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5화 〉 외전 13) 별을 맞이할 때까지 (Side : Elias) (3)
* * *
무엇이 그의 의식을 끌어올렸는지는 모른다.
아니, 그전에 언제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그는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감각이 돌아온 걸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추위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쁜 숨을 쉬면서 으스스 몸을 떨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차가웠다.
엘리아스는 가래 낀 기침을 하면서 손발을 움직여보았다.
‘뻣뻣해.’
아무래도 이 딱딱한 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있었던 건지,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져 있다.
‘기억이 안 나……’
멍하니 생각하며, 엘리아스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악.”
……그러다 무언가에 머리를 쿵 부딪쳐버렸다.
천천히 일어나다가 생긴 사고라, 아픈 것보다는 놀란 게 더 컸다.
망연히 고개를 들자, 아무리 봐도 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기둥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눈도 멀쩡하군.’
좋은 소식에도 그리 들뜨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다.
엘리아스는 고개를 숙인 채 철퍼덕 주저앉아, 긴 숨을 내쉬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런 뒤, 조금 맑아진 눈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깜깜한 걸 보니 밤이다.
그래도 주위 풍경이 어느 정도 맑게 보이는 걸 보니, 하늘이 아주 창창히 개어 있는 듯했다.
그 다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흙?’
머리 위에 있는 나무의 바깥 양쪽에 흙이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이었다.
꼭 흘러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르르 무너져내린 것처럼.
“아.”
불현듯 귀가 지잉 울린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딘가 가까이에서, 칼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 들었다. 질리도록 들었다.
앞으로도 평생 들을 생각이었으나,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을 들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버리고, 비가 퍼붓고, 달리고 또 달려서 심장이 터지도록 뛰고, 누군가가 죽는 것을 들었다.
“하……!”
절친한 사람들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 그들의 입과 목이 피를 뿜는 것, 방금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화살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전부 듣고,
전부 본 것이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으… 우윽……!!”
일순 뒤집어진 속을 한차례 게워내자, 오히려 머리가 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엘리아스는 격하게 기침하며, 나무 그늘에서 비틀비틀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 아래, 흘러내린 토사(??)로 엉망진창이 된 산이 보인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를 보자, 그의 두 팔로도 다 감쌀 수 없을 만큼 굵은 아름드리나무가 꺾여 있다.
주변에 바위가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산사태로 날아온 바위에 나무가 맞은 모양이다.
바위가 약했는지 나무가 의외로 튼실했는지, 아주 부러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럼 왜 기절한 거지?’
엘리아스는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에서 피가 나지도, 어지럼증도 없고 그냥 몸이 무겁기만 하니, 나무가 쓰러지면서 그의 머리를 때린 것은 아닐 터.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으리라.
‘그냥 탈진으로 뻗은 건가……?’
엘리아스의 눈이 다시 거의 부러지기 직전인 나무를 향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졌거나 나무가 완전히 뚝 부러졌다면 그대로 곤죽이 되어버렸겠지.
설령 나무에 깔려서 죽지 않았더라도 산사태 때문에 생매장을 당했을 터.
나무가 완전히 부러지지 않고, 그게 일종의 지붕 역할을 해준 덕에 그는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산사태가 적절히 멎은 덕분에 파묻히지 않고 나무 아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얼마만큼의 행운을 지불했을까?
어쩌면 나머지 삶은 불운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후.”
지금은 죽음을 비껴갈 수 있게 해준 행운의 무게를 곱씹을 때가 아니다.
엘리아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은 뒤, 한 번 더 긴 숨을 내쉬고서 산 위를 올려다보았다.
기억하던 것보다 꽤 짧아지고 볼품없어진 잿빛 탑을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가야 해.’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반나절…… 어쩌면 하루 이상이 지나버린 이상, 저 위에 누군가가 남아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으니까.
만약 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영주가 보낸 병사이다.
허리춤에 아직 검이 꽂혀 있긴 하나, 그를 제대로 휘두를 기운은 없다.
그러니 발각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거나 다름없건만.
그럼에도 그는 계속 올라갔다.
발길을 돌려서 마을…… 아니, 산 아래로 가야 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비틀비틀 흙더미를 밟으면서, 엘리아스는 조용히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려는 듯이.
‘번개가 쳤어.’
그리고 굉음과 함께 벼락이 되어 지상에 떨어졌다.
창조주의 징벌이라 부르기도 하는 벼락은, 지상에 떨어질 지점을 고른 뒤에 그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 떨어진다.
