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영애와 경호관2016.01.05.
“이백오십일, 이백오십이…….”
남자의 팔꿈치가 직각으로 꺾여 바닥으로 내려갈 때마다 보기 좋게 갈라진 남자의 구릿빛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제 존재감을 나타냈다.
“하아.”
짧게 숨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킨 민준이 힐끗 시선을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더니 곧장 욕실을 향했다.
적당하게 마른 몸매에 185cm 가량의 키,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없는 길쭉하고 큰 눈에 무심한 듯 보이는 흑갈색 눈동자.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홱 뒤돌아선 민준이 수건걸이에 걸려 있던 하얀 수건을 집어 들고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얀 수건으로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를 툭툭 털어낸 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작은 리모컨을 들어 버튼 하나를 꾹 누르자, 조용한 클래식 선율이 공간을 메우며 거실 가득 스며들기 시작했다.
민준은 식빵 두 장을 봉지에서 꺼내 토스트기에 집어넣고 스프링 버튼을 아래로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틱’ 소리와 함께 노릇노릇 잘 구워져 나온 토스트 두 장을 둥근 접시에 담은 후 머신기 앞에 놓인 머그컵을 함께 들고 식탁 앞에 앉았다.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빵을 천천히 씹으며,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신문을 식탁 위에 넓게 펼치자 정치면 제일 위에 ‘강현석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으로 곧 취임식을 하고 청와대에 입성할 대통령에 대한 기사들이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바삭’ 토스트가 입안에서 천천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띠리리리-
핸드폰 벨소리에 민준은 손을 길게 뻗어 핸드폰의 초록색 버튼을 옆으로 밀어냈다.
-출근 준비는 잘 하고 있나?
“강조국은 누굽니까, 팀장님.”
‘바삭’ 민준이 다시 한 번 토스트를 베어 물며 무심하게 물었다.
민준이 오늘부터 비밀 경호를 하게 될 영애의 이름은 분명 강설이라고 들었다.
26세 강설. 이번에 당선된 강현석 대통령의 유일한 영애.
대통령의 영애 강설에 대한 신상 정보는 거의 없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딸의 신상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었고, 때문에 현재 대통령의 딸 강조국(25) 양에 대한 정보는 나이와 본명인 이름 외에는 별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게 없었다.
-몇 년 전에 개명한 이름이 강설이야. 대외 극비 사항이니 말조심해. 회사 사람들은 강설 씨가 누군지 모르니 행동 조심하고.
개명이라. 굳이 개명을 하면서까지 그렇게 철저히 신분을 속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홀짝 커피 한 모금이 목 뒤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경호 붙지 않습니까. 어차피 눈에 띌 텐데요.”
민준은 무심하게 신문 페이지를 한 장 옆으로 넘겼다.
-당선인께서도 본인도 원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게 원거리 경호만 하고 있어. 그래서 네가 그곳에 들어가는 거잖아.
민준은 며칠 전 영애의 근거리 경호를 위해 그녀가 사는 아파트 앞 동으로 이사를 왔다.
앞 동과 뒤 동이 서로 가깝게 붙어 있는, 동간 간격이 좁은 아파트이다.
민준의 아파트 뒤쪽 베란다 창문에서 시선을 조금 내리면 커튼이 쳐지지 않은 강설의 아파트 거실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특히 어두운 밤이면 더욱 선명하게.
“설마, 저를 여기에 5년 동안 처박아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신문을 넘기던 손이 멈칫하더니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민준은 NIS(국가정보원)의 대테러 1팀 소속이며 작년 독일 베를린에서 납치된 인질을 무사히 구출해 돌아온 전적이 있는 최고의 정예 요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준은 그에게 영애 밀착 경호가 임무로 주어졌을 때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한참 동안 박 팀장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었다.
-영애가 5년 안에 결혼을 하든가, 그도 아니면 밀착 경호를 해제해도 된다든가. 뭐 어쨌든 그동안 둘 중에 하나는 걸리지 않겠어?
“하나가 더 있지 않습니까.”
-뭐가?
“영애가 경호관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을 때.”
-영애는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행동 조심해.
