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연인처럼2016.01.21.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너른 마당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파란 플라스틱 의자 위에 나란히 앉은 민준과 설.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잠시 후 대통령이 무대 단상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떨리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대통령의 걸음걸이는 힘차고 당당했으며 단상 위에 서 있는 몸짓과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여유 있게 단상 아래를 빙 둘러보는 대통령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멋지시네.”
선거 당시 젊은 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강현석 대통령이다. 민준이 단상 위의 대통령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멋지세요.”
설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학자인 자신이 정치적으로 휘둘려 큰 뜻을 품은 사위에게 누가 될까 봐 늘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할아버지셨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이루고자 하는 뜻은 같았기에 사위와 장인이기 이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정신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민준이 잠시 설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는 설렘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부푼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환호하고 있었다.
“…….”
피식 웃으며 주변을 무심하게 둘러보던 민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가 다시 태연한 모습을 되찾았다.
모든 사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단 한 사람만이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을 바라보던 남자는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민준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
수만 명의 인파 속에서 설을 알아보는 남자가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취임식 끝나면 뭐 할 거야. 시간도 많이 남는데.”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요.”
다시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설과 대화를 이어 가며 민준은 무심하게 손에 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취임식이 진행되는 동안 주변 전파가 모두 차단되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내가 사진 찍어줄까?”
“네? 괜찮은데요.”
갑자기 민준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설의 모습을 핸드폰 카메라 화면에 담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설의 모습이 핸드폰 화면에 담겼지만, 카메라 화면에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민준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썰물처럼 행사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설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민준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설의 손을 잡았다.
“아…….”
순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설은 민준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민준의 손을 잡은 채로 설은 인파 속을 헤치며 밖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을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실어다 줄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좀 걸을까?”
민준이 설의 손을 잡고 국회의사당 앞 정류장을 지나쳐 느긋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인파를 헤치고 걸어가는 게 쉽지 않자, 민준은 설의 어깨를 한쪽 팔로 단단히 감싸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설의 얼굴에는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지만, 주변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민준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긴장되어 있었다.
한참을 걸어 가까운 지하철역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설의 어깨를 감싼 민준의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광화문 갈래?”
“광화문이요?”
“응.”
왼팔로 설을 감싼 채로 민준은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지하철 노선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하철이 도착했고, 민준과 설이 마침내 지하철에 올라탔다.
민준이 스트레칭하듯 목을 좌우로 자연스럽게 꺾으며 흘끔 주위를 쳐다보았다.
‘왼쪽 끝에 하나, 오른쪽 대각선 둘.’
“어디서 내려야 해요?”
“다섯 정거장 뒤.”
지하철 출입문 구석에 설이 등을 기대섰고, 민준은 한쪽 팔로 설을 감싸듯 기둥에 손을 기대 짚고 섰다.
사람들에게 밀려 민준의 몸이 설에게 가까이 밀착되자 민준의 숨결이 설의 얼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설이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민준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럽게 지하철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시끄러운 주변 소음 덕분에 설의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지하철이 다음 정거장 앞에서 멈춰 서자 지하철 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지하철이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문이 다시 닫히려는 순간, 지하철 밖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설의 몸이 갑자기 밖으로 휙 당겨졌다.
“……?”
놀란 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진 순간, 어느새 출입문이 굳게 닫히더니 지하철은 다시 앞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예요?”
설이 자신의 팔을 붙든 민준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이 바뀌었어.”
“뭐라고요?”
지하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고 난 뒤,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설을 향해 민준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가자.”
“네에?”
설의 손을 잡고 지하철역 밖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 민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호관들이 아니었다. 빌어먹게도.
“어디 가는 건데요?”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민준은 도로변에 서서 한쪽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곧바로 주황색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섰고, 민준이 뒷좌석 문을 열어 설을 태운 뒤 설의 옆자리에 앉아 곧바로 뒷문을 닫았다.
“롯데월드 가주세요.”
“우리 놀이동산 가요?”
“응.”
“…….”
황당한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민준은 타닥타닥 빠른 손놀림으로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빠르게 문자를 보낸 후 민준은 다시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민준을 설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
“지금, 회전목마를 타자고요?”
