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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7화 (7/94)

7화. 좋은 것, 예쁜 것으로2016.01.26.

“차 한 잔만 줘봐.”

“네에?”

이미 꽤 늦은 저녁이었다.

설을 아파트 출입구까지 바래다준 민준은 집에 잘 들어가라는 말 대신 설과 함께 아파트 1층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상품으로 인형도 줬는데 집에서 차 한 잔은 줄 수 있잖아?”

“……그렇긴 한데요.”

“엘리베이터 왔네.”

“…….”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설을 휙 지나쳐 민준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안 타?”

“타요, 타는데…….”

집 안으로 민준을 들인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설이 생각하는 ‘차 한 잔’과 민준이 생각하는 ‘차 한 잔’의 의미가 같기를 바라며, 잠시 망설이던 설이 마침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연애를 하자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건 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다.

민준이 흘끔 설을 쳐다보았다.

“지금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거 지워.”

“네에?”

“얼굴에 다 쓰여 있잖아.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제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 남자가 집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

“맞네. 정답.”

순식간에 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보통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처음에 조심스럽고 긴장되고 상대방을 의식하기 마련인데, 민준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좀 다른 것 같았다.

연인으로 대한다기보다 보호하려는 느낌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하나.

마치, 그 사람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정답 아니에요.”

설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띠띠띠띠’ 숫자 네 개와 샵 버튼을 누른 후, 아파트 문을 활짝 열고 민준을 쳐다보았다.

“들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준이 성큼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민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갔다.

“집 구경해도 돼?”

“안 돼요.”

“인형도 줬는데.”

“인형 그냥 가지실래요?”

“……알았어. 그럼, 커피나 한 잔 주든가.”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민준이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에 가 앉았다.

설은 민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잠시 쏘아보다 주방으로 가 커피 머신 스위치를 올렸다.

혼자 사는 집이긴 해도 이십 대 아가씨가 사는 집인데 설의 집은 지나치게 깔끔했고 군더더기 같은 물건들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거실을 빙 둘러보던 민준이 다시 태연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화장실은?”

“저쪽이요.”

설이 현관 가까운 방 옆에 있는 화장실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뒤를 돌아 커피 잔을 꺼냈다.

“과일도 줄 거지?”

“…….”

아주 뻔뻔하기가 그지없다.

설이 못마땅한 얼굴로 냉장고 문을 열더니 안에서 토마토와 오렌지를 꺼낸 후 주방 조리대 앞에 섰다.

쏴아-

설이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고 과일을 씻기 시작하자 민준이 빠르게 걸음을 옮겨 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민준이 코트 안에서 네모난 작은 기계 장치 하나를 꺼내어 스위치를 켜더니 거실부터 시작해 설의 침실과 욕실 그리고 작은 방에 들어가 빠르게 공간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군.’

다행히 집 안에 민준이 설에게 부착해 놓은 장치 외에 다른 신호는 잡히지 않았다. 민준은 기계 장치 스위치를 끄고 다시 코트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설의 침실을 끝으로 방에서 나가려던 민준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작은 액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

사진 속에서 이인호 박사의 팔짱을 끼고 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낯설게도 설은 이인호 박사와 똑같은 모양의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슴 부분에 원자력 연구원의 로고가 박혀 있는 하얀 가운을.

천천히 손을 뻗어 액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민준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서 뭐해요?”

등 뒤에서 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계하는 듯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아……, 문이 열려 있길래.”

“…….”

손에 들고 있던 액자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민준이 태연히 뒤를 돌아 설을 바라보았다.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눈빛에 의심과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침대가 넓고 좋네. 곰인형이랑 같이 자도 되겠어.”

“…….”

“몸 뚫어지겠네. 뭘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나는 방문을 열어 놓지 않거든요.”

“……아. 그건 좋은 습관이네. 현관문도 꼭 그렇게 잠그고 자고.”

민준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설을 지나쳐 설의 침실 밖으로 나왔다.

설이 침대 옆 협탁 위의 액자를 서랍 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은 후 다시 거실로 나와 이미 주방 식탁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는 민준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여자친구 집에서 늘 이렇게 행동해요?”

“아니.”

민준이 오렌지 하나를 들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럼 나한테만 이러는 거예요?”

