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상한 강설2016.01.14.
“안녕 이웃사촌?”
“…….”
이른 아침, 설의 자동차에 기대 서 있던 민준은 출입구를 통해 나오는 설을 발견하자 반가운 듯 오른 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설은 민준을 무시한 채 쌩하니 지나쳐 그대로 차에 올랐다.
민준이 얼른 조수석 문을 열더니 설의 차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설은 고개를 돌려 어이가 없다는 듯 민준을 쳐다보았다.
“카풀.”
“누구 맘대로 카풀을 해요? 전 불편한 거 싫어한다니까요?”
민준에게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집을, 아니 어디까지 봤냐고 묻고 싶지만 괜히 그 기억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진 않다.
“출퇴근은 강 주임이 해주고, 저녁은 내가 사주고. 괜찮잖아.”
이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 넘어간다.
“전 안 괜찮아요.”
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는 잘 잤어?”
또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김민준.
어젯밤 설은 침대에 눕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며 민준의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는 나쁜 꿈을 꾸지 않고 편안한 아침을 맞이했다. 신기하게도.
“덕분에요.”
이것도 덕분이라면 덕분이겠지.
“다행이네.”
어젯밤 설의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민준은 거실의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민준이 슬쩍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벨트를 딸깍 채웠다.
설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
설과 민준이 나란히 9층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른 아침부터 몇몇 직원들이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찍 나오셨네요?”
설이 의아한 얼굴로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하아. 말 시키지 마요, 죽겠으니까. 좀 있음 팀장님 출근하실 텐데.”
설과 같은 마케팅팀 대리가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있을 경영회의에 회장님 이하 임원진들 앞에서 마케팅팀 팀장의 보고가 있을 예정이다.
프레쉬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신규로 론칭할 제품 이미지 샷을 2000개의 작은 퍼즐 조각들을 이용하여 만들었고, 설이 알기로는 어제 오후 업체로부터 완성본도 넘겨받았다.
“…….”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니 사무실 책상보다 훨씬 더 큰 직사각형 모양의 퍼즐 판이 둥그런 회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업체에서 받은 퍼즐판을 확인한 후, 퍼즐이 떨어지지 않도록 겉에 투명한 액체를 바르고 조심스럽게 액자 안에 다시 끼워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테이블 바깥 바닥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작은 퍼즐 조각들이 지금 상황이 꽤 난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다 맞춰!! 이제 30분밖에 안 남았는데!!”
앞으로 남은 30여 분을 이용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고 싶은 모양이었는지 직원들이 각각 퍼즐 몇 조각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판에 대고 맞춰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쯧. 안됐군.
관심 없다는 듯 냉큼 고개를 돌리며 해외사업부로 발길을 돌리는 민준과 달리, 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팀의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설이 퍼즐 몇 조각을 손에 쥐더니 천천히 퍼즐 판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이미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설은,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다.
바닥에서 퍼즐들을 주워 가며 퍼즐 판 위에 올려놓던 설의 손길이 채 10분이 흐르기도 전에 멈추었고, 어느새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된 넓은 퍼즐 판이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완성본을 바라보는 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
“…….”
하지만 뿌듯한 마음도 잠시, 설의 표정이 금세 어색하게 굳어졌다.
같은 팀 동료들이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꽤 친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안 주임마저 놀란 얼굴로 설을 바라보자, 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번졌다. 실수했다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스타킹 내보내야겠네.”
설의 등 뒤에서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설이 6살 때의 일이었다.
햇살이 깊숙하게 들어오는 거실에서 외할아버지 이인호 박사와 아버지 강현석 변호사가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집 앞마당에서 강아지와 놀던 조국이 무료해졌는지 집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왔다.
“할아버지 나 심심해요.”
조국이 할아버지 시야를 가로막아서며 놀아달라는 듯 할아버지의 셔츠 자락을 매만졌다.
밖에 나가 같이 놀아달라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방으로 함께 가고 싶다는 뜻이다. 할아버지 이인호 박사의 서재는 조국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강조국, 조금만 기다려. 할아버지가 거의 다 이겼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인호 박사가 조국을 한쪽 무릎 위에 앉혔다.
“할아버지가 질 것 같아요.”
갑자기 조국이 고사리 같은 두 손을 앙증맞게 모은 뒤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이인호 박사의 한쪽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런 조국이 귀여워 이인호 박사의 얼굴에 절로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이 불만스러운 듯 강현석 변호사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조국의 이름을 불렀다.
“강조국, 아빠 서운해. 아빠 딸인데 이렇게 할아버지 편만 들기야?”
헤헤. 조국이 배시시 웃으며 이인호 박사의 무릎에서 내려오더니 아빠에게 가기 위해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우당탕’ 작은 소음들과 함께 바둑판이 거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실 바닥에 순식간에 흩어진 하얗고 검은 돌을 바라보며 이인호 박사와 강 변호사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조국이 당황한 얼굴로 카펫 위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서둘러 까만 돌과 하얀 돌을 집어 바둑판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냐 놔둬, 조국아. 아빠가 정리할게.”
