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너에게로 흐르는 마음2016.02.02.
민준네 집.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핸드폰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소파 위에 앉아 하아 한숨 소리와 함께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임무이기 때문에 당연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배신감이나 미움 따위 얼마든지 받아 주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오늘 처음으로 설이 받게 될 마음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설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졌고, 설의 눈물과 슬픔을 보고 싶지 않아졌다.
민준을 위해 요리를 하며 살며시 미소 짓는 설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
설을 떠올리는 민준의 눈빛이 어둡게 짙어졌다.
잠시 후 소파에서 일어선 민준이 천천히 와이셔츠 단추를 풀며 욕실로 향했다.
**
딩동딩동
한참 후에 욕실 문을 열고 나온 민준은 요란하게 울리는 현관벨 소리에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보이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가 많이 난 듯 입술을 꾹 다문 설이 민준의 현관 벨을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민준이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가 현관 도어록 버튼을 누르자 띠리-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밖으로 벌컥 열렸다.
“뭐예요, 진짜?”
“…….”
씩씩거리며 민준을 쳐다보고 선 설을 민준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민준의 머리카락에서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어깨 위로 뚝뚝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사람이 그러고 가버리면…….”
민준을 향해 언성을 높이던 설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민준의 가슴 근육을 타고 내려온 물방울이 허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하얀 수건 위로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대리님이 왜 화가 났는지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
도대체 민준은 왜 반나체로 문을 열어 준 것인지.
갑자기 민준의 집에 찾아온 이유를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이제와 뒤돌아서자니 타이밍도 적절해 보이질 않는다.
“뒤…… 돌아설까요?”
“……아니.”
민준이 손을 뻗어 설을 현관 안으로 당겼고, 설의 등 뒤에서 띠리-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거기 있어.”
민준이 무심하게 설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설이 붉어진 두 뺨에 손을 올리며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실 한복판에 서 있던 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의 아파트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집이다. 언제든지 들어오고 또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만큼 아파트는 적막했고, 보통 사람들의 집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생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설의 무심한 시선이, 거실 벽면 까만 장식장 위에 설치된 웅장한 오디오에 가 닿았다.
‘이 오디오구나.’
민준이 들려주던 음악 생각이 났다.
설이 장식장으로 다가가 무심코 오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
민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갑자기 설의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움찔 무심코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며 설은 놀란 표정으로 민준을 돌아보았다.
“……알겠어요.”
설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통의 오디오와 다르게 생긴 것 같아 궁금했던 것뿐인데, 민준이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민준의 눈빛에 순간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진 감정이 짜증이나 분노가 아닌 그 어떤 두려움에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설이 다시 한 번 오디오에 시선을 주었다 민준을 바라보았다.
“나, 저녁 안 먹었어요.”
“뭐 먹을래? 나가서 먹자.”
“…….”
민준이 설의 눈빛을 피하며 서둘러 차 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조급한 모습은 민준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여기서 먹어요. 날도 추운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손에 잡고 있던 노란 풍선이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 버린 것처럼.
“배달 음식은 먹을 만한 게 없어.”
“대리님이 사오면 되잖아요. 난 여기서 기다릴게요.”
설이 민준의 거실 소파에 가 앉았고, 민준의 두 눈이 차분하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있어, 그럼. 적당히 알아서 사올 테니까.”
민준이 방에서 점퍼를 꺼내 입더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 설은 다시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오디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공포 영화를 보면 그렇게 주인공들이 어리석어 보일 수 없었다.
빤히 보이는 구렁텅이에 스스로 다가가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이 열어버리는 그 어리석음이. 그렇지만 막연하게 느껴지는 불안함보다 낯선 느낌이 드는 오디오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다.
설은 아까 만지려고 했던 오디오 앞에 다시 바짝 다가가 섰다.
얼핏 보면 다른 오디오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오디오의 기능 중 불필요해 보이는 버튼이 몇 개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이 조그만 빨간 버튼이라든지.
설이 빨간 버튼을 천천히 눌렀지만 이상한 예감과는 달리 오디오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감인지 미안함인지 모를 얕은 한숨이 뱉어져 나왔다.
“하아.”
[하아.]
“…….”
“뭐…… 지?”
[뭐…… 지?]
공포심으로 두 눈이 커진 설이 얼른 빨간 버튼을 다시 눌러 꺼버렸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도청…… 장치?’
‘하지만 김 대리님의 집에 왜 이런 게 있어?’
‘혹시 김 대리님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마구 뒤엉켜 떠올랐다.
그러다가 설은 조금 전, 오디오를 만지려 했던 순간 등 뒤에서 날아와 꽂혔던 민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민준이 이 장치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민준은 도대체 왜 자기 집에 도청 장치를 해놓은 걸까.
혹시, 집에 없는 동안 도둑이라도 들까 봐?
띠리리리-
갑자기 설의 핸드폰 벨이 울리자 깜짝 놀란 설이 몸을 움찔거렸다.
발신자를 보니 민준이었다.
“……여보세요.”