“그럴걸? 오렌지 먹을래?”

의자를 당겨 민준을 마주 보고 앉는 설에게 민준이 오렌지 조각을 내밀었다.

“그 말은, 나한테만 이렇게 쉽게 행동한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

설이 날 선 얼굴로 바라보자 민준이 손에 들고 있던 오렌지를 다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일반적인 연애를 말하는 거라면 그런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야.”

“왜요?”

처음부터 친근하게 다가왔던 사람이라 연애 경험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민준의 외모를 봐도 그렇고, 회사에서 사내 여직원들이 그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설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는 대신 앞에 놓인 오렌지 조각을 다시 하나 집어 입에 넣더니 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별로 얘기해 주고 싶지 않은데.”

“…….”

“대답해 주면, 나한테도 대답해 줄 거야?”

“뭘요?”

“액자 속 사진. 내가 아는 분 같은데.”

“…….”

설이 두 눈을 천천히 내려 앞에 놓인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눈빛이 쓸쓸해 보여 말을 이어 가려던 민준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우리 외할아버지예요. 저한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훌륭한 분이셨다는 건 알아.”

“조국을 많이 사랑하셨고, 조국 때문에 돌아가셨죠.”

설은 차분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랬었나.”

조국이라.

어떤 조국을 말하는 거지.

민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당신은, 나랑 왜 연애하고 싶었던 거예요?”

“……연애하자는 데 별다른 이유가 있겠어?”

“일반적인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면서요. 그런 당신이 왜 나랑 연애하고 싶은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아요.”

“나는…….”

나는.

내가 책임질 수 없는 감정에 책임감을 가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한다는 건 언제나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남겨진 자에게 새겨진 그리움의 깊이는 깊고 진하다.

하지만.

“나는 당신하고 보내는 시간이 꽤 즐거워.”

민준에게 주어진 임무라서가 아니라 사실 설과 보내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설이 웃는 모습도, 찡그린 모습도, 쓸쓸한 눈빛도,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민준의 시선을 비껴간 적이 없었다.

그것을 단지 임무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녀를 지켜보는 시간이 민준에게 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신,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일을 했던 거 같은데.”

사진에서 본 설은 분명 연구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랬죠. 지금은 아니지만.”

“왜지?”

“이젠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니까요.”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라를 위해 반평생을 헌신하셨던 할아버지를 대한민국이 지켜주지 못했다.

살릴 수 있었는데 더 큰 것을 잃을까 봐 할아버지를 위험 속에 내버려두었던 사람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되셨고, 누군가로부터 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되는 쪽을 택하셨다.

그래, NIS.

설도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설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했던 그 남자처럼.

“인생에 굴곡이 많네. 강설.”

하지만 다시 한 번 남자에게 설레는 마음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설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

“굴곡이 많아서 부담스러워요?”

“그러기에는 내 인생의 굴곡도 만만치 않아서.”

설은 이상하다.

잔뜩 경계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어린아이처럼 속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그녀가.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무심코 던진 말에 설은 미간을 좁히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내가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덕분에요.”

“다행이네.”

민준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쩐지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색해 설이 오른손으로 목 언저리에 매달린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거. 남자가 준 거야?”

민준이 설의 셔츠 안에서 언뜻 보이는 특이한 모양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남자가 준 건 맞는데…….”

설이 말끝을 흐리자 민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설을 바라보았다.

“안 어울리는데?”

설의 하얀 목덜미를 바라보는 민준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다.

“나한테는 소중한 거라서요.”

설의 눈빛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안 어울린다고.”

강조하듯 힘주어 말하는 민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설이 이윽고 픽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전혀.”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다른 남자가 준 선물을 아직도 소중하다고 말하는 설이 민준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이 얼굴에 미소를 떠올리자 민준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졌다.

안 어울려서 그렇다고 말한 것뿐인데 설은 왜 웃고 있는 것인가.

미소 짓고 있는 설의 까만 눈동자가 보석이 촘촘히 박힌 듯 반짝이고 있었다.

“안 가요? 늦었는데.”

“갈 거야.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이 식탁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흘끔 바라본 설의 붉은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만지면 부드러울까.

민준의 시선이 설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왜요?”

