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우리 연애해요2016.01.19.
설의 아파트 동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난 뒤 두 사람은 동네 가까운 상가 건물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왠지 조금 어색해진 설이 민준에게서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걸었다.
생각해 보면 민준은 이렇게 함께 걸을 때 설을 항상 인도 쪽에 두고 걸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는 몰라도 설이 다른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칠 것 같다 싶을 때는 설을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겨 지나가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 느낌이 설은 조금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겠지?”
민준이 고개를 돌려 힐끗 설을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같이 먹어도 괜찮고.”
“술 안 마신다며.”
“맥주 두 잔은 괜찮아요.”
어쩐지 조금 민망해진 설이 뽀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보통은 맥주 한 잔이라고 말하지 않나?”
맥주 두 잔은 괜찮다니.
재밌네, 이 여자.
“전 오백 두 잔까진 괜찮으니까요.”
“아. 그래?”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을 보며 민준이 속으로 큭 웃음을 터뜨렸다.
뭘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건지.
괜히 세 잔 먹여보고 싶게.
“그럼 식사도 같이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추천해 봐.”
저만치 앞에 높은 상가 건물들이 하나둘씩 시야에 가까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민준이 고갯짓으로 상가를 가리켰다.
민준의 말에 설이 걷던 걸음을 늦추더니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5층짜리 건물 있죠? 거기 1층에 치킨호프집 있어요. 되게 바삭한 프라이드 치킨집이래요.”
“‘예요’가 아니라 ‘래요’라니. 거기도 풍월로 주워들은 곳이야?”
“어차피 오늘 가볼 거잖아요. 안 그래도 맛이 좀 궁금하긴 했거든요.”
“치킨 좋아해?”
“네. 근데 프라이드만. 겉이 바삭한 걸 좋아해요.”
민준은 지금 설의 얼굴이 꼭 십대 소녀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은 대화 도중 언뜻언뜻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고, 설의 그 짧은 미소는 민준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그럼 오늘은 같이 마셔주는 거지?”
“……뭐, 맥주니까 괜찮겠죠.”
설은 말끝을 희미하게 흐렸지만,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사실 여기 있는 민준보다도 설이 더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게 설은 얼마만인지 모른다.
의식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지내왔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설은 요 며칠 곁에 있는 김민준이라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기억력이 좋은가 봐? 아니면, 아이큐가 높다고 해야 하나?”
민준이 맥주의 하얀 거품이 부드럽게 덮여 있는 묵직한 투명 유리잔을 들어 마셨다.
꿀꺽 목울대가 한번 느리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시 내려놓는 잔의 3분의 1이 비어 있었다.
“뭐, 그런 편이에요.”
둥근 접시 안에 담긴 치킨 조각 하나를 집어 앞 접시에 옮겨 놓은 후, 설이 양손에 포크를 들고 치킨을 먹기 좋게 찢어 그중 하나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역시 맛있는 집이 맞았다. 후후.
설이 흐뭇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적성이 뭐 따로 있나요.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고, 전 마음에 들어요, 지금 일.”
민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리더니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빈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전공이 원자력공학이던데, 보통은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나? 특히 K대는 더욱 그렇고.”
과학 인재들이 모인 K대 출신이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런 평범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 되질 않는다.
“……어떻게 알았어요?”
설이 포크를 양쪽에 쥔 손의 움직임을 멈추더니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총무팀에 물어봤어. 거기 여직원이 상당히 친절하더라고.”
“아…….”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앞에 놓인 치킨이 좋은 건지 아니면 워낙에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인건지, 설은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잘게 찢어진 치킨 조각을 다시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었다.
왜 물어 봤냐고 민준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바삭한 치킨을 먹는 기분이 설은 꽤 좋기 때문이다.
아까 사무실에서 퍼즐을 맞춘 설을 직장 동료들은 처음에 다들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민준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설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 준 사람은 외할아버지와 부모님뿐이었다.
설이 꿀꺽 맥주잔에 남아 있던 맥주를 끝까지 들어 마시자 민준이 한쪽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힐끗 시선을 돌려 저만치 앞에 서 있던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이리 오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오백 한 잔 더 주세요.”
민준이 설의 빈 잔을 다가온 직원에게 내밀자, 설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다시 포크로 치킨 조각을 하나 쿡 찍어 입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잘 먹네? 치킨도 잘 먹고, 맥주도 잘 마시고.”
“두 번째 잔까지만 마실 거예요. 더 마시면 취하거든요.”
“좀 취하면 어때. 내일 월차도 냈는데.”
