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2화 〉 외전 12) 닻을 내릴 곳 (Side : Bluebell) (7)
* * *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면서 열심히 달린 덕에, 블루벨은 저녁 어스름을 헤치며 고향 숲에 들어설 수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왕이 집무를 마친 뒤일 터이나, 골든로드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을 싫어하니, 술집에 갔거나 어디 파티에 참석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냥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왕이 아직 집무를 보고 있다면, 그의 시중을 드는 사람도 아직 곁에 남아있을 터.
그리고 아이들의 보호자가 집에 돌아가지 못했으니, 그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도 아직 집에 있겠지.
‘잘됐네.’
블루벨은 여기서 서류 하나를 작성한 다음, 그걸 들고 집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미 다 정해져 있는 양식을 채우기만 하면 되는데다, 지금은 일부만 작성하면 되니 오 분 안에 준비를 마칠 수 있을 터.
그러니오늘밤, 그녀의 가족이 맞닥뜨린 두 문제를 한 번에 치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골든로드에게 자잘한 잔소리와 타박을 듣지 않아도 되는 건 덤이다.
‘시작이 좋은데?’
블루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그곳을 떠나, 블루스타와 아이들이 있는 집 근처에 숨어서 때를 살폈다.
잠시 후, 일터에서 돌아온 블루스타가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자신을 보며 눈을 크게 뜨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블루스타. 오늘도 수고가 많네요.”
“블루벨……!”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반색이 퍼지다가, 이내 씁쓸한 기운이 섞이는 게 보인다.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게 기쁘면서도, 그녀를 괴롭히는 이 숲에 또 돌아와버린 게 안타까운 것이리라.
그래도 주저없이 그녀와 손을 맞잡는 걸 보면,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게 싫지는 않은 듯했다.
“……다행이다. 별일 없어 보이는구나.”
“걱정했어요?”
“당연히 하지! 네가 그리 갑작스럽게, 그것도 무척 상심한 채로 떠났지 않느냐!”
미간을 찌푸리며 강한 어조로 말하는 블루스타.
그러나 곧 작게 한숨을 쉰 후, 눈썹 끝을 내리면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널 찾으러 가려 했지만, 폐하께서 공연히 나서지 말라고 하시더구나. 그리고는 오늘 아침에야 네가 동쪽에 있다고 알려주셨지. 덕분에 어제는 한숨도 못 잤다.”
아무래도 일부러 말을 해주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짓는 블루스타의 눈 밑은 조금 검게 물들어 있다.
어쩐지 뺨도 조금 핼쑥해진 것 같았다.
그런 그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블루벨은 고소하다는 생각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으면 더 울적했을 것이다.
갑자기 뛰쳐나간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는 건,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아저씨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아셨나보네.’
옛 시대의 엘프인 골든로드는 짐승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혹시 그 능력으로 그녀의 소재를 파악한 걸까?
‘그럼 내가 메린과 대련한 것도 보신 건…… 설마, 일 보고 계실 시간인데 그건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야.’
만약 그녀가 메린에게 아주 처참하게 지는 걸 봤다면…… 지금쯤 종이에 쓸 문장이 아니라 그녀에게 쏟아부을 잔소리와 전투훈련 내용을 짜고 있으리라.
블루벨은 부디 왕이 자신의 무사와 소재만 확인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블루스타는 그녀의 손등을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쉰 후, 한결 편안해진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가 무사한 걸 내 눈으로 보니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구나. 자, 이만 들어가자. 아이들도 네가 돌아온 걸 보면 기뻐할 게다.”
‘그 여자가 구워 삶지 않았다면 그렇겠지.’
조금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걸 애써 달래며, 블루벨은 그가 문고리를 당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막 저녁식사를 마쳤는지 맏이가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처럼 약간 어두운 얼굴.
그러나 열린 문 앞에 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엄마!”
“응, 그래, 우리 귀염둥이. 엄마 왔어.”
블루벨은 바로 뛰어와준 아이를 품에 꼭 안고서 뺨에 입을 맞추었다.
딱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왠지 일 년간 헤어져 있다가 만난 것처럼 가슴이 찡하다.
더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더 감격스러운 것이리라.
‘역시 나도 엄마구나.’
