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강설. 눈이 많이 내려서 강설인가.2016.01.12.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설의 얼굴이 편안했다.
설이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팔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
최근 통화 시간 2시간 35분.
이 사람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던 걸까.
핸드폰을 충전기에 다시 꽂은 후 설이 침대에서 일어서 욕실을 향했다.
**
“이백구십구, 삼백. 하아.”
팔굽혀펴기를 하고 일어선 민준의 상체 근육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괜한 오지랖에 잠을 설친 건 민준이었다. 어젯밤 설이 잠든 걸 알면서도 민준은 일부러 음악을 틀어놓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 마음이 약해진다는데, 민준은 여자들이 우는 게 딱 질색이었다.
죽거나 살거나.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 살아가면서 가슴 졸이고 눈물 흘려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딱 질색인데…….
강설, 그 여자가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아직도 민준의 귓가에 남아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일어났을라나.
민준이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른 후 식탁 위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정수기 앞에 서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따라 마셨다.
-좋은 아침이야~!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박 팀장의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내주신 자료에는 강설에 대한 정보밖에 없던데요, 팀장님.”
-그럼, 또 다른 뭐가 필요해?
“강조국이었던 영애에 대한 정보는 왜 빠져 있습니까.”
민준이 토스터기에 식빵 두 개를 집어넣은 후 버튼을 아래로 꾹 눌렀다.
-아. 그건 아직 알 필요가 없다던데.
“아직, 이라뇨?”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려던 손길이 멈추더니 민준이 빙글 뒤를 돌아 핸드폰에 가까이 다가와 섰다.
-국장님 말씀이야.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까 궁금하면 네가 국장님께 직접 여쭤보든가.
“영애를 이렇게까지 근거리에서 보호를 해야 하는 이유는요.”
-그것도 아직.
“…….”
박 팀장의 말에 민준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민준을 고작 영애를 경호하는 일에 처박아 두고도 저렇게 태평하게 너스레를 떨고 있다니.
-야,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나도 진짜 잘 모른다고!! 다만…….
“다만 뭡니까.”
망설이는 듯 말끝을 흐리는 박 팀장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국정원에서 몇 년 전부터 강설 씨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만 알아.
“…….”
-널 영애의 경호나 하라고 거기에 넣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너도 알 것 아냐!
“경호 말고 다른 게 또 있습니까?”
-출근 안 하냐?
“팀장님.”
민준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이럴 땐 전화를 빨리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박 팀장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고!
뚝. 상큼하게 통화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
오전 7시 30분.
이제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욕실로 향했다.
***
출근을 하기 위해 아파트 출입구 밖으로 나온 설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려다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우연히 걸려온 민준의 전화 덕분에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
어제 회사에 차도 두고 왔을 텐데.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설이 핸드폰을 들어 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 대리님 집 근처 지나려고 하는데 아직 출근 전이시면 집 앞으로 갈게요.
-3분 뒤.
망설였던 마음이 무색하게 민준의 문자메시지가 곧장 화면 아래에서 쑤욱 위로 올라왔다.
픽. 설이 옅게 웃으며 핸드폰을 앞 거치대에 올려놓더니 자동차 시동을 켜고 민준의 아파트 동 앞으로 천천히 자동차를 움직였다.
“착하네, 강 주임?”
잠시 후, 민준이 자연스럽게 설의 자동차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당겨 매며 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참나. 국정원 요원인 나보다 더 비밀이 많은 영애라니.
“어제 차 두고 오셨잖아요. 지나가는 길에 생각이 나서요.”
별 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듯 설의 목소리는 억양 없이 단조로웠다.
“어젯밤엔 잘 잤어?”
민준의 태연한 목소리에 설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마치 설이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럼요.”
“음악은 맘에 들고?”
“취미가 고상하시대요.”
흘끔 민준을 쳐다보는 설의 눈에 민준의 피곤한 얼굴이 들어왔다.
“대리님은 잘 못 주무셨나 봐요.”
“누구 덕분에 음악 감상을 좀 오래 했지.”
“…….”
“강설. 강설…… 태어나던 날 눈이 많이 내려서 강설인가. 로맨틱하시네, 부모님이.”
혼잣말처럼 느긋하게 중얼거렸지만, 민준의 시선은 설을 향해 있었다.
설이 시선을 돌리며 무심하게 왼쪽 사이드미러를 쳐다보았다.
***
설이 이름을 바꾸던 그날.
개명 신청서를 앞에 두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괜찮다고 다독이며 설을 위로해주는 것처럼.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와는 달리 조국의 개명 신청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강설. 이름이 참 예쁘네요.’
