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10화 (10/94)

10화. 김 대리와 강 주임의 데이트2016.02.04.

실내 워터파크 여자 탈의실과 출입구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 설을 기다리는 민준의 모습이 초조해 보인다.

가로 줄무늬가 굶게 들어간,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마린보이 수영복 반바지를 입고 탈의실 앞을 왔다 갔다 하던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탈의실 입구 안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벗고, 입고. 그게 그렇게 오래 걸리나?”

아무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아도 몇십 초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아니, 아무리 굼뜨게 움직인다 해도 넉넉잡아 몇 분이면 족할 것 같은데, 설과 만나기로 한 탈의실 입구에서 민준은 벌써 몇십 분째 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민준이 주변을 흘끔 쳐다보더니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엄지와 검지로 시계 화면을 몇 번 터치하자 조그만 네모 화면 안에 빨간 점 하나가 제자리에서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화면을 확대하고 아래에 써진 글자들을 빠르게 읽어 낸 후 민준이 다시 화면을 닫았다.

그러자 GPS 기능이 탑재된 소형 위치 추적 장치가 사라지고 평범한 시계 화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구하러 가야 하나, 찾으러 가야 하나 민준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잠시 후 여자 탈의실 휘장을 젖히며 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의 얼굴을 발견한 민준의 입가에 씩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

하지만 흡족한 미소를 짓던 민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실망스럽게 변했다.

“수영복이 왜 이래.”

TV 광고에서 본 실내 워터파크 광고 모델들은 자신의 많은 부분을 아낌없이 보여주던데, 여자들 수영복이 다 그런 게 아니었나.

강설 참, 인색하네.

“내 복장이 어때서요?”

짧은 까만색 수영 반바지에 상의는 몸통은 까맣고 대신 팔 부분은 하얀 래시가드를 입었다.

한마디로 목 부분에서 양팔 부분, 몸통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꼭꼭 감싼 모양새.

그래도 짧은 수영복 반바지 아래로 늘씬하게 뻗은 설의 하얀 다리가 민준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너무 폐쇄적이잖아.”

“네에?”

이런 데 오면 비키니 같은 거 입는 거 아니었나. 쩝.

자동차로 몇 시간 달려온 기쁨이 조금, 아주 조금 수그러들었다.

“비키니 입으면 되게 예쁠 것 같았는데. 아쉽네.”

“뭐라고요?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랑 놀든가요, 그럼!”

“아야! 아파!”

설이 씩씩거리며 민준의 등을 찰싹 때리자, 민준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며 못마땅한 듯 작게 인상을 구겼다.

흥! 설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고, 그 모습을 본 민준이 마침내 하하하 커다랗게 소리 내어 웃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투닥거리는 자신과 설의 모습이 좋았다.

그 어떤 근심도 우려도 미안함도 다 잊은 채, 온전히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바닥이 미끄러워서 내가 넘어질 것 같아.”

민준이 설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잡아줄게요.”

그러자 설이 웃으며 민준이 내민 손을 잡았다.

설의 손을 꽉 잡고 앞으로 걷기 시작한 민준, 태연한 말투와는 다르게 민준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어 설의 마음이 부푼 풍선처럼 둥실 떠올랐다.

“우리, 수심 깊고 파도치는 데로 가자.”

막 무섭고, 막 그런 데.

민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며 씩 입가에 큼지막한 미소를 띠었다.

**

“무슨 수영을 그렇게 잘해?”

한 번쯤은 밀려오는 높은 파도에 무서운 듯 등을 돌리며 목에 두 팔을 휘감고 매달릴 줄 알았다.

그러면 설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고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내지는 ‘걱정하지 마, 내가 구해줄 테니까.’ 등의 말을 하며 설을 안심시키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상상했다.

하지만 오늘 민준은 설을 물 밖에서가 아니라 물속에서 더 자주 보았던 것 같다.

해녀도 아닌데, 잠수부도 아닌데, 아니 도대체 왜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거냔 말이다.

카바나 바닥에 엎드려 있던 민준이 고개를 들어 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말했잖아요. 웬만한 건 다 잘한다고.”

“그럼 못하는 건 뭐야.”

아무래도 그걸 하자고 해야겠다.

“그런 거 없어요.”

설이 어깨를 으쓱이며 바닥에 엎드린 민준을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는 설의 표정이 진지해 민준의 기분이 더 침울(?)해졌다.

“혹시 요리도 잘해?”

“그날 먹어 봤으면 알 수 있었겠죠.”

당신이 우리 집 문을 박차고 나간 그날 말이죠.

설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곱게 눈을 흘겼다.