더 마시면 요술봉을 휘두르며 변신이라도 하려나.
“내일 취임식에 늦으면 안 되니까요.”
설 앞으로 차가운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맥주잔이 놓이자 설은 직원을 향해 고맙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내일 강 주임도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거야?”
“…….”
역시 술은 백해무익하구나. 라는 생각이 순간 설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앞에 앉은 민준의 길게 뻗은 눈꼬리 끝에 즐거운 웃음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인 걸까.
“……네.”
짧은 순간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자 설은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민준이 무어라 대답할 것인지 왠지 알 것 같았지만 말이다.
“같이 가면 되겠네.”
“그러죠. 뭐.”
의외로 설이 순순히 대답하자 민준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설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내일 설을 따라다닐 생각이었지만, 우연한 만남을 어떻게 가장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주 심플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다.
“차는 못 가지고 갈 거야. 오늘 밤부터 교통 통제 들어갈 테니까.”
“알아요. 안 그래도 근처까지 가는 버스 타고 가려고 했어요.”
“이런 맛집들을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와보지도 않고서.”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민준이 힐끗 설을 쳐다보았다.
“음. 이런저런 정보들을 조합하는 거예요.”
“조합이라니. 무슨 조합.”
별거 아니라는 듯 흥미 없다는 말투로 말은 했지만, 민준의 신경은 온통 설의 대답에 쏠려 있었다.
“맛있다는 글을 읽거나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구요. 또 길을 가다 북적거릴 시간대가 지났는데도 안에 사람이 많은 걸 보게 되거나, 카운터에 서 있는 주인아저씨 아줌마의 표정이 어떤지, 혹은 먹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과 들어가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지. 가게에 납품하는 트럭들의 출현 빈도수가 잦다거나, 뭐 그런 걸 그냥저냥 머릿속에서 합쳐서 생각하다 보면 아, 저 집은 괜찮겠구나,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네, 진짜.”
피식 웃으며 두 눈을 내리깔던 민준이 맥주잔에 시선을 가져가며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켜 마셨다.
내일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국장님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탁’ 소리와 함께 민준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민준이 이만 갈까? 라는 말을 막 꺼내려는 순간 설의 오른손이 번쩍 위로 들렸다.
설이 직원과 눈을 마주치려 좌우로 열심히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까만 앞치마를 두른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설의 두 눈이 기쁘게 반짝였다.
“여기 오백 한 잔 더 주세요!”
설이 직원을 향해 씩씩하게 소리쳤다.
“…….”
민준이 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설이 말끝을 흐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냥 갈까요?”
“나도……, 시키려고.”
진짜 요술봉이라도 휘두르려나.
“…….”
“여기 오백 두 잔 주십시오.”
테이블로 다가온 직원에게 주문을 하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개의 맥주잔을 들고 주방 홀을 향해 걸어갔다.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서 코트 단추를 풀어내더니 가볍게 코트를 벗어 옆자리 의자 위에 걸쳐 놓았다.
한결 옷차림이 가벼워진 민준이 때마침 테이블 위로 놓인 맥주잔을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건배해야지?”
술기운이 오르는지 발그레해진 얼굴로 맥주잔을 꼭 움켜쥔 설을 향해 민준이 슬쩍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
“너! 왜 기울어져 있는 거야? 너만 지금 똑바로 안 서 있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설이 길을 가다 갑자기 멈춰서더니 양쪽 허리에 손을 얹고 앞에 보이는 가로수를 향해 대뜸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나무가 첫 번째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과 앞으로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꽤 많은 나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전 나무는 설이 ‘안녕 친구야’라고 인사를 했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호프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멈춰선 설의 뒤에서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변신이라면 변신인 건지.
“봐봐. 너만 3도가 기울어져 있잖아. 다른 친구들은 다 똑바로 서 있는데 말이야.”
“…….”
“그래도 괜찮아. 남들과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고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갑자기 설이 가로수를 두 팔로 껴안더니 토닥토닥 달래주듯 나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대화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던 길 가지.”
민준이 둥그런 나무 몸통을 껴안고 뺨을 기대고 있는 설의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민준의 두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던 설의 두 눈이 느릿느릿 감겼다 떠졌다.
“……넌 누구야?”
그리고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
이것도 술주정인가.
“난, 나무 아니야. 강설.”
갑자기 민준이 정색을 했다.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럼 넌 누구야?”
설이 빙글 몸을 돌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더니, 민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조그맣게 속삭이듯 물었다.
“김민준이야. 너한테 관심 있는 사람.”
민준이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돌려세웠다.