저조차도 낯선 설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주었던 그 사람.
***
“강설. 이름 참 예쁘네.”
민준의 말에 설은 다시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나 가는 동안 눈 좀 붙일게.”
많이 피곤한 듯 민준은 팔짱을 낀 채로 두 눈을 감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설이 다시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
‘강조국.’
혹시나 해서 구글링을 해보았지만 이름이 특이해서 무언가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강조국에 대한 작은 흔적 하나 보이질 않았다.
‘할아버지 흐흐흑.’
“…….”
민준이 다시 검색 창에 ‘강현석 부친’ 이라는 글자를 적어 넣자, 당선인의 평범했던 집안과 어린 시절에 대한 이런저런 글들이 검색 창에 주르륵 떠올랐다.
교육자 집안의 장남이었던 강현석 당선인은 학부 재학 시절 고시 3관왕으로 이름을 날렸었고, 추후에는 강직한 변호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집안 배경은 평범했고 당선인은 비범했던 케이스였다.
‘타닥타닥’ 민준의 손가락이 사무실 책상 위에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직이라.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인즉슨, 지금 민준이 알면 상황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국정원 요원에게 있어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은 임무를 그르칠 수 있는 상황뿐이다.
NIS는 오직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위해서만 일할 뿐 어떤 개인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조국.
생각해보면 독립투사도 아닌데 여자애 이름을 왜 그렇게 애국심 돋게 지었나 싶다.
쩝.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트북 검색창의 X 자를 누르려던 민준의 눈에,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들어 왔다. 인터뷰 날짜를 보니 아주 오래된 기사였다.
‘이인호 박사의 사위, 변호사 강현석.’
이인호 박사?
민준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다.
강현석 당선인의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천재물리학자로 워낙에 저명하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타계하셨다는 말씀에 전 국민이 애통해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이인호 박사가 당선인의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민준이 당선인과 이인호 박사와의 관계를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민준이 마우스를 움직여 기사 제목을 클릭하자 이인호 박사의 생전 모습과 함께 변호사 시절 당선인의 인터뷰가 주르륵 화면에 올라왔다.
“…….”
민준이 다시 검색 창에 빠르게 ‘이인호 박사’를 적어 넣자, 이인호 박사에 대한 생전 기록들이 좌르르 쏟아져 나왔다.
미국에서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던 천재 물리학자 이인호 박사는 미국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던 도중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영구 정착을 했다.
한국에서 대학교수와 원자력연구원 원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후배 연구원들과 함께 오랜 시간 연구에 매진하였고,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도 타계하였다는 이야기.
민준이 느긋하게 머리 뒤로 손깍지를 끼며 상체를 의자 뒤로 기울였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마케팅팀 쪽을 바라보았지만, 파티션 칸막이에 가려 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밥 먹으러 가야지?
“…….”
하아. 설이 핸드폰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6시 30분. 설의 핸드폰으로 민준의 문자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해.물.탕.
“…….”
뭐라 핑계를 댈까 고민하는 설의 얼굴이 보이기라도 한 듯, 강력한 온점이 찍힌 문자가 오늘 저녁 반드시 해물탕을 먹고 말겠다는 민준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
“친구 없으세요?”
“어 없어.”
“해외사업부에 팀원들 있잖아요.”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오늘까지만이에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내려감 버튼을 누른 후 설은 홱 몸을 돌려 민준을 노려보았다.
“우리 같이 밥 먹는 짝꿍 아니었어?”
참나. 어이가 없다. 누구 맘대로 짝꿍이래.
“아니에요!”
“아니야?”
흐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민준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설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고요했던 삶에 불쑥 끼어든 이 남자가 설은 불편하다. 게다가 오늘 아침엔 같은 팀 안 주임이 두 사람 무슨 사이냐며 설에게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 남자를 만난 이후로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문득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자꾸 그렇게 인상 쓰면 못생겨진다.”
‘찡그리지 마. 예쁜 얼굴 구겨지잖아.’
바로 이런 것.
이렇게 민준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
엘리베이터가 9층에 와 멈추자 민준과 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님 이러시는 거 저 불편해요.”
설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민준과 설, 두 사람뿐이었다.
“그럼 짝꿍 말고 나랑 연애할래?”
‘친구 말고, 우리 연애할래요?’
하아.