“그럼 오늘 저녁에 강설이 다시 만들어주려나?”

“내가 만든 거 싫다면서요. 만들지 말라고 했던 게 누군데 그래요?”

퉁명스러운 설의 대답에 민준의 두 눈이 잠시 바닥을 향했다 다시 설의 얼굴을 향했다.

“마음에 담아 두는 스타일이구나? 쪼잔하게.”

“일부러 담으려고 하는 건 아닌데 머릿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아요. 그게 뭐가 되든 간에.”

남들과 조금 다른 기억력이 때론 올가미처럼 설을 옭아맬 때가 있다.

고통스러운 상처도 슬픔도 남들보다 더 오래, 더 진한 잔상을 남기기 때문에.

“사람도?”

“사람은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요.”

흐흠. 설이 고개를 옆으로 살랑살랑 내저었다.

“그럼.”

“가슴으로 기억하는 거죠.”

설의 대답에 민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와 설의 가슴 부위에 머물렀다.

“이 가슴이 아니잖아요!”

“아야! 아프다고.”

‘찰싹’ 아직 송알송알 맺혀 있는 물기가 남아 있어 설의 손바닥이 민준의 어깨에 닿는 소리가 참으로 청량했다. 아프다며 잔뜩 인상을 구겼지만 민준의 눈과 입이 웃고 있었다.

“…….”

“뭐야. 왜 말이 없어.”

대답 없는 설의 두 눈이 민준의 어깻죽지와 등을 향해 있었다.

앞에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민준의 등과 어깨에 희미한 흉터 자국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살아오면서 등과 어깨에 이렇게 자잘한 흉터가 남을 일이 뭐가 있을까.

“……다쳤어요?”

“참 나. 농담도 못 하겠네, 이 아가씨.”

그 작은 손으로 몇 대 찰싹 때렸다고 정말 자신이 힘이 세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겹쳐 접은 두 팔 위로 다시 나른한 고개를 얹었다.

“그럼, 이건 다 뭐예요……?”

“…….”

설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민준의 어깻죽지에서 날개 뼈를 따라 아래로 흘렀다.

웃고 있던 민준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민준이 황급히 몸을 돌려 설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설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다시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민준의 손목과 팔에도 희미한 흉터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설이 다시 두 눈을 들어 민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민준의 입은 어색하게나마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설의 손목을 아프게 쥐고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당혹스런 눈빛도, 감춰지질 않았다.

“……아파요.”

설이 민준의 두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

“…….”

민준이 단단히 붙잡고 있던 설의 손목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설의 손목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고, 민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당혹스러워졌다.

하얀 설의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은 금방이라도 보라색으로 변할 것처럼 보였다.

“…….”

너무 미안한 나머지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설은 아무 말 없이 스트레칭하듯 손목을 아래로 가볍게 몇 번 털어 내며 흔들었다.

“……어디, 봐봐.”

“괜찮아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설에게 손을 뻗었지만 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설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시선을 내리고 있어 설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

민준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나머지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있는 힘껏 설의 손목을 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커피 마실까?”

“그래요.”

민준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먼저 일어서 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설은 자연스럽게 민준의 눈을 피하며 그의 앞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준의 눈빛이 어둡게 짙어졌다.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까마득한 일이지만, 아직도 이렇게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 캄캄하고 무섭기만 했던 공간,

눈을 감고 작은 두 손으로 감싸안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울던 날들을.

**

설이 둥근 플라스틱 테이블 앞에 앉아 다시금 손목을 매만졌다.

다친 건 부어오른 손목이 아니라 마음이었는지, 가슴이 이따금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하지만 지금 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 게 정확히 무엇 때문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설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던 민준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경계하듯 날카로운 날이 서 있던 차가운 눈빛.

민준은 커피를 주문하고 난 뒤 화장실에 갔는지 한참 보이지 않는다.

탁.

한참 후에야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민준이 테이블 위에 작은 연고와 파스를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설의 손목을 한 손으로 잡고 부어오른 손목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손목에 닿는 느낌이 시원했고, 연고를 바르는 민준의 손길은 익숙해 보였다.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거네요, 지금.”

“…….”

마음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 민준의 굳게 다문 입술과 여전히 굳어 있는 얼굴을 보니 왠지 이쯤에서 민준에게 말을 걸어줘야 할 것 같았다.

민준이 지금 많이 자책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설이 말을 붙였는데도 민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린 채 설의 손목만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야!!”

설이 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민준이 놀란 두 눈을 들어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아파?”

민준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둡게 짙어졌다.

“그럼요! 이렇게 붓고 멍도 들었는데.”

