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화 〉 외전 13) 별을 맞이할 때까지 (Side : Elia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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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냉기를 보이던 하얀 입김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새신부의 드레스처럼 눈부시게 하얀 대지가 차츰 연한 녹색으로 물들어간다.
차디찬 눈을 덮고 잠들어 있던 잿빛 나무들이 깨어나, 녹색 눈을 하나 둘 피우며 기지개를 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엘리아스는, 이내 두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봄이 찾아오는 시기답게, 지난주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밝아지고 있는 게 보인다.
하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하는 은빛 별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듯 이리저리 훑던 그의 눈이, 마침내 한 지점에 우뚝 멈추었다.
시선 끝에 있는 건, 여느 별과 같은 은빛 반짝임.
그러나 주변보다 조금 더 선명히 빛나고 있는 별이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북쪽으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모습에, 엘리아스는 미심쩍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직도 저기 있네.’
생각날 때마다 간간이 확인한지 벌써 10년째이건만, 반 걸음만큼도 더 가까워지지 않고 있다.
별을 처음 찾았을 때에 비하면 거의 다 온 수준이긴 하나, 더는 여기서 움직이기 싫다는 듯이, 별…… 수호성은 10년 전부터 계절에 상관없이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접착제로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보는 것도 아닌데.’
한 달에 한 번 관찰하고 있으니 별이 움직이는 걸 못 알아챌 가능성은 적다.
겨울이 슬슬 물러가면서, 밤하늘의 별자리들이 새로 그려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니까.
오직 그의 수호성 하나만, 계절이 바뀌건 말건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다.
북극성도 아닌데.
통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수호성은 사람의 운명과 함께하는 별이라고 전해지는 만큼 어떤 특별한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였다면, 저 별이 제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것에서 무언가 다른 의미를 읽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지식을 약간 이어받았을 뿐인 그는, 그저 기이한 현상이라는 것 외엔 달리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뭐, 어쨌든 오늘 눈이 오진 않을 거 같군.’
어깨를 으쓱이며 날씨를 읽은 후, 엘리아스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나무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흠집이 많이 간 물항아리의 물을 낡은 솥에 붓는다.
끼익거리는 화덕에 솥을 걸고, 그 아래에 가득 쌓인 숯과 재를 대강 덜어내고서 불을 피운다.
잠시 후, 한두 가지 야채와 밀가루를 넣어 만든 수프를 이 빠진 그릇에 덜어, 빵 한 덩어리와 함께 뱃속에 넣는다.
그렇게 간단히 아침을 때운 다음, 엘리아스는 의자에 앉은 채 공연히 집을 둘러보았다.
바닥이 자꾸 삐걱거리는 것도 그렇고, 벽 여기저기도 낡아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주인 잃은 상태였던 이 집을 고쳐서 산 지 30년이니, 실상은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여기 쌓여 있을 터.
게다가 혼자 지낸다고 보수관리를 소홀히 하고 있는 만큼, 분명 실제 시간보다 더 빠르게 낡아가고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10년이 지났구나.’
별을 보았을 때도 막연히 되새겼듯, 그가 이 집에 적막과 함께 지낸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아들이 독립해서 가정을 꾸린지 10년이 지났으며, 그가 자신의 유일한 사랑을 잃어버린 지 12년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 놋지빌에 정착한지 30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30년……’
거의 반평생을 여기서 산 셈이다.
그 사실이 왠지 새삼스러운 걸까?
엘리아스는 느릿하게 올라온 충동을 따라,침실로 가서 화장대 서랍을 열고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브로치를 집어 손바닥에 올린 후, 다른 손으로 그 표면을 조심스레 쓸었다.
정중앙에 박힌 금빛 호박 보석은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으나, 그 주변을 꾸미는 코스모스 문양은 약간 닳아져 있다.
그래도 그가 가장 중히 여기는 부분,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닳거나 녹슬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조금 가늘어진 눈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보고, 살며시 엄지로 쓸어내린다.
마지막 알파벳까지 매만진 후, 엘리아스는 나지막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피아.”
빈 껍데기가 됐던 자신을 다시 살게 해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여인.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보석을 바라보자, 그 속에서 머나먼 과거가 떠오르는 듯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대륙의 동서를 가르는 커다란 산맥에서 파생된 자그마한 줄기 위에 한 성읍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주가 왕을 내려다보아도 불경죄에 걸리지 않는 걸로 유명한 이 산성(山?)의 이름은 아이레.