웃음기 어린 민준의 목소리에 설이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너무 날 세우고 살지 마. 인생 뭐 있다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춰 서자 바깥을 향해 빠르기 걷기 시작한 설의 곁에 어느새 민준이 다가와 보폭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어? 설이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어린 민준의 목소리에 설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아마도 이 겨울의 마지막일 것 같은 함박눈이 어둠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설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설이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강설.”
민준의 낮은 목소리에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우는 여자 딱 질색인데.
지금 눈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서 있는 이 여자를, 순간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민준이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보글보글
큼지막한 냄비 안에 먹음직스럽게 가득 쌓아 올린 싱싱한 해물들, 가장 위에 얹어진 낙지 한 마리가 처연하게 몸을 배배 꼬다 이내 그 몸짓마저 잠잠해졌다.
가위를 들고 해물들을 먹기 좋은 크기로 싹둑싹둑 잘라내는 민준을 이따금씩 바라보며 설은 오늘도 오이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조금 전 민준에게 우는 모습을 보인 게 설의 마음을 계속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아삭, 하고 입안에서 바스러지는 오이 조각을 끝으로 더 이상 하얀 접시 위에 오이 조각이 남아 있질 않자, 이번엔 설이 그 옆에 참하게 누워 있던 당근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해물 먹으라고, 해물!”
‘탁!’ 소리와 함께 민준이 인상을 팍 쓰며 은색 집게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 앞에 놓인 접시를 바라보니, 언제 담아 놓았는지 한입 크기로 잘 잘라진 해물들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뿜어내며 설의 접시 안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해물탕은 대리님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설이 민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을 했다.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고 그래?”
참나.
어이가 없다는 듯 설이 두 눈을 부릅뜨며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누가 대자로 시키시래요?”
둘이 와서 먹는데 해물탕 대자를 주문한 민준이다.
얼마나 먹으려고 그러는가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인 네다섯 명은 먹고도 남을 양인데.
설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앞에 놓인 채소 접시로 손을 뻗자 민준이 접시를 멀리 치워 버렸다.
“해물.”
인상을 쓰며 민준을 바라보는 설을 향해 민준이 어서 먹으라는 듯 고갯짓으로 접시를 가리켰다.
못 이기는 척 설이 젓가락을 들어 잘라진 해물 하나를 입안에 집어넣자, 민준의 눈꼬리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아래를 향했다.
***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눈이 그쳐 있었다.
회사 건물 주차장을 향해 걸으며 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가는 시간이라도 달리해야 민준과 같은 아파트 안에서 마주치지 않을 것 같은데.
“집으로 갈 거지?”
설이 그런 고민을 하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민준이 물어봐 준다. 고맙게도.
“……네.”
“난 어디 좀 들렀다 가려고.”
민준의 말에 설의 얼굴에 언뜻 안도감이 스쳤다.
“이 집은 입맛에 맞으셨어요? 맘에 안 드시면 다른 집 알려드릴 수도 있어요.”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자 설은 조금 전보다 한층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맛있긴 한데……, 도대체 식당을 얼마나 돌아다닌 거야? 딱 보니까 나만큼 친구도 없어 보이는구만.”
“저도 오늘 처음 가봤어요.”
설의 대답에 민준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 어제 삼겹살집도?”
“네.”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의 고개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다시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내가 맛있는 집 알려 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성의가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먹어보지도 않고 알려줬다 이거지.
“두 집 다 맛있었다면서요.”
“응.”
“그럼 됐잖아요.”
“그렇긴 한데.”
뭐지, 이 기분은.
“다른 데도 알려드릴게요. 같이 먹어드릴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아진 듯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걷기 시작한 설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해장국집은 어디가 맛있어?”
“저기 저 골목 따라 위로 올라가면 왼쪽에 ‘전주콩나물해장국’이라고 있어요. 24시간 영업도 하고.”
설이 오른쪽 위로 난 좁은 골목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삼계탕집은.”
어쩐지 민준의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지만 설은 눈치채지 못했다.
“두 블록 지나서 삼정빌딩이라고 있는데 거기 2층에 있는 동진삼계탕집이요.”
“……칼국수.”
“칼국수는 저기 보이는 오피스빌딩 있죠. 거기 1층 왼쪽 코너에 있는 초록칼국수요.”
“…….”
설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사실 설도 궁금하기는 했다. 그 집들이 전부 다 어떤 맛일지.
하지만 혼자 이런저런 식당을 찾아다니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설에게는 아직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 민준과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들이 설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
민준이 아무 말이 없자 설이 민준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실수했나.
설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민준과 두 눈이 마주치자 설의 얼굴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그래서 내일은.”
“네?”
