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인식하다2016.01.28.
4년 전. 강설 22세 K대 4학년, 대전 연구 단지.
오전 수업을 마친 조국은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인근 연구 단지 안에 있는 원자력연구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조국이 연구원을 드나드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던 외할아버지께서 얼마 전 마침내 조국의 연구실 방문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 이인호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원자력연구원은 조국이 가장 좋아하고 오랫동안 선망해 왔던 곳이었다.
조국은 외할아버지가 오랜 시간 연구해 오고 있는 일에 대해 늘 궁금해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조국이 할아버지의 연구를 자세히 알게 되는 걸 내키지 않아 하셨다.
조국이 총명하고 뛰어난 습득 능력을 보일수록 외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근심스러운 기색이 점점 더 짙어졌고, 대한민국의 영재들이 모여 있다는 K대에서도 조국이 눈에 띄는 것을 상당히 염려하셨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학부 생활을 보낼 것.
조국이 K대에 조기 입학했을 때 외할아버지께서는 이것만을 유독 강조하셨다.
그리고 조국이 눈에 띄지 않게 얌전히 대학 생활을 보내 준다고만 약속한다면, 외할아버지의 연구실에 ‘언젠가는 발을 딛게 해주마’ 하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할아버지!!”
“강조국!”
경비가 삼엄한 연구소 출입문에 나와 서 있던 이인호 박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조국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미안하고 애틋한 하나밖에 없는 외손녀 강조국.
위험한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로서의 마음과 나라의 인재를 숨겨 두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가운데 늘 갈등을 겪어야만 했던 이인호 박사는 마침내 조국의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인호 박사만이 알고 있는 조국의 특별한 능력.
조국이 야당 국회의원인 아버지 때문에 정치적으로 휘둘릴까 봐 사위인 강현석 의원에게도 조국의 능력에 대해 일부러 세세하게 말하지 않았었다.
조국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자신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 더한 주목을 받으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기에, 이인호 박사의 마음속은 늘 복잡한 갈등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숨겨 놓는다고 해도 언제까지 숨겨질 수 있을지 모르는 조국을 이젠, 받아들이기로 했다.
“학교 수업은 다 마치고 오는 거지?”
“그럼요. 아주 얌전하게.”
조국이 이인호 박사의 팔짱을 끼며 생긋 미소 지었다.
최고의 과학 인재들만 모였다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조국에게 수업은 늘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국은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한 연구를 하고 평범한 리포트를 쓰며 조용한 학교생활을 했다.
“우리 외손녀인데, 놀러왔습니다.”
연구소 안 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만나게 되는 하얀 가운의 연구원들이 이인호 박사를 향해 고개를 숙일 때마다 이인호 박사는 그들을 향해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얌전히 구경만 하는 거야.”
“네!”
박사의 연구실 출입문 지문 인식기에 엄지손가락을 올리자 유리문이 스르르 옆으로 열렸다.
마치 열려라 참깨의 주문과 함께 열리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처럼.
이인호 박사를 따라 연구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조국의 심장이 기대와 설렘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박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조국을 흘끔 바라보다 옅게 미소 지으며 하얗고 길쭉한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연구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전문 분야별로 세세하게 나누어진 결과물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이인호 박사뿐이었다.
그 연구 결과들을 조합하고 분석해서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낼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우아! 초소형원자로 개발이에요?”
“…….”
모니터 화면에 보이는 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이인호 박사의 뒤에서 조국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박사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박사는 애써 담담하게 고개를 돌려 조국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저 이거 좀 봐도 돼요? 학교에서는 이런 걸 배울 수가 없어요.”
이인호 박사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조국은 두 눈을 반짝이며 오른쪽 마우스의 휠을 빠르게 굴려 내리기 시작했다.
“네가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헤헷. 알 것 같은데요?”
“…….”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사진을 찍듯 한 장 한 장 머릿속에 저장시키며 조국은 속으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조국은 지금 온 김에 머릿속에 모두 저장해서 가지고 갈 생각이다.
“이건 재료로 치면 빵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 같은 거야. 밀가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빵을 만들 수는 없어.”
딱 잘라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눈앞에 보이는 복잡한 도면과 기호들은 단순한 숫자와 그림들의 나열처럼 보였다.
“아……, 할아버지 말씀대로 정말 어렵네요. 역시 연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조국은 능청스럽게 부러 거짓말을 했다.
조국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염려하시는 할아버지가 또 다시 조국의 출입을 금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만 봐, 이 녀석아.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건 이 할애비밖에 볼 수 없는 거야.”
