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술잔에 담긴 눈물2016.01.07.
강설.
키 165cm 정도.
전체적으로 약간 마른 듯한 체형이지만 팔다리가 길쭉해서 그런지 비율상 더 커보이기도 한다.
학부의 전공과 직업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별로 없어 보이고 아버지가 대통령이 됐으면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 이상한 여자.
개명을 하면서까지 신분을 감추고 싶어 하고 세상 앞에 딸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대통령의 특이하고 유별난 자식 사랑까지, 무엇하나 평범한 게 없다.
일반적인 영애에 대한 경호가 아니라 NIS 요원인 자신이 붙은 이유가 분명 따로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하나뿐인 자식 얼굴이 알려져 혹시 납치라도 당할까 봐 걱정되는 건지.
“…….”
-회사 1층 로비에서?
정확히 퇴근 시간 1분 전, 설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날아들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말본새를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근데 이 사람, 오늘 핸드폰을 안 가져 왔다고 하지 않았었나.
-회사 뒷골목 편의점 앞에서 봐요.
설이 얼른 핸드폰을 들어 민준에게 답장을 했다.
괜히 이런저런 입방아에 오르고 싶지 않은데, 직원들이 행여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걸로 오해를 할까 봐 회사 밖에서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경호관들, 오전 출근길처럼 그들이 눈에 띄게 1층 로비를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설의 얼굴이 근심스럽게 찡그려졌다.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취임 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대통령에 준하는 경호를 받게 되었고 그것은 대통령의 직계 가족인 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은 다시 한 번 아버지께 말씀을 드릴 생각이다. 경호관들이 설을 따라 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설을 더 눈에 띄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핸드폰 안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생각해 보니 괘씸해서 설이 기어이 문자 하나를 더 날려 보냈다.
‘뭐야 이 사람.’
-찾아보니까 있더라고.
“…….”
설이 미간을 찡그리며 틱 핸드폰 케이스 덮개를 덮었다.
왠지 맞은편 해외사업부 팀에서 민준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설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까만 코트를 꺼내 입고 서둘러 단추를 잠근 후 어깨 너머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같이 내려가면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퇴근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부랴부랴 서두른 보람도 없이 설은 해외사업부와 마주한 통로에서 민준과 딱 마주쳤다.
설의 두 눈에 옅게 미소 짓는 민준의 입가가 보였다.
시선을 조금 올려보니 눈꼬리도 밑으로 살짝 휘어져 있는 게, 맛있는 고깃집을 간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민준의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왠지 조금 더 쳐다보고 서 있다가는 말을 시킬 것 같아 설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서둘러 9층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애쓴 보람도 없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9층에 올라와 멈추어 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설의 어깨와 부딪힐 듯 가까이 지나가자, 민준은 왼손을 뻗어 설을 자신의 몸 쪽으로 살짝 잡아 당겼다.
사람들이 설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고 나서야 민준의 손이 다시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탑시다.”
“……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설은 고개를 들어 상단의 빨간 숫자가 하나씩 내려가는 것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열기 탓인지 설의 한쪽 뺨이 아주 조금 붉어졌다.
**
민준과 설은 옆으로 한 발자국 정도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근처 오피스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집으로 혹은 술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 무리에 섞여들자 설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퇴근 시간,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민준과 설이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다.
설은 무의식적으로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누가 따라와?”
“네? 아니요?”
“그런데 왜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걸어?”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요.”
“없는데.”
갑자기 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민준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춰 섰다.
민준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오늘 처음 봤는데 말을 참 편하게 하시네요, 대리님은.”
사실 아까부터 진작 이야길 꺼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좋질 않았다.
아무리 대리로 입사를 해 설보다 직급이 높다고 해도 두 사람은 엄연히 오늘이 초면인데 말이다.
“존댓말 해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히려 민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요.”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설이 체념하듯 고개를 옆으로 작게 가로젓더니 다시 정면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근데 저녁 약속이 없는 걸 보니 강설 씨는 애인이 없나 봐? 물론 나야 좋지만.”
“묻기 어려운 질문을 참 쉽게도 하시네요.”