아이와 떨어져서 사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자식을 위한 삶을 사는 어미인 것이다.
블루벨은 새삼 그 사실을 되새기며 맏이와 함께 집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아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둘째의 이마에도 키스한 후, 셋째를 안은 채 자신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는 도우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잘 있었어요, 메리 씨? 오늘도 고마워요. 수고 많았어요.”
“네…… 돌아오셨네요.”
“어머, 그럼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디를 가겠어요?”
“……”
메리는 무어라 대꾸할 말이 있는 듯한 분위기였으나, 아이들과 블루스타의 눈치를 보는 건지 그저 딱딱한 미소를 보내기만 했다.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는 뻔하지.’
그녀를 보자마자 표정이 구겨진 것에서, 메리는 그녀가 집에 돌아온 걸 기꺼워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방금 전에도 아마 ‘아이들을 사랑한다면서 집을 비우냐’고 따지고 싶었으리라.
어쩌면 블루스타와 아이들이 가엾다고, 자신이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디 두고 보자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얼굴엔 미소를 띤 채, 블루벨은 메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 아이를 달라는 의미이건만, 메리는 도통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수고했어요, 메리 씨.”
“………아, 네.”
그녀가 넌지시 말을 건넨 뒤에야 겨우 아이를 돌려주는 메리.
굉장히 내키지 않는다는 게 눈에 다 보였다.
그 태도에 속으로 헛웃음을 켜며, 블루벨은 떠나려는 메리를 불러 세우고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블루스타랑 같이 들어줬으면 하니, 앉아서 조금 기다려주세요. 아이들을 방에 데려다주고 올게요.”
“할 말…이요……? 어떤……?”
“조금 이따 직접 들으시죠. 블루스타, 같이 차라도 마시고 있지 그래요?”
“음? 그래, 그러마.”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 읽기라도 한 듯, 블루스타는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벨은 한손으로 셋째를 안고, 다른 손엔 둘째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맏이와 함께 천천히 방으로 향했다.
이내 각자의 잠자리에 아이들을 두자, 맏이가 침대에 앉은 채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엄마.”
“응?”
그리고는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하더니, 그녀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요.”
“응? 생일?”
“응. 어제 엄마 생일이었잖아. 그래서 아빠랑 같이 케이크랑 선물이랑 준비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가버려서 깜짝 놀랐어.”
“……그랬구나.”
잊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바깥 세상과 숲을 오가며 바삐 지냈으니까.
‘그래서 어제 놀라면서 나한테‘오늘’ 운운했던 거구나.’
자주자주 집을 비우고 툭하면 아빠와 말다툼을 하는 못난 엄마이건만, 아이는 그래도 엄마라고 생일을 축하해주려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떠난다고 작별 인사를 해버렸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블루벨은 미안함에 목이 메여오는 걸 느끼며 아이를 깊이 껴안았다.
“엄마는 생일인 거 깜빡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잊어버린 걸 기억해줘서 고마워. 갑자기 가버려서 정말 미안해.”
“으응, 엄마 바쁘잖아. 괜찮아.”
“응~ 괜차나~”
해맑게 웃으며 끼어드는 둘째.
블루벨이 깊은 미소와 함께 두 아이를 다정히 쓰다듬자, 맏이가 환히 웃으면서 재차 말을 꺼냈다.
“엄마가 다시 왔으니까 됐어. 이제 안 온다는 말, 안 믿길 잘했어.”
“뭐?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메리 아줌마.”
“……”
아무래도 메리가 아이에게 개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게 완전히 메리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제는 그녀 스스로 이 집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여기고서 뛰쳐나갔으니, 그 도둑고양이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고 우쭐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빌미를 주지 않을 참이다.
적어도 아이들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조금 뒤에 있을 담판이 어떻게 끝나건, ‘어머니’의 자리는 확고히 지킬 수 있으리라.
“걱정 마. 엄마는 너희들 안 떠나.”
“응. 알아.”
“후후, 이따 책 읽어줄게.”
“응!”
블루벨은 해맑게 웃는 맏이와,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다른 두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다시 거실 겸 부엌으로 간 블루벨.
그녀는 두남녀 엘프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각각 찻잔을 앞에 두고서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약간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블루스타와,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메리.