“어차피 봐도 뭔지 잘 모르는데 조금만 더 볼래요, 할아버지.”
‘아직 머릿속에 다 집어넣지 못했다고요.’
마치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조국의 두 눈이 생기 있게 빛났다.
“오늘은 그만.”
이 박사가 오른쪽에 놓여 있던 마우스를 클릭하자 숫자와 도면으로 빼곡했던 화면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할아버지!!”
조국이 투정부리듯 이 박사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입술을 삐죽 앞으로 내밀었다.
“일주일에 두 번.”
“뭐가요.”
“연구소로 와. 출입증 카드 만들어 줄 테니까.”
“에에? 진짜요? 진짜 여기로 와도 돼요?”
대학을 졸업하면 어차피 조국을 부를 생각이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상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이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국은 이 박사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더 이상 지루한 학부 수업을 견디며 인내의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조국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조국이 환하게 웃으며 이 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옅게 드리워진 근심스런 표정까지는 미처 읽어내지 못한 채.
**
띠띠띠띠- 띠딕.
설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자 민준은 현관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는 설의 집 안.
민준은 무심한 눈으로 집 안을 빙 둘러보았다.
“…….”
이인호 박사의 사망 사건 후에 관련 연구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건 잠시나마 연구소를 드나들었던 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망 사건이 일어난 당일 연구소를 빠져나갔던 이인호 박사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시 급하게 연구소로 되돌아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의 연구실 안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날, 박사의 연구소 사무실 CCTV가 파괴되어 당일 출입한 사람들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파괴된 것은 CCTV만이 아니었다.
이인호 박사의 연구 자료가 들어 있던 컴퓨터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하드를 복구한 결과, 며칠 전까지 컴퓨터에 들어 있던 자료가 복사되었다는 흔적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강조국 양이 일주일에 두 번씩 이인호 박사의 사무실에 들르기는 했지만 정확히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진술했고, 아마도 개인적인 방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인호 박사의 연구는 학부 4학년이었던 강조국 양이 참여하거나 들여다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강조국은 연구와 관련된 조사에서 금방 제외되었지만, 사라진 파일을 찾을 수 있는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적도 찾지 못했고 NIS도 찾을 수 없었던 파일.
설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것, 혹은 설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숨겨져 있을 그것.
**
“대리님, 나한테 숨기는 거 있죠.”
“무슨 소리야, 그게.”
민준의 자동차 조수석에 올라탄 설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설의 농담이 재미가 없었는지 민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우리 회사 오너의 아들이라거나 아니면 조카라든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자유롭게 회사에 다닐 수 있어요?”
“그러는 당신은, 나한테 숨기는 거 없나?”
가볍게 던진 말이 되돌아와 정작 당황한 얼굴을 한 것은 설이었다.
숨긴다기보다 말을 하기가 조금 그랬던 것뿐인데 민준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야 하나, 순간 망설여졌다.
“……있어요. 그것도 아주 큰 비밀.”
민준의 얼굴만큼이나 설의 표정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설이 창문을 조금 내리며 고개를 돌리자 열린 틈 사이로 들어온 차가운 바람에 설의 머리카락이 살랑 나부끼기 시작했다.
평범한 이 남자에게 내 지난 이야기를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비단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궁금하다면. 얘기해 주나?”
두 사람 사이에 짧게 흐르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민준이었다.
“아니요. 얘기 안 할래요.”
“숨겨야 할 과거가 있나 보네. 그것도 아주 대단한.”
피식. 설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이내 사라졌다.
“옛 남자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떤 남자.”
“…….”
그 남자의 이야기가 설에게 더 이상 아픈 이야기는 아니다.
그 정도의 상처를 아픔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그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부러 떠올려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그 기억 언저리에만 다가가도 몸서리치게 욱신거리며 아프던 심장이 신기하게도 잠잠하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픔은 사라졌고, 이제 그 시간은 설에게 더 이상 아프지 않은 흉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설의 곁에 민준도 있다.
그래서 괜찮다.
사랑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랑이 아니었어도, 지금 설에게는 민준이 있으니까.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설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이제 더는 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첫사랑 얘기에 질투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어?”
“3년도 더 지난 일인데요, 뭘.”
“…….”
설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민준의 두 눈은 어둡게 짙어졌다.
‘3년 전에 영애에게 요원을 하나 붙였는데 일이 어긋났거든.’