박 팀장의 말에 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르더니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드레스 룸에 들어가 옷장 손잡이를 앞으로 잡아당기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히 줄지어 있는 양복들이 보였다.
잠시 후 민준은 짙은 갈색 서류가방과 차 키, 그리고 사원증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룹 Pakin 계열사 Boni의 해외사업부, 민준이 오늘부터 근무하게 될 곳이다.
***
주식회사 Boni는 식음료 프랜차이즈 전문 회사로, 몇 년째 업계 1위를 놓치지 않는 탄탄한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다.
대기업 Pakin의 계열사답게 도심 노른자 땅 한복판 위에 위풍당당 우뚝 솟아오른 Boni 사옥이 아침 햇살에 반짝 빛을 냈다.
민준은 1층 로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곧장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건물 안은 한산했고 지나칠 만큼 고요했다.
9층 유리 출입문 앞 단말기에 사원증을 인식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으로 길게 연결된 통로를 따라 각각의 부서들이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뚜벅뚜벅 무심한 표정으로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가던 민준의 발걸음이 마케팅이라는 글자 근처에 가 멈추어 섰다.
“…….”
마케팅팀.
영애인 강설이 근무하는 부서.
아직 출근 시간이 30분이나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사무실엔 휑한 고요함과 함께 썰렁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길쭉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케팅팀과 마주 보고 있는 해외사업부 파티션 쪽으로 민준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며칠 전 인사팀 팀장의 안내를 받았던 자리를 찾아 서류가방을 올려놓은 후,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그때,
“전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빠.”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여자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점점 더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요 며칠 계속 저를 지켜보고 따라오는 남자 두 명이요. 제가 몽타주라도 그려 드려요?”
또각또각.
“시치미 떼셔도 소용 없…….”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려던 설은 몇 발자국 옆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 회사예요, 끊어요.”
설이 서둘러 핸드폰을 끊더니 자신의 가방을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민준의 무심한 시선이 설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설의 얼굴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설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민준에게 인사를 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녀의 한쪽 얼굴을 가리듯 내려오자 설이 오른손을 들어 뒤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쓸어 넘겼다.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였다.
미리 사진으로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많이 달랐다.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 봐서 그런 건지, 그녀의 주변엔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공기가 맴돌았다.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혹시 새로 온 경력직 직원인가?
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머리 위로 물음표들이 둥실 떠올랐다.
“……해외사업부 김민준 대리입니다.”
중저음의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설의 귀에 착 감겨 들어왔다.
낮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울림. 설이 시선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위로 살짝 말려 올라간 남자의 입꼬리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케팅팀 강설 주임이에요. 그런데 못 뵙던 분이신데…….”
“제가 오늘 첫 출근이라서요.”
아. 그러고 보니 해외사업부에서 경력직 사원을 한 명 충원했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초면에 실례지만 핸드폰 한 번만 빌릴 수 있을까요? 제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
남자의 말에 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 전화번호를 알려고 하는 걸까?
아니야, 어차피 전화번호 같은 건 금방 알 수 있잖아.
하지만 책상마다 개인 전화기가 놓여 있는데 왜?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설은 마침내 민준 앞에 천천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래도 같은 회사 사람인데 야박하게 굴 수는 없었다.
“여기요.”
민준은 핸드폰을 받아들며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 키패드에 숫자들을 누른 후 설에게 등을 보이고 뒤돌아서 바깥 복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이 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자를 안으로 당겨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 사무실 책상 위에 올린 후 전원 버튼을 누르자 까만 컴퓨터 화면이 금세 파란 빛으로 가득 차며 환하게 밝아졌다.
사무실 9층 복도로 나온 민준은 귀에서 핸드폰을 내리며 흘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CCTV.’
민준이 느긋하게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남자 화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 화장실 한 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민준은 재킷 안쪽에서 재빨리 작고 뾰족한 드라이버와 납작한 금속 칩 하나를 꺼냈다.
핸드폰 본체 안쪽에 드라이버를 대고 빠르게 작은 나사들을 돌려낸 후 그 안에 얇은 칩 하나를 끼워 넣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핸드폰 오른쪽 버튼을 길게 누르자 까만 핸드폰 바탕화면을 배경으로 하얀 글자들이 다시 춤을 추며 나타났다.
