하거든? 빨리 끝나서 아쉽다 싶으면 카엘을 불러오고. 병사들은 별 생각없는데, 영주님이랑 기사들은 나 이겨보겠다고 아득바득 덤벼. 영주님 빼고는 다 카엘보다도 못하지만, 어쨌든 되게 의욕적이야.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그리고 영주는 자신에게 진 다음, 나머지 날 동안 카엘을 틈틈이 두들겨버린다는 듯했다.
말로는 영주 자신과, 아끼는 부하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십중팔구 화풀이일 터.
그래서 카엘이 너덜너덜해지면, 이번엔 자신이 대련날에 영주를 아주 곤죽으로 만든다.
그러면 또 카엘이 영주의 화풀이를 당하는 악순환 아닌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으나, 객관적으로는 성의 전투력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기에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심지어 괜히 중간에 껴서 처절한 꼴을 당하고 있는 카엘조차 ‘뒤질 거 같다’고 꿍얼거릴 뿐, 자신이 대련하는 것 자체는 막지 않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서 기지개를 켜는 메린.
이어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블루벨을 향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어쨌든, 그쪽 말대로 내가 좀 녹슬긴 했어. 그래서 이번엔 날 이기겠다고 입 털길래 좀 힘들까 싶었더만……. 하, 괜히 걱정했잖아. 아주 형편없어. 진짜 실망이야.”
“큭……!”
블루벨은 이를 앙다물었다.
일부러 그녀의 속을 긁으려고 저러는 거라면, 메린은 도발과 농락의 천재라 할 수 있으리라.
약해진 줄 알았던 상대보다 훨씬 더 약하다는 것에 더해, 그 상대에게 멸시받는 것보다 더한 굴욕이 어디 있으랴?
“분하냐? 그럼 제대로 덤비던가. 옛날처럼 긴장 좀 해보자. 지금은 눈 감고도 이기겠어.”
“이게……!!”
눈을 부릅뜨며 다시금 튀어나가는 블루벨.
그런 그녀를 시큰둥한 눈길로 보면서 자세를 잡는 메린.
또 다시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수차례 울리고, 검격이 여러 번 허공을 긋는다.
매섭게 날아드는 검을 발차기로 쳐내고, 폼멜을 내려치는 손목을 꺾는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목을 휘감아서 조인다.
그리고 목이 조여지는 그대로 몸을 날려서 깔아뭉개려 든다.
그렇게 주위에 흙먼지를 마구 날리면서 격돌한 결과, 오로지 블루벨만이 바닥에 철퍼덕 뻗어 있게 되었다.
“하아… 하아… 하아……!”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호흡을 가다듬기도 어려워, 하늘을 마주하며 드러누운 채 가쁜 숨을 쉬는 블루벨.
메린은 검을 거두고,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존나 약해.”
“으으으으……!!”
“백 년 넘게 수련한 거 다 날렸네. 백 년쯤 다시 하고 와라. 뭐, 나는 이미 죽고 없겠지만.”
“아아아! 분해애애애!”
떼를 쓰듯이 발을 바동거리면서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른 후, 블루벨은 비실비실 몸을 일으키고서 메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뚱하게 쳐다보는 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일으켜줘야지.”
“내가 왜? 혼자 일어날 수 있잖아.”
“그래도 이럴 땐 일으켜주는 게 예의거든? 일으켜줘. 안 그러면 계속 여기 드러누워 있을 거야!”
“그러든가. 저 숲 쪽으로 던져버리면 그만이지.”
“너 진짜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니?!”
메린은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기다가, 문득 집 쪽을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마 아이들의 눈치를 본 것이리라.
그런 뒤, 흙먼지를 털어주겠다면서 상당히 힘찬 손길로 그녀를 이곳저곳 퍽퍽 때리고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됐지? 이제 조금 있으면 아주머니들 올 테니 그만 가라.”
“숨 좀 돌리고.”
“근처 숲에서 돌리면 되잖아. 얼른 가.”
“으으……! 그래, 알았어. 간다, 가!”
분한 마음에 서운함을 더해서 빽 소리지른 다음, 블루벨은 집 안을 쿵쿵 울리면서 자신이 묵은 방으로 갔다.
그리고 배낭을 챙기고서 또 집 안을 쿵쿵 울리면서 바깥으로 나와, 배웅은 하려는지 함께 따라 나온 메린과 아이들에게 말했다.
“하룻밤 잘 자고 잘 먹은 건 고마운데, 신나게 구른 건 하나도 안 고마워! 그러니 고맙다고 안 할 거야!”
“어, 그래. 별로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으으으……!”
‘그래도 한때는 같이 여행 다닌 사이인데!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섭섭한 마음에 입을 비죽 내밀면서 작별 인사를 하려던 순간, 메린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저러나 하고 고개를 갸웃하기가 무섭게 다시 문 밖으로 나온 메린.
이어서 그녀에게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뭐야?”
“쿠키. 가다가 먹어.”
“어? 어…… 응, 고마워.”
‘꼭 이런다니까.’
서러워질 정도로 매몰차게 굴면서, 또 이렇게 자그마한 친절을 베푼다.
채찍과 당근이라고 하기엔 채찍이 너무나도 강한데도, 그만큼 당근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결국 조련당하는 느낌이다.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정말 영악하기 그지없다.