-먹고 싶은 거 말해봐.
“아무거나요.”
-치킨 먹을래?
“좋아요.”
민준이 유난히 조심성이 많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도청 장치는 그것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그래, 그런 것인데.
괜히 과민 반응을 보인 자신이 미안해졌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다시 내려놓으며 설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그렇게 안 생겨서 겁은 되게 많나 보네. 보니까 훔쳐갈 것도 별로 없는데 말이야.”
띠딕-
잠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치킨집을 털어 왔는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민준이 벌써 돌아왔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민준의 가슴이 빠르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프라이드 치킨, 바삭한 걸로 맞지?”
민준이 치킨 박스를 하얀 비닐봉지에서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고, 냉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를 꺼내어 두 사람 앞에 늘어놓았다.
갈증이 많이 났는지 민준은 식탁 의자에 앉아 곧바로 맥주 캔 뚜껑을 따더니 벌컥벌컥 두어 모금에 한 캔을 깨끗이 비워 버렸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이 예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바삭한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당신에 관한 건 다 기억해. 빠짐없이 전부 다.”
‘당신이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도 전부.’
민준이 두 번째 맥주 캔을 따서 입가에 가져가자 설이 민준의 팔목을 확 잡아챘다. 민준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매달고 설을 바라보았다.
“이건 내 거라고 꺼내 놓은 거 아니었어요?”
“냉장고에 많아. 그것도, 아~주 많아.”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맥주 캔을 입가에 대더니 이번에는 꾸울~꺽 천천히 목울대를 움직였다.
“대리님, 혹시 겁이 많아요?”
식탁 맞은편에 마주 앉은 설이 천천히 맥주 캔 뚜껑을 따며 민준에게 물었다.
“내가 어딜 봐서 겁이 많을 것 같아?”
“혹시, 도둑 같은 거 무서워해요?”
“내가 그래 보여?”
“아니요.”
“싱겁기는.”
“……그러니까요.”
설이 맥주 캔을 입에 대고 홀짝거렸다.
코끝에 알싸하게 퍼지는 맥주 맛이 시원했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맥주 맛이 쓰게 느껴졌다.
“아까는 왜 그러고 간 거예요?”
이제야 생각났다. 설이 지금 민준의 집에 와 있는 이유가.
굳이 세 번째 캔을 따서 입에 가져가는 민준이 속으로 대답을 고르느라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설이 민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서.”
아까의 상황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설은 그런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
의심이 또 다른 의심을 낳기 전에 설은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문을 그대로 묻어 두기로 했다.
“수상한 남자네요.”
설이 피식 웃으며 맥주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허기졌던 식욕은 이미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설이 두 번째 맥주 캔에 손을 가져가자 민준이 한쪽 눈썹을 위로 추어올리며 설을 쳐다보았다.
“두 캔째야. 더 마시면 취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괜찮아요. 집에 가는 길에 같이 대화 나눌 나무도 없는데요, 뭘. 그리고 취하면 대리님이 집에 데려다줄 거잖아요.”
“취했는데 집에 왜 데려다줘. 내가.”
민준이 손에 쥔 네 번째 맥주 캔이 치익-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을 몽글몽글 안에서 밀어 올렸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설이 민준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냉장고 안에 맥주가 많다더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건지 나오는 게 끝이 없다.
“난 안 취해.”
중요한 순간에는 더욱.
술김에, 홧김에, 이런 말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지.
민준이 설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늦었어요. 그만 가볼게요.”
설이 빈 맥주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테이블에 한 손을 짚고 섰다.
“데려다줄 테니까 좀 더 있다가 가.”
민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아까 우리 집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신 분이 생각나네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설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민준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왔잖아.”
????
“내 눈앞에 이렇게.”
강설, 당신이 나한테 왔다고.
네 번째 캔이 다 비워졌는데도 민준은 더 이상 맥주 캔에 손대지 않았다.
대신 길게 팔을 뻗어 설의 손목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취한다면서요.”
설이 민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숨이 조금 가빠왔다.
“안 취했어.”
“근데 지금…….”
민준이 설의 손을 꽉 잡고 끌어당겼다.
아. 이건…….
가만히 내려다보는 민준의 두 눈에, 설의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가 가득 담겼다.
“……정답.”
민준의 커다란 두 손이 설의 뺨을 감쌌고, 곧이어 살짝 벌어진 설의 입술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설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으며 민준의 혀가 설의 입안으로 천천히 밀려 들어왔다.
조금 크게 떠졌던 설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고 설의 부드러운 혀가 곧바로 민준의 혀와 리듬감 있게 엉켜들었다.
설이 가쁜 숨을 몰아쉴 무렵에야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낸 민준이 설의 얼굴에 두 손을 올린 채 그녀의 두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쿵쿵 빠르게 뛰는 민준의 심장, 그 진동 소리가 설의 뺨에 닿은 민준의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졌다.
“…….”
민준의 엄지손가락이 설의 입술 위를 스치듯 천천히 훑어 지나갔다.