도톰한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이자 민준이 두 눈을 들어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

만지고 싶게. 변태도 아닌데.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민준을 쳐다보았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테니까 전화하면 내려와.”

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민준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한 5분쯤 되었나.”

“여기서요?”

“응. 여기서.”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오다가 엘리베이터 앞 벽에 기대 서 있는 민준을 보고 설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분명 어젯밤 설에게, 내일 아침 전화하면 내려오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올라왔으면 벨을 누르던가요.”

“생각 좀 하느라고.”

설이 옆으로 다가오자 민준은 엘리베이터 내려감 버튼을 누르며 상단의 빨간 숫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요?”

엘리베이터가 두 사람 앞으로 와 멈추고, 곧이어 양옆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글쎄.”

아파트 출입구 앞에 민준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민준은 조수석 문을 열어 설을 차에 태웠고, 설과 함께 회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은 먹었어요?”

“그럼. 누구와는 다르지.”

“…….”

민준은 가끔 이렇게 설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해 설을 놀라게 할 때가 있다.

마치 설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회사 앞에 도착한 후에도 민준은 자동차 시동을 그대로 켠 채 운전석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먼저 올라가.”

“안 올라가요?”

설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얘긴 해뒀어.”

얘기를 해둔 건 아니지만, 할 예정이다. 어차피 순수하게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들어온 회사는 아니니까.

“바로 사무실로 올라갈 거지?”

“그럼 이 시간에 어딜 갈 데가 있다고요.”

“점심 전에는 돌아올 거야. 일 열심히 하고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

민준은 설이 회사 1층 유리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녀의 모습이 안으로 사라지자, 곧바로 차를 돌려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NIS 국장님을 만나야 한다.

**

“들어오라고 한 적 없는데. 지금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 아니야?”

책상 앞 가죽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앉은 김 국장이 귀찮은 듯 귀를 후벼 파며 앞에 선 민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뭡니까.”

“뭐가.”

“제가 영애 옆에 있는 이유.”

“영애랑은 좀 친해졌나? 좀 친해지면 부르려고 했는데.”

허리가 아픈지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국장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설마, 영애랑 친구 먹으라고 거기에 저를 처박아 두신 건 아니겠죠.”

“3년 전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3년 전에 영애에게 요원을 하나 붙였는데 일이 어긋났거든.”

요원이 강설을 마음에 두면서 일을 신중하지 못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

“찾아야 할 게 있어. 영애한테서.”

여전히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건지, 설도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국장님.”

예감이 좋지 않다. 좋지 않은 일이다.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행방을 알고 있을 사람은 영애밖에 없을 테니까.”

“…….”

김 국장이 창문 옆으로 다가가더니 유리창을 활짝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다. 벌써 찾아오다니.

“대통령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야. 우린 그걸 찾아야 하고.”

‘대통령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다.’ 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찾아야 하는 게 도대체 뭡니까.”

“3년 전 사고 때 사라진 파일. 15년 이상을 연구해 온 일이야. 수십조 원의 가치는 둘째 치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결과물. 그 핵심 파일이 사라졌어.”

민준이 속으로 가만히 숨을 삼키며 국장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리도 아니고, 상대방도 아니고,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파일. 그걸 찾아야 해.”

“…….”

“3년 전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 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들이 포기했던 일을 다시 시작한 데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때와 달리 이제는 영애이기 때문에 그들도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테지만.”

3년 전 사건.

이인호 박사의 사망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영애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대통령의 딸이다.

어떻게 대통령은 딸인 영애를 이렇게 위험한 상황 속에 내버려둘 수 있는가.

“아버지가 아니라, 이젠 이 나라의 대통령이니까.”

“…….”

“15년의 세월을 더 보낸다 해도 이인호 박사는 돌아오지 않아. 그 핵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파일을 찾는다 해도 그걸 풀어 낼 수 있는 연구원들이 아직 우리나라엔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영애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면서 그걸 찾는 방법밖에 없어. 그걸 가지고 뭘 할 수 있을 지는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고.”

“영애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김민준.”

“……아버지.”

뒤돌아서 민준을 바라보는 김 국장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다르게 굳어져 있었다.

위험하지 않길 바라지만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아들을 보냈다.