설이 힐끗 옆 눈질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난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해.”
“지금은 없어요. 별로 애인 사귈 처지도 못되고.”
“심심하겠네.”
“그러지도 않아요. 이런저런 취미 생활도 하…….”
아차.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설이 갑자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 왔어요. 여기.”
다행히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설의 발걸음이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널찍한 고깃집 앞에 멈춰 섰다.
설과 민준이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꽤 많은 직장인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지글거리는 불판을 사이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삼겹살 이 인분 주시고요, 이슬도?”
직원 아주머니께서 주문을 받으러 오자 민준이 둥근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은 설에게 물었다.
“아니요.”
“한 병만 주세요.”
설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민준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아주머니에게 주문을 했다.
잠시 후 민준이 잘 달궈진 불판 위로 두툼한 삼겹살을 올렸고, 설은 잘라진 오이 조각을 입에 물고 아삭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진짜 안 마셔?”
앞에 놓인 투명한 소주잔에 초록색 병을 기울여 채우며 민준이 힐끗 설을 쳐다보았다.
“네.”
“술잔에 담긴 인생을 모르는군.”
짐짓 농담 어린 어조로 민준이 소주잔을 들어 마시더니 테이블 위로 다시 내려놓았다.
“눈물이 담겨 있는 건 알아요.”
“……아, 눈물.”
‘영애의 눈물이라.’
‘아삭’ 무심하게 오이를 베어 무는 설을 민준이 힐끗 쳐다보았다.
***
“와. 고기 냄새.”
민준과 설이 삼겹살집 밖으로 나왔다. 왼쪽 외투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던 설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 맵싸한 저녁 찬 공기가 콧속으로 훅 함께 밀려 들어왔다.
“강 주임은 집으로 가나?”
민준은 소주 한 병을 마셨는데도 먹기 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 네.”
설의 말끝이 곤란한 듯 흐려졌다.
설마, 데려다 준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민준과 설이 회사 건물 주차장을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스트레칭하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꺾어 돌리며 뒤를 흘끔 바라보던 민준의 시선 끝에 ‘나 경호관이에요’라고 이마에 써 붙인 남자 두 명이 들어와 잡혔다.
“집에 가는 길에 나 좀 내려주지? 보다시피 내가 술을 마셔서.”
“…….”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민준은 설을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데려다 달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상식 밖의 남자이다. 어떻게 처음 보는 여자한테 데려다 준다는 말도 아니고 데려다 달라는 말을 꺼내는 건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민준의 집으로 가는 길이 곧 설의 집에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괜히 다른 동네 산다고 말했나. 이러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민망할 것 같은데.
“네, 그럴게요.”
설이 알았다는 듯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을 아파트 동 앞에 내려주고 난 후 자연스럽게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면 될 것이다.
**
“차가. 상당히. 인상적이군.”
설의 까만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 벨트를 매는 민준의 시선이 빠르게 차량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설의 자동차는 처음에 출고되어 나온 자동차의 모습 그대로인 듯 차량 내부엔 어떤 장식이나 흔한 액세서리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가족사진이나 애인 사진, 그도 아니면 십자가라든지 묵주 장식이라도 하나 달려 있을 만도 하건만. 하다못해 방향제라도.
민준은 NIS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면 박 팀장에게 ‘밝음’과 ‘러블리함’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자신이 알고 있는 뜻과 박 팀장이 알고 있는 뜻이 다른 건지 말이다.
“제 차가 어때서요. 이 정도면 꽤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는 건데요.”
“깨끗한 걸 말하는 게 아니야.”
픽. 민준이 웃으며 사이드 미러를 흘끔 쳐다보았다.
설이 자동차 시동을 켜고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자 자동차가 회사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어느새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부모님하고 같이 사나?”
“아니요.”
“왜?”
“멀리 사셔서요.”
“혼자 나와 살면 걱정 많이 하실 텐데.”
“부모님들이야 다 그렇죠 뭐.”
“이름이 특이한데. 부모님께서 지어주셨나 봐?”