“그래 조국아, 이 할애비가 할 테…….”
“…….”
순간 이인호 박사와 강 변호사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조국은 바둑판 위에 그냥 바둑돌을 올려놓는 게 아니라 조금 전 빼곡하게 차 있던 바둑판을 정확히 복기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완벽한 복기까지는 채 몇 분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아까랑 똑같아요. 근데 어차피 다섯 번만 더 움직이면 할아버지가 질 거야.”
조국은 뿌듯한 얼굴로 할아버지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
조국이 영특하다는 건 부모인 강현석 변호사도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조국은 한글 글자의 조합 원리를 스스로 터득해 두 돌이 되기 전에 이미 글을 줄줄 읽었고, 한 번 가르쳐 준 사실은 절대 잊지 않았다.
특이한 방법으로 혼자 수학 공식을 만들어서 문제를 풀거나 대학 전공생들도 읽기 어려운 두꺼운 책들을 붙들고 읽고 있을 때에도, 워낙에 똑똑한 부모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저러겠거니 했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장인어른을 생각하면 조국의 이런 남다름을 부모로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국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이인호 박사는 일부러 조국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국은 유치원을 다녀오거나 혹은 유치원을 종종 빼먹으며 할아버지의 집을 들락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서재를.
할아버지께서 두꺼운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읽으시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실 때면, 조국은 그중 아무 책이나 한 권 골라 할아버지의 흉내라도 내는 양 곁에서 태연하게 책을 읽곤 했었다.
하지만 그저 책 읽는 흉내라고만 하기에 조국의 눈빛은 지나치게 영롱하게 반짝였다.
허공에서 부딪친 이인호 박사와 강현석 변호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우리 조국, 이리 와봐.”
이인호 박사가 조국을 향해 팔을 벌리자 조국이 얼른 다가가더니 할아버지의 품에 덥석 안겼다. 그러자 이인호 박사가 조국을 품에 안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국이란 이름은 태어날 아이가 사내애건 여자애건 상관없이 꼭 지어 주고 싶었던 이름이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지냈던 미국에서의 오랜 교수 생활 중, 날이 갈수록 나라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커져갔다.
이제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재능과 능력을 다른 나라 땅이 아니라 조국의 땅에서 펼쳐야겠다는 확신이 들자, 이인호 박사는 주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외손녀 조국을 만났고, 과기대의 교수를 역임하며 조용히 연구에만 매진하였다.
“우리 조국 참 똑똑하네. 할아버지가 너무 놀랐어.”
이인호 박사가 조국과 눈을 마주치며 마침내 부드럽게 미소 짓자, 어딘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던 조국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치원에서 햇님반 선생님은 조국이 잔뜩 어질러진 책들을 원래 있던 대로 꽂아 주었을 때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해괴한 것을 본다는 표정으로 조국을 바라보았었다.
“조국이 할아버지랑 놀고 싶어?”
“네!”
조국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면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들이 할아버지의 방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인호 박사가 조국의 손을 잡고 서재를 향했다. 신이 난 듯 조국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깡충깡충 뛰어갔다.
‘아이가 너무 많이 뛰어난 거 같아요. 아니 사실 뛰어나다기보다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며칠 전 조국을 데리러 갔을 때 들었던 유치원 선생님의 말이 떠오르자 강현석 변호사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설을 스타킹 프로그램에 내보내자는 민준의 말에 이상하게 흘렀던 공기가 와르르 흩어지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와, 덕분에 살았어. 강 주임.”
“진짜 TV 스타킹이나 진기명기 이런 데 나가야 되는 거 아냐?”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오자,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들이 그제야 설을 향해 여유 있게 농담을 던졌다.
설이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얼른 뒤돌아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봐, 스타킹.”
“…….”
무시하자.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른 설이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의미 없이 마우스 위에 얹어 놓았던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 눌러댔다. 오늘따라 부팅되는 속도가 더디게만 느껴졌다.
“너무하네, 이웃사촌.”
어쩐지 민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들린다 싶었더니, 고개를 든 설의 눈앞에 민준의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민준이 파티션에 두 팔꿈치를 가볍게 기대어 짚고 의자에 앉아 있는 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어젯밤 아.주. 중요한 사실도 알려줬는데.”
“무슨 중요한 사실이요?”
안 주임이 앉은 채로 바퀴의자의 다리를 굴려 쪼르르 설의 옆에 다가와 멈췄다.
귀도 밝기도 하지.
“난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피식.
민준이 옅게 웃었다.
“두 사람만 너무 친한 거 아니에요? 저도 좀 껴줘요. 대리님.”