설이 민준 앞에 보란 듯이 번쩍 손목을 들어 보였다.

“…….”

“데이트할 때 폭력을 쓰는 남자는 만나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어떡하죠.”

“…….”

“참 나. 농담도 못 하겠네, 이 아저씨.”

설이 조금 전 민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쯔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미안해.”

민준의 입술이 조용하게 움직였다.

이제야 비로소 설이 아는 민준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이렇게 공손(?)한 모습은 처음 보지만 말이다.

괜찮다는 듯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웃었고, 마침내 민준의 눈빛에도 따듯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배고파요. 이제 밥 먹어요, 우리.”

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오전에 일찍 와서 한참 물놀이를 했더니 배가 고프다.

“여기는 뭐가 맛있는데?”

민준이 설을 따라 의자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맛있는 걸 먹는 게 무척 소중하시다는 김민준 대리님을.

“이런 곳에서는 맛있는 게 아니라, 빨리 먹을 수 있는 걸 먹는 거예요.”

“맛있는 걸, 빨리 먹으면 안 될까?”

민준이 설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손을 잡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지만, 아까와 달리 민준은 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설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왼손을 내밀어 민준의 오른손을 잡았다.

“미끄러워서 넘어질 것 같다면서요.”

“…….”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며 멋쩍은 듯 설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잠시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민준이 고개를 들어 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꼬리가 몇 개야?”

아홉 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아흔아홉 개라면 모를까.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아요?”

설이 눈웃음을 지으며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잘 못하는 거 하나만 알려줘 봐.”

“알려 주면 나한테 불리하잖아요.”

“똑똑하네.”

쩝. 아쉽다는 듯 민준이 한쪽 눈썹을 장난스럽게 아래로 찡그렸다.

“숨기려면 그 사람도 모르는 곳에 숨겨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무언가를 감추고 싶을 때는 그 사람도 모르는 곳에 숨기라고.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곳에 말이에요.”

“…….”

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았고, 발목에 무거운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민준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소중한, 곳에?”

“그럼요, 그래서 내 꼬리는 아주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나만의 장소에 숨겨두었죠. 그래서 난 내 꼬리도, 내 꼬리가 몇 개인지도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꼬리 이야기가 즐거운 듯 한껏 신이 난 설이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언젠가, 민준이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그런 얼굴과 그런 눈빛으로.

“…….”

‘소중한 거라고 말했잖아요.’

“…….”

설의 반짝이는 두 눈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온 민준의 시선이, 설의 목 언저리에 가 닿아 멈추었다. 민준이 벌어졌던 입술을 천천히 굳게 다물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조수석에 앉은 설이 아무 말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민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설의 손목이 조금 붓긴 했지만 물놀이를 중단하고 다시 돌아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두 사람은 일찍 집으로 출발했다.

워터파크 음식이 정말 별로였는지 민준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테이블 맞은편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앉아 이따금 시선을 들어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이 정말 괜찮다고 말을 했는데도, 굳어진 민준의 얼굴은 풀어지질 않았다.

“김 대리님."

설이 딱딱한 목소리로 민준을 불렀다.

오늘 하루 민준과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민준은 오히려 설에게서 한걸음 뒤로 물러선 느낌이었다.

민준이 여전히 대답이 없자 설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민준과 웃으며 장난쳤던 게 무색해졌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설이 시트에 천천히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민준이 오른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자 자동차 히터에서 따듯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차 안 공기는 따듯해졌는데, 설의 마음은 반대로 더 서늘해졌다.

“안 추워요.”

설의 목소리가 냉랭하다. 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은 추워.”

“…….”

낮게 흘러나온 민준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설의 마음은 따듯해지지 않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오후에 이런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민준은 설을 옆에 두고도 오는 동안 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목은, 괜찮아?”

“…….”

“미안해. 누가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해서.”

담담한 민준의 목소리에 설이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뜨고 고개를 돌려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설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나중에.”

“이제 기분은 좀 괜찮아졌어요?”

설은 더 이상 민준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지금 쓸쓸해 보이는 민준의 얼굴에 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면, 강설이 저녁 만들어 주나? 그럼 괜찮아질지도 모르는데.”

민준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설과 두 눈을 마주치며 옅게 웃었다.

“뭐가 먹고 싶은데요?”

“맛있는 거.”

“맛있는 걸 빨리 먹고 싶어요?”

“아니, 맛있는 걸 천천히 먹고 싶은데? 그래야 강설이랑 오래 있지.”

민준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지으며 힐끗 설을 바라보았다.

“매일 얼굴 보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타박하듯 조금 퉁명스런 말투로 말을 건네며 설이 얼굴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한번 지나가 버린 건 다신 돌아오지 않아. 되돌리고 싶다고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고.”