“이름만큼이나 심플하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민준이 픽 가볍게 미소 지었다.
설의 핸드폰에는 아무런 잠금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고 바탕화면엔 그 흔한 앱 하나 깔려 있지 않았다. 그 누가 가져다 마음대로 사용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민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
“잘 썼습니다.”
깜짝이야.
노트북을 켜고 이런저런 포털 기사를 검색해 보던 설의 눈앞에 갑자기 까만 핸드폰이 불쑥 나타났다. 설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파티션 앞에 서서 설의 눈앞에 핸드폰을 쥔 오른손을 길게 내밀고 있었다.
“네.”
민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든 설은 노트북 옆 오른쪽 책상 위에 핸드폰을 얌전히 올려놓았다.
하지만 민준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설의 회색 파티션 앞쪽에 멈춰 서 있었다.
“여기 구내식당은 먹을 만합니까?”
설은 내렸던 고개를 다시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설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설에게 묻는 말이 맞았다.
잠깐 의아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마침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먹을 만하다는 기준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는데도, 민준은 여전히 파티션 위에 두 팔을 기대 올린 채 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물어볼 게 남아 있으세요?”
설의 목소리가 조금 언짢아졌다.
‘귀찮다, 이 남자.’
“…….”
평범한 회사이다.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직원.
이곳에 대통령의 딸이라는 게 알려져서 특별히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을 것 같은데, 자신을 이곳에 부러 집어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강설 씨는 마케팅팀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민준의 입술이 다시 느릿하게 움직였다.
“제품 홍보, 광고 쪽 일을 하고 있어요.”
민준과의 대화를 별로 이어가고 싶지 않아 설은 시선을 내리며 앞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열어 전화 버튼을 누르자 최근 통화 목록에 02-114라는 숫자가 보였다.
“……?”
설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았다. 민준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근처에 맛있는 식당 좀 물어보려고.”
“…….”
의문스럽게 민준을 쳐다보는 설의 시선을 피해 민준이 그제야 기대 서 있던 파티션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태연하게 맞은편 해외사업부 팀을 향해 걸어갔다.
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민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
“같이 먹읍시다.”
“…….”
점심시간, 사옥 지하 1층에 위치한 구내식당.
구석 테이블에서 같은 팀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던 설 앞에 갑자기 하얀 식판이 놓였다.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끔뻑거리는 설의 눈에 ‘해외사업부 대리 김민준’이라는 사원증에 적힌 글자가 들어와 박혔다.
민준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쭉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해외사업부에 새로 오신 대리님이세요?”
설의 옆에 앉아 식사를 하던 동기 안 주임이 민준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민준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안에 넣은 후 맞은편에 앉은 설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했다.
“그전에는 어디 계셨었는데요?”
“독일이요.”
질문은 안 주임이 하는데 입안에 든 음식을 오물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민준의 시선은 아까부터 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안 주임이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식판 위로 시선을 가져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강 주임은 어디 삽니까. 일찍 출근하는 거 보니까 가까운 데 사나 보던데.”
민준의 질문에 설은 힐끗 시선을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아래로 내렸다.
“여기서 멀어요. 광화문 쪽에 살아요.”
설은 일부러 살고 있는 곳과 다른 엉뚱한 지역의 이름을 댔다. 실제 사는 곳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앞에 앉은 남자의 뻔뻔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하긴 그쪽에 청와대가 있기 때문에 아주 연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쉽네. 난 가까운 동네면 같이 카풀이나 하려고 했는데.”
“그러게요. 아쉽네요.”
픽. 설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난 수서동 살거든. 수서동 한빛 아파트.”
“…….”
하지만 이어지는 민준의 말에 설의 입꼬리가 다시 어색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민준은 태연하게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반찬을 집어 입안에 넣은 후 오물거렸다.
그리고 순간 당황해 눈빛이 흔들리는 설을 재미있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잠시 당황한 듯 보였던 설의 눈은 어느새 짜증을 살포시 담고 있었다.
무례하게 말꼬리를 뚝뚝 잘라먹으며 말을 붙이는 것도 언짢은데, 하필이면 같은 아파트라니.
“김 대리님. 강 주임한테 관심 있나 봐요?”