이제는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엔 어렴풋하게나마 아직 살아있었다.
아마 일개 학자 가문이, 영주보다 더 높은 곳에 탑을 세워서 살고 있다는 게 퍽 인상적이었던 것이리라.
어째서 거의 산꼭대기나 다름없는 곳에 탑을 세우고, 가문 전체가 거기 모여 살고 있는가?
혹자는 그 이유가 자신들의 연구성과와 업적을 지키기 위해서일 거라 했다.
또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금지된 연구를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진지하고 익살스러운 추측을 내놓았지만,그 중에 들어맞는 건 별로 없었다.
특히 왕과 귀족들을 내려다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냐는 건 완전히 어불성설이었다.
탑에 사는 학자들의 눈은 항상 지상이 아닌 하늘, 그것도 주로 밤하늘에 머물렀으니까.
이들이 높다란 산에 모여 사는 건, 밤하늘에 한가득 빛나고 있는 별을 맨눈으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모두 천문학자였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등, 대부분의 학문은 세상의 구조를 파헤쳐 사회를 더욱 견고히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은 이들과는약간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세상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게 아닌, 그를 움직이는 어떤 흐름을 파악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즉, 하늘과 별을 연구하는 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려 했다.
구름의 모양, 별자리의 위치, 해와 달 주변에 안개 같은 게 끼는 현상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한 다음, 당시에 일어난 사건과 대조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무수한 시간을 들여서 연구한 결과, 탑의 학자들은 단순히 날씨를 예측하는 것에서 시작해, 한 사람의 삶, 더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운명까지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학자보다는 점술사로 생각하곤 했는데, 이따금 별을 통해 점을 치기도 했으니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특이한 학문을 한데 모여서 연구하는 기이한 가문의 이름은 에스트렐.
먼 옛날에 사라진 언어로 ‘별’이라는 말에서 성씨를 따온 것처럼, 아이레에 자리하기 전부터 대대로 별을 관찰하고 그 움직임을 읽는 일족이었다.
이들이 세운 탑…… 천문탑은 이들 에스트렐 가문의 연구소인 동시에 거주 구역이었기에, 선조와 같은 길을 걷기로 한 에스트렐의 후손은 모두 이 탑에서 태어났다.
엘리아스 역시 그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는 유소년기를 모두 탑과 그 주변의 고지대에서 보내야 했다.
보통은 그대로 탑에서 별을 보며 일생을 마치게 될 터.
그러나 엘리아스는 탑 아래의 사람들 틈에 섞이기를 원했다.
일평생 하늘과 종이만 들여다보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되었을 때, 엘리아스는 아버지에게 탑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나가서 뭐 하려고? 사냥꾼? 하긴, 넌 항상 책보단 돌팔매질로 산토끼를 잡는 걸 더 좋아하긴 했지.”
“돌팔매질이 아니라 슬링이에요, 아버지. 학자이시잖아요. 제대로 된 용어를 쓰셔야죠.”
“그게 그거 아니냐? 돌멩이를 날리는 게 네 팔이 아니라 끈이라는 것만 다르지.”
그렇게 따지면 슬링과 활도 똑같아진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사냥꾼이 될 생각은 없어요.”
“그럼?”
“위병이 되려고요.”
그 말에, 그의 아버지가 눈을 질끈 감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리스. 아들아, 사내 자식이 꿈을 그리 작게 꾸어서 되겠느냐? 위병이라니, 기사를 목표로 해야지!”
“그건 꿈이 아니라 망상 아닌가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검을 배운 적도 없는 그가 어떻게 기사가 되랴?
성에 소속되어 영주의 사병이 되는 게 최선이리라.
여하튼 엘리아스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탑을 나와서 마을로 내려갔고, 예상과 달리 위병이 아니라 영주의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가 위병소에서 이름을 대자, 구인담당이 그를 병영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으나, 아무래도 이미 성에 들어가 있는 일족이 손을 쓴 듯했다.
그렇게 그는 별점 좀 쳐달라는 동기와 선배들의 조롱 섞인 부탁을 적당히 무시하며, 정식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위병보다 좀더 좋은 급료를 받는 대신에 몇 배는 더 고된 나날을 보내게 됐으나, 그래도 꽤 보람 있는 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탑에 있을 때보다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됐을 뿐 아니라, 의외의 적성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괜히 산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던 게 아닌지, 엘리아스는 뜻밖에도 검과 싸움에 소질을 보였다.