딸에게 모든 걸 다 말해줄 수 없는 아버지, 대통령의 마음이 어떠할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애를 부탁한다.”

“…….”

김 국장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

회사로 복귀하는 민준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대통령의 취임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설의 얼굴이 떠올라 민준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 같은 여자.

대통령의 딸씩이나 되어서 뭔 인생을 그렇게 험하게 살고 있는 건지.

그냥 아버지의 후광이나 누리다 재벌 집으로 시집이나 가면 될 것을.

사무실 유리문을 통과해 기다란 통로를 따라 걷던 민준의 발걸음이 마케팅팀 설의 책상 파티션 앞에 멈춰 섰다.

“뭐예요?”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설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물끄러미 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민망하지도 않은지 민준의 시선이 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밥 먹었어?”

“그럼요. 지금이 몇 시인데.”

“잠깐 나와봐.”

“아니 지금…….”

이 남자는 도대체 회사를 뭘로 알고 다니는 건지. 뭐가 이렇게 자기 맘대로야?

인상을 찌푸리는 설에게서 민준이 빙글 등을 돌리더니 바깥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설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민준이 복도 끝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근무 시간이라고요.”

“선물이야.”

갑자기 민준이 설 앞에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

은색으로 된 줄 가운데에 동그란 펜던트가 앙증맞게 달린 목걸이를.

예쁜 케이스나 혹은 그 어떤 고백도 없이.

민준이 목걸이를 풀러 멍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고 서 있던 설의 목에 목걸이를 채우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인상을 구기며 설을 바라보았다.

“이거 좀 빼면 안 되나?”

설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가 몹시 맘에 들지 않는 민준이다.

“소중한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럼 두 개 다 하고 다니든가.”

진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는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는 설의 목에 금세 민준이 선물한 목걸이가 걸렸다.

“지금 이거 주려고 나 부른 거예요?”

연애를 글로 배웠는지, 민준의 행동은 정말 상식 밖이다.

“응. 그러니까 절대 빼지 마.”

강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내가 알 수 있도록.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이 오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갑작스레 불려 나오긴 했지만 뜻밖의 선물에 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나한테 꼭 얘기하고.”

“왜요?”

“내가 질투가 심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시간, 내가 모르는 사람은 이제부터 절대 안 돼.”

“그럼 김 대리님은요.”

“내가 뭐.”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이 묻어 나왔다.

“일이 있어서 아버지 좀 만나고 왔어.”

“…….”

아버지.

우리 아빠가 대통령인 걸 알게 된다면 이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인데.

설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은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민준의 시선이 설의 하얀 목덜미에 가 멈추었다.

“어떤 남자가 준 거야?”

“뭐가요.”

“그거.”

“아, 이거요…….”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갯짓으로 설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렇게 안 봤는데 옛사랑에 미련이 많은 타입인가.

“나를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준 거예요.”

“…….”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더니, 민준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다.

“우리 할아버지가.”

설핏 웃는 설의 두 눈에 눈물이 핑그르르 맺혀 돌았다.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할아버지께서 설에게 조용히 건네주셨던 마지막 선물.

그날 이후로 설은 한 번도 이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낸 적이 없었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소중하게 가지고 있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처음으로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겼다.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는데.

“……할아버님이 꽤……, 다정하신 분이셨나 보네.”

아무리 질투가 심한 타입이라고 해도 할아버지에게까지 질투할 필요는 없는데, 무얼 생각했는지 민준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천천히 흘러나왔다.

“선물을…… 많이 해주셨나 봐?”

“네. 예쁜 거, 좋은 거 있으면 가끔 이것저것 선물해 주셨어요.”

옛 추억을 떠올리는 설의 눈빛이 쓸쓸해 보인다.

“…….”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민준은 머릿속으로 심플한 설의 집안 구조와 인테리어를 떠올렸다.

설의 집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6시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에에? 또 나가게요? 아니 무슨 회사를 그렇게 자기 맘대로…….”

“잘리면 어쩔 수 없고.”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설을 바라보며 피식 민준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설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설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고 누려야 할 것들을 마음 편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그러면 나는.

“…….”

“다음엔 좀 더 예쁜 걸로 사줄게.”

좋은 것, 예쁜 것으로.

당신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민준의 두 눈이 따듯하게 휘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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