설의 입술은 조금이라도 스치면 상처가 날 것처럼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얼굴이 붉어진 설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나의 옛날이야기, 그리고 또…….
“……말 안 해도 돼.”
“…….”
따듯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의 눈빛이 갑자기 어둡게 짙어졌다.
“하지만 난 대리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요.”
“…….”
생각해 보니 민준의 이름과 나이, 직업 외에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가족 관계라든지 혹은 그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 무엇이라도.
설은 민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고, 민준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설은 좀 더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잠시 설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준이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내 이름은 김민준이야. 스물여덟 살. 그리고…….”
그리고
“강설을 좋아해.”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는 게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서.
“……강조국.”
“…….”
“원래 내 이름, 강조국이었어요. 3년 전까지.”
“…….”
설의 고백에 뺨을 감쌌던 민준의 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민준의 표정 없는 얼굴에 설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왜……, 묻지 않아요?”
물어야 하는데. 왜 이름이 바뀌었냐고.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궁금하지 않아.”
오늘만큼은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설 당신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민준이 설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식탁 의자 위에 걸쳐 두었던 점퍼를 손에 집어 들었다.
“너무 늦었네. 데려다줄게.”
“…….”
하지만 설은 뒤돌아선 민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민준의 얼굴에 나타난 미세한 균열이 설의 마음속에 불안하게 스며들었다.
“지금 안 가면 오늘 못 갈 수도 있는데.”
고개 돌려 설을 바라보는 민준이 설핏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래로 한껏 휘어진 눈꼬리에 가려 민준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 맘대로……, 집에 못 간다고.”
민준의 짓궂은 농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붉어진 설이 새침한 얼굴로 민준의 곁을 부러 씩씩하게 스쳐 지나갔다.
“내일부터는 성실하게 일해야겠어.”
“왜요?”
회사를 놀이터처럼 다니시던 분이 왜.
굽 낮은 운동화를 신고 선 설이 현관문을 열고 선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내 직장이잖아.”
민준이 슬쩍 웃으며 설의 손을 잡았다. 잡은 설의 손을 민준이 한쪽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래, 그냥 지금처럼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돌아와 투닥거리며 같이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봄이 오면 한강에 가서 같이 자전거도 타야지.
“자전거는 탈 줄 알아?”
“네 발도 운전하는데 두 발 운전을 못 할까 봐요?”
여름엔 바다에 가서 수영도 하고.
아 바다는 싫어하려나. 그럼 실내 워터파크.
민준이 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 버튼을 눌렀다.
“수영은.”
“제가 머리도 좋지만 몸으로 익히는 속도도 꽤 빠르거든요.”
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민준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뿌듯한 설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지더니 민준의 입술이 설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면서 그대로 틈새 없이 민준의 입술과 부드럽게 맞물렸다.
“……빠르네, 정말.”
띵- 소리와 함께 민준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고, 설의 얼굴엔 화끈거리는 붉은 그림자가 남았다.
“산은 좋아해?”
민준이 점퍼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설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파트 출입구 밖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설마, 스키도 잘 타냐고 물을 건 아니죠?”
“어떻게 알았어?”
민준이 으응? 놀랍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귀신같네, 강설.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예지력까지 있다니.
“나 올림픽에 내보내게요?”
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전거에 수영, 등산에 스키까지. 어째 죄다 운동하는 것뿐이다.
“올림픽엔 왜??”
아, 데이트할 때 남들은 보통 이런 걸로 안 하나?
큰 깨달음을 얻은 민준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영은 양보 못 해.”
수영은 꼭 하러 갈 것이다.
난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니까.
“수영이 그렇게 좋아요? 난 특별히 좋은 건 잘 모르겠던데.”
“그래, 그럼 이번 주말에 가자.”
“무슨 대화가 이래요?”
또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김민준.
못 말리겠다는 듯 설이 곱게 눈을 흘기며 민준을 쳐다보았다.
슬쩍 설을 쳐다보며 웃는 민준의 모습이 마치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의 얼굴 같았다.
“이번 주에는 실내 워터파크 가고, 다음 주에는 어디 갈까.”
민준이 주머니에 담긴 설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강설.
당신과 즐거운 기억을 쌓고 추억을 쌓으며,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연애를 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김민준 대리이고, 당신은 강설 주임이니까.
“아, 돈을 많이 벌어야겠어. 여긴 월급이 얼마나 되려나?”
갑자기 민준이 발길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몰라요?”
“내일 물어봐야지.”
민준이 씩 웃더니 강설에게서 등을 돌려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강설의 손을 잡고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위험해요.”
설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이 인상을 찡그리면 눈꼬리가 새끼 고양이처럼 축 늘어져 내려온다.
“괜찮아.”
“다치면 어떡하려고.”
“괜찮다니까. 당신이 손만 놓지 않으면.”
민준이 빙긋 웃으며 설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설의 몸이 민준의 가슴에 안착했고 민준이 한 손으로 설의 등을 감싸안았다.
“……그러니까. 내 손 놓지 마.”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여유 있게 웃고 있는 민준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