안 주임이 쌩긋 웃으며 민준을 올려 보았다. 짧은 단발머리가 그녀의 귀밑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안으로 곱게 말려 있었다. 성격 보이게.
“미안. 난 홀수로는 안 놀아.”
“왜요?”
“부족하거나 남거나, 홀수는 외롭거든.”
순간 안 주임의 얼굴에 짜증이 밀려드는 게 보였다. 안 주임이 다시 바퀴 의자를 발로 도로록 굴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민준이 파티션 위에 두 팔을 겹쳐 그 위에 고개를 얹더니 다시 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일 월차 냈다며.”
“별걸 다 아시네요.”
설이 노트북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내일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강현석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다.
설은 아빠의 취임식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기 위해 월차를 냈다. 영애의 참석을 알고 있었기에 민준 역시 취임식 참석 티켓을 미리 확보해 놓았다.
“나도 연차 냈거든 내일.”
“대리님은 왜요?”
“왜라니? 내일 새 대통령 취임하는 날이잖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봐야지.”
“…….”
마우스 위에 올린 설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설마, 내일 그곳에서 마주치지는 않겠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일로 연차까지 내다니 대단하시네요.”
“걸그룹도 온다고 하고.”
“…….”
설이 힐끗 시선을 올려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픽. 그리고 옅게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걸그룹 보러 간다는 건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설이 자신을 너무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민준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농담도 다큐로 받나, 이 아가씨는.
민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일하러 안 가세요?”
“강 주임 차 안에 뭘 떨어뜨린 것 같아서. 찾아보게 차 키 좀 줘.”
“진짜예요?”
“진짜지 그럼.”
“…….”
설은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준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가방에서 차 키를 꺼내 민준에게 건네주었다.
“지하 2층, 엘리베이터 기준 왼쪽 2열 28번째에 있어요.”
“……아.”
이 회사 사옥 지하 주차장엔 여느 백화점 주차장이나 마트 주차장과 달리 기둥에 번호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군.”
민준이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하며 설에게서 천천히 차 키를 받아 들었다.
‘타닥타닥’ 설의 손가락이 노트북 자판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오후 6시 30분이 되자 설이 조용히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민준이 설을 찾기 전에 슬그머니 퇴근을 하면 될 것이다.
설이 코트와 가방을 손에 든 채 살금살금 빠르게 사무실 통로를 스쳐 지나갔다. 9층 출입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설이 그제야 휴우.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곧게 펴고 또각또각 엘리베이터 앞에 다가가 섰다.
그때 갑자기, 막 엘리베이터 내려감 버튼을 누르려던 설의 손보다 반 박자 빠르게 설의 오른쪽 옆에서 쑤욱 기다란 팔 하나가 뻗어 나왔다.
그러고서는 역삼각형 모양 버튼을 천천히 힘주어 꾹 눌렀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스치듯 설의 코끝을 휘감다 사라졌다.
“배신자.”
“…….”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가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설은 얼른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빙글 뒤돌아 선 설의 눈앞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민준의 얼굴이 보였다.
“……?”
민준은 오른손에 쥔 무언가를 허공에 대고 보란 듯이 살짝 흔들어 보였다.
“……!”
자동차 키!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히려 하자 설이 얼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차 키 주세요.”
설이 오른손으로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서서, 민준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하는 거 봐서.”
민준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내딛자,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스르르 닫혔다.
“뭘 하는 거 봐서예요. 내 건데! 얼른 이리 내요.”
“오늘은 칼국수 말고 동네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이웃사촌끼리.”
민준이 설의 차 키를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술 안 좋아해요.”
설이 민준을 향해 여전히 오른손을 내민 채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 그래도 오늘은 좀 마셔야겠어.”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지하 2층이었다.
열린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 민준의 뒤를 설이 얼른 뒤따르더니 어느새 민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얼른 달라구요, 내 키!”
“…….”
민준이 분해 어쩔 줄 모르는 설의 얼굴을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강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도대체 뭘까.’
“……알았어요. 같이 갈 테니까 차 키 얼른 이리 줘요.”
“…….”
‘내가 왜 당신 곁에 있는 거지.’
“내 말 안 들려요?”
“…….”
민준이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손을 빼내더니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설에게 건네주었다. 휙 낚아채듯 차 키를 받아든 설이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짜증 섞인 얼굴로 설은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고, 곧이어 민준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른 후 다시 차문을 닫았다.
“……이게, 뭐예요?”
못 보던 장식 하나가 키홀더에 자동차 키와 함께 매달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USB였다. 키를 꽂고 시동을 켜려던 설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잠 안 올 때 들으면 좋은 음악들. 내 맘대로 고른 거니까 취향 타도 어쩔 수 없고.”
“…….”
잠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차 안 공기가 갑자기 후덥지근해지는 것 같아 설은 운전석 쪽 창문을 조금 내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하자 바깥의 찬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와 발그레해진 뺨의 열기를 천천히 식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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