“그렇게 정색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민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아 설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옛 연인의 이야기는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울로 올라왔지만 설은 고집을 부려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께서 서울에 계실 때 머물던 그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 이 또한 부모님이 완강히 반대하셨다.
대신 부모님의 집 가까운 곳에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사는 것을 허락하셨고, 설은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 은둔 생활을 했다.
설이 그날 예고도 없이 할아버지의 연구소를 찾아가지만 않았더라면 혹시 할아버지는 살아계실 수 있지 않았을까.
끊임없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설을 어둠 속에서 꺼내 주었던 남자. 하지만 설에게 환한 웃음을 되찾아 주었던 그 남자는 설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시켰다.
‘찾을 수 없습니다. 강조국 양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국장님. 그러니, 더 이상의 조사는 필요가 없을 것 같습…….’
친구와의 만남이 어긋나 설이 오피스텔로 돌아온 그날, 자신도 약속이 있다던 그 남자는 설의 오피스텔 안에 있었다.
설이 한 번도 데려온 적 없었던 그녀의 오피스텔 안에.
**
한참을 달리던 민준의 자동차가 설의 아파트 동 앞에 멈추어 섰다.
“어디가 안 좋아요?”
오는 동안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민준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설이 조심스럽게 민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차 시동을 끄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린 후에야 민준은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같이 저녁 먹을래요? 별건 없지만 간단한 저녁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평소 같았으면 꺼내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민준의 불편해 보이는 얼굴 기색이 마음에 걸렸다.
“……뭐 해줄 건데.”
“대단한 건 아니니까 기대하지는 마세요.”
설이 웃으며 자동차 문을 열고 내려섰다.
민준은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하는 게, 어떨 때 보면 꼭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항상 자신감 있고 그 어떤 것에도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는 민준이 이렇게 가끔 소년 같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한 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민준은 조금 전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의 아파트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민준에게 발견될 것이었다면, 진작 그 파일은 누군가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을 테니까.
“거기 얌전히 앉아 있어요. 저번처럼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설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뻗어 거실 소파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더니 주방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채소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설이 분주한 손길로 파란색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에이프런을 앞에 둘렀다.
“대충 아무거나 시켜 먹지. 번거로운데.”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겠는지 어느새 민준이 설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두고 이왕 먹을 거 맛있는 걸로 먹자, 라는 게 대리님 신조라면서요.”
“…….”
“그리고…… 선물도 해줬고.”
도마 위에 채소를 올려놓고 탁탁탁 조심스레 칼질하는 설의 뺨에 옅은 홍조가 어렸고, 그런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 마.”
내가 지금, 이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민준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갑자기 민준이 칼을 쥔 설의 손목을 힘 있게 붙잡아 움켜쥐었다.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으며 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왜요?”
말없이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민준의 표정이 낯설게도 일그러져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설은 다시 도마 위로 시선을 돌렸다.
“어려운 거 아니에요. 금방 할 수 있…….”
“하지 말라고!”
설의 몸이 민준을 향해 거칠게 홱 돌려졌다.
붙잡힌 손목에 통증이 느껴져 설은 인상을 찌푸리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대리님, ……왜?”
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 설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민준의 입에서 신음처럼 낮은 욕설이 뱉어져 나왔다.
이따금 민준의 심장을 아프게 쿡쿡 찔러 대던 그것은, 설을 속이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만이 아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설을 바라보던 민준이 등을 홱 돌리더니 손에 차 키를 들고 곧바로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거예요?”
뒤쫓아간 설이 민준의 팔을 붙들자 민준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설이 이마를 찡그린 채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해주겠다고 했는데 왜 화를 내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민준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
민준이 몸을 돌려 설을 마주 보고 서더니 두 엄지손가락으로 설의 찡그려진 눈썹을 꾹 눌러 반듯하게 펴놓았다.
“잘 자.”
그리고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민준은 굳은 얼굴로 다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설은 멍한 얼굴로 띠딕- 소리를 내며 닫히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
‘잘 자’라는 인사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저녁이었다.
아니 그보다, 왜 화를 내는 거냐고 물었는데 민준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민준은 오늘 설에게 목걸이 선물을 해주었고, 다음에는 더 예쁜 것으로 사주겠노라며 설을 바라보며 웃었으며, 마침내 그를 위해 저녁 식사를 만드는 설에게 어이없게도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다.
이런 전개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설은 에이프런을 풀러 식탁 위에 ‘탁’ 올려놓더니, 곧바로 씩씩거리며 현관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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