그렇기에 벼락을 맞고 싶지 않으면 높이 솟은 나무에서 떨어져야 한다.
만약 나무가 없는 평원이라면 납작 엎드려서 근처에 떨어지지 않기를 빌어야 한다.
수세대간 하늘을 본 에스트렐 일족은, 어째서 번개가 치는지는 몰라도 그게 어디에 떨어질지는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벼락을 피하는 방법을 알아낸 상태였다.
그 방법이 바로, 탑의 꼭대기 지붕에 화살촉처럼 뾰족한 쇳조각을 끼운 막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벼락이 막대에 떨어지게 만들어서 천문탑을 지킨 것이었다.
그러나 어제 번개가 칠 때, 엘리아스는 잿빛 돌덩이…… 탑의 벽이 깨지면서 생긴 파편이 굴러가는 걸 보았다.
실제로 탑이 짧아지기도 했으니, 분명 벼락을 맞은 것이리라.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탑이 벼락을 맞았다는 건, 지붕에 설치한 막대가 없어졌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 피뢰용 막대는 틈틈이 상태를 확인하고 보수하는 중요 물건이다.
게다가 꽤 튼튼한 소재로 만들어져 있으니, 비바람 정도에 부러지지도 않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 제 기능을 못하게 된 것인가?
일족을 잡으러 온 병사 중에 장사(??)가 있어서 대포알을 던져 맞추기라도 했단 말인가?
네놈들이 하늘의 뜻을 읽어 창조주를 분노케 했기 때문이렷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영주가 소리친 말이 맴돌았다.
정말로 창조주가 분노해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하늘을 읽고 그 뜻을 전하는 것은, 사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걸까?
엘리아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게 금지된 일이었을 리 없다.
정말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면, 에스트렐 일족은 진작에 교단에게 멸족되었겠지.
사제가 일족에게 축제일 날씨가 어떨지 묻거나, 아버지의 서재에 교단의 옛 글자로 적은 책이 꽂혀 있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대체……?’
어째서 피뢰용 막대가 무력화되었을까?
탑에 가면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며, 엘리아스는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탁 트이며,
검댕과 돌 조각, 그리고 시신이 한가득 널부러진 평지가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어스름 속, 지붕이 뜯겨져 나간 잿빛 돌탑이 서 있다.
그 주변은 물론이고, 물자운반용 길로 들어서는 입구 근방에도 시체가 내팽개쳐져 있다.
판금갑옷, 문장과 색이 들어간 서코트, 가죽을 덧댄 천갑옷, 숯덩이, 평범한 튜닉, 지금은 너무 이른 두툼한 외투, 형체가 남은 커다란 숯덩이……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두 발을 딛고 일어서 있는 건, 엘리아스 에스트렐 단 한 명뿐이었다.
“……”
터벅터벅,다시금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출입문이 완전히 부숴져 있는 탑으로 향한다.
그 주변에도 병사들이 죽어 있는 걸 보니, 학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버텼던 모양이다.
병사들이 해를 끼치러 온 것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엘리아스는 시체들을 지나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또 다른 시체들을 넘으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으로 가득하나, 그의 발은 굉장히 익숙하다는 듯이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었다.
벽과 바닥을 장식하는 건 검댕뿐, 어디에도 붉게 칠해져 있지 않다.
병사들이 문을 부수긴 했지만 안을 유린하진 못한 듯하다.
그런데도 다들 죽어 있으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히 생각하며 걷는 엘리아스.
이윽고 그의 발이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탑의 거주구역 중, 그의 직계가족에게 배정된 곳이다.
주저없이 문을 열자, 구멍이 뚫린 천장과 함께 거실이 나타났다.
기억을 더듬어 초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인 후, 엘리아스는 그 초를 촛대에 꽂아서 손에 들었다.
그런 뒤, 잔해를 지나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기 시작했다.
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재와 돌조각뿐, 사람은 그 비슷하게 생긴 것도 없다.
한창 난리가 났을 때, 다들 여기 ‘집’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리라.
서재 겸 연구실도 비어 있는 것에 한숨을 쉬며 떠나려던 찰나, 문득 그의 눈이 책상 위에 머물렀다.
종이 하나가 굉장히 다소곳하게 놓여 있는데, 일부러 가지런히 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왠지 모르게 신경이 쓰여, 엘리아스는 가만히 손을 뻗었다.
종이에는 익히 본 필체로 여러 글자들이 적혀 있다.