내가 어젯밤 놀이동산에 오고 싶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타고 싶었던 게 회전목마는 아니었는데.
“응. 오랜만에 이게 타고 싶네?”
오려고 해서 온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적당한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니 절.대.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는 강설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
요즘은 초딩들도 유치해서 타지 않는 회전목마 매표소 앞에 민준과 설이 섰다.
놀이공원 안은 겨울 방학을 만끽하는 학생들로 넘쳐났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회전목마는 유일하게 줄을 서지 않고도 탈 수 있었다.
“무슨 색 탈 거야?”
“……하얀색이요.”
설이 체념하듯 손가락으로 하얀 말을 가리켰고, 설이 하얀 말 위에 오르자 민준이 벨트를 매어 준 후 곧바로 옆에 있는 말에 가볍게 올라탔다.
“이게 왜 타고 싶어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지만, 말들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자 설의 얼굴에 금세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며 놀이동산을 내려다보는 기분도 좋았다.
어렸을 적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구름처럼 둥실 떠올랐다.
말 기둥에 한쪽 뺨을 기댄 채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설을 바라보는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설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
바람에 설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날리기 시작하고 설은 아이처럼 연신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돌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주변을 살펴보다 민준이 다시 기둥에 얼굴을 기대며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 쫌 러블리하네.”
민준이 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강설.
당신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대체 내가 왜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걸까.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두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무슨 생각해요?”
기분이 좋은지 민준을 부르는 설의 목소리가 발갛게 상기된 뺨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다음에는 뭘까.”
오늘 민준이 본 게 우연일 리 없다.
그들이 강설을 따라온 게 우연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왜, 그리고 어디까지.
“다음에는 무얼 타고 싶은데요?”
“회전목마 탔으니까 이제 강 주임이 하고 싶은 거 해.”
어찌 되었든 간에 강설 덕분에 오랜만에 놀이동산이라는 곳에 다시 와봤다.
머릿속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따듯한 기억들 중 하나가 떠오르는 곳에.
민준에게 놀이동산에 대한 기억은 한 가지뿐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말 위에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던 민준과 그런 민준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아버지.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
**
“나보고 이 머리띠를 하라고?”
“원래 이런 데 오면 이런 거 쓰는 거래요.”
“‘거예요’도 아니고 ‘거래요’는 또 뭐야.”
놀이공원 안 기념품 가게 가판대 앞에서 설이 토끼 모양 머리띠를 두 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민준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놀이동산에서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민준 앞에 토끼 모양 머리띠를 내밀었다.
“그래도 토끼는 아니야.”
모양 빠지게 이 나이에 무슨.
단칼에 거절하는 민준의 말에 설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설이 토끼 머리띠를 가판대 위에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민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악마라면 모를까.”
그래도 토끼보단 낫겠지.
속으로 이를 악물며 민준이 토끼 머리띠 옆에 있는 빨간 뿔이 달린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그거 빨간 불도 들어오는 거래요.”
다시 설의 얼굴에 반짝 생기가 돌자 민준이 체념한 듯 빨간 뿔이 달린 머리띠를 들어 머리 위에 아무렇게나 얹었다.
“비뚤어졌어요. 이렇게 해야 해.”
설이 발뒤꿈치를 들어 민준의 머리 위에 얹어진 머리띠를 매만져 주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거 두 개 주세요.”
그리고 가게 주인을 향해 얼마냐는 듯 손가락으로 악마 머리띠를 가리켜 보였다.
“왜, 토끼 하고 싶다며.”
“원래 두 개를 세트로 같이 하는 거라고 그랬거든요.”
아, 진짜.
“토끼 해, 토끼!!”
민준이 머리에서 악마 뿔 머리띠를 빼내더니 다시 토끼 머리띠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두 개 주세요.”
지갑에서 거칠게 돈을 꺼내어 직원에게 건네는 민준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아마 지금 이 모습을 동기들이 본다면 술자리에서 자신을 안주 삼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두고두고 놀릴 것이다.
“헤헷. 재미있다.”
“…….”
“거울 볼래요?”
설이 가판대 한쪽 위에 세워진 둥근 타원 모양 거울을 가리키며 기분이 좋은 듯 후후 웃었다.
“아니.”