안 주임이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두죠.”
민준은 여전히 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안 놀라네?”
의외라는 듯 민준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런 일로 놀라지 않아요.”
설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롭고 어려운 시간들을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있다.
관심이 있다는 남자의 고백 정도로 놀라거나 떨려하지 않는 건, 설이 보통의 또래 아가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며칠 후면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으로 부임하게 될 아버지 때문은 아니다.
“김 대리님, 진짜 강 주임한테 관심 있어요?”
정작 고백(?) 받은 당사자는 담담한데 설의 곁에 앉아 있던 안 주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글쎄요.”
가늘게 눈을 접으며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분명 박 팀장님한테 듣기로는 영애는 밝고, 러블리한 아가씨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밝음과 러블리함은 오늘 집에 놔두고 출근을 했나.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풍성하고 짙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풍성한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에서 차분하게 찰랑거리고 있는 걸 보면 러블리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두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까만 눈동자는 속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인다.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설이 담담하게 화제를 돌리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화제를 바꾸려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미식가이기에 초면에 핸드폰까지 빌려 맛집을 물어보는 건지.
의외로 민준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했다.
“MSG도 없이 담백하고. 건강해지겠네.”
민준은 식사를 다 했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옆 의자에 한쪽 팔을 길게 뻗어 걸친 채 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 주임은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남아 있다며 먼저 사무실로 올라가 버렸다.
떨떠름한 안 주임의 표정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남자가 눈앞에 앉아 있어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이 작아서 그런지 식사를 꽤 오래 하네.”
민준이 설의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을 쳐다보더니 설의 앞에 놓인 식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제가 생각하기엔 대리님이 빨리 드시는 거 같은데요.”
설의 식판 위의 하얀 밥은 다행히 거의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먹을 수 있을 때 빨리 먹어 두고 이왕 먹을 거 맛있는 걸로 먹자, 라는 게 내 신조거든.”
“…….”
민준의 말에 조금 전까지 냉랭했던 설의 눈빛에 측은함이 얹어졌다.
많이 어렵게 자랐나 보다 이 사람.
역시 이 남자가 먹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회사 건물 뒤쪽으로 가면 맛집 많아요. 이 근처 말고 사거리 지나 올라가면 더 많고요.”
설은 물 컵을 집어 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안내해 줄 건데?”
“…….”
민준의 말에 설은 곤란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를 따라 아동보육시설을 종종 따라다녀서 그런지, 설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만큼 보이는 건지, 그런 사람들은 유독 설의 눈에 잘 띄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쓸데없이 측은지심이 드는 바람에 귀찮아졌다.
“귀찮으면 말고.”
뜨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설은 어쩐지 조금 민망해졌다.
하지만 앞에 앉은 남자가 힘들거나 어려워 보이진 않았는데도 안 된다는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도대체 왜.
머뭇거리는 설을 바라보며 민준은 속으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조금 비겁하긴 하지만 회사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영애를 쉽게 경호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바로 영애의 애인이 되는 것.
아. 국장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라나. 필요 이상의 인간적인 관계는 맺지 말라고 하셨는데.
뭐 그러든지 말든지.
“뭐 좋아하시는데요.”
마침내 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에 앉은 민준을 쳐다보았다.
민준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고기 좋아해. 종류는 상관없이.”
“회사 뒤쪽에 괜찮은 삼겹살집이 있어요.”
“그럼 오늘 저녁은 같이 삼겹살 먹는 건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요?”
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짙어졌다.
그저 알려만 주고 올 생각이었는데, 역시 괜한 참견을 하는 게 아니었다.
“삼겹살을 혼자 먹을 순 없잖아.”
민준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어 뭐라 대꾸를 하려던 설이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혼자’라는 단어가 설의 마음에 쓸쓸하게 스며들었다.
“……데이트하는 건 아니에요.”
먼저 확실히 해두겠다는 듯 설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먹는 거지 그냥. 같은 회사 동료끼리.”
민준이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설은 방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지만, 앞에 앉은 민준의 표정이 즐거워 보여 벌렸던 입술을 다시 천천히 다물었다.
남자의 눈웃음 끝에 걸린 무언가가, 설의 시선을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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