내용은 차치하고, 아버지가 쓴 게 틀림없었다.
“……”
시선을 움직여 글자가 시작되는 곳에 향했다.
<집 나간="" 못난="" 아들,="" 엘리아스에게="">.
무척 어이없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편지…….’
엘리아스는 촛대를 책상에 두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 편지가 너에게 전해질지는 모르나, 네 성격에 여길 안 오고 배길 수 없겠지.
그리고 여기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몰라 머리를 마구 긁적이고 있을 게 뻔해.
그러니 네가 머리카락을 잃지 않도록 아비로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우리가 아이레에 재앙이 닥칠 것을 본 건 알고 있겠지.
그리고 그대로 재앙…… 전쟁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게다.
하지만 아니야.
별이 알려준 재앙은 전쟁이 아니었어………>
그 대목을 읽는 엘리아스의 눈이 커졌다.
일족이 발견한 재앙이, 이 성에 닥친 전쟁이 아니었다니.
그는 눈두덩이를 문지르고서 다시 그 문구를 읽은 다음, 잘못 본 게 아니라는 사실에 헛웃음을 켜며 계속 읽어갔다.
영주가 투항한 날 밤에도 불길한 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족은 다같이 머리를 맞대어 찾아올 가능성이 높은 재앙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가주님의 수호성이 매우 가까이 왔다는 걸 발견했다.
편지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나 네 엄마를 포함한 모두가.>
‘수호성…….’
그것은 별을 따르는 에스트렐 일족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이 생명을 받아 태어나는 순간, 저 머나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하나 새겨진다.
위치는 그 사람의 정수리 바로 위.
일 년간 그 자리에서 반짝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다시 가까워지고, 맨 처음 자리……
즉, 그 사람의 정수리 위 하늘에서 다시 빛나는 날, 그는 숨을 거두게 된다.
이처럼 그 사람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기에, 일족은 그 별을 수호성이라 불렀다.
일족 외의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어린아이나 믿을 법한 이야기라며 코웃음 치겠지.
그러나 에스트렐 일족은 꽤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이유는 딱 하나.
수호성과 이어진 사람 외엔 그 별을 볼 수 없다는 특이성 때문이다.
아무리 ‘저기 있다’고 위치를 알려주고 아예 그림까지 그려도, 다른 사람의 눈엔 그저 무수히 뿌려져 있는 별들 중 하나로만 보인다.
그러나 별과 이어진 사람은, 설령 짙은 구름이 껴 있을지라도 자신의 별이 어디서 반짝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걸 매일매일 확인하지는 않기에, 대부분은 수호성이 돌아온 걸 모른 채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일단 알게 되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천문탑도, 일종의 신변 정리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중요 연구물들을 들려서 미드랜드의 지하 신전으로 보냈다.>
천문탑의 인구 대부분은 에스트렐 가문이었으나, 이따금 별에 매료되어 합류한 다른 성씨가 있었다.
아마 그들을 수도로 보낸 것이리라.
특히 지하 신전, 즉 교단으로 보냈다는 것에서, 일족이 교단과 척을 지고 있긴커녕 꽤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기회가 된다면 영주에게 이걸 들이밀어서 따지고 싶다.
엘리아스는 한숨 섞인 헛웃음을 켜며 계속 편지를 읽었다.
여하간 일족은 그렇게 대대로 다듬어온 유산을 피신시켰다. 그런 다음, 무엇이 일어날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비가 퍼붓는데도 병사들이 산을 올라오는 걸 보고, 그들이 자신들을 해치러 온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저 우리가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만 알지.
그런데도 순순히 따른다면, 그게 오히려 죄가 될 게다.
스스로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니까.
그래서 마침 비도 오겠다, 피뢰침을 치워버리기로 했다.
번개가 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뭐,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리고 그들의 바람은 훌륭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는 탑 주변에 쓰러진 시체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하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벼락 때문에 지붕이 뚫렸으니, 그 안으로 비가 쏟아져 들어갔겠지.
벼락은 물에 푹 젖은 것을 순식간에 익혀버리는 힘도 있으니, 탑과 주변의 시체들은 그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산사태가 일어난 것도 납득이 된다. 아마 탑의 파편이 비를 맞아 약해진 땅을 때렸던 것이리라.
즉, 일족은 길동무를 만들기로 했고, 하마터면 엘리아스도 그에 동참할 뻔했던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평처럼 속으로 툭 내뱉는 엘리아스. 그의 눈은 이제 편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고 있었다.