블루벨은 차를 마시겠냐는 메리의 권유를 거절한 후, 품속에 고이 두었던 서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리고 종이의 맨 위쪽, 라 적힌 문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두 분 다 이 글자, 읽을 줄 알죠? 여기 아래에 누구 이름이 서명되어 있는지도 보이고?”
“……블루벨.”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말할게요.”
블루벨은 그가 말을 꺼내려는 걸 막아버린 다음, 자신이 서명한 곳의 옆 자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서명해요, 블루스타. 그러면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되어서 독립할 때까지 쭉 옆에 있으면서 당신과 함께 살게요.”
“그 말은, 이 숲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냐?”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의 표정이 일변했다.
블루스타는 탐탁지 않다는 듯이 표정을 찡그리고, 메리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야 다르겠지만, 어쨌든 둘 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블루스타는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대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블루벨, 전에도 말했지만 굳이 이럴 필요는 없다.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라 해서, 아이들이 너와 나의 자식이 아니게 되진 않아.”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요?”
“뭐?”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내가 이 상황을 못 견디고 떠났으면 하는 게 아니고?”
“무슨 뜻이냐?”
“몰라서 묻는 건가요?”
“그래,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어. 그러니 알려다오.”
연이어 모른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약간 험악해져 있다.
희미한 분노까지 서려 있는 그의 두 눈에서, 그가 모른다는 말과 달리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애초에 블루벨 자신이 어제 집을 떠나면서 두 사람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블루스타는그녀보다 더 귀가 좋으니, 분명 그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들었으리라.
그러니 어차피 서로 다 아는 거, 전부 다 속 시원히 털어버리는 게 나을 듯했다.
블루벨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요? 여기 계신 우리 고마운 보모, 메리골드 씨가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거죠. 덤으로 우리 귀여운 히비스, 데이지, 프리지아도요. 특히 막내인 프리지아의 엄마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 같던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이냐……?”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당신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요, 메리 씨?”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던졌으나, 메리는 그녀의 눈을 피할 뿐 아무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부정하지도 않고 그냥 시선을 피하다니, 그건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반면, 블루스타는 상당히 혼란스럽다는 듯이 눈동자를 떨며 얼굴을 쓸었다.
“블루벨, 대체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메리골드는 우리가 없는 대신 아이들을 돌보아주고 계신 고마우신 분이야. 프리지아를 아끼시는 것도, 그 아이의 유모이기도 하시니 당연한 것 아니냐.”
“당신에게 메리 씨는 그저 보모일 뿐이라는 건가요?”
“달리 무엇이 있겠느냐!”
쿵.
주먹으로 약간 세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소리쳤다.
“네가 무얼 떠올렸는지는 듣고 싶지 않아. 그 대신 하나 물으마. 블루벨, 정녕 내 마음을 의심한 것이냐?”
“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건 말이죠. 당신이 메리 씨의 헌신을 너무나도 고맙게 여기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셔츠를 말끔히 다려주고, 당신과 아이들의 옷을 손수 말끔히 빨고, 심지어 맘대로 테이블 보와 커튼을 바꿔도 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블루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그에게 연이어서 말했다.
“나도 하나 물을게요, 블루스타. 그저께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밤새 뭔 이야기를 했냐고요.”
“……너에게 줄 선물을 논의했다. 어제는 네 생일이었잖니.”
말다툼으로 토라진 블루벨의 마음도 달래줄 만한 좋은 선물이 없을지, 같은 여자인 메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연락했다.
메리는 달리 가족이 없이 혼자 살고 있는데다 지금 세 아이의 보모로 일하고 있으니, 밤에 연락하더라도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술이 들어간 탓에 하소연도 좀 해버렸지만, 그 외엔 아무 일도 없었어. 맹세하마.”
“며칠 잠자리를 가지지 않은 남자가 여자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걸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요?”
“믿기지 않느냐? 허나 그게 사실이고 진실이야. ……블루벨, 나는 네가 숲 바깥에 애인이 하나도 없다고 한 것을 아주 굳게 믿고 있다는 걸 기억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니, 없으니까 없다고 한 거잖아요. 당연히 믿어야죠! 그거랑 이게 같아요?”