민준이 운전석의 설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저한테 궁금한 게 참 많으시네요. 대리님은.”
줄곧 무심하게 대답을 하던 설의 목소리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갑자기 문득, 예전 그 사람이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설을 사랑한다 했고 설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가.
“뭐 그럼 나한테 물어보든가. 나는 얼마든지 대답해 주지.”
민준이 팔짱을 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설을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 궁금한 거 없어요?’
그 남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설에게 물었었다.
“……없어요. 그런 거.”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설의 두 눈이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처럼 아득하게 짙어졌다.
***
잠시 후 민준의 아파트 동 앞에 설의 자동차가 멈추어 섰다. 설은 습관적으로 핸드브레이크를 위로 올리고 구멍에서 차 키를 빼냈다.
“우리 집 가게? 커피 줄까?”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려던 설의 등 뒤에서 웃음기 어린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민준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아차. 순간 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인사…… 드리려고요.”
설이 태연하게 고개를 돌려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운전석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근데 강 주임은 이 동네에 와봤었나 봐? 나한테 길도 안 물어보고 한 번에 찾아오는 걸 보니 말이야.”
“…….”
설의 자동차 앞에 멈춰선 민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다.
“안녕히 가세요, 대리님.”
설은 대답 대신 민준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했다.
다행히 민준은 금방 뒤돌아서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준의 모습이 출입구 안쪽으로 사라지자 설이 얼른 자동차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서둘러 뒤 동으로 차를 몰았다.
사실 앞 뒤 동이라 그대로 주차해 두어도 되지만, 혹시라도 민준이 설의 자동차를 발견하길 바라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출입구 문 안쪽에서 설의 자동차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의 눈물이라……, 술 이름으로 하면 참 좋겠네.”
조금 전 고깃집에서 무심하게 내뱉은 설의 말이 떠올라 민준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열자 현관 센서 등이 집 안의 어둠을 밝혀 주었다.
설은 거실 등을 켜고 들고 있던 가방과 핸드폰을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코트를 벗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코트에 밴 삼겹살 냄새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
설이 인상을 찌푸리며 코트를 들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침실 앞 베란다에 매달려 있는 천장형 빨래 걸이에 코트를 걸어 놓은 후 설은 다시 베란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며 욕실을 향했다.
“아 이런. 경각심이 너무 없네, 저 아가씨.”
아파트 뒤 베란다에 서서 한쪽 입가에 담배를 물고 아래를 힐끗 내려다보던 민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안으로 들어온 민준이 거실 한쪽 벽면에 놓인 까만 오디오 장치 앞에 다가가 섰다.
오늘 아침 민준이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오디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느 오디오 기계와 조금 달라 보인다.
민준이 손을 뻗어 작고 둥근 빨간 버튼을 하나 누르더니 스피커 볼륨을 조금 높였다. 그리고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내며 욕실을 향했다.
**
민준이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커피를 내려 식탁 앞에 앉았는데도 거실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가끔 스피커를 통해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잡음이 들려오긴 했지만.
설의 핸드폰 본체 안쪽에 삽입한 초소형도청기는 핸드폰 충전과 함께 충전이 되는 방식이라 한번 부착을 해놓으면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핸드폰 통화 내용은 물론, 주변의 작은 소음까지 정확하게 전송해 주기 때문에 민준이 꽤나 애정하는 장비 중 하나이다.
민준이 침실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고 와 식탁 위에 올려놓고 화면을 열었다. 노트북 자판을 탁탁 가볍게 몇 번 두드리자 잠시 후 NIS 로고와 함께 하얀 창이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우며 나타났다.
민준은 박 팀장이 보내준 영애에 대한 자료들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기 시작했다.
한쪽 손에 턱을 괴고 무심하게 틱틱 마우스를 클릭하며 과거 영애의 사진들을 넘겨보던 민준의 손길이 잠시 멈춰 섰다.
“…….”
언제 적 사진인진 모르겠지만,
나풀거리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 렌즈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봄 햇살처럼 화사하게 노트북 화면에 펼쳐졌다.
“……이건 꽤 러블리해 보이네.”