이걸 쓸 때엔 아직 병사들이 오지 않았는지,아버지는 상당히 안정된 필체로 편지를 마치고 있었다.
벼락을 맞든 병사들에게 끌려가든, 천문탑은 오늘로 폐점이다.
이후에 누가 하늘을 보건, 우리의 유산을 이어간다면 좋으련만.
여하간 리스, 영주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그런 건 너와 어울리지 않아.
아들아, 부디 네 자신의 삶을 계속 이어가거라.
나와 네 엄마가 너에게 바라는 건, 그것 하나밖에 없다.
아니, 하나 더 있군.
참한 아가씨를 만나서, 너를 쏙 빼닮은 자식을 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 고생을 알지.
기억해라, 리스.
선조들이 그랬듯, 우리의 영혼 역시 저 밤하늘에 섞여 있음을.
그러니 별이 떠 있는 한, 네가 어디에서 무얼 하건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아주 먼 훗날, 다시 별이 되어 만나자꾸나.
사랑한다, 엘리아스. 건강하렴.
그런 네가 자랑스러운 아버지, 에이브 에스트렐.
항상 너를 사랑하는 어머니, 루시 에스트렐.>
편지 읽기를 마친 후, 엘리아스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부모를 포함해 일족 전부가 동반자살을 했단 사실을 알았건만, 그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럴 법했다는 납득도, 미쳤다는 비난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이제 무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온 건 일족의 결말을 눈에 담기 위해서이다.
부모님과 형들이 이 안에 쓰러져 있는지 보고, 여기 없다면 설령 죽더라도 마을에 가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읽고 나니, 그럴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그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저 막연히, 절대로 찾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 뿐이었다.
엘리아스는 편지를 품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촛대를 든 채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통해, 갈 수 있는 만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윽고 벼락에 부숴지고 무너져, 천장이 없어진 층에 다다랐다.
본래보다 두세 층 정도 낮아진 꼭대기이나 여전히 꽤 높다.
창문이라기엔 너무 큰 구멍이 난 벽 너머로, 탑 아래에 있는 마을이 내다보일 만큼.
“……”
그러나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탓이리라.
엘리아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조금 틀어서야, 그는 아직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별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긴…… 북쪽인가.’
어째서 방향을 확인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그는 촛대를 옆에 내려놓고 무릎을 모아 이마를 대고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해가 비춰주는 빛 속에서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여전히 마을을 찾을 수 없다.
흙과 바위, 쓰러진 나무들 외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흙 속에서 지붕 같은 게 몇 개 보이는 것 같긴 하다.
그 중에 굉장히 눈에 익은 것, 신전의 종탑과 둥근 지붕이 있는 것에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먼저 보였어야 하는 건물은 온데간데없었다.
신전도 멀쩡히 있건만, 영주의 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천문탑의 붕괴가 만들어낸 산사태에, 모두 덮여버린 것이리라.
“…………”
그렇다면, 이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엘리아스는 고개를 돌려, 아직 꿋꿋이 켜 있는 촛대를 집어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쓴 편지를 꺼내더니 주저없이 촛불에 가져다댔다.
순식간에 타오르는 종이.
불이 붙는 걸 보자마자, 엘리아스는 편지를 벽 너머로 던졌다.
주황빛 불꽃이 검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멀거니 지켜본 다음, 그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가족의 시신을 찾는 건 무의미하다.
벼락에 타버리거나 탑이 무너지는 것에 휘말려서 어디 묻혔을 테니까.
복수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부모님이 바라지 않는 건 차치하고, 전부 흙이 삼켜버렸으니까.
가족도, 일족도, 하다못해 원수조차도 남지 않은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엘리아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몇 점 둥실 떠가는 파란 하늘.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속에서 별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젠가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날, 그의 마지막 숨결을 받아갈 수호성.
머나먼 북쪽에서 빛나는 별을 보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기로 가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밤하늘의 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리를 바꿔간다.
수호성도 그러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저것도 별 아닌가?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니, 그 자신이 별을 맞이하러 북쪽으로 간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으리라.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겠네.’
그러나 그는 원래부터 아버지의 뜻을 잘 따르지 않는 아들이었다.
그러니 천문학자가 아닌 군인이 된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텅 빈 웃음을 지으며 엘리아스는 계단을 내려갔다.
‘집’에서 적당히 먹을 것을 챙긴 다음, 터덜터덜 탑을 나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어디인지 모른다.
그저 별을 향해 갈 뿐.
‘북쪽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끝을 맞이하러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