블루벨은 속으로 투덜투덜거리면서 꾸러미를 받아 들고, 메린과 아이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집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없는 카엘과, 지금 바로 앞에 선 메린이 8년간 꾸며온 보금자리.
이곳을 지키기 위해 둘 다 나름 고생하고 있겠지.
특히 메린은 자신의 본래 성질과 버릇을 죽이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그래야 카엘과 아이들이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생각보다 더 뜻밖이었을까?
블루벨은 머릿속에 조용히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메린, 너 전엔 하기 싫은 건 절대 안 하려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은 꾹 참으면서 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뭐니? 검까지 놓고서.”
“엉? 뭐, 왜 이렇게 사냐고?”
“……좀 이상하게 들리긴 한데 얼추 비슷해.”
메린은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글쎄? 난 그냥 카엘이랑, 또 애들이랑 같이 살고 싶을 뿐인데? 그러려면 애들 잘 돌봐야 하니까 집에 있는 거고, 애들이 사고 쳐도 잘 해결되려면 다른 사람들이랑 잘 지내야 하니까 부녀회 하는 거야. 그만큼 검에는 소홀해졌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몸뚱이는 하나밖에 없으니 못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덤덤히 말하는 메린에게, 블루벨은 재차 물음을 던졌다.
“그걸로 정말 만족해? 너 검 잡고 싸우는 거 좋아하잖아.”
“응.”
메린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아서 지금도 계속 검을 잡고 있지만, 아예 놓게 되더라도 상관없었어. 카엘과 애들이랑 같이 사는 게 더 좋으니까.”
“……그래? 그럼 이런 변두리에 살기로 한 건, 네 뜻이니?”
“아니, 카엘. 그 녀석은 뭐 읽고 적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서 좀더 큰 마을이 낫지 않겠냐고 했는데, 잘못하면 눈에 띄니까 외진 곳이 낫다고 하면서 여기 왔어. 뭐, 성에서 일하게 된 덕에 종이랑 책은 계속 보고 있으니 다행이지.”
“그렇구나.”
블루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린이 검을 포기할 생각을 했듯, 카엘 또한 무언가를 내버릴 각오를 하고서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었다.
아마 이유를 묻는다면 메린과 같은 대답을 하겠지.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할 게 분명하다.
‘다 가질 수는 없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새기면서,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자식들의 어머니가 된 옛 동료와, 그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덕분에 결심이 섰어.”
“뭔 결심?”
“내 가족 일.”
“아~ 조질 거야?”
“아니, 담판 지을 거야.”
결과에 따라서는 물리적인 행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나,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러니 괜히 말했다가 이루어지지 않게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대신, 그녀는 밝게 웃으며 확정된 약속을 입에 올렸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사흘 뒤에 또 올게. 신년축제 때에 봐.”
“그래……. 또 보는구나…….”
“노골적으로 시무룩해하지 말아줄래?! 자꾸 그러면 계속 찾아와버린다!”
“그러든가.”
“……엥?”
뜻밖의 말에 순간 멍해진 블루벨을 향해, 메린은 무척 덤덤하게 대꾸했다.
“맘대로 하라고. 내가 오지 말란다고 안 올 성격이야? 아니잖아. 그러니 좋을 대로 해.”
“어…… 진짜? 나 막 연락없이 찾아오고 그런다?”
“상관없어. 위슨도 지 맘대로 오는데, 뭐. 근데 있잖아, 내가 무조건 받아주겠다는 건 아니다? 어제처럼 밤에 오면, 기분에 따라서 파묻어버리는 수가 있어.”
“히익.”
아무래도 간밤엔 메린의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은 때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카엘이 집을 비우고 있어서 무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블루벨은 일순 메린의 눈이 번뜩인 것 같은 착각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나, 낮에는 괜찮다는 거지? 나, 나도 눈치는 있으니까 낮에 찾아와줄게.
그럼…… 이만 갈게. 또 봐.”
“그래. 잘 가. 가서 다 조져버려.”
“담판 짓는다니까! 너희도 잘 있어. 엄마아빠 말씀 잘 들으렴. 다음엔 언니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언니’에 유독 강조하면서 인사하는 블루벨.
아이들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환히 웃었다.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 또 봬요.”
“블할, 잘 가~”
“바이바이, 블할~”
“할머니가 아니라 언니! 그리고 너희 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꺄하핫!”
머리를 감싸 쥐면서 성질을 부려봤자 꺅꺅거리면서 더 좋아할 뿐,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블루벨은 그에 비통함을 느끼면서 다시금 손을 흔들고, 가볍게 땅을 차고서 뛰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쓸면서 지나가고, 주위 풍경이 그녀의 옆을 급류처럼 빠르게 지나치며 흘러간다.
정처없이 달렸던 어제와 달리, 그녀의 두 발은 한곳을 향해 확고히 내딛고 있다.
여름의 녹음을 담은 두 녹색 눈이 바라보는 건, 지평선에 자리한 커다란 산맥.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그녀의 불안정한 보금자리이다.
그녀의 위치가 애매했던 탓에, 여러모로 불안하게 휘청거리던 둥지.
비로소 그 흔들림을 바로잡을 때가 온 것이다.
‘다 붙잡을 수는 없어.’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
그 사실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블루벨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