“아주 똑같지.”
블루스타는 그녀의 말을 일축하고, 깍지 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팔꿈치를 괴었다.
그리고 그 자세로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와 같이 자유분방하면서 사랑스러운 여자가 홀로 다니는데, 어느 사내가 가만 내버려두겠느냐? 특히 내가 벌을 주겠다고 했으니, 네가 즐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내, 내가 벌받을 거란 소리에 더 즐길 줄 알았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대체 이 남자는 자신을 뭘로 보고 있는 것인가?
묶이거나 그런 것에 조금 많이 두근거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에게 벌을 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른 남자에게 안길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나랑 자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지만!’
몇몇 인간이 그녀가 엘프라는 것에 호기심을 가진 적은 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가 바닥에 발을 딛고 꼿꼿이 서면 하나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애인을 만들 생각 따위 추호도 없긴 하나, 애초에 생길 일도 없던 것이었다.
‘하, 너무 완벽한 것도 문제라니까. 다들 손 대기를 주저하잖아.’
그런 그녀에게 손을 대어, 마침내 아이의 어머니가 되게 한 블루스타는 정말 여러모로 대담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당신에게 메리 씨는 그냥 보모일 뿐이고, 여전히 나만 사랑한다? 그런 건가요?”
“그래. 전에 말했을 게다, 블루벨. 나는 네게 내 심장을 전부 바쳤어. 결코 다른 마음을 품는 일은 없다.”
단호히 대답하는 블루스타.
그런 그의 옆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군 메리를 힐끗 본 후, 블루벨은 다시금 서류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여기 서명하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네요. 안 그래요?”
“……블루벨,”
“서명 안 하면,”
그녀는 목에 힘을 주어 그의 말을 또 잘라버린 다음, 목소리를 낮추고서 말을 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여길 떠날 거예요.”
“뭐……?”
“아이들이랑 같이, 당신과 골든 아저씨가 있는 이 숲을 완전히 떠나버릴 거라고요.”
“아니, 아이들은……!”
“왜요? 내 자식이잖아요. 내 배 아파서 낳은 내 자식들. 죽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게 낳았고, 집에 제대로 못 있는 나를 엄마라고 해주는 아이들! 절대 혼자 안 가……!”
원하는 걸 다 가지고서 살 수는 없다.
카엘과 메린이 그랬듯이, 보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에게 괴로움을 주는 이 숲을 떠나기를 바라는 남자.
똑같이 그녀를 무척 사랑하면서, ‘어머니’라는 역할에 꽁꽁 묶어주려는 아이들.
고향인 이 숲은 물론이고, 대륙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그녀에겐 자신을 붙잡아줄 존재가 필요하다.
꽃은 한 자리에 머물러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온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발을 붙이지 못한 꽃은 그저 바람에 나부끼는 풀잎이나 다름없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러니 둘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니 결정해요. 나랑 애들을 잡을지, 아니면 다 내버리고 혼자 자유롭게 살지.”
“……”
“미리 말하는 건데, 날 곁에 두기로 한다면 남편 노릇 제대로 해야 할 거예요! 내가 한눈 팔지 않게!”
그렇게 단단히 이르면서, 블루벨은 망연히 자신을 보는 블루스타를 향해 서류를 밀었다.
그가 무엇을 택하건, 그녀는 사흘 뒤에 친구들을 만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 통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그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분통을 터뜨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자신이 줄곧 찾아 헤매던 ‘머무를 곳’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외엔 손에 넣으면 기쁘지만 놓치면 아쉬울 뿐인, 그녀의 존재의의와는 상관없는 부가요소이다.
그렇기에 이젠 눈에 띄게 침울해하는 메리와 달리, 블루벨은 무척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고개를 끄덕여줬으면 좋겠는데.’
블루스타는 지성 없이 태어난 그녀가 온전한 한 사람이 되도록 돌보아준 아버지이자,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남자이다.
어찌 그의 곁에 있길 바라지 않을 수 있으랴?
“……”
그렇게 또 한차례 침묵이 흘렀다.
긴장까지 흐르기 시작한 고요 속에서, 블루스타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윽고 들려온 그의 대답에, 블루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처없이 떠다니기만 하던 배가, 비로소 닻을 내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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