민준의 표정이 이상한 것 같다는 느낌은 다행히 설의 기우였나 보다.
민준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천천히 끌어올리며 물었다.
“내일은 어디서 먹는 건데.”
“아니요, 이제 저는 그냥 알려드리기만 할 거예요. 내일부터는 대리님이 알아서 드세요.”
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아. 칼국수 먹지 그럼. 대신 칼국수는 강 주임이 사.”
“전 이제 알려만 드린다니까요?”
이 사람은 도대체 사람 말을 어떻게 듣는 거야?
“사기 싫어?”
“아니 사기 싫다는 게 아니라요.”
“내일 봐, 그럼.”
‘삐빅’ 민준의 자동차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이 빙글 몸을 돌려 냉큼 차에 오르더니 그대로 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참나.”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설이 마침내 민준의 자동차 근처에 세워져 있던 까만 자동차에 올랐다.
설의 자동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곧바로 도로에 진입했고, 잠시 후 오른쪽 도로에 깜빡이를 켜고 정차 중이던 민준의 차도 설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
자동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설은 자동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리더니 언제나처럼 아파트 동 출입구 현관 앞에 서서 아파트 호수와 비밀번호를 누른 후 #버튼을 눌렀다.
유리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렸고 설이 안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여기서 뭐해?”
갑자기 등 뒤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설이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민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살아?”
“…….”
“우리 집 앞 동이네? 근데 거짓말한 거구나? 일.부.러.”
“…….”
그런데 너무 당황해 할 말을 잊은 설과 달리 민준은 화가 났다기보다 이 상황이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모레는 삼계탕이 좋겠어. 잊지 마, 강 주임.”
“…….”
민준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발걸음도 가볍게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은 뒤늦게 인상을 잔뜩 쓰며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올라감 버튼을 눌렀다.
저 남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아주 웃긴 사람이다, 진짜.
도대체 내 스케줄을 왜 자꾸 저 사람이 정하는 건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분한 마음에 설이 홱 걸음을 돌려 출입구 바깥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동 출입구에 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집에 들어간 건지 민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
[아니 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해? 대리가 뭐라고? 그래봤자 나보다 회사에도 늦게 들어왔으면서?]
씩씩거리며 집 안에 들어선 설이 가방을 거실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앉았다.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설의 목소리가 민준의 오디오 스피커를 통해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너도 네가 하고 싶은 말 해, 그럼.”
민준이 정수기 앞에 서서 태연하게 버튼을 누르며 거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설의 목소리에 대꾸하듯 말했다. 정수기 앞에 놓인 하얀 머그컵에 차가운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되게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네가 더 이상해, 강설.”
실제로 설에게 말하듯 민준이 인상을 쓰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
조심스럽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설의 목소리에 민준이 흘끔 거실 오디오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아. 씻어야겠다.]
설마.
민준이 황급히 몸을 돌려 뒤 베란다에 가 서더니 얼른 창문을 열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블라우스 단추를 천천히 하나씩 아래로 풀어 내리며 베란다 유리창 앞에 다가와서는 설의 모습이 보였다 .
[달 예쁘다.]
설이 고개를 들어 깜깜한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다시 몸을 돌려 베란다 가까운 유리창에서 멀어져 갔다.
따르르르르.
욕실을 막 향하려던 설의 발걸음이 탁자 위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멈춰 섰다. 설이 다시 돌아와 핸드폰을 손에 들고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안녕, 이웃사촌?
또 김민준 대리이다.
“왜요.”
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다.
-보여주려면 다 보여주든가. 사람 감질나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이 휙휙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얼른 다시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뭘 두리번거려? 거기 누가 있다고.
설이 재빨리 베란다 쪽으로 다가가더니 거실 유리창을 옆으로 밀고 베란다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설의 눈에,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참 가깝다 싶었던 앞 동 두어 층 위에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
-흰색 좋아하나 봐?
멍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던 설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민준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황급히 아래로 내려 보니 좌우로 열린 블라우스 사이로 하얀 언더웨어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
재빨리 블라우스 앞을 여미며 설이 민준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고마운 줄 알아.
뚝. 민준이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르더니 잠시 설을 내려다보다 홱 등을 돌려 집 안으로 사라졌다. 빨개진 얼굴로 여전히 씩씩거리며 서 있는 설을 뒤로한 채.
주방 안으로 들어온 민준은 다시 컵 하나를 꺼내 정수기에서 시원한 냉수를 내려 마셨다.
“왜 이렇게 더워?”
손으로 붉어진 얼굴에 부채질을 해대며 민준이 욕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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