“너도 나랑 친구 하고 싶어?”
“아니, 너랑 연애하고 싶어.”
“…….”
까암-빡.
설의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 떠졌다.
흐려져 있던 정신줄을 다시 붙잡고 보니 눈앞에 보이는 건 나무가 아니라 민준이었다.
“나랑 연애할래?”
연애하자는 민준의 얼굴은 그의 말투만큼이나 조금도 설레거나 두근거려 보이진 않았다.
민준의 눈빛은 호기심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설은 마음속으로 연애하자는 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어 보고 있었다.
“연애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설이 마음속으로 혼자 한 생각인데 귀에서 소리가 들렸다. 신기하게도.
“달라질 건 없어. 지금처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지. 같이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고.”
심지어 민준은 설의 생각에 대답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니, 이건 설의 마음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입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설이 민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민준의 한쪽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설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설을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
나중에 설의 곁을 떠날 때 상처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만나면 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혹시, 날 좋아해요?”
술기운이 조금 가셨는지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눈빛이 어느새 또렷한 제 빛을 찾았다.
하지만 채 가시지 않은 알코올의 기운이 습기로 남았는지 설의 두 눈에 촉촉한 물기가 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관심 있어.”
관심이 있다.
이건 지금 거짓말을 하지 않고 민준이 가장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다.
어쩐지 민준의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관심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까.
살랑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설의 머리카락이 공중에 가볍게 휘날렸다.
설의 뺨을 가리고 내려온 머리카락이 거슬려 민준이 저도 모르게 천천히 손을 뻗어 설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와 닿는 뺨의 촉감이 부드러워 다시 손을 거두어 내는 민준의 손길에 아쉬움이 담겼다.
“…….”
가만히 민준을 바라보던 설의 눈꼬리가 마침내 부드럽게 휘어져 내렸다.
“……나, 아까 이상하다고 안 해줘서 고마웠어요.”
설의 입술이 다시 작게 달싹거렸다.
“…….”
민준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설의 조금 다른 면도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여 주는 민준이 설은 고마웠다.
그리고 아마 우연이었겠지만 그녀를 악몽에서 구해준 민준에게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날이 또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음악도 고맙구요.”
설의 두 눈에 담긴 습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처럼 반짝거렸다.
웃고 있는 설의 얼굴은 설레어 보였지만 어쩐지 두 눈이 슬퍼 보였다.
“…….”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문득 민준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계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설을 보며 민준의 마음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우리……, 연애해요.”
“…….”
잠시 망설이던 설이, 오른 손을 뻗어 민준의 코트 자락을 가만히 붙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민준의 가슴속에서, 갑자기 무언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
늦은 밤, 민준은 아파트 뒤 베란다에 서서 열린 창문을 통해 설의 아파트를 내려다보고 있다.
설의 거실 커튼이 베란다 유리창 전면을 꼭꼭 가리고 있어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설은 그날 밤 이후로 거실 유리창 커튼을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괜히 가르쳐 줬나.”
아쉬운 듯 한쪽 입술에 담배를 비스듬히 물고 선 민준의 얼굴이 작게 구겨졌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도 보고 달도 보던 설을 내려다보던 재미가 나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민준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 다시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고 있을까 아닐까.
거실 오디오를 향해 성큼 걸어가 조그만 버튼을 누르자 거실에 낮고 고요한 음악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민준이 USB에 담아 설에게 선물해준 음악이다.
민준이 씩 미소를 지으며 거실 소파에 길게 드러눕더니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리고 두 눈을 감았다.
[지금 자고 있으려나.]
“…….”
스피커를 통해 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민준이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당신 진짜 이상해요.]
설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설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민준이 옅게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잖아. 당신이 더 이상하다고.”
민준이 스피커 쪽을 힐끗 쳐다보며 대답을 했다.
[나 사실, 내일 우리 아빠 취임식에 가는 거예요.]
“알아.”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
[그런데, 내일 같이 가게 되면 혹시 데이트를 하는 건가. 취임식이 끝나면 점심인데 끝나고 놀이동산 같은데 가면 좋겠다. 근데 또 그런 건 싫어하려나.]
“…….”
부스럭부스럭 작은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스피커 너머의 세상이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새근새근 숨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민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서더니 다시 뒤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탁탁’ 라이터에 불을 붙여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 후 밤하늘에 길게 뱉어내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허공에 흩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연애해요.’
힘들이지 않고 듣고 싶은 말을 들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졌고,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이 나아지질 않는다.
민준은 한참 동안 불이 꺼진 설의 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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