픽. 민준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짓더니 노트북 화면을 그대로 둔 채 머그컵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띠리리리리.]
갑자기 고요했던 민준의 거실에 전화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물론 민준의 전화벨 소리는 아니다.
[여보세요]
강설의 목소리이다.
[강조국.]
이건, 며칠 후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부임할 강현석 당선인의 목소리.
[네 아빠.]
[늦었는데 아직까지 안 자고 뭐했어.]
[이제 자려고 누웠어요.]
조금 전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침대에 누워 뒤척이는 소리였나.
[경호관은 내일부터 철수하라고 했다.]
당선인은 분명 국장님께 보고를 받았을 테고 NIS 요원 한 명이 이 회사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능청스러운 당선인의 연기에 민준이 큭 웃음을 터트렸다.
[잠은 잘 자고?]
TV에서 보던 카리스마 넘치던 눈빛과 달리 당선인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운 아버지의 모습이 묻어 나온다.
[그럼요.]
[그런데, 오늘 같이 저녁 먹은 남자는 누구냐.]
[아. 남자가 아니라 그냥 우리 회사 대리님이에요.]
[난 또 우리 딸이 남자랑 연애하나 했지.]
[별로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부녀간에 오고 가는 대화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민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래. 그럼 잘 자고.]
[네 아빠. 안녕히 주무세요.]
부녀간의 다정한 대화는 끝이 났고, 다시 민준의 거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은근히 존심 상하게 하네, 이 아가씨.”
참나.
민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주방 거실 식탁에 다가가 앉았다.
노트북 화면에서는 여전히 강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긴 하네.”
피식 웃는 민준의 한쪽 눈썹이 느긋하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내려왔다.
흘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다.
머그컵에 남은 커피를 싱크대 앞 개수대에 흘려보내고 식탁으로 돌아온 민준이 마우스를 움직여 노트북 전원을 껐다. 그리고 다시 거실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 섰다.
하지만 막 전원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민준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흐흑.]
설의 울음소리.
놀란 민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할아버지. 흐흑.]
“…….”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새 잠이 들었나 보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래도…… 어쨌든 별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
민준이 빨간 버튼을 누르자 거실 안에 다시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가씨가 잠버릇도 나쁘네.”
민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실 등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거실 불을 끄고 침실을 향해 걸어가던 민준의 발걸음이 다시 멈춰 섰다.
“……신경 쓰이게 진짜.”
민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핸드폰을 찾아 손에 들더니 곧바로 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참을 울리던 통화 연결음 소리가 사라지자, 저 너머에서 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설의 목소리에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다.
“나야.”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퉁명스런 목소리.
설이 핸드폰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누구세요?
하지만 이번엔 경계하는 목소리이다.
“누구세요라니, 내 번호 저장 안 했어?”
민준의 언성이 단숨에 높아졌다.
-이 밤에 무슨 일이세요. 대리님.
얕은 한숨 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설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일 저녁 메뉴.”
-…….
“해물탕이 좋겠다고. 그 말 하려고 전화했어.”
-하아…….
짜증 섞인 설의 한숨 소리가 고스란히 민준에게 전해졌다.
“한숨 소리 다 들려.”
-…….
“내가 지금 잠이 안 와서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데.”
-…….
민준이 다시 거실 불을 켜고 하얀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당신도 듣든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리모콘을 들어 버튼을 누르자,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밤공기를 가르며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준이 가끔 악몽을 꾸며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듣기 시작한 음악이 이제는 취미가 되었다. 듣기 편안한 음악들이니 적어도 지금보다 불편한 밤은 되지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설은 어느새 핸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바꾸어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설은 이불을 가슴 언저리까지 끌어당겨 모으며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꿈속에서, 노란 유채꽃이 가득한 들판 한가운데에 설이 서 있었다.
‘강조국!’
설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는 외할아버지를 향해 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 풀썩 안기자, 할아버지가 설의 겨드랑이에 두 팔을 넣어 빙글빙글 돌리며 환하게 웃으셨다.
행복한 꿈을 꾸는 듯 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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