민준은 한쪽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쩐지 눈빛이 쓸쓸했다.

“대리님의 소중한 한 끼처럼 말이죠.”

“역시 똑똑하단 말이야.”

민준이 힐끔 설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대리님은 왜 그렇게 맛있는 걸 좋아해요? 어머니께서 음식 솜씨가 별로 안 좋으세요?”

“아니, 아주 좋으셔.”

어머니께서는 항상 식탁 위의 가장 맛있고 좋은 음식은 민준의 앞으로 밀어 놓아주셨다.

아버지도 아니고, 여동생 서연도 아닌 민준 앞에.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어머니의 편애에 토를 달거나 투정을 부리지 않았고, 아버지는 민준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항상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민준아, 나랑 같이 가자.’

목이 메어 말씀하시던 바로 그날 이후부터, 오늘까지.

하지만 맛있는 걸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고 허기가 졌다.

겉으로는 내색할 수는 없었지만, 동생 서연과 달리 한 번도 민준을 혼내거나 꾸지람하시는 일 없이 민준을 안아만 주셨던 두 분의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 가끔 민준을 쓸쓸하게 만들었었다.

“그래서. 대리님은 뭘 가장 좋아하는데요?”

설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짜장면.”

“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설의 입이 벌어졌다.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한 끼 한 끼가 그렇게 소중하다더니.

‘겨우 짜장면?’

“그런데 이젠 잘 안 먹어.”

“왜요?”

“입맛이 변했는지 아무리 먹어도 옛날 그 맛이 안 나더라고.”

그래서, 그 맛있게 먹던 기억까지 사라질까 봐.

“그러는 강설은 뭘 제일 좋아하나?”

“별로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대리님처럼 뭘 먹을까 하고 고민해 본 적은 없어요.”

“그렇게 중요한 게 정말 고민이 안 돼?”

민준이 장난스럽게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정말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먹는 게 뭐가 고민이에요. 누구랑 먹을 건지가 고민이면 몰라도.”

“누구랑 먹는 게 뭐가 고민이야. 아무나 같이 먹으면 되지.”

“같은 음식도 누구랑 먹느냐에 따라 더 맛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럼, 나랑 같이 먹은 저녁은 맛있었어?”

민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내가 맛있는 집으로 골라서 그런 거고요.”

물론 맛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하지만 민준과 같이 먹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 집이 맛있는 집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뭐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겠지만.

“강설, 다 잘하는 줄 알았더니 못 하는 것도 있었네.”

“뭐가요?”

“거짓말.”

민준이 조금 붉어진 강설의 뺨을 힐끗 쳐다보더니 픽 웃으며 시선을 정면으로 가져갔다.

“그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얘기해야죠.”

“해도 돼. 나한테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말을 안 하면 모를까, 거짓말하고 싶진 않아요.”

특히, 김민준 당신한테는.

“그래도 괜찮아.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그러니, 강설 당신도.

“사실 아직도 손목이 시큰거려요.”

“…….”

강설이 몸을 왼쪽으로 틀더니 불쑥 오른손을 민준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그러자 민준이 강설과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하라면서요.”

“……어.”

“그래서 미안하지만 오늘 저녁 요리는 패스를 해야겠어요. 다음에 해줄게요.”

“응. 사실 나도 오늘 꼭 먹으려던 건 아니었어.”

민준이 진지한 얼굴로 죄를 사하여 주신 강설 님을 향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가요.”

“짜장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면서요. 아마 맛있을 거예요. 내가 맛있는 집으로 데려갈 거니까.”

설의 두 뺨이 조금 더 붉어졌다.

사실은, 맛있는 집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함께 먹어줄 거니까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손목이 아픈 건 설이었지만, 설이 생각하기에 안심과 위로가 필요한 건 설이 아니라 민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한 박자 느리게 민준의 입에서 탄성도 아닌 깨달음도 아닌 애매모호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 할 말이 고작 그게 다예요?”

‘고맙다’ 라든지, ‘강설이 추천하는 곳이라면 맛있겠네’ 라든지, 하다못해 ‘그럼 그건 내가 사주지’라는 말이라도. 내가 지금 당신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일부러 먹으러 가겠다는데.

“강설이랑 살면, 참 좋겠네.”

할 말이 그게 다냐는 말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무심한 민준의 목소리에 잠시 멍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홱 고개를 돌려 정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려 민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

민준이 당황스러운 속내를 감추며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고개를 틀어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았다.

제 입으로 무심코 뱉어낸 말의 여운이 민준에게도 진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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