심지어 단 두세 달 만에, 따로 검법을 배운 기사의 자제를 대련에서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훈련병과 달리 글을 읽고 쓸 수 있는데다, 집에 쌓여 있던 책들 덕에 여러모로 아는 게 많았으므로, 엘리아스는 금세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로 주목받게 되었다.
영주를 섬기는 기사 중 하나가 그를 종자로 삼아서, 차후엔 정말로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는 그저 망상으로 치부했던 그 미래를, 잘하면 실현될지도 모르는 꿈으로 품기 시작할 만큼 길이 잘 풀려가는 듯했다.
아니, 그 꿈은 필히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일족의 가주가 전한 불길한 별에 대한 이야기를 영주가 제대로 들었다면, 그래서 이후에 아이레를 덮친 전화(戰火)를 피했더라면, 엘리아스는 기사 서임을 받은 최초의 에스트렐이 되었겠지.
설령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일개 소대장이나 부사관에 그치더라도 그는 충분히 만족했으리라.
탑 바깥에서 사는 것.
그가 유일하게 바란 소망이 이미 훌륭히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니 이웃 영주의 습격에 성이 무너지고, 아이레의 영주가 가신들과 함께 투항했어도 그다지 좌절하진 않았다.
엘리아스가 아이레의 영주를 섬겼듯, 아이레의 영주 또한 자신이 무릎을 꿇은 자의 신하가 됐을 뿐.
그를 포함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레에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괴된성과 마을을 복구하면서전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설욕할 기회가 찾아올 터.
엘리아스 역시 친구들을 잃었기에 기꺼이 복수의 칼날을 갈아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스트렐의 가주가 본 불길함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한때 주인이었던 이전 영주가, 자신이 불행을 당한 책임을 에스트렐 가문에게 떠넘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네놈들이 하늘의 뜻을 읽어 창조주를 분노케 했기 때문이렷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이런 환란을 당하겠느냐!”
하늘을 읽는다고 어찌 창조주가 분노하랴?
구름을 뭉쳐서 파란 하늘에 띄운 것도, 검푸른 밤하늘에 별을 뿌리고 어떠한 의도를 담아서 반짝이게 한 것도 전부 창조주이니까.
오히려 읽지 않으면 실례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하늘은 무척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 영주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몰락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란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자 했다.
“그래, 이 모든 건 네놈들 탓이다! 네놈들의 요사스러운 말에 미혹되어서, 창조주께서 나를 벌한 것이야……! 사술에 의지한 것을 책하신 것이 틀림없도다!”
먼저 물음을 던진 건 그이다.
그간 날씨 예측을 부탁하는 건 물론이고, 축제 날짜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길흉을 점치길 바랐으면서 그건 전부 다 잊어버린 듯했다.
고난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웃어넘긴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건만.
엘리아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늘이 보여주는 뜻을 읽었을 뿐인 자신의 일족이, 어째서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에스트렐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창조주께 그 목을 바쳐 속죄할 것이다!”
체포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엘리아스를 비롯한 에스트렐 가문의 일원들이 곧바로 둘러싸였다.
그의 장래가 기대된다며 웃던 기사도, 어제까지 동고동락한 다른 병사들도 모두 그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게 아닌가!
자연히 한 자리에 모인 에스트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검을 뽑아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엘리아스 역시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채 소리쳤다.
“잠깐만요!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영주님!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꼴 보기 싫으시다면 추방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닥쳐라! 네놈들이 또 다른 곳에서 사술을 펼치도록 놓아둔다면, 창조주께서 내게 더 벌을 내리실 터……!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그 죄악을 전부 끊어버리겠다!”
“영주님, 제발……!!”
“다들 무엇 하느냐! 사악한 에스트렐 놈들을 전부 잡아라! 저항하는 놈은 모두 죽여라!”
철걱, 철걱.
살의가 담긴 검들이 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엘리아스를 좋게 보던 기사는, 내키지 않다는 게 역력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미안하네. 영주님의 명이니 어쩔 수 없어. 자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니 부디 원망마시게.”
“윽……!”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온다.
무척이나 잘 아는 얼굴들이, 친밀하게 대해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살려면, 그들을 베어야 한다.
이곳을 당장 빠져나가지 않으면,
아버지와 가족들이 위험해진다!
“으으… 끄으으으으!!”
“쳐라아아!!”
이를 악물며 팔을 휘두르는 엘리아스.
순식간에 격전이 벌어지며, 방 안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