전혀 보고 싶지 않아.
민준이 거울을 외면하며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토끼 머리띠를 하자 진짜 토끼로 변신한 건지 깡충깡충 뛰듯이 걷는 설의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민준이 한 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손을 거두자 어디로 사라졌는지 설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굳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민준의 눈에 저만치 앞에 멀뚱멀뚱 서 있는 설의 모습이 보였다.
“멋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인상을 잔뜩 구기며 민준이 성큼성큼 걸어가 설의 등 뒤에 다가섰다.
설은 민준이 곁에 다가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은 채 앞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또 뭔데?”
뭐냐고 물었지만, 토끼 머리띠보다 더 심한 건 견딜 수 없다.
“저거 맞히면 인형 주는 거예요. TV에서 봤거든요.”
“…….”
민준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니 실내 사격대 앞에 남자들이 사격 총을 들고 작은 구멍을 맞추기 위해 온 신경을 모으고 서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잔뜩 기대하고 서 있는 여자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한 남자는 가게 사장님께 계속해서 지폐를 내밀고 있었다.
쯧. 그냥 인형을 사주지 저게 무슨.
저 돈이면 인형을 너댓 개 사주고도 남겠구먼.
“무슨 인형이 갖고 싶은데.”
민준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냈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거 되게 맞추기 어렵대요.”
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무슨 인형이 갖고 싶냐고.”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느새 민준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매표소 앞에서 주인아저씨에게 지폐를 교환하고 있었다.
“…….”
“이거 다 맞추면 아무거나 가질 수 있습니까?”
설이 멀뚱멀뚱 민준을 바라보고 서 있자,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인아저씨를 쳐다보았다.
주인아저씨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철컥’ 소리와 함께 별다른 조준도 없이 민준이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더니 탕탕 연이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
“…….”
“뭐 갖고 싶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아저씨의 시선을 무시하며 민준이 사격대 위에 총을 내려놓고는 설에게 물었다.
“……하얀 곰.”
두 눈을 끔뻑거리며 잠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이윽고 손을 길게 뻗어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하얀 곰인형을 가리켰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다른 것도 해줘?”
“아니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설이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울상을 짓고 있는 아저씨 얼굴을 보니 다른 인형도 갖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사격 선수예요?”
“아닙니다.”
아저씨가 커다란 곰인형을 내려 설에게 건네주며 민준에게 물었다. 영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민준의 대답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커다란 곰인형을 품에 안아 든 설은 신기한 듯 곰인형을 내려다보다 다시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실내 사격장을 오픈한 이래 이 곰인형을 상품으로 가지고 가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신기해요.”
설이 믿기지 않는 듯 곰인형의 한쪽 팔을 붙들고 아래위로 흔들어 보였다.
설의 기쁜 얼굴을 바라보는 민준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네.”
설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자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어느새 가슴 속에 따듯한 바람이 불었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습처럼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멋있지?”
“네.”
설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하하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설이 곰인형의 한쪽 팔을 들어 인사를 하듯 민준에게 좌우로 흔들어 보이자, 민준이 오른손을 뻗어 설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흐트러뜨리며 웃었다.
‘진짜 귀엽네, 이 여자.’
“아악! 왜 그래요.”
설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민준을 찌릿 옆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하얀 곰인형을 소중하게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혹시 인형하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나?”
나무하고는 곧잘 대화를 나누던데 말이야.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인형하고 무슨 대화를 나눠요?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네요.”
사람을 뭐로 보고 진짜.
흥. 설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무는 되는데 인형은 안 돼?”
“나 말이에요?”
설이 곰인형의 한쪽 팔을 붙잡고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강설 말이야.”
“…….”
술에 취하면 길에 서 있는 가로수와 인사를 한다는 주변 목격자들의 말이 사실이었나.
설의 두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오늘 저녁에도 우리 맥주 마실까?”
“아.니.요.”
민준의 입술 끝에 걸린 웃음이 얄미워 설이 곰인형의 두 팔을 붙들고 민준에게 엑스 자를 그려 보였다.
하하하.
민준이 하늘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자 설이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마주 보고 웃음 짓는 두 사람의 모습 뒤로 저녁노을이 두 사람의 마음처럼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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